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하는 용 베트남" 역자후기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 가까운 듯 먼 듯
베트남의 북부 항구도시인 하이풍이 바다를 방어한다는 의미의 해방 (海防 )이라는, 그리고 하롱베이의 하롱이 하룡 (下龍 )이라는 한자발음에서 나왔다는 걸 알고는 그곳 역시 한자문화권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 수도인 하노이가 하내 (河內 )라는 걸 알았을 때는 화들짝 놀랄 정도로 온갖 정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내 ’는 어릴 때 하루에도 수차례씩 입에 올리거나 머리에 떠 올리는 고향 인근의 마을 이름 (정확히는 경남 창녕군 길곡면 증산리 하내마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을에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가슴이 찡하도록 그리운 큰 고모님이 시집가 사셔서 , ‘하내고모 ’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고 , 또한 그 마을에서 시집온 하내라는 택호를 가진 할머니가 우리 동리에 계셨는데 성질이 걸걸해 동리 사람들과 충돌이 잦고 욕쟁이 할머니로 소문나 있어 동리에서 ‘하내 ’라는 말이 더 자주 회자된 것이다 . 아무튼 송 (Song)강 안쪽에 있는 하노이와 낙동강 안쪽에 있는 고향 인근 마을이 다 같은 ‘하내 ’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하노이가 우리 고향 인근 마을과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것처럼 가깝고 정겹게 느껴졌다 .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와 매우 닮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 이전에 월남의 한국대사관 공사로 재직하다 사이공 함락 때 월맹공산군에게 체포 , 투옥되어 5 년여 억류생활을 한 바 있는 이대용 (李大鎔 )씨는 모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와 문화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다 . 베트남 역사서 첫 몇 장만 펼쳐보아 도 이 말에 수긍이 간다 . 기원전 207 년에 남 베트 (南越 )국을 세운 조타 (趙陀 )라는 인물은 그 행적으로 보아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 (衛滿 )과 빼 닮았고 , 한 (漢 )의 무제 (武帝 )가 이 나라를 정복하여 7 개 군 (郡 )을 설치한 것도 , 같은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하여 한사군 (漢四郡 )을 설치한 것과 너무나 닮았다 . 호동왕자 (好童王子 )와 낙랑공주 (樂浪公主 )를 꼭 닮은 이야기도 나오고 , 당 (唐 )이 남 베트국을 멸망시켜 그 곳에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 )를 둔 것도 고구려 고토에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 )를 둔 것과 닮았다 . 몽골의 침입을 받으면서 민족의식이 높아가 건국신화를 완성하여 설화집 『영남척괴 (嶺南摭怪 )』를 내고 그 뒤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 (大越史記全書 )』를 편찬한 것도 우리의 삼국유사 , 삼국사기 편찬사정과 흡사하다. 중세사와 현대사를 펼쳐보아도 닮은 점은 계속된다 .
하지만 이 유사성은 두 나라 모두 중국과 접경하여 고대로부터 유교를 비롯한 중국문화의 영향에서 온 우연한 지정학적인 결과일 뿐 인종적인 연결고리가 있거나 역사적으로 두 나라가 돈독한 문화적 교류를 한 결과는 아니다 . 그래서 서로 닮은 점이 참 많으면서도 이론적으로 그러려니 하는 것일 뿐 두 나라 국민들 각각이 느끼는 이질감은 동남아 다른 나라와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 베트남 현지에 사는 어떤 한국인의 블로그에서 바로 그런 마음을 적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한국과 베트남 미디어에서는 참 많이 닮은 나라라고 말하지만 현지에서의 느낌은 그렇지 않다며 차라리 문화적 동질감이 전혀 없는 나라에 사는 것보다 괴리감이 클 때가 많다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과 베트남의 유사성은 형해화 (形骸化 )하여 현실세계에서는 별 활용이 되지 못하는 유사성이라고나 해야 할 정도인데 ,이렇게 된 데에는 위에서 말한 인종적 역사적 관계 외에 베트남이 한국이나 일본처럼 자신의 문자를 개발하여 한자를 병용하는 정책을 쓰지 않고 (한자병용정책을 썼다면 우리와 일본과의 사이 정도의 유사성은 가졌을 것으로 본다 )로마자를 사용함으로써 한자문화와 완전 결별한 데서도 일단의 원인이 있는 것도 같고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대척관계에 있고 월남전이라는 역사적 상흔이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
이젠 좀 더 돈독하게
이 책 『비상하는 용 , 베트남 』은 이처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 가까운 듯 먼 듯 ’한 두 나라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좀 긴 서론을 달았다 . 공산주의 정치체제라는 걸 제외하곤 1950 년대에서 1970 년대까지의 한국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의 내용이 한국 독자들에게 동병상련 (同病相憐 )의 마음을 넘어 동기상구 (同氣相求 )의 정신을 갖게 할 수도 있겠다싶어서다 . 1992 년 통일 베트남과의 국교수립 이후 인적 물적 교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 이젠 연간 베트남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85 만 여명 , 한국을 방문하는 베트남인이 14 만 여명에 이르는가 하면 , 한국기업들의 현지투자액이 미구에 400 억 달러를 돌파하고 , 정부의 대외협력기금 (EDCF)이 1 조 6 천억 여원이나 제공된 점을 고려 할 때 , 그리고 근년 들어 한국으로 시집 온 베트남 신부가 5 만을 넘어서고 앞으로도 계속 급격한 증가세가 예상되어 혈연적인 사돈국가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제는 베트남을 전혀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봐야 하는 날이 온 것 같아서다 . 또 하나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이 갖는 중요성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북한을 반추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 같은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1 인 독재체제인 북한이 베트남과 같은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할 경우의 여러 상황들을 이 책을 통해 유추해 볼 수도 있다 .
