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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보다 빨랐던 동양과 이슬람의 대항해 시대

이강기 2022. 12. 18. 07:38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5] 서양보다 빨랐던 동양과 이슬람의 대항해 시대

이슬람, 서양과 화폐 통합 이루고 중국과 교류하다
초인플레이션이 제국을 무너트리다

 

조선일보, 2022.12.18 

 
 
 

◇대항해 시대에 앞서 이미 8세기에 구축된 해상 실크로드

                                      장보고 시대 해상실크로드. /위키피디아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라면 15∼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3차 대항해이다. 세계 해양 무역사를 보면 이미 8세기에 동양과 이슬람의 상선단이 해상 실크로드를 완성했다. 이것이 1차 대항해다. 이들은 양쯔강 하구 곧 상하이 입구의 주산군도, 영파(명저우), 양저우 등에서 만나 교역을 했다.

 

그 무렵 이슬람 상인들은 삼각형의 세로 돛을 단 ‘다우선’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항로를 개척했다. 다우선은 작지만 조종하기가 매우 편리한 배로 아프리카와 인도, 아시아 등 대양을 연결했다. 이때 이슬람 상인들의 항로는 중국 광저우 지나 양쯔강 하구의 양저우에까지 이르러 그곳에 이들의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백제, 신라와 이슬람의 교류도 이뤄졌다.

 

 

◇백제, 신라와 이슬람의 교류

불어로 된 이 지도는 고대 한민족 세력권 곧 한반도와 발해만 내역과 주산군도를 비롯한 양쯔강 좌우, 그리고 구슈 등이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당시 주산군도와 영파에는 백제와 신라 유민들이 많이 건너와 살고 있었고 비단과 도자기, 철광석 교역 등 본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다. 그들은 연안 항로 이외에도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했다. 주산군도와 구슈 그리고 전남 영암 사이에는 구로시오(흑조) 해류가 북쪽으로 흘러 이를 이용해 뗏목을 이어 만든 연선과 선박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주산군도에는 심청의 사당이 있고 우리 민족의 백김치와 젓갈이 있다고 한다.

 

동서양의 뱃길은 고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에는 비단이 유행하여 1세기 중엽에 이미 로마에 비단 전문시장이 들어섰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두 나라로부터 왔다고 했다. ‘세리카’와 ‘시나이’였다. 로마인들은 육지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세리카’라 불리는 중국에서 온 것이고, 바다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시나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구분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세리카나 시나이가 모두 중국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시나이가 ‘신라’를 뜻하거나 주산군도에 있었던 ‘신라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신라와 로마가 어떤 형태로든 교류가 있었다. 유독 신라 고분에서만 고대 로만 글라스가 발굴되고 있다.

 

 

◇다우선의 활약

                                                                     다우선. /위키피디아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주로 쓰였던 다우선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대 수메르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교류가 활발했던 점을 보면, 이 시기에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오갔던 다우선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정수일 박사가 “고대 인도양에서 항해하던 선박으로, 삼각돛을 단 목조선 일반에 대한 범칭. 일찍이 5000년 전부터 다우선은 인도양에서 부는 계절풍을 타고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와 인도의 모헨조다로 사이를 항해하면서 교역에 사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고대로부터 사용했던 다우선은 목재와 목재 이음을 쇠못이 아닌 노끈으로 꿰매어 묶었다. 노끈으로 묶은 배라 튼튼하지 못한 단점도 있지만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는 장점도 있었다. 중세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야자섬유인 칸바르(qanbar)는 배를 꿰매는 데 쓰는 노끈을 말한다. 인도나 예멘의 배들은 이 노끈으로 꿰맨다. 왜냐하면 두 지방의 바다 밑에는 암초가 많아 쇠못을 박은 배의 경우 못이 암초에 부딪히면 깨지고 만다. 그러나 노끈으로 꿰매면 노끈이 젖어 있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이슬람, 서양과 화폐 통합 이루고 중국과 교류하다

