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와 마주보기 역자후기
이 책은 비교역사학서로서 서구 기독교세계의 역사와 중동 및 인근 이슬람세계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2001 년 9.11 사태 이후 부쩍 세계인들의 관심사와 우려의 대상이 된 이슬람주의 (‘정치 이슬람 ’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와 과거 서구 이데올로기들 중 유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비교분석한다 .
저자는 서구역사에서의 3대 이데올로기 투쟁을 (1) 국가가 어떤 형태의 기독교를 인정하고 지지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대략 1520 년대부터 1690 년대까지 벌인 투쟁 , (2) 1770 년대에 시작하여 약 1 세기를 끈 군주제와 공화제의 투쟁 , (3) 1910 년대부터 1980 년대 말까지 이어진 공산주의 , 자유민주주의 , 파시즘 사이의 투쟁으로 정의한다 . 그런데 이들 각각의 투쟁기마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 또는 전쟁으로 수백만 ,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대충 큰 것만 꼽아 보아도 (1)의 기간에는 당시 독일인구의 약 15-20%인 300 만 –400 만을 희생시킨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30 년 전쟁 ’이 일어났으며 , 프랑스에서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갈등으로 위그노 전쟁이 일어났고 , 앙리 4 세가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낭트칙령을 루이 14 세가 폐지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수십만 명의 위그노를 죽이거나 추방했다 . (2)의 기간은 프랑스 대혁명과 7 월 혁명 , 2 월 혁명 등 혁명과 혼란의 연속이었고 , (3)의 기간에는 세계 제 1 차 , 2 차 세계대전과 여러 피압박민족들의 유혈 독립투쟁 , 그리고 서구세력이 개입한 한국의 6.25 사변과 월남전이 있었다 .
이에 비해 이슬람의 역사는 초기 정복전쟁에서 이교도들에게 호된 시련을 안기고 많은 희생을 강요했지만 , 이슬람교 내의 이데올로기 투쟁만은 기독교의 그것처럼 대량 살육을 벌이거나 처절하지는 않았다 . 그들에겐 대략 수니파와 시아파 (이 두 파 외에도 하와리지파 , 무르지아파 , 무타질라파 등 많은 파벌이 명멸했다 ) 사이의 알력 , 그리고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사이의 갈등을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볼 수 있겠다 . 어떤 이는 100 만이 훨씬 넘는 희생자를 내며 1980 년부터 7 년 넘게 지속된 이란 –이라크 전쟁을 수니파 (이라크 )와 시아파 (이란 )의 혈전으로 간주하기도 하나 이 전쟁은 정치 , 종교 , 종족과 관련된 복합요인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투쟁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
세속주의는 19 세기에는 유럽식민주의자들에 의해 , 20 세기에는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 Mustafa Kemal Ataturk)과 이란의 레자 팔레비 (Reza Shah Pahlavi, 혁명으로 쫓겨난 무함마드 팔레비왕의 아버지 ) 같은 현대화를 추진한 독재자들의 손을 거쳐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의 전환은 1967 년 ‘6 일 전쟁 ’에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군이 이스라엘군에게 대패함으로서 아랍인들에게 나세르 (Gamal Abdel Nasser)의 세속주의 프로젝트가 완전 실패했다는 환멸에서 시작되었다 . 다시 말해 이슬람을 버리고 서구화 하는 것이 이슬람세계를 구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이슬람교가 해결책 ”이라는 말이 ‘고풍스런 노인들 뿐 아니라 점점 더 젊은이들의 슬로건이 되어 갔고 ’, 1979 년 이란혁명으로 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최고지도자로 군림하는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고 , 1981 년 나세르에 이은 세속주의 지도자로 이집트에 강압통치를 펴 온 사다트 (Muhammad Anwar Sadat)가 암살당함으로서 이슬람주의의 확산이 가속화하였다 .
이슬람주의자들은 국가의 법률은 샤리아 (Shari‘ah)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 “물 마시는 곳으로 이끄는 길 ”이라는 뜻의 샤리아는 ’알라께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직접 계시하신 ‘ 코란 (Koran, al-qur’ān)과 ‘무함마드의 말씀에서 나온 ’ 하디스 (Ḥadīth)를 말한다 . 세속주의자들은 , 법률은 이슬람에서 나온 것이 아닌 (온건파 세속주의자들에겐 오직 이슬람으로부터만 나온 것이 아닌 ),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문제는 이슬람국가 국민들의 여론이다 . 근래에 실시한 한 여론 조사에서 코란의 가르침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이집트 60%, 파키스탄 82%, 요르단 72%, 튀니지 22%, 터키 17%, 레바논 17%였다 . 이란은 이 통계에서 빠졌지만 , 중도파인 하산 로우하니 (Hassan Rouhani)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으로 보아 이집트와 유사한 여론일 것 같다 .
