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우리 집의 "흰 白字 동백꽃" - 겨울 내내 꽃을 피우는 기이한 나무

이강기 2015. 9. 9. 11:12

우리 집의 "白字 동백꽃" - 겨울 내내 꽃을 피우는 기이한 나무

 

동백꽃의 한자는 冬柏꽃이다. 그런데 이 측백나무 자 대신 흰 자를 쓴 冬白꽃이 우리 집에 한 그루 있다. 물론 사전에는 없는 꽃나무 이름이다. 누가 겨울에 우리 집에 와서 이 꽃나무를 보고 ", 나무는 분명 冬柏나문데 꽃은 冬柏이 아니네!" 하면 "그건 흰 자 동백꽃이지" 하고 설명해 준다.

 

 

봄에서 여름, 가을까지는 영판 冬柏나무다. 나무 둥치나 가지가 매끈하고 약간 흰빛을 띄는 것도 그렇고, 반질반질한 계란형 검푸른 잎에 가장자리에 톱니가 나 있는 것도 그렇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冬柏나무 잎보다 약간 덜 억샌 게 차이라면 차일까.

 

 

그런데 겨울이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진짜 冬柏나무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봄에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집 冬白나무는 밤 기온이 영상 5도 이하로 내려가는 초겨울(10월 말 - 11월초)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이듬해 이른봄(2월초순)까지 계속한다. 꽃도 冬柏꽃과는 전혀 딴 판이다. 요즘은 冬柏꽃도 개량종이 많이 나와 꽃 색상도 다양해지고 장미나 다리아처럼 복합꽃잎으로 된 꽃들도 있지만, 순종 冬柏꽃은 종 모양을 한 단엽 붉은 꽃잎이 주종을 이루고 꽃잎이 튼튼해 낙화가 되어도 그 형체를 좀처럼 잃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 冬白꽃은 하얗디하얀 색깔(이런 순백색의 꽃은 생전 처음 본다)에 장미처럼 꽃잎이 수도 없이 많다. 개화할 땐 장미꽃 형체를 닮았다. 꽃의 크기도 거름이 좋을 땐 큰 장미꽃 만 하다. 그러나 일단 다 피고 나면 꽃잎이 연약해서 꽃잎 제각각이 약간씩 구부러져 장미꽃 형체가 없어지고, 나중엔 개개의 꽃잎으로 낙화한다. 늦여름에 맺어진 수도 없이 많은 꽃망울이 겨울 내내 쉬엄쉬엄 꽃을 피운다. 꽃향기는 고약하다. DDT 냄새 같은 향기를 뿜는다. 처음 이 꽃에 코를 갖다 댔다가 질겁을 했다. 겨울에 순백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서 이런 고약한 냄새를 풍기다니, 식물도 인간처럼 다 갖추고 살기는 어려운가 보다 싶었다.

 

 

冬白꽃나무는 누굴 시켜 멀리 마산서 나무 몇 그루를 사왔는데 거기에 끼어 온 것이다. 처음엔, 서울지방 기후에서는 옥외에 둘 수 없다는 冬柏나문줄 알고 "이런 걸 무엇 하려 사 왔나"고 투덜대며 얼어죽든지 말든지 괘념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마당가에 심어 놓았다. 그 해 11월 초순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창 너머로 정원을 바라보다가 그만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장미꽃 크기 만한 순백의 꽃이 수십 송이 하얗게 피어 을씨년스런 겨울정원을 화사하게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冬柏꽃나무치고는 유달리 꽃망울이 많이 매달린다싶긴 했지만, 원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순백의 꽃을 피울 줄이야. 그 때부터 이 꽃나무는 우리 집 보물 1호가 되었다. 구경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나무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冬柏나무 번종"일 거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초겨울부터 이듬해 이른봄까지 내내 꽃을 피우는 冬柏이 있다는 소릴 못 들어 봤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싶었다. 冬柏번종이라면 우리 집 보물 1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나무이름을 지어버리자. 처음엔 동절화(冬節花)가 어떨 까도 싶었지만 그건 보통명사고........우여곡절 끝에 "冬白"이란 괴상한 이름이 되었다.

 

 

(추기: "冬白"나무는 영상 5도 이하가 되면 꽃이 피고 영하 3도 이하의 날씨가 계속되면 얼기 시작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어 결국 지하실 남향창문 앞 작은 꽃밭으로 이사를 시켰다가 IMF때 우리와 함께 변두리 아파트로 쫓겨와 지금은 아파트 베란다의 대형 화분 속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아무래도 거름이 시원찮아 정원에 있을 때만큼 크고 많은 꽃을 피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해마다 겨울 내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지금도 하얀 꽃 대여섯 송이가 달려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없는 게 정말 유감이다.)

 

(200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