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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리안

이강기 2015. 9. 7. 21:55

몽골리안

 

 

 

주간조선, 2005년


 

  왜 너희 아시아 인종들은 눈이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니? ' 

 

미국이나 유럽, 러시아로 유학을 간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로부터

 

가끔 이런 놀림성의 질문을 받는다. 특히 부모를 따라 이민간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서 백인 아이들이 놀리는 것이 싫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 일이 많다고 한다. '왜 나는 쟤들처럼 눈이 안 크지?' 

 

이런 작은 의문이 '몽골리안 루트' 프로그램의 출발점이 된다.

 

 

   보통 현생 인류를 피부색과 유전 형질의 차이에 따라 백인종(코카서스

 

인종),  황인종(몽골인종), 흑인종(니그로 인종) 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니까 '몽골리안'은 한국인, 일본인, 몽고인, 중국인, 베트남인 같은

 

황인종을 말한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듯이,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진화를 거듭하며

 

구대륙으로(유럽과 아시아) 퍼져나갔다. 유전학에 의하면 흑인종과 백인종은

 

약 12만년 전에 , 백인종과 황인종은 약 6만년 전에 인종적으로 분화됐다.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 광선 속에서 진화한 최초의 인류는 모두 검은 피부색을 가졌고,

 

아프리카를 벗어난 인류의 집단은 보다 적은 태양 광선을 받으며 생존하기 위해

 

덜 짙은 피부색으로 바꿔나갔다. 일조량이 훨씬 적은 빙하기의 유럽으로 진출한

 

인류는 백인종의 조상이,  아시아의 해안가와 내륙으로 진출한 인류 집단이

 

황인종의 조상이 된 것이다.

 

 

   황인종인 몽골리안은 다시 내륙 아시아에서 진화?적응한 북방계

 

몽골리안과 아시아 대륙 남쪽에서 진화?적응한 남방계 몽골리안으로

 

나누어진다.  한국인, 몽고인,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 일본인의

 

일부, 북남미의 인디언 등이 북방계 몽골리안에 속하고,  중국인, 베트남인,

 

태국인 같은 동남아인들이 남방계 몽골리안에 속한다.

 

 

 

 

  20세기의 과학 기술은 인간의 물리적 이동을 극대화시켰다. 100년 전 장편으로

 

씌어졌던 '80일간의 세계일주' 가 이제는 단 하루의 단편으로  가능해졌다. 항공편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지 가서 명함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며,  대규모 물류의

 

이동으로 사용 가능한 상품의 수 또한 무궁무진하게 늘어났다.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가상 세계'를 자신의 이동

 

영역에 추가했다. 복잡한 지하철, 한적한 시골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이동전화가 울려대고, 방안의 컴퓨터는 인터넷의 혈관에 연결돼 전세계 정보의 맥박을

 

쏟아낸다.  현대인은 실제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 그 어디로든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여여권을 발급받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지성 자끄 아탈리는 현대를 새로운 유목의 시대로 규정하고,

 

철학자 질 들뢰즈는 유목적인 사고방식이 새로운 시대의 사고 패러다임이 되리라고

 

예언한다. 

 


 

 

 

   인류의 조상은 2백 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진화를 거듭하며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며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것은 기껏해야

 

1만년 전부터.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때를 약 10만 년 전으로

 

보면, 인류는 그 삶의 대부분을 떠돌이로 살아온 것이다. 

 

  그 떠돌이의 역사 중 인류는 두 번의 의미심장한 대규모 이동을 단행했다. 

 

첫 번째는 몽골로이드 황인종에 의해, 두 번째는 유럽계 인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몽골로이드 중 북방계에 속하는 여러 집단이 선사 시대에  신대륙을 정복했고,

 

기원전 1천년기부터 기마 유목민으로 변신한 또 다른 몽골로이드 집단이 15세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했다.    

 

  두 번째 대규모 이동의 주인공인 유럽계 인종은 15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전 세계로 확산,  근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부터 인류는 물리적 공간과 사이버 공간에서 동시에 3번째의 이동

 

을 시작했다.

 

 

  KBS는 제 3의 이동이 시작된 인류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아 '이동의 관점'

 

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사를 정리한다. 

 

  그 첫 번 째 부분 '몽골리안 루트' 는 혹한의 새로운 땅으로 진출한 선사 시대 북방계

 

몽골리안이 신체의 형질 적응과 새로운 석기 기술의 개발로 신대륙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유럽과 중국, 정주 문명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됐던 유라시아

 

대륙의 몽골리안 기마 유목민족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롭게 부활한다. 유럽사 중심의

 

편협한 세계사에 가려졌던 몽골리안 역사의 주역들이 거대한 영상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1.툰드라의 서곡

 


 

 

   영하 50도의 시베리아. 한 에벵키족 사냥꾼이 눈 쌓인 타이가에서

 

순록을 기다린다. 그의 가느다란 두 눈은 숲 속의 작은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순록의 살코기를 뜯기 좋은 강한 턱과 튀어 나온 광대뼈,  습기가

 

맺힐 틈을 주지 않는 듬성듬성한 수염,  강하고 건조한 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눈가의 몽골 주름, 그의 작고 단단한 체구는 순록의

 

털가죽으로 만든 옷 속에서 몇 시간을 버틸 수 있다. 

 

16세기 남미의 끝 파타고니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영하의 온도에

 

도 거의 알몸으로 사냥을 나가는 몽골리안 야간족을 보고 놀랐다.

 

저 야만인들의 몸은 강철로 만들어졌는가?

 


 

 

   인간의 신체적 형질은 그를 둘러싼 자연 환경과의 투쟁의 산물이다.

 

현생인류에서 최초의 몽골리안이 분화된 아시아 내륙의 환경은 혹독

 

했다. 그들은 시베리아 혹한으로 진출,  세대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몸

 

과 생리를 바꿔 냉혹한 자연환경의 성공적인 적응자가 됐다. 유럽인

 

종이 지리상의 발견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15세

 

기 이전에 지구의 대지 60%의 주인은 몽골리안이었다. 황인종, 그

 

중에서도 북방계 몽골리안은 신대륙을 밟은 최초의 인류였다. 이들

 

은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는가? 형질적응만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20세기 초부터 고고학자들은 바이칼 호수 동쪽의 시베리아, 몽골 그

 

리고 알래스카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현대의 수술용 매스만큼이나

 

예리하고, 갖가지 도구에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세석기들을 무

 

더기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맘모스 뼈에 박힐 정도로 강력한 도구를

 

사용한 이 사냥꾼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신체의 형질혁명과 도구의

 

혁명을 바탕으로 서서히 극북으로 지출, 인류의 거주반경을 결정적으

 

로 넓혔다. 툰드라의 바람 속에서 인류사의 지구 개척 서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1만 2천년에 걸친 몽골리안 루

 

트의 여정이 열린다.

 


 

2. 베링해 안개 속으로

 


 

 

  북극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에스키모 사내가

 

베링해를 걷고 있다. 해마다 겨울이면 바다는, 유대민족에게

 

마른 길을 터준 홍해처럼 얼음길을 내준다. 사내는 날짜 변경

 

선을 경계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미국의 다이오미드 섬과 러

 

시아의 라트마노바 섬 사이를 왕래한다. 그는 일만 이천년 전

 

빙하기에 시베리아와 신대륙을 연결했던, 지금은 바닷물 속에

 

잠긴 베링지협을 건넌 몽골리안 조상들의 발걸음을 되풀이 하

 

고 있다.

 

 

   1725년 베링이 이 해협을 발견하기까지, 유럽인이 그린 지

 

도에는 알래스카와 시베리아의 북동부는 백지 상태였다. 몽

 

골리안의 신대륙 진출 발판은 바다 밑에 잠들어 있었다. 20

 

세기에 접어들면서 잠겨있던 베링지협은 고지질학과 고기후

 

학의 도움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다. 양대륙에 걸친 태고의 단

 

일 문화권에 대한 가설도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제기한 이 가설은 1975년 고비 사막과 알래스카에서

 

동일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면서 정설로 자리잡는다. 두 대

 

륙 몽골리안의 치아와 두개골 구조 비교 등 형질인류학적 증

 

거와 유사한 세석기 기술, 두 대륙 주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

 

하는 상징들이 이 정설을 뒷받침한다.   