 

6세기에 발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종교와 형제애로 다져진 ‘움마 공동체’를 만들어 빠른 시간에 사라센 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은 7세기 말에 서양과 화폐 통합을 이루었다. 곧 동로마 제국의 금화와 사산왕조의 은화를 통합했다. 금화 1닢은 은화 22닢과 교환되었다. 이로써 서양과 이슬람의 화폐 교환이 한결 수월해져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계획도시 바그다드. /위키피디아

 

750년 압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동양과 좀 더 가까운 메소포타미아에 계획 도시 바그다드를 만들어 옮겼다. 이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인구가 150만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 당시 바그다드와 견줄 수 있는 도시는 당나라 수도 장안과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정도였다.

 

이후 이슬람은 인도와 남중국해로 해상 무역 반경을 넓혀나갔다. 삼각돛의 ‘다우’선으로 비단, 도자기 등 각종 교역 품목을 실어 날랐다. 당시 해상 실크로드 무역은 부의 원천이었다. 외국 무역상들이 중국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광저우와 그 인근에만 20만명의 이슬람 상인과 유대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는 자치 구역이 있을 정도였다.

 

875~884년에 발생한 ‘황소의 난’ 때 광저우를 점령한 반란군들은 이들 중 12만명을 학살했다. 특히 유대 상인 4만명이 살해되어 광둥 지역 유대인 정착촌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슬람 상인들은 이 같은 ‘차이나 리스크’에 충격받아 믈라카 해협의 작은 섬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후 중국과 이슬람 상인은 인도 남부 항구 퀼론(쿠이론)을 경계로 동서 해역에서 각각 해상 무역을 담당했다.

 

 

◇은 부족 사태로 어음이 출현하다

 

이슬람 상인과 중국 상인의 해상 교류로 인도양 주변 해안 도시들의 상업이 활발해지자 유라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게다가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 수출 대금을 은으로만 받았다. 그러자 은 공급량이 경제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10세기에 이슬람 세계는 극심한 은 부족 현상을 겪게 되었다. 중국은 은이 조세의 기본이라 은이 금에 비해 고평가되었는데, 서양의 금과 은 교환 비율이 1대12인데, 이슬람은 1대9, 중국은 1대6 정도였다. 당연히 서양과 이슬람의 은이 고평가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이슬람 지역에서 외상 거래와 어음이 탄생했다. 당시 이슬람 사회의 유대인 공동체와 이슬람 움마 공동체는 그들의 경전인 탈무드와 코란이 국제법 역할을 해 먼 거리에 위치한 공동체 간에도 서로 신뢰하며 거래할 수 있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간의 오랜 정보 공유 전통으로 지역별 환시세에 정통했다. 그들은 시장에서 서로 다른 화폐를 바꾸어 주는 환전상 업무를 하면서 들고 다니기 무겁고 위험한 금속 화폐 대신 다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통용되는 어음과 수표를 960년께부터 발행함으로써 부족한 은화를 보충했다.

 

그 뒤 연이어 일어난 시아파의 봉기로 바그다드 주변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경제와 무역의 중심이 이슬람에서 지중해로 옮겨 갔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는 유대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고, 어음도 이들을 따라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중국, 어음이 지폐로 발전하다

 

중국에서도 이슬람과 비슷한 시기에 어음이 출현했다.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 개발로 당나라 말기부터 강남 지역이 활발히 개발되었다.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거래할 때 쓸 철전과 동전이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북송 시대 쓰촨에서 민간 금융업자가 철전과 동전 대신 종이로 만든 어음인 ‘교자(交子)’를 유통시켰다. 10세기 후반 발행된 ‘교자’는 철전이나 동전을 맡기고 받은 예탁 증서였다.

