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귀족, 농민 귀족
( 2000년 11월28일)
다행히 한국전력과 대우자동차의 노사분규가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국회 앞에서 특수고용직 근로자 집회를 갖는 등 공기업 민영화 등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본격적인 동계투쟁에 들어감으로서 노사, 노정간 충돌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엇그제는 농민 대표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강경투쟁을 벌이더니 오늘 보도를 보면 어떤 지방의 농민대표들이 경찰서를 방문, 경찰의 강경진압에 항의했다고 한다. 정말 적반하장도 유만부동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국가경제 동맥의 하나인 고속도로를 점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시간 불편을 주고 경제에 막대한 물적 손실을 끼친 사람들이 그걸 해산시키려고 약간의 강압수단을 쓴 경찰에 오히려 항의하러 몰려갔다니 말이다. 금지선을 넘어오는 시위자를 사정을 두지 않고 제압해 버리는 미국 경찰의 권위가 새삼 돋보인다.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 시위자들이 걸핏하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이에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팔장을 끼고 있는 뉴스를 곧장 접하곤 하는데, 영락없이 우리의 농민대표자들이 그 못된 버릇을 본받은 것 같다. 제발 우리 나라 공권력이나 국민 여론이 그런 막가파식 시위문화를 용납하지 않았으면 싶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박봉과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위협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수입개방에 따른 농산물가격 폭락과 구조적인 적자로 삶이 고달픈 줄 알고 있다. 일부 기업들의 경영부실로 총 백 몇 조원이라는 공적자금을 펑펑 쏟아 붓고 있는 세상이니 우리만 손해보고 있을까부냐는 반발도 있을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2의 IMF니 어쩌니 하는 판에 노동자들과 농민들까지 들고일어나면 나라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듣자하니 공기업 구조조정이 노조의 결사반대에 부딪쳐 난항을 겪고 있다 한다. 또 일부 대기업 노조의 경우엔 연봉이 3천만원 가까이 되는 사람들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간 <노동자들>이라면, 경제발전의 주역이면서도 가장 혜택을 적게 받은 계층으로 인식돼 왔기 때문에 웬만한 노사분규엔 여론도 보통 노동자 편을 들어왔다. 그러나 일부 공기업이나 대기업 노조원들은 중.소기업 특히 영세 소기업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소득에 비하면 노동귀족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중.소기업 노조원들 역시 3D 업종은 20여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맡길 정도로 궂은 일하기 싫어한 적이 벌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말이면 실업자가 100만을 넘네 어쩌네 하면서 우려하는 목소리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물론 소득이나 근로조건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닌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노동자들도 이젠 사(使)는 착취하는 계급이고 노(勞)는 착취당하는 계급이라는 70년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농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천 수백만원 짜리 자가용을 몰고 와서 시위에 참가하는 농민들도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1년에 4, 5차례는 남부여대하여 장거리 단체 여행을 떠난다는 소리도 들린다. 경운기나 기타 고가의 농기구도 정부보조와 저리융자등의 혜택 때문에 몇 번 고장이 나 골치를 썩히면 아예 내다버리고 새 것을 산다는 말도 들린다. 애써 닦고 조이고 하여 아껴 쓰려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별로 급하지도 않는 벼 말리는 기계를 1천 수백만원의 빚(농협 돈)을 얻어 사서는 1년에 한 두 번 쓰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고, 커다란 현대식 축사를 지어놓고 텅텅 비워두는 사람들도 있단다. 역시 정부보조금과 저리융자에 매력을 느껴 그렇게 했단다. 언젠가 시골 아는 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더니 모든 조문객들에게 점심 꾸러미를 안기는데 그 내역이 이러했다. 6천원짜리 도시락에, 캔맥주 하나, 종이 팩에 든 소주 하나, 1,400원짜리 담배 한 갑, 음료수 캔 하나, 그리고 무엇 무엇에다 봉투에 든 노자돈 1만원... 모두 합쳐 2만 5천원 쯤 되는 꾸러미였다. 이것도 중간 정도 수준 밖에 안 된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도시락과 술, 음료수의 절반쯤은 쓰레기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네 집은 농협 빚이 몇 천만원이고 누구네는 몇백만원이라면서 1년 농사 지어야 수십만원 소득도 안 된다고 울상을 지었다.
도시고 농촌이고 시위에 참가하여 임금을 올려달라거나 농협부채를 탕감해달라고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거의가 중산층에 들만큼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이고, 진짜 바닥생활을 하며 열심히 사는 농민이나 도시 영세민들은 항의를 해 볼만한 조직조차 없어
오히려 조용히 살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한다. 떼거리로 몰려가 큰 소리 치면 뭔가 득을 볼 수 있는 세태가 조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를 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20-30년 전의 잣대로 오늘의 농민들을 그리고 도시 노동자들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
같다.
'붓 가는대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두맛 나는 고추장 단지가 있어도 (0) | 2015.09.09 |
---|---|
2003년 2월 이후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온다 (0) | 2015.09.09 |
안동수 변호사의 어떤 일면 (0) | 2015.09.09 |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 (0) | 2015.09.09 |
"작전꾼들" (0) | 2015.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