 

 


 

   극북으로 진출한 몽골리안들은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

 

아남기 위해 자연에의 순응과 존중을 축으로 삼는 믿음의 체

 

계를 빚어냈다. 그것은 시베리아의 타이가에서 비롯된 사냥

 

꾼의 세계관, 샤마니즘과 일맥 상통한다. 인간은 사냥감의 고

 

기와 영혼을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려올 뿐이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들을 자연에 되돌려 주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 자연의 지배보다는 자연에의 순응이라는 소극적이고

 

소박한 사고방식이 몇 만년 동안 양 대륙 몽골리안들의 정신을

 

지배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혹한으로 진출한 박력에 비교하면

 

얼마나 가냘픈 사고인가 ?  그러나 자연이 그들을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 그 박력보다는 가냘픔 때문이었다. 

 

 

3. 대지의 조상

 


 

   97년 6월 미국 북서부 오리건주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서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인디언들의 기마 행렬이 이어졌다. 

 

백인과의 오랜 전쟁 끝에 1877년 美정부에게 땅을 빼앗기고

 

추방됐던 네즈퍼스 족의 후예들이 고향의 땅을 사서 돌아온

 

것이다. 120년 만에 이루어진 대지로의 귀환이었다.

 

 

  1만 2천년전 베링 지협을 건너 새로운 대지의 주인이 된 몽

 

골리안인 고인디언들은 알래스카와 미대륙을 차단하고 있던

 

두 개의 거대한 빙하가 느슨해진 틈으로  남하했다. 북미의

 

넓은 땅에는 맘모스, 버팔로, 야생말 등의 풍부한 사냥감이

 

뛰놀고 있었다. '클로비스'라는 강력한 석기로 무장한 이들에

 

게 대지는 훌륭한 사냥터였다. 사냥감이 풍부하지 않은 곳은

 

옥수수와 감자를 심는 좋은 밭이 됐다.  중미의 건조지대와

 

밀림, 페루의 좁은 해안가도 새로운 땅으로의 전진을 막지 못

 

했다. 베링 지협을 건넌지 천년도 안돼 몽골리안의 일부는 남

 

미의 끝까지 도달,  신대륙 확산 드라마를 완성한다.

 

 

  뉴멕시코주의 타오스 푸에블로족 인디언은 봄이 오면 말의

 

편자를 벗기고, 사람들은 부드러운 깔개를 한 신을 신고 대지

 

위를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대지를 찬미한다. 인디언들에게

 

대지는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영적인 관계를

 

갖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 대지뿐만 아니라 대지를 발판으로

 

살아가는 버팔로와 코요테 같은 동물들도 그들에겐 영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진출하면서부터

 

대지의 영혼은 서구 문명의 탐욕에 희생되기 시작했다. 서부로

 

진출하기 위해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았고 식량원인

 

버팔로를 무차별 학살해서 인디언을 몰아냈다. 몇 백만 마리

 

의 버팔로가 죽었고 그 뼈는 대륙횡단 열차에 실려 비료공장

 

으로 보내졌다.

 

 

 

  ' 악마와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 속담은 19세기

 

미국에서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인디언과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과 땅에 관한 4백건이 넘는

 

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단 한 건도 지켜진 것은 없었다.  땅을

 

빼앗긴 인디언들은 당뇨병과 알콜 중독, 자살과 무기력증에

 

빠져버렸다. 이제 빼앗긴 대지가 그들에게 무슨 약속을 해줄

 

것인가?  그러나 아직도 해마다 봄이 오면, 인구의 반이 당뇨

 

병에 시달리는 아파치 인디언들은 아름다운 대지를 준 것에

 

감사하며 화이트 마운틴을 오른다.

 

 

4. 태양의 죽음

 

 

  해마다 9월이면 멕시코시티 부근에는 아즈텍 제국의 후예인

 

점술사들이 모인다. 아즈텍 역법으로 52년마다 찾아오는 종

 

말에 대비했던 아즈텍인들처럼 점술사들은 이 불안정한 세계가

 

착오없이 다음의 윤회를 하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450년 전 그들의 선조들은 자신의 문명이 그 한계에 도달했

 

다고 믿었을 때 홀연히 나타난 백인 정복자들에게 힘없이 무

 

너지고 말았다. 무엇이 그들 역사의 윤회에 종지부를 찍게 했

 

는가 ?

 

 

  마야의 잠언은 이렇게 가르친다. '인간은 작살의 날처럼 날

 

카로운 산 위를 걸으며 살고 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심연이 존재한다. 살아남으려면 중간의 길을 찾아 걸어야한다'

 

마야, 아즈텍, 잉카의 세 문명은 모두 환태평양 조산대의 약한

 

고리에 위치해,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는 지진과 폭발하는 화

 

산의 두려움 속에서 성장하고 소멸했다. 뚜렷한 우기와 건기의

 

구분, 계절마다 바뀌는 태평양 해류는 윤회의 관념을 이들 문

 

명의 뼈속 깊이 새겨 넣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자연의 균

 

형이 깨지면 재난이 닥쳐오고 우주의 윤회는 끝이 난다. 무엇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이 윤회의 시계를 영원히 돌릴 수 있는가?

 

 

   '문명은 큰 강가에서 발생하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와의 교

 

류를 통해 성장한다.' 는 명제는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중남미 여러 몽골리언 문명은 이런 상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 문명은 타 문화와의 교류와 투쟁을 통해 성장한 것이 아

 

니라, 몽골리언들이 두려운 자연과의 미묘한 타협의 접점을

 

찾아 아주 힘겹게 쌓아 올린 것이다. 절대로 자연을 노하게

 

해서는 안되며 자연에 도전해서도 안된다. 현대 남미 국가의

 

어떤 농업 기술로도 잉카 시대보다 더 많은 경작지를 넓힐 수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와 신뢰를 받아야 하는 살아있는 주체이다. 

 


 

5. 괴조 그리포스의 후예들

 

 

 

  2천 5백년 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자신의 책에 스

 

키타이인이 사는 초원지대를 지나면, 먼 동쪽의 산에 황금을

 

지키는 괴조 그뤼푸스의 무리가 살고 있다고  적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민족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럽계 유목민들을

 

아시아의 서쪽 끝으로 밀어냈다. 그리스인들조차 두려워

 

했던 기마민족 스키타이를 서쪽으로 밀어낸 그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그 의문은 몇 백년이 흐른 뒤 그들이 직접 유

 

럽에 나타남으로써 풀리게 된다.

 

 

   A. D. 376년 훈족이 돈강을 건너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신이 자신들의 타락을 벌하기 위해 이 야만인들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훈족의 침입으로 고트족, 게르만족이 연쇄적으로

 

민족 이동을 했고 그 여파로 서로마는 천년의 역사를 마감

 

하고 말았다. '말에서 내리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 싸움

 

잘하는 유목민들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들의 말

 

발굽에 짓밟혀 사라져가면서도 로마인들은 끝내 그들의 정

 

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는 20세기 초 헝

 

가리에서 훈족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묘지가 발굴되기 전

 

까지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면밀히 측정한 결과,

 

묘지의 수 십개 두개골은 몽골로이드의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어떻게 이들은 수 천

 

km나 떨어진 초원지대에서 벗어나 강력한 로마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는가?

 


 

 

   청동기 시대에 알타이 산맥 동쪽을 차지했던 알타이어족

 

몽골리안들은 새로운 철기 제작 기술과 기마술을 발전시켜

 

서서히 유럽계 유목민들을 압박한다. 한편으로는 남쪽의

 

농경정주 문명인 중국과 대립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서쪽

 

으로 기나긴 이동을 시작한다. 당시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나한나라의 사마천에게는 유목민들이란 그저 시도 때도 없이

 

국경을 침입하는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몽골계, 투르크계, 퉁구스계로 분류되는 이들 알타이어족의

 

유목민들이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 전체의

 

역사를 뒤바꿔 놓으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6. 황금가지

 

 

 

  유라시아의 서쪽에 들이닥친 훈족의 이동이 서로마 멸망의

 

도화선으로 타들어 가던 시기, 유라시아의 동쪽 끝, 일본 열

 

도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기원 300년부터 거대한

 

고분군이 일본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력한 무력

 

을 갖추고  일본의 대부분을 통일한 뒤,  그 이전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사자(死者)의 집을 지은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오래 전부터 일본 사학계에서는 한반도나 대륙으로부터 대

 

규모의 기마민족이 이동해왔다는 이론이 제기돼왔다. 하지만

 

고분에 부장된 무기나 마구가 북방계통이라는 것 외에는 구

 

체적인 사료가 없어 '기마민족 이동설'은 단순한 상상력의 산

 

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일본일들의 자존심은 지배계층의 '

 

도래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최근까지도 일본인들은 자신의 조상은 일본 구석기 문화를

 

담당한 조몽인이라고 굳게 믿어왔었다. 그러나 형질 인류학

 

연구결과들은 일본인의 자존심에 조금씩 균열을 불러왔다.