 

교자의 편리성이 입증되자 나중에는 나라가 직접 발행을 관장했다. 교자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거치면서 ‘교초(交鈔)’라는 지폐로 발전했다. 원래 여진족은 동전을 기본 통화로 썼는데,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점령한 후 구리가 부족해지자 1142년에 비단을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금나라는 동시에 은화와 동전도 발행해 금속 화폐와 지폐가 함께 통용되었다.

이후 금나라가 아래로는 남송과 싸우고 위로는 몽골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전쟁 비용이 증가하자 지폐가 남발되었다. 금나라 말기인 1214년 무렵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1000관짜리 지폐도 발행되었다. 금나라는 화폐 개혁을 단행해 새로운 지폐인 보천(寶泉)을 발행했으나 이미 실추한 신뢰의 상실로 시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도한 지폐 남발로 인한 통화 붕괴는 금나라 멸망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순식간에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

                                       13세기 몽골인들이 세운 대제국. /위키피디아

 

 

13세기 몽골인들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이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제국이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넓었고,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 등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도 넓었다. 당시 15만명의 군사로 그 넓은 땅을 정복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칭기즈칸의 사망으로 몽골군이 회군하지 않았다면 서유럽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몽골군은 신출귀몰한 기동력 덕분에 순식간에 적들을 제압하고 정복할 수 있었다. 보통 몽골 기병 한 명이 서너 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바꿔 타 하루 이동 거리가 200㎞에 달할 때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적들은 전광석화와 같은 몽골군의 기습에 혼비백산했다.

 

고대로부터 대규모 부대가 움직일 때는 그 뒤를 따라가는 보급 부대가 있어야 했지만, 몽골군은 보급 부대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 행군 속도가 빠르고 기동력 있는 작전이 가능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몽골군은 장병 스스로 자기 먹을 걸 안장 밑에 갖고 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바로 말젖 분말과 육포 가루였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몽골군은 4~5㎏ 정도의 말젖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 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는 육포 가루를 물에 타 먹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불을 피워 조리를 할 필요도 없어 부대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몽골은 전 유라시아를 통일했기 때문에 기존의 실크로드 이외에 초원길이 더 뚫렸다. 그들은 네 개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 곧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길’로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다. 그리고 통행로 요소요소 마다 마구간과 숙소를 겸한 역참을 세웠다. 이는 동서 무역을 위한 무역 진흥책이었다.

 

 

◇은본위 지폐로 화폐 통일을 이루다

 

원나라 초기만 해도 은과 비단이 주요 화폐였다. 교초 지폐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금나라에서 관료로 일했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눈에 들어 원나라에서도 재무 담당 관료로 일했다. 그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폐를 활용할 것을 건의해 2대 황제 오고타이 때 교초를 발행했다. 원나라 때 시행한 역참제로 안전하게 열린 실크로드는 동서 무역의 비약적인 활성화를 가져왔다.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원나라는 각 지역의 도시와 항구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행세나 관세를 없애고 모든 물품의 세금은 마지막 판매지에서 한 번만 지불토록 했다. 그 결과 상업과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육로뿐 아니라 해상 교역도 활발했다. 천주 항구에만 1만5000척의 선박이 해상 수송에 종사했다.

 
                                                          교초. /위키피디아

 

 

본격적인 지폐 시대가 열린 것은 5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가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역 활성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폐의 사용을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 은과 비단에 기반한 냥(兩) 단위 교초(지원통행보초)를 발행했다. 이는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 유통시킨 태환 지폐였다. 원나라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위조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문구도 새겨 넣었다. 덕분에 대량의 주조비용이 절약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쿠빌라이 초기엔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폐와 은의 철저한 교환 비율을 지켰다. 은을 확보한 만큼만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지폐 인쇄를 위해 수도 연경(燕京·베이징)에 조폐창을 두었다.

 

이로써 은본위 제도의 이슬람권과 몽골이 공통된 통화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이 모두 은을 기반으로 삼는 화폐 경제 체제 안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교초는 고려부터 시리아까지 몽골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통용됐다.

