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학자가 본 한국 역대정권(조선왕조 포함)의 인사정책
(2001년 5월30일 - 에머지)
이 글은, 작년 2월경
이장춘 외교통상부 대사(당시)가 역대 한국정부의 외교관 인사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 모 일간지에 게재돼 큰 파문이 일어났을 때, 에머지에
올린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송문홍 동아일보기자가 신동아 2000년 3월호에 쓴 <[인물연구] 외교부 인사난맥상 폭로파문과 이장춘
대사>라는 글에 이 글의 일부를 인용한 바 있다. 임명된 지 43시간만에 물러난 모 장관 일 때문에 시끌벅적한 정치판을 보노라니 한국의
고질적인 인사정책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싶어 그 때 그 글을 약간 손본 후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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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일간지에 실린 이장춘대사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일부 고약한
전통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구나 싶어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 문제는 물론 현 정권의 책임만도, 앞 정권 내지 그 앞 정권의 책임만도
아니며, 수 백 년간 연연히 내려오는 우리 나라 관료사회의 적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건국 후 어느 통치자도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려하지 않고
계속 답습하려는데 있다. 오히려 현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정권교체라는 대변화와 맞물려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된 느낌이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란 책을 보면, 조선왕조기간 중 가장 효율적이었던 세종대왕의 통치기간(이 때 황희는 약
23년간을 정승직에 있었다)을 빼고는 참으로 가관이다 싶을 정도로 보직이동이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한성판윤은 조선왕조 518년 동안 1,375번이 바뀌었는데, 평균 약 130일에 새로운 시장이 태어난 셈이다. 헨더슨은
이것을 두고 어떤 문화권에서도 그 유례가 없을 것이며 세계기록이 될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좀 길지만 조선시대의 다른 관직들의
이동에 대한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태조는 대사간(大司諫)을 1년에 1.7번 바꿨으며, 그의
아들(태종)은 그 자리를 평균 1년에 3번 바꿨다. 그리고 1400년부터 1406년까지는 대사간이 평균 60일마다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계산도
있다. 이러한 교체비율은 그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7대 왕(세조) 때는 평균 연간 3.6명, 9대(성종) 때는 2.5명 그리고
10대(연산군) 때는 4.2명, 11대(중종)의 처음 12년 동안에는 6.6명, 그리고 그 이후에는 수십 년 동안 평균 4.7명을 기록했다.
1571-74년의 단기간 동안에는 평균 거의 매달 새로운 대사간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열띤 속도는 그때까지 2백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완만해지지 않았다. 대원군은 분명히 대간의 불만과 권력을 억누르기 위해 대사간을 1864년 1월 3일부터 1873년 12월 16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183번이나 교체하였는데, 이는 약 10년 동안 평균 20일에 한 사람 꼴로 갈아치운 셈이다. 1860년대 초 같은 기간에 대간의 또
다른 주요 관리인 대사헌(大司憲)은 193번 교체되었다. 이 기간 내내 보다 젊은 감찰관들의 임기도 적지 않게 짧아, 10일 동안 장령(掌領),
그 후 3개월 동안 군수, 그런 다음 15주간 승정원 승지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조선관리들의 경력을 보면, 약 30년간의 관직기간 중
100회 또는 그 이상 보직을 바꿨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간 동안 잠정은퇴 내지 상복을 입는 기간과 기타 일시적으로 임기를 중단하는 경우가
있다. 유명한 율곡은 대사간을 두 번 했는데 매번 수일간 했다. 그는 호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수개월, 형조판서를 수주간 역임하고 그런 다음
병조판서를 하였는데 곧 사임할 때까지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감찰기관에 있는 관리들이 통상 2-3년간
같은 자리에서 근무하고 때로는 대간의 기능이 전문직에 접근하였다. 같은 시대 수십 년 동안 해협너머 일본에서는 마츠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가
대장성 장관을 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내무장관을 4년 그리고 총리를 3년 반 역임하였고,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毅)가 각각 9년 동안 육군장관을 했다. 당시 조선의 관리 중 중요한 인사인 박제순(朴齊純)은 1883년 공직에 발을 들여놓고
27년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54개자리를 옮겨다녔다. 그 중에서도 그는 11일 동안 궁내부고문, 2 주 동안 동 부 협판(協辦),
한성좌윤(漢城左尹) 2개월, 의전, 공공사업, 국세부문 부서의 협판을 1개월씩. 그리고 전라도 감사 1개월, 충청도 감사 4개월, 농상공부
대신을 5일 동안 맡았다. 그는 외부대신을 세 번 역임했는데 두 번은 각각 한 달씩 했다. 또 그는 한 달 동안 주 필리핀 대사를
역임했으며(이는 당시 느린 배로 필리핀까지 가는 기간이다!) 2개월 동안 참정대신을 지냈다. 그는 전문화의 증거로 2개월 동안 중장(中將)으로도
임명되었다. 그가 역임한 자리는 당시 조선이 거의 연속적으로 위기와 위험에 처한 때에 중요한 임무를 가진 중요한 행정 포스트였다. 그때 두 번의
전쟁과 국내에서 대 반란이 일어났으며 근대화의 초기가 시작된 시기였던 것이다."
헨더슨씨는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이러한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승만은 취임 후 6개월 이내에 장관의 거의 절반을 갈아치웠고, 집권 12년 동안 매년
10명 이상의 장관을 바꿨다. 장면정권도 초기 4개월 동안에 매월 내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으며 8개월 동안에 총 28명의 장관을 새로 뽑았다.
군사정권도 후반기 일부를 제외하곤 예외일 수가 없었다.
헨더슨씨는 이러한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를 다음 몇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는 조선사회가 관료중심사회였으며, 중간매개조직(이를테면 유럽 중세봉건사회의 교회조직이나 길드 같은)이 없기 때문에 개인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중앙을 향해 소용돌이를 치며 몰려들고 있는데 비해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관직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전문가(specialist)들을 천시하고 만능가(generalist)들을 선호하는 사회풍조에 있다는 것이다. 일정한 수준의 지식만 쌓으면 어느
직책을 맡아도 무방할 정도로 사회가 전문화되지 못했으며, 역으로 그러한 의식이 사회의 전문화를 가로막았기 때문에 통치자가 사람을 바꾸는데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관료들이 어떤 기득권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역대 통치자들이 두려워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속 사람을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대원군이 감찰직이나 어사직을 계속 새 사람으로 교체한 것이나 이승만이 장관을 자주 바꾼 것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장춘대사는 외교부의 경우만 얘기했지만, 오늘날 정부의 모든 부서는 물론 국영, 민간 할 것 없이 모든
기업들에서도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비슷한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사람을 한 자리에 오래 두면 매너리즘에 빠지던가 부패하던가
한다면서 자주 로테이션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전문가들을 천시하는 의식은 사라졌지만 한 자리에 오래 두어 전문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부족한 것은 조선시대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국제회의 때마다 대표가 바뀌어 우스개 깜이 되고 있다는 이 대사의 말에 한 가닥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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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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