 

조몽 시대 이후 등장한 야요이 문화 담당자들의 두개골과

 

문화를 조몽의 그것과 비교 연구해본 결과 현격한 차이가

 

나타났다. 조몽인- 현대 일본인의 사이에 친연관계가 있기

 

보다는 야요이인 - 현대 일본인 - 한국인 사이의 형질이 더

 

친근관계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과연 일본은 대륙과

 

한반도의 문물뿐만 아니라 대량의 이주민까지 받아들였던

 

것인가? 만약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

 

는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말에 씌우는 말투구가 그려져있다. 그

 

러나 북방 기마 유목민 계통의 이 말투구의 실물은 유달리 가

 

야와 일본의 고분에서만 발견됐다. 4 - 5세기 가야와 일본의

 

고분에서 무더기로 발굴되는 이 호전적인 무구의 기원을 두고

 

많은 논란이 계속됐다. 일본에서는 가야가 당시 왜의 식민지

 

였다는 주장과, 가야가 일본에 영향을 줬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한반도의 세력이 아닌,  대륙 세륙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문물과 인적 이동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뤄 왔다.

 

1996년 만주 지역의 선비족 무덤에서 북방지역에서는 처음

 

으로 말투구가 발굴되면서 기마민족 이동설을 둘러싼 논란은

 

또 다시 혼란에 빠져든다.

 

 

7. 천마의 제국

 

 

 

  훈족이 로마를 침공한 지 천년 뒤, 유럽은 또 다시 황색

 

회오리 바람에 휩싸인다. 1241년, 유럽의 방파제를 자

 

처한 폴란드와 헝가리의 군대는 몽고제국의 기마 군단

 

에게 전멸하고 만다.  유럽군은 체스를 두는 것처럼 진을

 

짜고 대항했지만 몽고의 기마병들은 정렬된 진법 없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변화무쌍한 공격으로 상대를 유린

 

했다.  이 싸움은 서로 다른 전술과 병사의 충돌이기 전

 

에,더 근본적으로는 유목적 사고 방식과 정착 문명적

 

사고 방식의 맞부딪힘이 기도 했다.   하나하나가 움직

 

이는 방식이 정해져 있는 장기의 말들과, 특정한 규칙

 

없이 자유분방하게  놓여질 수  있는 바둑알들이 맞붙

 

었을 때의 결과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기 말

 

사이의 위계성과 바둑알 사이의 위상성처럼,  두 문명 간

 

세계관의 차이는 이 전투를 통해 드러났고,  결국 유목적

 

세계관의 승리를 점치게 했다. 

 

 

 

 

  러시아와 중동,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인도북부, 중국 등

 

유라시아 정주문명권의 대부분이   몽고제국의 울타리에 편

 

입됐다.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이 독점하던

 

동서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질서, 팍스 몽골리카

 

의 시대를 열었다. 폐쇄적으로  기능하던 각 지역의 경제 시

 

스템이 몽고제국을 통해 하나로 통합됐고, 유라시아 대륙을

 

포괄하는 최초의 세계사가 그로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1300년 초, 몽고제국의 일부인 중국 원나라를 다녀온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 을 펴냈을 때까지만 해도 유럽은 아직

 

지구 한 구석의 좁은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베니스를 필두로

 

몽고 제국과 교류하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제국의 종교에 대한 관대함과 무역과 상행위에 대한

 

포용은 당시 폐쇄적인 종교, 계급 사회 속에 살고 있던 유럽

 

에게는 놀라움이었다. 제국의 해체 뒤 유럽은 오스만 투르크

 

에 의해 막힌 대 중국 무역로를 찾아 바다로 나서게 된다. 정

 

주문명 유럽이 몽고를 본따  바다로의 유목을 시작하면서 몽

 

골리안의 몰락과 근대 자본주의 세계의 개막이 시작되는 것

 

이다.

 

 

8. 여정을 끝나고

 

 

 

   아놀드 토인비는 大著 『역사의 연구』에서 ' 내륙 아시

 

아의 역사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의  날줄과 씨줄로 짜여진

 

천'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위세에 밀려 투르

 

크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그늘진 부분에 기록됐다.  몽고

 

보다 더 일찍 서진을 시작한 투르크계는 뛰어난 금속 야금

 

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철제무기를 만들어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다. 기마 전법의 달인인 투르크 유목민들은 중앙아

 

시아 오아시스 국가의 방위를 담당하는 용병으로 자주 고

 

용됐다. 그들은 아랍,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권의 변방 세

 

력에서 점차 정치?문화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셀주

 

크 투르크는 분열돼 있던 아랍권을 통일해 문화의 부흥자

 

로, 유럽 십자군의 침략을 막는 아랍지역의 수호자로 자리

 

잡았다. 투르크의 한 계파는 북아프리카까지 진출, 이집트

 

에 맘룩이라는 왕조를 세운다.  몽고고원에서 출발한 말발

 

굽소리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의 제국으로 완성된 것이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

 

의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방의 패권을 장악

 

한다. 그 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유럽세력은 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한다.  유럽의 해상 세력이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다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 오

 

스만투르크의  반대편에 있는 몽골리언 문명을 파멸시킨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다. 기술 문명으로 무장한

 

유럽의 자본주의 문명이 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

 

오스만투르크의 쇠퇴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79년, 파미르 고원에서 유목을 하던 1천 2백명의 투르

 

크계 키르키즈인들이 몇 천 km떨어진 같은 투르크계 국가

 

인 터키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유럽계, 아랍계와 혼혈이 돼

 

얼핏 보기에는 백인에 가까운 터키인들이, 비교적 몽골로

 

이드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해온 키르키즈인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돌궐제국

 

이래로 투르크계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으로 이동,  문화적

 

?형질적 변화를 걷는다. 그런 심각한 변화 속에서도 투르

 

크어는 접착제, 끈 구실을 해서 다양한 투르크계 민족들의

 

결속력을 보장하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터

 

키를 중심으로 하는 범투르크주의의 정치적?문화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됐다.

 

 

 


 

연재 / 세계의 몽골리안들 ①

 

  지구의 냉동 창고, 러시아 야쿠트 공화국

 

   - 타이가의 바다 위에 뜬 섬,  순록 유목민을 찾아가다.

 


 

' 1000 년 전, 누가 대서양 서쪽 저편에 또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 있음을 알았겠는가?' 기원 1천 년기를 마무리하는 99년 12월 31 밤 마지막 미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천 년 간의 가장 큰 사건은 미 대륙의 발견'이라고 평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대작을 남긴  아날학파의 거두 페르낭 브로델도 유럽의 미대륙 발견을 '거금의 복권에 당첨된 것' 에 비유했다. 유럽계 백인들은 복권에 당첨되자마자 전 세계로 이동?확산,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구축했다. 오늘 날 인류의 대다수는 유럽인들이 세운 질서 속에 살고 있다.