 

원나라는 아예 지폐만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금은과 동전을 몰수하고 이를 지폐로 바꿔주었다.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이었다. 이전 송나라 때 지폐를 사용하긴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폐(교초)만 통용된 것은 원나라 때가 처음이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의 지폐 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서 지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유럽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종이가 돈 구실을 한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초인플레이션이 제국을 무너트리다

 

원나라는 남송과의 전쟁과 대규모 토목공사 등 거액의 재정 지출이 필요하면 무거운 세금 징수로도 모자라 지폐를 마구 발행했다. 1274~1281년 원은 남송을 병합하고 고려의 2차 일본 침공으로 고려에 엄청난 원나라 지폐가 유입된다. 과도한 팽창 정책으로 인해 원나라가 빚더미에 앉게 되고 은을 준비금으로 예치하지 않은 지폐가 남발되자 사람들은 은을 지폐와 교환하지 않았다. 이제 교초는 은으로 교환할 수 없는 명목상의 화폐, 곧 명목 화폐로 전락했다. 게다가 위조지폐도 등장했다.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화폐 체계가 붕괴되면서 통화 시장이 마비되었다.

 

시장경제가 무너지자 원시적 물물교환 시대로 되돌아갔다.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밟던 전철을 몽골 제국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후 농민 봉기와 주원장의 발흥으로 1368년 몽골군은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 원의 지폐는 휴지가 된다. 이렇듯 초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도 쉽게 무너뜨렸다.

 

 

◇중국의 대항해가 콜럼버스보다 앞서

                                                                             중국의 정크선. /위키피디아

 

 

10세기 후반 중국 상인들이 여러 개의 사다리꼴 세로돛을 단 원양 범선인 ‘정크’선과 나침반 등 새로운 항해술을 이용해 남중국해와 인도양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2차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2차 대항해는 대개 10∼11세기를 기점으로 13∼14세기에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정화의 대항해가 대미를 장식한다.

 

정화 대항해에 동원된 배는 함대의 중심으로 보선(寶船·보물을 가지러 가는 배)이라 불린 대형 함선만 60여 척이었다. 보선의 크기는, 비록 과장설이 있긴 하나, 가장 큰 배의 경우 길이 151.8m, 폭 61.6m에 무게 약 3,000톤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 이 같은 함대의 규모와 배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는 1492년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참가한 인원이 120명, 함선은 3척에 불과했고 기함 산타마리아호도 230톤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콜럼버스의 배와 비교된 정화선단의 배 크기. /위키피디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포르투갈의 콜럼버스가 길이 20m 안팎의 함선 세 척으로 인도를 찾아 나선 것은 1492년으로 정화보다 거의 1세기가 늦다. 정화의 대원정은 함대나 병력 규모, 실제 항해 거리 면에서 당시 유럽인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만큼 항해를 받쳐 줄 만한 나침반 등 항해술과 화약, 대포 등 과학 기술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제 1차 세계대전까지 정화의 남해 원정대에 필적할 만한 함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정화의 원정에서 보듯이 그 당시 중국 등 동양권이 인구, 생산력, 무역 규모 등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력, 학문, 과학,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구 문명을 압도하고 있었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동남아 곳곳에 화교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인도양 각국에서는 정화의 초상을 모신 도교풍의 사원을 볼 수 있다.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인 셈이다.

 

 

◇명나라의 쇄국정책, 항해선을 모조리 파괴하다

 

1371년 명나라 홍무제에 이어 1433년 선덕제는 다시 해금 정책을 취했다. 국경을 봉쇄하고 외국으로의 모든 여행과 교역을 금했다. 당시 일본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여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더구나 명나라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난 후 해상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 한편 해상 장악력이 떨어지자 시박사(해외 무역을 관리하고 관세를 매기던 기구)를 중심으로 한 관세 수입이 유명무실해졌다. 중앙 정부로서는 실익이 없어진 것이다.

