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이후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온다
(2000년 11월21일)
우리 헌정사 52년은 가히 보복의 악순환으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9 혁명이나 5.16 쿠데타 및 12.12 반란에 이은 5.17 친위쿠데타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비정상적 사태로 탄생된 정권이 자신이 무너뜨린 정권을 부정하거나 보복하는 것이야 자신의 정통성확보를 위해서 부득이한 짓이었다 하겠지만, 문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탄생한 정부도 어김없이 그런 악순환을 되풀이해 온 데 있다. 앞 정권과 난형난제인 노태우 정부가 바로 호형호제하던 전직 대통령을 심산유곡의 사찰에 유폐한 것이나, 역시 앞 정권에 접목하여 태어난 김영삼 정부가 전직 대통령 둘을 감옥으로 보내고, 문민이다 역사바로세우기다 하며 앞 정권들의 도덕성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실은, 그런 행위의 법적인 내지 역사적인 잘잘못을 떠나 대한민국의 정통성확립에 상당한 장애가 되어왔다. 이런 말하면 또 소위 진보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눈을 치켜 뜨며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나올 지 모르지만 그 바로잡는 방법이 또 다른 잘 못을 저지르고 그 다음에 나오는 정권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부정되며, 또 예사로 나라의 정통성 훼손을 서슴치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 부상한 권력자는 거의 한결같이 신생국 초대 대통령 행세를 해 왔다. 그리고 마치 나폴레온이나 히틀러가 로마제국 같은 천년왕국을 꿈꿨듯이 자신을 국부로 모시는 천년왕국을 만들기 위해 임기의 대부분을 새판짜기에 허송했다. 항상 앞 정권과는 구별되는 새 나라를 만드는 환상에 젖어 있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새나라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게 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나타나는 또 다른 권력자는 어김없이 앞 권력자의 그런 노력을 하루아침에 쓸어버리고는 또 다른 새 나라를 세우기에 골몰한다. 결국 그들 집권자들의 원대했던 이상은 자기 임기 때만 유효했던 진리로 끝나고 그들이 세우려는 집은 언제나 약간만 충격을 줘도 부서져버리는 초라한 판잣집 밖에 되지 않았다. 자기는 주춧돌만 놓을 테니 다음 사람이 와서 기둥을 세워주시오, 그리고 그 다음 사람이 와서 대들보를 올려주시오 하며, 앞으로 올 사람이 해야할 일도 남겨가며 큰집을 지으려는 국가원수는 지난 52년 헌정사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나 박정희 정권 초기에 그런 기운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장기 독재로 흐르면서 그 정신이 퇴색돼버렸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임기제가 정착되면서 오히려 <새 나라 세우기> 정신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권은 들어서면서부터 50년만의 정권교체니 뭐니 하면서 국민들의 가슴속에 잔뜩 새바람을 넣고 IMF 위기 탈출이다 뭐다 하면서 크게 인기를 올렸던 데다, 초대 이승만 정부이래 유래 없는 열성지지자들에 의해 생긴 카리스마에다,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의 숙원사업에 정면 승부를 걸며 뛰어들었고, 대통령의 뛰어난 머리와 임기응변력 그리고 그에 걸맞은 레토릭에 일부 열성파들이 껌벅하는 시늉까지 하다보니, 과거 그 어느 정권보다도 "새 나라 세우기" 열정에 불타왔고 지금도 그러해 보인다.
그런데 열성지지파가 아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현 정권의 이런 열정 역시 과거 정권의 그것과 진배없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보고 있고, 그리고 이런 여론이 크게 높다는 점이 2003년 이후의 새 정권 초기에 역시 과거와 같은 뒤집기 현상이 일어나지 않나 보이는 것이다. 개혁소리는 천지가 진동할 만큼 요란한데 결과는 태산명동서일필 격으로 보잘것없고, 부패도 전과 다름없거나 오히려 더 심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같고, 권력기관들의 정권비호도 과거와 같거나 오히려 더 심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보다 더 심하다는 이론은 오래 굶주린 사람이 더 많이 먹는다는 소위 <궁자대식론>으로 보강되고 있다. 아무튼 벌써부터 이런 여론이 비등할 지경이니, 2년 후 정권이 바뀌고 나면 또 얼마나 기기묘묘한 사건들이 줄줄이 폭로될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공직자와 정치가들이 부패와 권력남용혐의로 줄줄이 쇠고랑을 찰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권력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줄줄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지, 또 언론들은 제철을 만난 듯 얼마나 야단법석을 떨 것인지, 또 구정권이 어질러 놓은 일을 청소하는데 새 정권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허송해야할 것인지,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대통령 일가는 무사할 것인지.... 정말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골이 쑤셔온다. 이 문제는 누가 다음 정권을 잡느냐와는 별 상관없어 보인다. 야당이 집권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여당의 누구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끄럽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는 벌써 새로운 당을 만들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우가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골치가 아플 곳은 남북문제인성 싶다. 핵심은 물론 현정권의 대북 달래기 자세, 이른바 햇볕정책이 그대로 견지되느냐는 점일 것이다. DJ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 기자회견인가에서 자기의 사상적 성향을 중도우파라고 표현한 적이 있으나, 외신들은 한결같이 중도좌파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중도우파 내지 우파적 성격을 띈 정권이 들어서면 현재도 논란이 일고 있는 햇볕정책이 수정 없이 계속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찮아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있는(이번의 이산가족상봉의 남측단장이 적십자사 부총재로 바뀐 것만 해도 그렇다) 북측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설사 근간은 바뀌지 않는다 해도(그걸 위해, 즉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가게 하기 위해 현 정부가 숨가쁘게 몰아 부치고 있는 것 같다.), 남북간 새로운 숨결을 고르기 위해선 긴 시간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대북접촉과정에서의 여러 비밀스런 사실들이 그 치부를 드러냄으로서 "총풍사건"보다도 훨씬 규모가 큰 회오리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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