 

유럽인의 이동이 단기간에 급속하고 강력하게 이루어졌고 또  아직도 그 영향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유럽 이전의 다른 이동과 확산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고 정당한 평가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1492년 이전 아메리카 대륙과 유라시아 대부분에 퍼져 살고 있던 또 다른 인류가 있었다. 그들이 바로 한국인도 그 계통에 포함되는 '북방계 몽골리안'이다. 2만 년 전 내륙아시아의 혹독한 기후에 적응해  작은 눈, 튀어나온 광대뼈, 다부진 몸 등의 신체적 형질을 획득한 북방계 몽골리안은 1만 2천년 전 전인미답의 땅인  '신대륙'에 인류의 존재를 알렸고,  기원전 1천년 전부터 알타이계 기마유목민으로 변신, 정주문명과 끊임없이 대결하며 유라시아의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됐다 

 

KBS는 유라시아 대륙과  미 대륙에 퍼져 살고 있는 북방계 몽골리안의 삶을 취재, 올 3월 다큐멘타리 '몽골리안 루트'를 방송할 계획이다.주간조선은 KBS

 

제작팀이 3년간의 취재 과정에서 만나고 겪은 몽골리안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소리까지 얼어붙는 땅' 시베리아 

 


 

99년 3월 11일 아침 ,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시베리아 동부의  야쿠트(또는 사하) 공화국 수도 야쿠츠크 공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간 디지탈 온도계의 숫자는 정확하게 영하 33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틀 후에 에벤족과 에벵키족의 봄 순록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서울의 3월 보다는 춥겠지만 그래도 명색의 봄인데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겠지 하는 섣부른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당장 비디오 카메라 작동이 걱정됐다. 보온 덮개를 준비해 왔지만 그걸로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 

 

공기가 차가우니 숨을 너무 깊이 들이 마시면 폐를 버린다고 마중 나온 러시아인이 충고를 했다. 공항 밖을 몇 발자국 걷자마자 그게 빈 말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한 숨 들이 쉴 때마다 수 많은 바늘로 가슴을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도시의 자동차와 굴뚝이 내뿜는 연무 속의 수증기가 얼어서,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폐의 기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 촬영을 한 시간 정도 했을까,  통역, 카메라맨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해서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널부러진다. 숨을 깊게 못쉬니까 산소부족으로 쉽게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다.  마치 히말라야의 고산병에 걸린 것처럼 .

 

혹한의 내륙 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적응, 인간의 북방 거주 한계선을 확장한 북방계 몽골리안의 한냉적응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택한 지역이 바로 지구의 최한극 야쿠츠크였다. 기네스북에도 오른 최저 온도  영하 71.2도, 한반도에 한파를 몰고 오는 시베리아 고기압의 고향, 겨울엔 춥고 여름엔 찌는 대륙성 기후의 전형, 여름에도 곡괭이로 땅을 1미터만 파내려 가면 얼음층이 나오는 영구동토, 너무 추워서 소리까지 얼어붙는 땅 등등의 으시시한  표현을 달고 다니는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런 추위에 적응해서 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한 세대가 아니라 수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추위에 맞는 형질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한냉적응에 관한 재미있는 연구 사례가 하나 있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미군들 중 많은 수가 겨울 추위에 동상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흑인 병사들이 고생이 심했는데 , 한국군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동상에 잘 안 걸렸다. 미국 의료 연구진들은 인종별 차이의 원인을 면밀히 조사했다.  동상에 취약한 손끝과 발가락 부분에 퍼져있는 모세혈관의 기준 시간당 맥박수를 각 인종별로 측정했더니 우리 같은 북방계 황인종의(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인은 남방계로 분류됨) 맥박수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백인, 가장 낮은 것이 흑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모세혈관의 맥박수가 높을수록  손끝의 혈액 순환이 잘 돼 동상에 안 걸린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실험 결과는 그만큼 우리의 조상이 추운 곳에서 살며 적응해 왔다는 걸 말해준다. 학자들은 약 4만 년 전부터 아시아 해안가에 살던 남방계 몽골리안의 일부가 대륙성 기후의 춥고 바람이 센 내륙아시아로 북상하면서 서서히 이런 형질을 얻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냉적응을 잘 해서일까? 거리의 야쿠트인들은 추위를 즐기는 듯하다. 얼음조각을 해 놓은 광장에서 아이들은 썰매를 즐기고 , 냉장고가 필요없는 노점상의 아이스크림은  정말 불티나게 팔린다. 식당에서는 인근 레나강에서 잡자마자 얼어붙은 송어의 살을 칼로 얇게 저며서 접시에 내놓는다. 민물고기의 살은 혀에 닿자마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린다.   

 


 


 

영구동토의 배(船) 순록 

 

야쿠트의 다수 민족인 야쿠트족은 투르크계로 시베리아 선주민족 중 최대인구 38만을 자랑한다. 다른 소수민족들이 살아 있는 인류학 화석의 수준인 몇 백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인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조상은 10세기 이전에는 중앙아시아의 여타 투르크계 민족들처럼 스텝의 기마 유목생활을 하다가 차츰 경쟁에서 밀려나 13세기까지 이곳으로 북상해서 자리를 잡았다. 19세기 이전의 이들의 주업은 半유목적 목축과

 

모피 짐승의 사냥이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로 야쿠트는 맨 처음에는 유배지로, 그후에는 레나강 분지의 석탄, 다이아몬드 같은 광물의 풍부한 산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야쿠트 자치 공화국에는 야쿠트족 외에도 투르크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인  에벤족과 에벵키족이 살고 있다. 원래 이들은 일년에도 수 십 번씩 이동하며 순록을 사육하는 유목민이었는데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집단농장에 편입시킨 뒤에는 각 순록 사육 목장인 스타제 별로 정착 생활을 하고 있다. 타이가와 설원에 사는 이들에게  순록은 캐러밴에게  낙타가 갖는 의미 이상으로 유용한 짐승이다. 순록은 이들에게 젖소처럼 젖을, 밍크처럼 털가죽을, 돼지처럼 고기를, 말처럼 이동 수단을, 또 근래에는 중국이나 한국에 수출하는 '뿔'을 주는 전천후 봉사자다. 그래서 에벵키 사람들은 ' 순록없이는 에벵키도 없다'고 말한다. 

 

농경민족들이 봄맞이 축제와 추수감사제를 바치듯 순록 유목민들은 암컷의 출산철인 4월이 오기 전에 순록축제를 연다. 각 지역의 마을 별로 소규모 잔치가 열리고 마지막으로 수도 야쿠츠크에서 가장 큰 축제 판이 벌어진다. 첫째 날에는 순록 썰매 경주, 둘째 날에는 순록 올가미 던지기 대회를 하면서 춤추고 놀며 즐기는 행사는 떨어져 있던 유목민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축제 첫날, 순록 썰매 경주를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데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보온 덮개에 기름 주머니 난로까지 동여맨 소형 디지틀 비디오 카메라 한 대가 그만 서버린 것이다. 기록용 사진을 찍기 위해 가져간 카메라도 얼어 붙어 필름이    돌아가지 않았다. 유목민의 행사용 천막에 들어가 불을 쬐봐도 한 번 맛이 간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몸이 한냉적응을 하기도 전에 기계가 먼저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해버린 꼴이었다.      

 


 


 

타이가 속에 떠있는 섬 - 순록 유목민

 


 

축제 다음날 우리는 북한이 저공 침투에 쓰는 AN-2 기로 2시간 비행한 뒤  에벤족의 마을 세벤꾀르에 도착,  다시 러시아제 카마스 트럭에 몸을 싣고 3시간을 달려 순록 유목민의 겨울 캠프를 방문했다.  빽빽한 타이가 숲에 둘러 싸인 평지에 통나무 오두막이 한 채 서 있고 주변에는 순록을 가두는 나무 울타리가 삥둘러져 있었다. 친척을 포함한 바실레이(35세) 일가족 7명이 돌보는 순록의 수는 1900여 마리. 그중 대부분은 집단 농장 소유이고  가족의 소유는 울타리에 가두고 젖을 짜는 몇 십마리 정도였다. 나머지 순록은 겨울 내내 숲에 풀어 놓고 이듬해 4, 5월경 뿔을 자를 때 집 쪽으로 몰아 온다고 한다.

 

우리가 숲에  있는 순록떼를 촬영하고 싶다고 하자 바실레이는 친절하게도 당장 순록썰매를 준비했다. 산타클로스의 순록썰매를 난생 처음 타본다는 설레임도 잠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필자와 카메라 맨은 썰매에서 떨어져 눈밭으로 나동그라졌다. 설마 순록이 그렇게 빨리 달리리라고는 짐작도 못한데다, 곳곳의 비탈과 커브길이 워낙 많아 조금만 몸의 중심을 잃으면 곧바로 추락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보이는 것이라곤 눈 쌓인 산과 나무 밖에 없는데 바실레이와 그 일행은 어떻게 알았는지, 순록떼가 앞의 높은 산 두 개 뒤로 가버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같은 초보자가 거기까지 가기에는 무리였기에  대신 능숙한 몰이꾼을 한 명 보내 순록떼를 몰아 오기로 했다. 하지만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도 순록도 보이지 않고 몰이꾼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할 수 없이 우리는 썰매를 타고 오두막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아마 독자들께서는 남들 해보지 못한 순록 썰매를 실컷 타봤다고 부러워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가 떨어져 기온이 영하 40도로 곤두박질하는 상황에서 썰매를 타고 시속 30km 로 달려보시라. 지옥이 따로 없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썰매를 꼭 잡아야지, 옷의 빈틈을 비집고 계속 찬바람이 몰려들어오지, 썰매날에 튄 눈발이 얼굴에 달라붙어 얼지를 안나, 그렇게 한 시간을 타면 정말 동사직전이 되버린다.