BBC 하노이 특파원으로 활동하다 당국의 비위를 거슬려 추방당하기도 했던 저자 빌 헤이튼은 언론인다운 차분하고 냉철한 눈으로 베트남을 통찰한다 . 이 책은 베트남에 대한 여행기도 , 연구서도 , 역사서도 아니고 , 한 예리한 기자가 베트남을 거대한 취재원으로 삼아 종합적으로 취재한 특종기사 모음집이라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 같다 . 우선 기자다운 간결하고 매끄러운 필치가 책을 술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해 주며 , 사람들이 베트남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이나 주제들을 잘도 집어내 펼쳐 보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흥미로운 진단을 내린다 . 예컨대 베트남의 국제관계를 진단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기억의 억제가 특징이고 중국과의 관계는 기억의 날조가 특징이라면 , 제 3 국들과의 관계는 기억의 회복이 특징일 것이다 .”라는 표현으로 요약하는 식이다 .
베트남 사람들은 마음을 잘 열지 않아 그들의 진의를 오해하거나 사태의 올바른 흐름을 잘 못 짚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점을 지적한다 .
베트남은 그들의 비밀을 잘 지켜가고 있다 . 장기체류 외국인들도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베트남 친구들이 부지런히 아주 분명한 설명을 해 줄 때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며 천천히 사태를 인식하게 된다 . 여러 번 나는 뉴스보도를 끝내고 획기적인 보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 사실은 자주 BBC 베트남 사무소의 현지인 친구나 동료가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 대한 몇몇 중요한 본질을 지적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태진전을 ‘실제로 ’ 이해할 수 있었다 . 여러 번 나는 이면에서 거대한 조류가 흐르고 있는데 표면의 잔물결만 평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이면의 조류를 평가하기 위한 시도이다 .
저자의 이러한 고백은 이 책이 베트남의 올바른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그리고 또한 지금까지 나온 베트남에 관해 쓴 많은 평가서들 중 일부 내용에는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아무튼 이런 점은 국가나 개인을 불문하고 베트남인들과의 접촉에서 특히 유의해야할 사항일 수 있겠다 .\
저자는 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에 대해선 매우 비판적이다 .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길은 물론 관리민주주의 길로도 가지 않으려 하고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공산주의체제를 고수하려한다는 것이다 . 베트남은 번영에 성공할 구성요소는 이미 갖춰져 있으며 , 그 중 일부는 젊은 인구 , 높은 교육수준 , 대규모 외국인 투자 등인데 이 나라가 번영할지 쇠퇴할지는 주로 공산당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 저자는 만약 공산당이 계속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한다면 , 그들의 몰락을 재촉할 큰 변혁이 올 수도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기도 한다 . 즉 , 베트남 독립 이후 공산당은 광범위한 감시와 동원 가능한 망상조직을 통해 통제력을 유지해왔지만 ,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며 , 임금상승이 전지적 (全知的 ) 보안감시시스템의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할 것이고 독자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시민들에게 감시와 밀고의 의무를 묵살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필연적이다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공산당 지도부에 은근히 겁을 준다 .(2014 년 6 월 28 일 , 60 여명의 베트남 공산당 원로들이 당 중앙위원회에 공개서한을 보내 사회주의 포기와 중국에 대한 의존 탈피를 요구했다는 외신보도를 보면 , 베트남의 정치적 장래가 다른 공산국가들보다는 훨씬 밝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옮긴이 )
이 책에 나오는 외국인들 이야기 가운데는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 우선 초대형 국영기업들이 한국의 재벌들을 벤치마킹해 왔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삼성의 7 억 달러짜리 휴대전화공장 이야기도 하고 있고 , 젊은이들이 한국 10 대들을 본뜬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이야기와 하롱베이 관광을 즐기는 한국인 관광객 이야기도 한다 . 한국인 소유의 일부 공장들이 몰래 폐수를 버리다 벌금을 낸 이야기도 나오고 , “주로 한국인들이 탑승한 33 대의 관광버스 ”가 곰 사육 농장에 들어가 살아있는 곰으로부터 추출한 웅담을 사 먹는다는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도 하고 있다 . 앞으로 이 책을 읽고 베트남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을 부러워하고 본받으려는 베트남인들에게 절대로 경멸받는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
