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작전꾼들"

이강기 2015. 9. 9. 11:26

 

 

"작전꾼들"

 

 

(2001223)

근본이 노름판 같아서 證券이란 證字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특히 증권을 싫어하는 이유는 "작전꾼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른바 몇몇이 담합을 하여 턱도 없는 주식을 턱도 없이 올려 왕창 해먹고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에게 덤터기를 씌워버리는 일이다. 시장바닥의 야바위꾼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내가 잘 못 본 것일까, 아니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의 정부' 들어 비단 증권가 뿐 아니라 사회 이곳 저곳에서 소위 이런 "작전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그런 패거리들이 이 정부 들어 처음 생겼다는 얘기는 아니다. 과거 자유당 시절의 여러 어용단체들도 따지고 보면 "작전꾼들"의 원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여러 정권 시절에 등장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든 유형 무형의 수많은 단체들 역시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옛날 것들은 미련스럽고 너무 노골적이어서 쉽게 구별이 되고 곧잘 마각이 드러나는데 반해, 이 새로운 것들은 하도 은밀하고 교묘하고 날렵하여 얼른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 또 입만 열면 개혁이니, 정의니, 자유니, 민주니, 펑등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국민들을 몹시 헷갈리게 한다는 점이다. 옛날 것들의 아이큐가 80 정도라면 새것들은 200이 넘고도 남을 것이다. 주로 '국민의 정부' 사람들로부터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어떤 정치가가 언젠가 "빨치산 운운" 했다가 경을 치른 적이 있지만, 그의 표현 가운데는 이 정부가 이런 "작전꾼들"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의미도 포함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본적도 있다.

 

 

"증권가의 작전꾼들"이 턱도 없는 주식을 조작하여 턱도 없이 비싸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회의 작전꾼들"은 턱도 없는 여론을 조작하여 턱도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데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겉으로는 개혁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여당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각종 공공 토론회나 게시판들을 휩쓸고 다니며 방청석 마이크를 독차지하고, 게시판과 댓글란에 도배를 해댐으로써, 멋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민들의 여론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따위다. 그리고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친여 언론들은 그런 주장이나 글들을 마치 전체국민의 여론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용, 보도하여 "보편타당화" 시켜버리는 것이다.

 

 

언젠가 DJ는 편지공세, 전화공세를 공공연히 부추기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국민의 여론을 전달해야한다는 취지였다. 그것이 과연 국민들의 진정한 여론전달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결국 "작전꾼들"에게 활개치며 활동할 공간만 제공하는 꼴이 될 것인지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좀 오래된 얘기지만, 1992년 대선 투표당일 오전, CBS 라디오에서 전화로 유권자들의 여론을 알아보는 생방송 프로그램(프로그램 명칭은 기억이 안 난다)을 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말하자면, 당시 여야 대통령 입후보자들이 표방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을 듣겠다는 취지였던 것 같은데, 놀라운 사실은, 전화를 건 사람들의 99%가 일방적으로 당시 여당후보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판을 해대는 것이었다. 담당 아나운서도 이런 편향적인 상황에 좀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생방송이라 갑자기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그냥 진행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여나무명의 전화발언자 중 비교적 중립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이 내 기억에는 꼭 한 사람뿐이었다. 이것이 정말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동 방송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고있는 소위 "작전꾼들"의 작전 탓이었을까? 그 당시 국내상황을 잘 모르고 있던 나는 처음에 그것이 정말 국민들의 여론을 대변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선거의 결과는 그 라디오방송에 나온 전화통화자들의 얘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물론 생방송이라는 특성상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전화에 나온 사람들의 원고를 읽는 듯한 달변이며 그 내용들이 아무래도 우연인 것 같지가 않았다.

 

 

증권가의 "작전꾼들"은 처벌을 받지만, 사회나 정가의 "작전꾼들"은 처벌을 받는 일도 없다. 사실은 증권가의 "작전꾼들"보다 후자의 경우가 수십 배 수백 배 해악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한 표현방식으로 치부되어, 정치가들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것을 권장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고,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야 가릴 것 없이 즐겨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수법이 '국민의 정부' 들어 친여 쪽에서 더욱 교묘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웬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