 

그날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몰이꾼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영하 50도의 캄캄한  밤에 순록을 타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산 두 개를 넘어 천 8 백여 마리의 순록을 근처 숲까지 몰아온 것이다.  우리는 괜한 부탁을 해서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구나 하는 자책을 하고 있었는데 몰이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서 순록 고기 수프와 흘레브(러시아의 딱딱한 갈색빵)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숲에서 튀어나오는 수 많은 순록떼와 맞부딪혔다. 몰이꾼들에게 쫓겨 이리저리 눈발을 날리며 뛰는 순록떼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침엽수와 눈과 순록떼의 어우러짐은 그 어떤 동양화보다도 정갈하고 어떤 활극 영화보다도 역동적이었다.

 

바실레이의 가족들은 올가미를 던져 젖이 잘 나오는 암컷과 장에 내다팔 수컷을 몇 마리 잡았다. 밧줄에 걸린 뿔을 빼려고 순록이 발버둥 칠 때마다 연신 백설이 날렸고  그 눈가루에 반사된 햇빛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빚어냈다.  이 적막하고 광활한 타이가의 바다 속에서 순록떼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는 한 개의 아름다운 섬이고,  유목민들은 그 섬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 주민이었다.  숲을 뒤흔들며 뛰어 다니는 순록떼의 한 가운데에 서서, 우리도 그 섬 위에 잠시 표류한, 문명세계로부터 난파한 선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프로그램 소개 박스 기사

 


 

  <다양한 학문적 이론 토대로 3년간 제작>

 

오는 3월 방영되는 KBS 문명 다큐멘터리 <몽골리안 루트>(프로듀서 진기웅, 손현철)는 총 8부작. KBS가 밀레니엄 특집으로 특별 제작했다.1993년 기획된 이 다큐멘타리의 실제 제작은 97년 5월 시작됐다. 엄청난 제작비와 방대한 내용 때문에 경영진이 결단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작 도중에도 IMF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어려움이 더 컸다. 

 

유럽계 인종의 지리상의 발견과 확산에 비해 잘 알려지 있지도 않고 또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했던 인류사의 잊혀진 드라마. 그래서 '몽골리안 루트'는  다큐멘타리 PD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소재였다. 기획에만 2년, 실제 제작에 3년을 투입한 KBS의 '몽골리안 루트'는 기존의 다큐멘타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제작진은 자신한다. 기존의 다큐멘타리들이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서 주변의 풍경과 풍습을 소개하는데 그친 것과는 달리, '몽골리안 루트'는 다양한 학문적 이론을 토대 삼아 중요한 테마 위주로 밀도 있게 구성한 본격 다큐멘타리이다.  전반부인 1~4편은  내륙아시아의 기후에 형질적응한  북방계 몽골리안이 시베리아와 베링 지협을 거쳐 북남미 신대륙으로 진출, 확산하는 과정을, 후반부 5~8편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마유목민으로 변신한 북방계 몽골리안 알타이어족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진출,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한국 방송 다큐멘타리 사상 최장의 제작 기간과 최대의 비용을 투입한 이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은 한국방송공사 인터넷 홈페이지 www.kbs.co.kr/mroute에서 미리 볼 수 있다.

 


 

 


 

        카자흐족의 독수리 군단

 

 

  - 몽고 바얀올기 지역 카자흐 족의 독수리 사냥.

 


 

우리가 독수리의 청명하면서도 섬뜩한 울음소리에 눈을 뜬 것은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아침 7시.  카자흐족 바이테(67세) 노인이 사냥나갈 독수리에게 여우고기를 먹이고 있었다. 몽고 내에서 투르크계 카자흐족이 가장 많이 사는 최서부  바얀올    기 아이막(우리의 행정단위 道에 해당)에 도착한 때가 바로 이틀 전이었다.  독수    리 사냥에 뛰어난 노인을 물어물어 찾아 다니다가 겨우 간밤에 바이테 노인집을     찾았으니, 우리는 아직 주인공 독수리와 인사를 나누지 못한 처지였다.

 

벌써 흰 입김을 만드는 10월의 아침 찬 공기를 마시면서 부랴부랴 마당으로 나섰다. 태양이 삭사이 솜(우리의 면)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준봉들을  막 넘을  찰라, 카자흐족 특유의 모자와 옷을 입은 노인의 오른 팔 위에 산란하는 햇빛  을 받으며 흑갈색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역광을 받은 노인과 독수리는 새와 사람이 한 몸이 된 반인반조의 신수를 연상시키기기에 충분했다.

 

독수리는 가끔씩 날개를 퍼득이며 여우의 머릿고기를 맛있게 뜯어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이테 노인은 여우고기에 연신 퉤퉤 침을 뱉는 것이었다. '아무리 날짐승이라지만 먹는 음식에 침을 튀긴담, 더럽게시리.'  노인이 너무 열심히 침을 뱉길래 방해할 수는 없고 해서 나중에 물어 보니 아주 깊은 뜻이 있었다. 침으로 고기를 연하게 해서 독수리가 잘 뜯어먹고 탈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란다. 침 속의 효소가 고기의 단백질을 분해하는데 도움을 줄테니 분명 일리가 있었다.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 먹일 밥을 자기 입으로 좀 씹다가 아기 입에 넣어주는, 그런 사랑이라고나  할까. 바이테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난 카자흐족들은 모두 독수리에 대해 일종의 자식사랑, 형제애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카자흐족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 흩어져 있던 투르크계 부족들과 13세기에 중앙아시아로 진줄한 몽골계 민족과의 혼혈로 생겨난 민족이다. 언어는 투르크어를 쓰고 있는데 터키반도의 투르크 민족과도 말이 통한다고 한다. 20세기 말 현재 1천만 여명으로 추정되는 카자흐족의 대부분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종교는 이슬람교다. 몽고 서부 바얀올기 지역에는 약 10여 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카자흐족이 언제부터 독수리를 길들여 들짐승 사냥꾼으로 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 6세기 투르크(돌궐) 제국 시대에  벌써 매에 대한 언급이 있는 걸 보면 그 기원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를 침입했던 몽고의 영향으로 한반도에서도 매사냥이 유행했으니  최소한 13세기 이전에 스텝 전역에서 독수리나 매를 이용한 사냥이 널리 행해졌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스텝의  유목민들에게 독수리 사냥은 손쉽게 사냥감을 얻고  신분 과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독수리를 팔에 얹고 말을 탄 유목민의 모습은 정말 위엄이 있어 보인다.

 

카자흐족의 전설에는 독수리와 관련된 얘기가 참 많다. 카자흐족이 믿는 신이 맨 처음 카자흐인을 창조한 뒤 카자흐인의 오른쪽 어깨에서 두 번째 피조물인 독수리를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신은 독수리에게  카자흐족에게 봉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옛날에 다른 부족 사람이 카자흐족 사람에게 자기 마을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마을에는 구리와 다양한 보석이 난다고. 그러자 듣고 있던 카자흐족 왈, '우리에겐 4달 만에 또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양이 있고 두 달 만에(야생을 길들여서) 사냥을 할 수 있는 독수리가 있다'   이 말에는 보석은 가지고 있으면 그냥 보석일뿐이지만 양과  독수리는 끊임없이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지극히 유목민적인 관점이 들어있다.  또  독수리에 대한 카자흐족들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독수리는 쉽게 길들여진다.  17세부터 독수리 사냥을 시작한 바이테 노인은   지금(1998년 현재)까지 34마리의 독수리를 길들여서 사냥을 했다고 한다. 얼추 계산을 해보면  1년 6개월에 1마리 꼴로 새로운 독수리를 길들인 셈이다. 독수리가 주로 잡는 짐승은 여우와 토끼, 삵쾡이 등이다. 사냥은 주로 들짐승의 모피가 가장 좋고, 눈이 쌓여서 짐승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11월 부터 12월 사이에 주로 행해지는데 많이 잡는 철에는 30마리 이상을 거둬들인다고 한다.     