끝으로 이 책의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조인순님은 미흡한 표현들을 바로잡아 번역서의 격을 높여주셨고 , 주식회사 한국파크의 기획담당 박범준 이사님은 베트남어 고유명사를 한국어로 표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 로마자 표기로 된 베트남어 고유명사의 발음이 하도 까다로워 , 이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 별첨 “나는 왜 베트남에 투자했나 ”라는 글은 베트남정부가 1986 년 도이모이 정책을 펴며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자 곧 그곳에 진출하여 30 년 가까이 현지에서 사업을 크게 벌이고 계신 (주 )한국파크 박찬용 대표님의 글이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기업들의 베트남 투자액이 곧 400 억 달러를 돌파하는 시기에 현지투자의 경험담은 현지의 투자환경이나 노동력 등에 관심을 가진 일부 독자들에게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
2015 년 10 월 28 일
별첨
나는 왜 베트남에 투자했나
나는 70 년대부터 무역업계에 투신했으며 80 년대에 봉제품 제조 수출에 직접 뛰어들었다 . 80 년대는 국내에서 민주화를 위한 열기가 분출되어 정치적 혼란기였지만 제조업과 수출은 호황기를 맞이하였다 . 이른바 3 저 현상으로 경제가 고성장을 지속했다 .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7 년 1,000 달러에 달했고 1987 년에는 3,200 달러에 달했다 . 따라서 한국은 중산층의 폭이 확대되고 있었다 .
고속 성장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 당시 한국은 노사분규의 소용돌이 속에 국내 거의 모든 제조업이 홍역을 앓고 있었다 . 80 년대 중반 이후 임금이 매년 10%이상 상승했는데 이는 노동 생산성 증가를 훨씬 상회한 것이었다 . 내가 전념하고 있는 봉제 수출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
급기야 봉제품의 원가에서 차지하는 노임 비율이 25%를 넘어 30%에 육박하게 되었다 . 그때 나는 노임이 원가의 30%가 넘으면 한계산업화 하여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할 것으로 판단했다 . 그래서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해외 생산기지를 찾기 시작했다 .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 서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 주로 봉제공장을 실제로 살펴보면서 생산성과 품질을 면밀히 검토했다 . 당시 한국의 많은 봉제업체들은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
하지만 나는 중국보다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 . 왜냐하면 중국은 이미 연안을 중심으로 소득 수준이 상당히 올라 봉제업에 매달리기에는 생산 적지가 아닌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마침 베트남 정부는 1986 년 12 월 낙후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Doi Moi 정책 (혁신과 개방 )을 발표했다 . 이 정책은 공산 체제 하에서 농민들이 초과 생산한 쌀을 시장에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 말하자면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겠다는 것으로 외국인 투자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던 것이다 .
내가 처음 베트남에 진출한 80 년대 말에는 그야말로 수출용 봉제공장을 짓고 근로자를 모집하여 훈련시켜 선진국 시장용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 전력공급 등 인프라기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맨땅에 헤딩하는 식 ”이었지만 ,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한 공무원과 근로자 개개인들의 품성이었다 .
사실 , 나는 베트남 봉제공장에서 작업자가 작업이 끝나면 그때마다 매번 스스로 검사를 한 후 다음 작업물을 시작하는 각개인의 책임의식에 매료되었다 . 물론 각 생산 라인에는 검사반이 있어 별도의 검사를 한다 . 한국에서는 개인성과를 더 중시하여 검사는 검사반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훨씬 많이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이나 상당히 많은 불량품이 발생해서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 더구나 세계 유명 브랜드 상품을 주로 생산 공급하는 나의 경우 , 불량품 발생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
지금까지 30 여년동안 베트남 현지에서 제조업을 하면서 겪은 베트남 근로자들을 통해서 볼 때 온순한 국민성 , 섬세한 손재주 , 지시사항을 가감 없이 수행하는 수동적인 작업 태도가 봉제업에는 최선이라는 판단이 섰다 . 물론 당시의 근로자 급여는 기타 경쟁국에 비해 가장 낮은 선이었다 .
