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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를 추앙한 죄… 비행왕의 추락이 시작됐다 - 대서양 첫 단독비행한 찰스 린드버그, 그의 삶이 던지는 화두

이강기 2020. 12. 22. 14:10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독재자를 추앙한 죄… 비행왕의 추락이 시작됐다

 

대서양 첫 단독비행한 찰스 린드버그, 그의 삶이 던지는 화두

 

뉴욕=송동훈 문명탐험가

조선일보

 2020.12.22 03:00

 

 

 

 

 

1927년 5월 21일 린드버그가 몰고 간 ‘세인트루이스 정신’ 항공기가 파리 르부르제 비행장에 도착하자 수만 명 인파가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린드버그는 에펠탑 위를 선회한 후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린드버그는 뉴욕 귀국 환영 행사에서도 400만명 이상에게 환호를 받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뉴욕은 마천루의 도시다.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시에 퍼레이드의 도시다. 운이 좋으면 마천루 사이를 가로지르는 퍼레이드를 보게 되는데, 장관(壯觀)이다.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퍼레이드는 3월마다 열리는 아일랜드의 성인 ‘성 패트릭(Saint Patrick)’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그날 뉴욕 거리와 펍은 온통 성 패트릭의 상징색인 초록으로 뒤덮였다. 성대했지만 내 기억 속 한 장면과 비교하면 초라했다. 기억 속의 퍼레이드는 흑백이다. 한 남자를 위한 환영 행사였는데, 건물에서 날린 무수한 색종이가 뉴욕의 마천루를 뒤덮었다. 이토록 거대하고 열렬한 퍼레이드는 본 적이 없다. 개선 행진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청년, 찰스 린드버그였다.

 

하늘을 동경한 소년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는 1902년 미네소타주(州)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姓)은 몬손(Månsson)이었다. 조부 올라 몬손(Ola Månsson)이 1859년 스웨덴을 떠나 미국에 이민 갔을 때 린드버그로 개명했다. 린드버그와 동명인 아버지 찰스는 변호사를 거쳐 공화당 연방 하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린드버그는 아버지를 따라 워싱턴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린드버그는 비행을 동경했다. 위스콘신대 2학년 때 결국 비행의 꿈을 좇아 자퇴했다. 당시 비행사는 기피 직업이었다. 월급은 적었고, 생활은 불안정했으며, 사고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린드버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대서양을 최초로 단독비행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 /게티이미지코리아

 

 

린드버그는 1922년 4월 9일 처음 하늘을 날았다. 네브래스카주(州) 링컨의 비행 학교였다. 비행에 더욱 매료된 린드버그는 위험천만한 곡예비행사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2년 동안 무려 700회 이상 창공을 날았다. 1924년에는 육군 항공 예비군 훈련 과정에 들어가 체계적 기술 훈련까지 받았다.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당시 미군은 비행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린드버그는 보직 없는 대위 계급장만 받았다. 비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린드버그는 항공 우편 조종사로 취직했다. 현장은 난관투성이였고, 린드버그는 그런 어려움을 돌파하면서 최고 비행사로 성장했다. 1927년 봄이 됐을 때 린드버그는 스스로 준비됐음을 확신했다. 때가 된 것이다.

 

 

대서양 비행에 성공하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이목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쏠려 있었다. 당대 최고 조종사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무명 청년 린드버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린드버그는 샌디에이고 라이언 항공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비행기를 제작했다. 오직 한 사람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널 비행기 ‘세인트루이스 정신(Sprit of St Louis)’은 그렇게 탄생했다. 린드버그가 세인트루이스 정신을 타고 뉴욕 루스벨트 비행장을 떠난 건 1927년 5월 20일 오전 7시 52분이었다. 린드버그는 오직 혼자 힘으로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파리로 가는 항로를 정확하게 찾아 동쪽으로 날아갔다. 경이, 그 자체였다.

 

5월 21일 저녁 린드버그 눈앞에 거대한 빛무리가 펼쳐졌다. 파리의 불빛이었다. 린드버그는 에펠탑 위를 선회한 후 목표했던 파리 북동쪽 르부르제 비행장의 풀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저녁 10시 22분. 뉴욕을 떠난 지 33시간 30분이 갓 넘은 시간이었다. 수만 명이 기다리던 르부르제는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사방에서 군중이 린드버그를 향해 소용돌이처럼 밀려갔다.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이며, 눈앞에서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영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몰아치는 찬사의 광풍

그날 파리는 잠들지 못했다. 같은 시각, 미국 전역은 승리감으로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어제까지 무명이었던 한 청년 이름을 입에 올렸다. 신문은 린드버그에 대한 찬사로 도배됐다. ‘인류 역사상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공적’ ‘부활 이후 최대 사건’ ‘창조주에게 보내는 최초의 전권대사 출현’ 등 온갖 미사여구가 총동원됐다. 린드버그를 위한 온갖 제안이 쏟아졌는데 거기에는 평생 세금을 면제해주자, 항공부를 신설해 린드버그를 종신 장관에 임명하자, 미네소타주명을 린드버지아로 개명하자 등이 포함됐다. 공원, 거리, 산, 강, 다리, 학교 등 온갖 것에 린드버그 이름이 붙었다. 린드버그 집으로 350만통이 넘는 편지가 갔고, 선물이 담긴 소포 1만5000점도 배달됐다.