 

바이테 노인은 우리의 촬영을 도와준다고 독수리를 가지고 있는 동네 노인 두 명을 더 불러왔다. 사냥 보조로 따라 다니는 아들과 친지까지 포함해서 일행은 순식간에 6명으로 불어났다. 사냥  출발하기 전에 서울에서 가져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독수리들 들고 있는 노인들을  한 명씩 촬영해서 바로 사진을 주었더니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중에는 독수리가 없는 젊은이들까지도 독수리와 한 컷 찍어달라고 줄을 섰다.  사진기도 귀할 뿐만 아니라, 있다해도 현상 인화하려면 하루를 말타고 도회지로 나가야 하니 그럴만도 했다.  드디어 여우를 잡기 위해 출발.  말을 탄 6명에 3명은 팔 위에 독수리까지 얹었으니 그 행렬은 정말 장관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독수리 군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제는 우리였다. 말타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결국 타고온 러시아 69 짚차로 따라갔는데 중간에 차가 갈 수 있는 길이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여우를 잡으려면 일단 말을 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독수리가 조감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한다.  독수리 군단은 급경사를 타고 자꾸자꾸 멀어지는데 짚차는 중간에 서 버렸고, 우리는 허겁지겁 장비를 들고 따라 갔지만 결국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들 한 명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방금 독수리가  삵쾡이 한 마리를 잡았으니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독수리의 발톱이 얼마나 날카롭고 무서운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움켜쥠'으로 삵쾡이는 즉사한 상태였다. 어쩌면 '움켜쥠' 보다는 독수리의 발톱이 짐승의 몸통을 꿰뚫어 버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저들의 독수리 발톱에서 저를 구하소서'라는 성서의 표현이 단순한 수사법만은 아닌 셈이었다.  카자흐족들도 독수리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발톱만은 늘 조심한다. 독수리를 다루거나 오른 팔 위에 올려놓을 때도  사슴가죽으로 만든 두텁고 팔꿈치까지 오는 벙어리 장갑 겸 토시를 낀다. 안 그러면 남아나는 팔뚝이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독수리는 한 번 움켜쥔 것을 잘 놓지 않는다. 그래서 독수리가 움켜쥔 사냥감을 발톱에서 떼어내려면 두 사람이 붙어서 용을 써야 한다.    

 


 

둘째 날 아침에는 더 많은 독수리가 바이테 노인 집의 마당을 채웠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즉석 사진을 찍으려고 동네의 독수리 가진 사람이 다 몰려든 것이다.  바이테 노인은 대부대를 이끌고 둘째 날의 사냥에 나섰다. 작전을 좀 바꿔서 골짜기 하나를 말과 사람으로 둘러싸고 여우를 몬 뒤 독수리를 띄우기로 했다.  산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면서 포위망을 좁혀 나가자 먹이를 찾아 나섰던 여우 한 마리가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는 눈가리개를 씌우고 있다가 이 때 벗겨주면 독수리는 요격기처럼 출격, 사냥감을 향해 내려꽂힌다. 운이 나쁜 여우는 독수리의 손아귀를 벗어 나지 못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재빨리 달려가 발톱을 뜯어내서 우리는 살아있는 여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촬영을 마치고 바이테 노인과 우리가 먼저 집으로 돌아온 뒤에 슬픈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같이 사냥을 나갔던 친구 노인의 독수리가 풀밭의 양을 잘못 습격했다가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기별이었다.  카자흐 족들은 독수리로 사냥을 하다가 어느 정도 연수가 되면 독수리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 보낸다. 독수리가 그 동안 무사히 사냥 마친 것을 축하하면서 양도 잡고 풍악도 울리면서 즐기다가 독수리를 날려 보낸다.  노인의 독수리는 자기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주인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다음 날 위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 친구 노인의 집을 찾아갔다. 노인은 독수리를  산에다 묻으려고 말에 안장을 얹고 있었다. 죽은 독수리를 안고 말에 올라타는 노인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식을 묻으러 가는 사람처럼 쓸쓸하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 먼 산 그림자에 묻힐 때까지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취재 후기〉

 


 

'몽골리안 루트'를 촬영하면서 제작진이 같은 '몽골리안' 이어서 덕을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베링해의 세인트 로렌스 섬에서는 원칙적으로 에스키모의 사냥을 촬영하는게 금지돼 있었다. 환경보호 단체와 방송의 비난에 시달려온 부족위원회는 아예 모든 영상 취재 활동을 막아버렸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생존활동을 그만두라는 건 죽으라는 얘기와 똑 같다는 게 이들의 항변이었다. 사실 20세기에 고래나 물개 같은 바다 포유류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은 백인들의 상업적인 무차별 학살 때문이었다. 백인들이 이제 와서 환경보호 운운하면서 자신들을 비난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는 것이다. 몽고의 독수리 사냥 촬영도 우리가 같은 피부색에 같은 얼굴 모습을 가졌기 때문에 수월하게 풀렸다. 구미의 유명 다큐멘타리 잡지의 사진가들도 우리  팀처럼  독수리 사냥꾼을 많이 모아 놓고 촬영을 하지는 못했다.

 

물론,  말은 안 통해도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인종적 공통인자가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끼리의 화친과 공동 번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형질적으로 가까울수록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와 일본이 그렇고, 프랑스와 독일이 그렇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과 공유한 동질적인 부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번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일 많이 깨달은 것은 우리가 너무 그들, 아니 우리들 '몽골리안'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유럽의 문화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에 달할 정도의 지식을 가졌으면서도 초원과 변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뿐인가, 그런 방면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수준이 낮다거나 아주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다수가 돌아 보지 않는 곳에서 길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중세 교회의 절대주의와  권위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타락하고 방종하다는 비난을 받던 그리스, 로마의 가치관에서 르네상스의 싹이 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서구의 계산적 합리주의와 디지틀의 최첨단이 판쓸이를 한 시대에  오히려 사냥꾼과 유목민의 단순한 세계관에서 새 천년의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얼마전 타계한 20세기 철학의 마지막 스타  질 들뢰즈가 서아시아 스텝 유목민의 역사로부터 '유목적인 사고'를 구축하는 원료를 끌어낸 것만 봐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몽골리안 루트'가 새로운 사고로의 전환점이 됐으면 하는게 제작진의 바램이다.

 


 

 


 

몽골리안 루트 1 베링 해를 건너 신대륙으로

 


 

아시아계 인종 집단을 가리켜 흔히들 '몽골리안(Mongolian)'이라 부른다. 몽골리안 중에서도 중국계 민족과 동남아시아인을 제외하고, 만리장성 이북과 만주, 한반도 등지에 삶의 터전을 잡은 부류를 '북방계 몽골리안'이라고 한다. 누런 색에 가까운 피부와 '몽골주름'이라 불리는 눈꺼풀주름, 뻣뻣하고 검은 모발, 광대뼈가 솟은 넓적한 얼굴, 많지 않은 체모와 출생 후 얼마 동안 나타나는 몽골반점이 바로 겉으로 드러나는 북방계 몽골리안의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리안 루트'는 수만 년 전부터, 내륙아시아의 기후에 적응한 북방계 몽골리안이 전세계를 향해 퍼져 갔던 경로를 의미하는 말이다.

 

15세기 이전까지 유라시아의 초원 지대와 북남미 대륙의 주인이었던 북방계 몽골리안. 그들은 아시아 내륙에서 출발, 새로운 땅으로의 이동과 확산을 계속해 시베리아와 북극 지대, 미 대륙뿐만 아니라 만주 초원부터 중앙아시아의 건조 지대를 거쳐 터키 반도까지 아우르며 인류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유럽의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몽골리안 문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오에서는 2000년 2월부터 2회에 걸쳐 과거 몽골리안의 이동 경로를 따라 화려했던 문명의 흔적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짚어 본다. 먼저 그네들이 인류 최초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간  길목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사진: 박종우 글: 손현철

 


 

'쟤들은 눈도 이상하지, 정말 사람 고를 줄 모르네' 백인과 흑인 그리고 아시아계 여성 모델의 얼굴이 나란히 등장하는 베네통의 패션 광고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백인이나 흑인 모델은 우리가 영화나 잡지에서 익히 보아온 얼굴형이라 별 거부감이 없는데, 화면 한쪽을 차지하는 동양 여성의 얼굴은 속된 말로 '영 아니올시다'다. 아시아 여자들 중에도 눈이 크고 보조개 있는 미인이 많은데 하필이면 '눈이 쫙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여성을 황인종 대표 모델로 썼담? '혹시 황인종을 깔보려고 이런 모델을 썼나?'하는 유치한 생각까지 들라치면, 백인들의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미적 취향이 우리와 다를 수도 있다는 아주 상식적인 판단조차 잠시 뒷전에 밀리기 마련이다.