1989 년 제 1 공장을 소규모로 시작했다 . 개업 후 3 개월이 지나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 고무적이었다 . 노임의 원가 비중은 6% 선이었다 .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섰고 자금이 뒷받침되는 대로 확장을 서둘렀다 . 시작 후 1 년간 가장 큰 애로사항은 언어 소통 문제였다 . 관리 책임자 한명이 영어로 통하는 거 이외에는 현지어 통역을 두지 않았다 . 한국에서 파견된 생산관리자들의 현지어 습득은 무척 빨랐다 . 얼마 가지 않아 공장용 언어가 습득되고 아울러 현지인과의 공고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 돌이켜 보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입은 적지 않은 손해 보다는 인간관계 형성이라는 더 큰 자산을 얻게 된 것이다 .
베트남 전쟁 중 만들어진 도로 , 항만 덕분에 자재와 완제품 운송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 더욱이 항구가 사이공 강을 따라 여러 곳 있어서 홍콩을 오가는 화물선의 운송을 용이하게 해줬다 . 베트남이 시장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본격화함에 따라 각종 인허가 , 수출입제도도 무척 간편화 되어 초기에 해외투자 업체들이 당면한 애로사항을 덜어 주었다 .
한편 , 세관의 감시는 엄격했다 . 원자재가 면세 통관되기 때문에 국내시장으로의 불법유출을 철저히 통제한 것이다 . 수출용 봉제품을 생산하다보면 바이어의 긴급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급할 땐 때로 편법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 결국 현지 법규를 철저히 준수하기로 결심했다 . 모든 서류를 완벽히 하여 내용과 서류가 항상 일치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경주했다 . 그 결과 1 년 후 우수 업체로 선정되어 수출입 검사 면제 업체로 지정받기도 했다 .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항상 정도를 걸어야 모든 일이 편리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베트남에서도 실감했다 .
회사조직의 현지화는 빨리하면 할수록 발전이 그만큼 빨라진다고 생각한다 . 현지인을 책임자급으로 기용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 결국 회사 업무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어 조직의 힘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 그렇게 되면 모든 직원이 운영자 (operator)일 뿐이다 . 회사가 잘 돌아가게 하려면 충성심이 있는 현지인 운영자를 지속적으로 길러내야 한다 . 사실 , 베트남에서는 경제가 장족의 발전을 지속하고 있지만 아직 까지도 필요한 책임자급 전문 인력을 구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실정이다 .
실례로 3 년 전 신설공장을 가동했는데 현지에서 마땅한 기술 인력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어 필요한 기술자 대부분을 중국에서 중국인 기술자를 구해 와야 했다 .
제조업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는 무엇보다 노사 분규라고 생각한다 . 나의 경험에 비추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베트남에서는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 노사 문제가 한국에서와 같이 과격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분규가 조용한 가운데 발생한다 . 구타 , 파괴와 같은 극단적인 행위는 극히 드물다 . 대부분의 분규는 급여문제에서 발생하는데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따르면 큰 문제없이 해결된다 .
요즈음 베트남 내 공장들이 생산하는 의류와 봉제품을 살펴보면 각종 고급 브랜드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다 . 어떤 브랜드는 해외생산 본부를 아예 베트남으로 옮겨 운영하고 있다 . 고급품 위주로 생산하고 있는 우리 회사 제품의 경우 베트남에서도 모든 비용이 오르고 원가에서 차지하는 노임비중이 20%선에 육박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딱히 임금이 저렴하고 양질의 노동력이 공급되는 대체 생산국이 보이지 않는다 . 2013 년 말 현재 베트남의 1 인당 GDP 는 4,000 달러에 달하여 소득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
하지만 전체 인구 9 천 300 만 명 중 40 세 이하가 69%를 차지하여 노령화 문제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노동력이 5 천 2 백만 명에 달하고 있다 . 이런 노동력을 보고 해외 투자자들이 몰려오고 있다 . 더구나 동남아에서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베트남 인력은 나의 경험을 통해 보아도 그렇지만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현재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TPP (Trans Pacific Partnership)의 일원이기도 한 베트남은 앞으로 상당기간 봉제업이 번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
2015 2 월
(주 )한국파크 대표 박 찬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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