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육, 세계사 교육
(2002년 5월14일)
최근 중고교의 세계사 교육을 경시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한 비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사와 세계사 교육의 불균형 때문에 아이들의 세계관 확립에 문제가 많을 것으로 보고 있는 터에, 중고교 시절에 세계사 한번 들쳐 보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지식의 불균형이 정말 심각한 상태가 될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분리할 게 아니라 같은 책에 묶어 필수과목으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꽤 오래 전 경험이지만, 유럽 어떤 나라의 초등학교 3학년 시험 답안지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우선 문제 제목부터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짜리 한 테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해 써라"였다. 그 얼마 전에는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 써라"는 시험이 있었다.(이 나라에서는 OX나 4지선다형 시험문제 같은 것은 구경하려해도 없다). 답안은 더욱 가관이었다. 산업혁명의 발생원인, 경과 및 그 영향을 어린이다운 안목으로 쓰고는, 마지막으로 "이로 인하여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생겨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당시 그 나라에선 공산당이 정권을 넘볼 정도로 강했고 학교교육도 꽤 좌경화 돼 있었다). 아무튼, 서구의 문화수준이 높다는 게 헛말이 아니었구나 싶어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단테는 그렇다 치고(우리 나라로 말하면 아마도 "이퇴계에 대해 써라"와 같을 것이다), 아직 영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제대로 모를 아이들한테 산업혁명에 대한 시험문제를 내는 수준이 놀라웠던 것이다.
세계사는 책장도 한번 넘겨보지 않고 한국사 공부만 한 아이들은 장차 어떤 세계관을 가지게 될까?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도 세계를 제대로 알고 난 연후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 밖에 안 될 것이다. 고조선이 4천 300여년 전에 건국됐다고 하니까 우리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수준의 고대문명을 가진 것으로 착각할 지도 모르겠고, 고려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백 수 십 년이 앞선다 하니까 오늘날의 인쇄문화가 오로지 고려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니까 세계에서 철선(鐵船)을 최초로 만든 것으로 착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더 큰 문제는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구별 못하는 일일 것이다. 지역문화가 설사 아무리 찬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성을 잃어 세계 문화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못했다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고, 때로는 보편성의 시각에서 그로테스크해 보이기까지 하는 법이다. 마야나 잉카 문명이 그 자체로는 찬란했지만, 오늘 날 세계인의 눈에는 기괴하게 비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계사를 배우지 않는 우리 아이들이 세계인들의 눈에 기괴하게 비치는 시각을 가질까봐 적이 걱정된다.
만약 그들이 훗날 정치 지도자라도 된다면, 奇行을 해가며 서구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적대감을 보이던 옛날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오늘날의 북한 위정자 같이 세계가 비웃는 괴상한 정치를 하려 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남한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니까 부랴부랴 수억 달러를 들여 어마어마한 경기장을 지어 세계청년축전인가를 어거지로 열더니, 또 남한에서 월드컵 경기를 한다니까 백성들은 양식이 떨어져 굶느니 죽느니 하는 판에 문제의 그 경기장에서 십만 명이 출연한다는 아리랑축전인가를 벌리는 일이 세계인들의 눈에선 어이없다 못해 코미디처럼 비치는 것이다. 만약 그가 학교시절에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여 세계의 흐름을 보는 안목을 제대로 갖췄다면 절대로 이런 정신나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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