 

짐작컨대, 베네통의 백인 광고 사진가는 '눈이 작고,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이 황인종 얼굴의 특성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여러 아시아계 여성 중 그러한 특징이 두드러진 사람을 광고 모델로 뽑았을 것이다.

 

압구정동에 몰려 있는 유명 성형외과는 방학 때마다 쌍거풀 수술을 받으려는 여학생들로 붐빈다. 서양 여자들처럼 눈이 커 보였으면 하는 게 그네들의 소망인가 보다. 보통 쌍거풀 수술을 하면서 눈가 양미간 쪽 아랫부분의 얇은 거풀인 '몽골주름'(의학용어로 Mongolian Eye Fold 또는 Epicanthic Fold)이라는 것을 제거한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몽골주름은 아시아 지역 인종 눈가 안쪽의 특징적인 주름으로, 북미 인디언에게서도 발견된다."고 씌어 있다. 성형외과 의사들은, 이것을 제거하면 눈이 훨씬 더 커 보인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도 잠시 거울을 한번 보고 자신의 눈에 이 몽골주름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길. 만약 없다면 순종 북방계 몽골리안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이 몽골주름의 역할은 무엇일까? 형질인류학자들은 안구가 외부와 접촉하는 면을 줄이기 위해서 발달한 살거풀이라고 설명한다.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 스키를 타거나 벌판을 걸을 때면 눈을 가늘게 뜨게 된다. 너무 추우면 눈동자까지 시리게 되기 때문이다. 몽골주름은 안구를 덮고 있는 습기까지 얼어붙게 하는 추위를 덜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섬섬옥수(纖纖玉手)의 미인이라는 말을 보면, 우리 선조나 그 사자성어를 만든 중국인이나, 가느다란 손가락을 미인의 조건 중 하나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아무나 다 섬섬옥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즉 보통 사람들의 손가락은 짧고 뭉툭했기에 그만큼 가느다란 손은 희소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인의 손가락은 서양인들 것보다 덜 가느다랗다고, 더 짧고 뭉툭하다.

 

동물학에는 '알렌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포유 동물의 종은 추운 곳에 사는 아종일수록 신체의 돌출 부분(코, 귀, 꼬리 등)이 작아지고 둥근 체형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체적에 대한 체표 면적의 비율이 작아질수록 체온 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포유류인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의 짧은 손가락은 우리가 백인들보다 더 추운 곳에서 형질 적응해 왔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우리의 조상들은 얼마나 추운 곳에서 살았길래 오늘날 냉온대 지방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작은 눈'과 '뭉툭한 손' 같은 형질을 물려 준 것일까? 몽골리안 루트는 우리의 이런 신체적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내륙 아시아의 지도 위에 실제로 존재한다.

 


 

혹한 속으로의 진출

 


 

지구의 냉동 창고는 어디일까? 보통 남극과 북극을 떠올리지만, 진짜 추운 곳은 시베리아를 포함한 내륙아시아다. 시베리아의 러시아연방 야쿠트자치공화국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50도. 기네스북에 오른 최저 온도인 영하 71.2도의 기록도 야쿠트자치공화국의 오이미야콘 마을이 가지고 있다. 우리에겐 봄이 시작되는 3월 낮 평균 기온도 영하 30도에 달한다. 그런데도 이런 추위에 야쿠트자치공화국의 수도 야쿠츠크에서는 '봄맞이' 순록 축제가 열린다. 영하 30도인데 봄이라니! 1999년 3월 중순, 서울에서 가져 간 비디오 카메라 두 대 중 한 대는 얼어서 돌아가지도 않는데 주변 마을에 사는 에벤족 유목민들은 순록 썰매를 타고 찬 바람을 맞으면서 씽씽 잘도 달린다. 우리 같으면 10분도 안 돼 얼굴에 얼음이 박힐텐데 이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날씨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이런 추위에 적응하게 되었을까?

 

유전학에 의하면,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아종인 흑인종과 백인종은 약 12만 년 전에, 백인종과 황인종은 약 6만 년 전에 인종적으로 분화됐다.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 광선 속에서 진화한 최초의 인류는 모두 검은 피부색을 가졌다. 아프리카를 벗어난 인류의 집단은 보다 적은 태양 광선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피부색을 점차 엷은 색으로 바꿔나갔다. 일조량이 훨씬 적은 빙하기의 유럽으로 진출한 인류는 백인종의 조상이, 해안가를 따라 아시아로 진출한 인류 집단이 황인종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아시아 대륙의 남쪽과 오세아니아 대륙, 태평양의 하와이, 폴리네시아 제도 등 비교적 따듯한 곳에서 적응한 최초의 황인종 즉, 몽골리안은 현재의 동남아시아인처럼 눈이 우리보다 크고 쌍거풀이 발달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팔과 다리도 더 길었다. 이들을 남방계 몽골리안이라고 부른다.

 

약 3만 년 전쯤 해안가에 거주하던 몽골리안의 일부가 바람이 많이 불고 강한 태양광선에 일교차가 심한 아시아 내륙, 즉 오늘날의 몽골 고원, 고비 사막, 티베트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3만 년 전 내륙아시아의 기후는 더더욱 춥고 모질었다. 새로운 환경과 투쟁하면서 이들의 신체적 형질은 서서히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강풍과 추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눈은 작아지고, 습기가 차 얼어붙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체모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체열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체적으로 다부지고 뭉툭한 체형을 가진 새로운 인류 북방계 몽골리안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북방계 몽골리안에 속하는 대표적인 민족은 몽골족, 퉁구스계의 소수민족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지역부터 카자흐스탄을 거쳐 터키까지 퍼져 있는 투르크계(우리 역사에는 돌궐로 기록된) 민족,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약 1만 3000년 전 북방계에서 갈라져 나와 미 대륙으로 진출한 북미의 인디안, 남미의 인디오들이다.

 

북방계 몽골리안이 기후가 안 좋은 내륙아시아로 진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맘모스 스텝'이라 불리는 키 큰 초원이 퍼져 있어서, 지금은 멸종한 맘모스나 들소 같은 먹이가 풍부했다. 이들은 집단적인 몰이 사냥으로 거대한 맘모스를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았다. 투박한 돌날을 나무 막대기에 동여맨 석창이 사냥꾼들의 주 무기였다. 그런데 약 2만 년 전부터 도구 체계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부터 고고학자들은 바이칼 호수 동쪽의 시베리아, 몽골, 그리고 알래스카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현대의 수술용 매스만큼이나 예리하고,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세석기들을 무더기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북방계 몽골리안은 이 날카로운 돌날들을 나무틀에 박아 낫이나 칼과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내륙아시아에서 단련된 신체 형질과 새로운 장비로 무장한 신인류 북방계 몽골리안은 자신의 거주 반경을 타이가와 툰드라 같은 낯선 땅으로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무르 강 유역과 캄차카, 추코트카 반도에는 1만 4000년 전 몽골리안 이동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우리가 흑룡강이라고 부르는 아무르 강 유역에는 나나이, 울치, 네기달, 우데게이 등의 퉁구스계 민족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17세기부터 시베리아로 진출한 러시아의 흰 바다 위에 떠 있는 황색 점, 소멸해 가는 몽골리안 소수 민족의 '섬'들이다. 이 중에는 퉁구스계로 보기에는 언어 구조가 몹시 달라 러시아 인류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니브히족도 끼여 있다. 고아시아계로 분류되는 니브히족은 아무르 강 하구와 바다 건너 사할린 섬 북부에 소수만이 남아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화석이다. 오오츠크해와 태평양에서 회귀하는 연어의 통로 아무르 강은 구석기 시대에도 훌륭한 거주지였다. 학자들은 세석기 기술을 갖춘 몽골리안이 어자원이 풍부한 아무르 강 유역에서 생활하다가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다시 일부가 캄차카나 시베리아 북부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석기 시대 이후에 아무르로 진출한 퉁구스계 민족과는 달리 니브히족은 북상하지 않고 아무르 강에 남아있던 민족의 후손으로 분류된다.