저자는 이슬람국가들에서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갈등을 해소하여 화합하는 길을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관용주의에서 찾는다 . 서구사회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갈등으로 유혈의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종교적 관용주의를 베풀어 17 세기와 18 세기에 유럽의 경제대국으로 1 등 국가가 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 관용주의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자 유럽에서 여러 유형의 종교적 소수자에게 매력적인 곳이 되어 , 자본 , 기술 , 그리고 국제적 연줄을 가진 망명자 ,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네덜란드를 발전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 그 결과 인구가 프랑스의 10 분의 1 에 불과한 네덜란드가 프랑스보다 “상선대는 9 배 , 해외무역규모는 4 배였고 , 1 인당 GDP 는 프랑스나 영국의 그것보다 2.5 배 높았다 .” 그 후 영국이 네덜란드의 관용주의를 본받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영국의 부강을 부러워한 프랑스가 뒤늦게 종교적 관용주의로 돌아섰다 .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하겠지만 ,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갈등도 수렴과 관용의 과정을 거쳐 화합의 길을 찾는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수출입국 (輸出立國 )을 소리 높여 외치던 1970 년대에 어떤 회사 수출부서의 세일즈맨으로 엄청 큰 샘플가방을 질질 끌며 석유가격 폭등으로 갑자기 부국들이 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 이라크 , 이집트 및 페르시아 만의 여러 토후국들을 1 년에도 몇 차례씩 드나들던 일 , 그리고 ‘70 년대 말에는 쿠웨이트에서 2 년 남짓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일을 자주 떠 올렸다 . 이집트의 사다트 , 이라크의 후세인 (Saddam Hussein), 이란의 팔레비가 건재하여 이슬람 세계에 세속주의가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본업인 비즈니스는 잠시 제쳐두고 이라크와 이집트의 BC 수천 년 전의 고적과 유물들에 정신이 팔려 귀중한 출장시간을 허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특히 바빌론의 아쉬타르 성문 (비록 오리지널은 베를린 박물관에 있다하고 , 모형에 불과했지만 ) 앞에서는 이 문으로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인 포로들이 드나들고, 동방원정 중이던 알랙산더 대왕이 드나들었다니 싶어 오랜 상념과 별난 감회에 젖기도 했다.
’74 년이던가 , 한국무역협회가 주선한 무역사절단 (이름이 사절단이지 무역협회 임원을 단장으로 한 약 20 여명의 각 회사 수출담당자들로 구성된 세일즈맨단 )의 일원으로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뜻밖에도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 내외와 만찬을 함께 하는 ‘호사 ’를 누리기도 했다 . 당시 이집트 –이스라엘 국교정상화 중재 차 이집트를 방문한 키신저 내외가 공교롭게도 우리 사절단이 상품전시회를 열고 있던 나일강변의 쉐라톤 호텔에 묵게 되었고 , 바로 그날 저녁 , 이집트의 파미 외상이 그 호텔 옥탑 연회장에서 개최한 키신저 내외를 위한 환영만찬장에 우리 일행을 초대한 것이다 . 당시 이집트의 외교정책이 친소 (親蘇 )에서 친미 (親美 )로 마악 돌아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 미국의 맹방에서 온 ‘무역사절단 ’을 동석시키는 것이 키신저의 환심을 사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그랬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뜻밖의 초대였다 . 이집트 정부 여러 고관들과 내외 귀빈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아랑곳 않고 유난히 얼굴이 넓적하고 머리가 노랗던 자기 부인의 뒷목덜미를 오른 손으로 주물러주고 안마를 해 주던 키신저의 거리낌 없던 행동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제 4 차 중동전쟁이 끝난 지 아직 1 년도 지나지 않았고 , 몇몇 나라에 불온한 기운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 그래도 세속주의가 풍미하던 그 시절의 그곳 이슬람 국가들은 평화롭고 안정돼 보였다 . 그러던 곳이 갑자기 이란혁명 , 이란 –이라크 전쟁 ,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 미군을 위주로 한 다국적군의 반격 , 9.11 사태 이후 후세인 제거를 위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작전 , 알카에다 , IS 같은 과격 이슬람주의 단체 등장 등 20 세기 말에서 21 세기 초의 일이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사태들이 연거푸 발생했다 . 저자가 이슬람 국가의 역사를 450 년 전의 서구 역사에 비유한 것이 과연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 기독교원리주의가 구가되던 중세를 우리는 암흑시대라고도 부른다 . 이슬람원리주의가 점점 기세를 돋우고 있는 서남아시아 , 중동 및 아프리카의 이슬람국가들이 혹시 ‘암흑시대 ’를 예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끝으로 초벌번역 상태나 다름없던 원고를 정성들여 깔끔하게 정리해 준 한울 엠플러스 편집부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 한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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