선덕제의 해금령은 왜구를 봉쇄할 목적 이외에도 지방 토호 세력이 남쪽 해상 세력과 손잡고 일으킬지 모르는 쿠데타를 사전에 방지한 것이다. 또 양쯔강 이남의 해상 세력이 왜구 등 외국 세력과 결탁하여 정권에 도전할지 몰라 이들 관계를 사전에 단절케 하기 위한 조치였다.

 

명나라는 항해할 수 있는 배는 모조리 파괴했다. 섬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불러들여 무인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파괴 행위가 명나라 관리의 감독 아래 중국 전역에서 일제히 자행되었다. 항해 탐사 기록마저 모두 없애버렸다. 한마디로 닫힌 사회의 광기 어린 행동이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움직임은 사상적으로는 유교 관료주의와 중화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중화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나라들은 모두 오랑캐라는 사상이다. 해금령은 중화사상에 매몰된 오랑캐 혐오증 곧 외국인 혐오증이 주원인이었다. 이들 사상이 반상업주의와 함께 외부 오랑캐와의 접촉을 금지한 것이다. 외부 오랑캐들과의 교역이 서민들의 농본주의 숭상 정신과 미풍양속을 해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유교 관료주의의 발흥은 글 읽는 선비를 숭상하고 농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전형적인 사농공상 사회를 지향하여 상업과 교역을 천시했다. 유교 문명은 상업이 인간의 심성을 해친다고 여겨 이를 낮춰 보았다.

 

게다가 서양보다 앞서 지폐를 사용한 몽골 시대의 은본위 통화시스템과 시장경제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이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것을 포기하고 물물교환의 자연경제로 되돌아갔다. 농업이 천하지대본이라 하여 서민들의 상업과 교역 활동을 억압하여 시장경제를 쇠퇴시켰다. 정화의 대항해 때 3000톤급의 배까지 건조했던 대형 선박의 건조를 모두 금지하고 기존 선박마저도 모조리 파괴했다. 해양에 관한 지식, 기술, 전통은 물론 의욕과 미래까지 꺾어버렸다. 이때부터 중국은 고립과 쇠퇴를 자초했다. 오랜 자본주의의 역사를 갖고 있었던 중국이 한 군주의 오판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이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의 해금령,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바꾸어 놓다

 

불행하게도 명나라의 쇄국 정책을 조선 역시 같은 이유로 펼쳤다. 고려 말부터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해적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아예 섬에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여기에 더해 민간인의 항해를 금하는 해금 정책을 폈다.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한 것이다. 걸리면 곤장 100대였다.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벌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500년 역사 내내 바다는 없었다. 조선의 해금 정책은 조선을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시켜 중국에 더욱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주인 없는 조선의 바다에는 왜구가 주인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도자기, 금속활자, 측우기, 신기전 등 수준급 과학기술을 보유한 조선이 500년간의 해금 정책으로 눈과 귀를 막아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소외되었다. 반면 이 시기에 일본은 개방 정책을 폈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교류하며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와 조선의 은제련 기술로 제련한 ‘은’을 팔아 경제 대국의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 그 돈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쇄국 정책과 개방 정책의 차이가 후에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결과를 가져온다.

 

 

◇해금령, 동서양의 역학적 관계를 바꾸어 놓다

 

중국과 조선의 쇄국 정책 이후 동양의 성장은 한동안 멈췄다.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명(明)나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은 ‘어둠의 나라’였다. 바깥 세계와 담을 쌓고 안으로 빗장을 걸면서, 몽골 제국이 부흥시켰던 동서 교류의 흐름이 끊어지고 동양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중농억상 정책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유럽 국가들은 무역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반면 명나라는 쇄국과 해금을 고집해 국제 무역에서 스스로 탈퇴했다. 오랜 기간 세계 일류 국가였던 중국은 17세기에 들어 서방 국가들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명나라의 정책 오류가 동서양의 역학적 관계를 뒤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