 

니브히족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오늘날도 연어잡이, 그리고 아무르 강의 특산물인 갈루가잡이로 살아가고 있다. 갈루가는 서양인들이 세계 최고의 진미로 치는 캐비어를 뱃속에 품고 있는 철갑상어로 희귀어종이다. 멸종위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갈루가잡이를 금하고 있지만, 캐비어 가격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감시의 눈길을 피해 몰래몰래 어로가 행해진다. 사실 니브히족이야 선조들이 살 던 땅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터에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남획 때문에 갈루가 수가 급속히 줄어들면서 니브히족의 고유한 생존 활동조차도 금기가 돼버렸다.

 

우리는 아무르 강의 끝마을 트네이바흐에서 니브히족 이노겐치 노인이 관리들의 눈을 피해 아들 안드레이와 나서는 갈루가잡이에  동행했다. 이틀 전에 바다와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쳐 놓은 그물을 확인하러 가는 참인데, 노인은 별 기대를 하지 않는 듯했다. 갈루가를 많이 잡으려면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마다 넓은 그물을 쳐놓아야 한다. 하지만 이노겐치 노인에게는 큰 그물을 살 돈이 없었다. 이웃의 러시아인들은 큰 그물을 몇 개씩 여기저기 쳐 놓아 어른 몸집 만한 갈루가를 잘도 건져 올리는데, 이노겐치 노인은 헛탕을 치기가 일쑤고 어쩌다 걸린 넓적다리만한 놈에 만족해야 한다. 러시아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안드레이가 겉보기에는 백인에 가깝고, 그의 자손이 대를 거듭하면서 니브히족의 피가 엷어질 게 뻔하듯이, 니브히족 생존의 끈도 점차 가늘어 지고 있었다.

 


 

신대륙에 인류의 존재를 알리다.

 


 

1999년 6월 초순, 서울 같았으면 벌써 반팔 상의를 꺼내 입어야 할 때에 우리는 추위에 떨며 얼음 바다를 헤매고 있었다. 미국령 알래스카와 러시아령 추코트카 반도를 갈라 놓고 있는 베링 해의 한복판 세인트로렌스 섬 앞바다. 아침 일찍 따라 나선 시베리아 유픽 이누이트족의 해마 사냥을 정신없이 촬영하는 사이 우리는 조금씩 유폐되고 있었다. 한낮에는 얼음 조각 하나 떠있지 않던 바다가 해류가 바뀌면서 갑자기 나타난 흰 무리들의 거대한 운동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음들끼리 이를 악문 것처럼 배가 갈 틈을 다 막아버리면, 내려서 배를 얼음 위로 올려 끌다가 다시 바다에 띄우기를 수십 번 , 다행히 백야라서 조금씩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알래스카의 여름은 새벽 2시쯤에야 해가 잠시 졌다가 두 시간 후에 다시 밝아졌다. 이누이트족들은 위성 위치 판독 장치인 GPS와 경험에 의존해 뱃전에 부딪히는 흰 이빨을 뿌리치며 방향을 잡아나갔다.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하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구조헬기는 언제쯤 올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극북에서의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랜 옛날에 이 길을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뼈 저리는 추위로 느끼면서.

 

베링 해는 매년 10월 말부터 서서히 얼음장으로 덮인다. 한겨울이 되면 북극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걷는 일이 가능해진다. 날짜변경선을 경계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미국의 다이오미드 섬과 러시아의 라트마노바 섬의 에스키모들은 여권과 비자도 없이 서로 왕래를 한다. 추위가 얼음길을 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1만 8000년 전, 최후 빙하기 시대에는 베링 해 수면이 지금보다 40여 미터나 낮아 사계절 아무 때나 육로 이동이 가능했다. 고지질학자들은 지금은 베링 해 밑에 잠긴 이 육지를 '베링 육교'라고 부른다. 이 지협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동물들이 미 대륙으로 퍼져갈 수 있었다. 북방계 몽골리안의 일파가 이동하는 사냥감을 따라 베링 육교에 도달한 것은 늦어도 1만 3000년 전 최후 빙하기 말기였다. 당시의 베링 육교는 북상한 맘모스와 버팔로의 조상 뻘인 원시들소가 뛰노는 훌륭한 사냥터였다. 하지만 1만 2000년 전, 간빙기의 시작으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점차 높아지면서 베링 육교가 바다에 잠기고,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몽골리안들은 서로 영원히 분리된다. 신대륙으로 진출한 이들은 현재의 미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과 인디오의 조상이다. 인류학자들은 후손인 현재의 인디언과 구별해 고(古)인디언이라는 명칭을 쓴다.

 

새로운 대지의 주인이 된 고인디언 앞에는 새로운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현재의 캐나다 지역인 북미 대륙의 북부는 빙하 천지였다. 한반도 보다 최소 10배가 넓은 캐나다 중부쪽의 거대한 빙하와 태평양 해안가 록키 산맥 서사면을 끼고 발달한 빙하, 이렇게 두 개가 몇 킬로미터 사이를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학자들은 알래스카의 동물군이 이 빙하의 크레바스를 따라 먼저 남하하고, 고인디언이 긴 시차를 두고 그 뒤를 따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빙하의 남쪽에는 현재의 북미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내륙아시아의 맘모스 스텝을 연상케 하는 이 건조한 초원지대는 맘모스, 버팔로 등에게는 훌륭한 먹이 창고였고 새로운 침입자 고인디언에게는 둘도 없는 사냥터였다. 고인디언이 얼마나 뛰어난 사냥꾼이었는지는 대평원 곳곳에서 발견되는 들소의 뼈무덤들이 증언하고 있다. 고인디언들은 들소 무리를 경사진 골짜기로 교묘하게 몰아 넣어 압사시킨 뒤 힘들이지 않고 수십 마리의 고기를 얻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이런 집단 사냥터에는 고인디언이 들소를 잡고 해체하는 데 쓴 '클로비스'라는 석창이 꼭 남아 있다. 1900년대 초 미국 뉴멕시코의 '클로비스'라는 곳에서 처음 발견된 데서 이름이 유래한 이 석창은 보통 흑요석으로 만들어진다. 흑요석의 아름다운 광채와 당장 가슴 깊숙이 파고들 것만 같은 유선형의 날씬함, 외과수술에도 쓸 수 있는 날카로움이 어우러진 이 도구 겸 무기는 1만 년 전에는 고인디언의 폭발적인 확산을 촉발시켰고, 1만 년이 지난 오늘 날에는 수많은 미국인을 매혹시키고 있다. 돌을 치고 다듬어서 클로비스를 만드는 '냅핑(Knapping)'이라는 새로운 야외 레저가 유행처럼 번져 사람들을 원시 체험의 장으로 끌어 모은다. 당장 인터넷에 들어가서 냅핑이란 검색어를 쳐보시라. 미국의 각 주마다 1년에 몇 번씩 열리는, 누가누가 더 멋있는 클로비스를 만드나 겨루는 대회의 일정과 '돌 깨는' 원시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들이 주르륵 나타날 것이다.

 

북미 대륙 각지로 퍼진 인디언들은 다양한 생존 방식을 택하며 번성했다. 대평원에 자리잡은 평원 인디언(수족이나 샤이언족)은 버팔로 사냥으로, 해안가의 인디언(하이다족이나 마카족)은 연어잡이와 고래잡이로, 건조 지대의 인디언(호피족이나 나바호족)은 옥수수 등의 농작물을 경작하며 살아갔다. 어디에 거주하든, 이들에게 대지는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영적인 관계를 갖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 대지뿐만 아니라 대지를 발판으로 살아가는 버팔로와 코요테 같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베리아의 사냥꾼 시절부터 지녀온 세계관, 대지로부터 얻은 사냥감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빌어온 것만큼 다시 되돌려 주지 않으면 자연의 균형이 깨져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소박한 자연관이 이들을 새로운 땅의 주인으로 오래오래 남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