 

광풍은 뉴욕 환영 행사에서 절정을 맞았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직접 보낸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돌아온 린드버그는 워싱턴에서 대대적 환영을 받고 뉴욕에 도착했다. 6월 13일 월요일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뉴욕 전체가 단 한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기다렸다. 맨해튼 남쪽에서 브로드웨이를 거쳐 센트럴파크에 이르는 모든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건물 옥상과 창문에도 빼곡하게 사람들로 가득 찼다. 린드버그는 뉴욕 시장과 함께 무개차(無蓋車)에 올라 뉴욕을 가로질렀다. 마천루에서 뿌린 색종이가 진눈깨비처럼 쏟아져 린드버그의 모습을 가릴 정도였다. 최소 400만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됐다. 린드버그에게 이날은 인생의 절정이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

린드버그의 모험은 계속됐다. 항공 산업의 선구자 노릇도 했다. 대중은 영웅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열광했다. 그러나 세상의 지나친 관심은 숫기 없는 린드버그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의 인생은 1932년 초 아들의 납치와 살해라는 가장 파괴적 방식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린드버그 부부는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특히 독일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36년 나치는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린드버그를 초청했다. 영웅은 기꺼이 응했고, 대접은 융숭했다. 2년 뒤 나치 정권은 린드버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독일 공군 사령관이자 히틀러의 최측근 헤르만 괴링이 히틀러를 대신해 훈장을 달아줬다. 파멸의 서곡이었으나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린드버그는 1938년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히틀러가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린드버그는 미국의 참전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수렁에 한 발 더 디뎠다.

린드버그 몰락의 시작이었던 독일 나치 인사들과 만나는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1941년 9월 11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린드버그는 ‘영국, 유대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고의로 진실을 왜곡해 미국을 전쟁으로 끌고 가는 3대 전쟁 선동자로 규정하고 매도하는 연설을 했다. 유대인들이 “미국의 영화, 언론, 라디오, 정부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있어서 그들의 영향이 특히 악랄하다”는 발언도 했다. 나치의 시각으로 전쟁과 미국을 본 이날 연설로 20세기의 이카로스는 추락했다. 여론은 영웅에게서 등을 돌렸다. 3개월 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린드버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뒤늦게 조국의 대의명분을 지지하고 나섰으나 너무 늦었다. 전쟁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린드버그는 본토를 떠나 하와이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1974년 8월 26일). 시신은 사망 직후 자택 근처 조그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독재자와 어울렸던 죄

업적에 비해 초라한 말년이고 최후였다. 포드 대통령이 헌사에서 밝혔듯 린드버그는 ‘세계를 변모시킨 항공 시대의 위대한 선구자’로 기억하는 것이 맞는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린드버그에 대한 찬사는 살아생전에 이미 사라졌다. 뉴욕의 마천루는 역사상 최고 퍼레이드가 열린 때보다 훨씬 웅장해졌지만 정작 그날의 주인공은 잊혔다. 히틀러를 좋게 봤고, 히틀러에게 훈장을 받았으며, 히틀러에게 도움이 되는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린드버그는 지식인도 정치가도 아니었다. 비행에 미쳤던 용기 있는 도전자에 불과했다. 그런 린드버그에게 역사와 대중이 내린 판결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웅에겐 그에 합당한 도덕적 기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마천루에 설 때마다 린드버그의 삶이 준 경고를 되새긴다. 독재자와 어울린 죄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비정한 역사의 법정에서 유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세계 첫 초음속 조종사는 척 예거]

지난 7일(현지 시각) 척 예거(Chuck Yeager·1923~2020·사진)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류 최초로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한 사람이다(1947년 10월). 음속을 돌파함으로써 예거는 음속 이상으로 비행하면 충격파 때문에 폭파될 것이라는 두려움의 벽을 깼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매체들은 물론이고 가디언 같은 영국 매체들도 그의 삶에 대해 긴 부고를 썼다. 달 표면에 최초로 발자국을 남겨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이뤄낸 닐 암스트롱이 2012년에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찰스 린드버그의 긴 부고에도 공과가 차분한 어조로 함께 실렸다. 강대국과 비강대국의 차이는 이런 데 있다. 강대국은 정말 가치 있는 업적이 무엇인지, 정말 기억해야 할 영웅이 누구인지 안다. 약소국은 그러지 못한다.

 

 

윤형준

2020.12.22 10:01:42

미국의 록펠러등 유태인, 유태 자본가들이 쏘련 공산당 설립, 나치스 정권획득에 어떠한 역활을 했는가에 대해 공부해 봅시다. 깜짝놀라 꺄무려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