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보"를 외치며 설쳐대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글
(2000년 7월2일 - 에머지)
저는 그저 평범한 서민이오이다.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주로 할인매장 이용하지만 헐벗지 않고, 변두리 후미진 곳이지만 32평 짜리 자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말하자면 의식주로 큰 고통받지 않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중하층민이오이다. 저를 공부시키느라 허리가 휘도록 고생하신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으려 일찌감치 직장인이 되어 가정꾸리기에 정신을 쏟다보니 어느새 세월은 가고 신문이나 방송에 이름 내는 일 한번 못하고 사는 이름 없는 사람되고 말았더이다. 젊어서 야망 한번 안 가져 본 사람 어디 있겠더이까 만 살다보니 인생사 마음먹은 대로되지 않더이다. 그 우라질 아이엠에프 때문에 하루아침에 서울특별시 서초동민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지만 누구들처럼 걸핏하면 잘 못 된 것 모조리 와이에스 탓으로 돌린 적도 없나이다. 모든 게 내 탓이지 어찌 남 탓이오이까. 이런 사정이니, 저는 보수니 진보니 하며 게거품을 물고 서로 씹어대는 그런 곳하고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며 당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곧잘 덮어씌우는 "극우"나 "수구보수" 혹은 "수구 기득권" 층하고는 천리만리나 먼 사람이오이다.
오래 전부터 느껴오던 터이지만, 이 땅의 일부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색깔도 가지가지 주장도 가지가지여서 종잡기가 좀처럼 힘들고 또 뭔지 이기적이고 정치적이기도 하여 순수해 보이지도 않더이다. 저가 "진보주의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 달리 적당한 명칭이 없어 사용한 것일 뿐이오이다. 진보주의란 "사회의 모순을 변혁하려는 전진적 사상"으로 알고 있는데 이 어의에 합당한 진보주의자들이 이 땅에 과연 몇이나 될지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이다. 진보주의자들이라는 말 앞에 "소위..."라는 관형사를 부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오이다. 본래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들은 서양 것을 일본인들이 번역하여 우리들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사 당신들을 순수하게 평가한다 하더라도 영문용어로 리버럴리스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쇼설리스틱하거나 쇼설 디모크레틱하고, 랩티스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리버럴하고, 아무튼 요령부득하기 짝이 없더이다. 하기야 이코노미스트지 97년 1월 28일자(월간 Emerge 새천년 99년 9월호 게재)를 보니까 미국과 유럽에서도 리버럴리스트와 쇼셜리스트 혹은 쇼설 디모크래트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아 헷갈리긴 하더이다만, 저 생각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좌로 좀 더 기울어져 있지 않나 싶더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당신들은 좀 개혁적인 지식인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해왔으며, 그저 중구난방으로 메아리 없는 함성만 질러대는 "별종" 취급을 받아왔던 게 아닌가 싶더이다. 하기야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당신들 중 일부는 마치 월매가 어사도 이도령을 만난 듯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다"고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긴 하더이다만 다수가 보는 차가운 눈길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더이다.
저가 뭐 전문적으로 당신들에 대해서 연구를 해 볼만한 실력도 자격도 없기에 체계적, 논리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겠고 그저 평소에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개 머루 먹듯이 몇 가지만 골라 보겠나이다. 7, 80년대 개발독재시절에 당신들 중 일부에서는 소위 종속경제론이란 저 라틴 아메리카에서 빌어 온 이상한 이론을 들이밀며 외국자본 들어오는 것을 마치 식민지를 만들려 제국주의 군대나 쳐들어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이다.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이름 아래 씨도 먹히지 않은 이 이론으로 진보성향의 언론매체들에 도배를 해대는데, 누가 그런 게 아니라고 조용하게 반론이라도 제기할라치면 그 말에 흙이라도 묻을새라 "극우", "수구보수" 운운하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감히 두 번 다시 말을 못 붙이게 하더이다. 경제전공을 하지 않아 그 방면에 문외한인 저가 듣기에도 도무지 수긍이 안 되는 얘기 같더이다만, 그 사람들이 워낙 거세게 눈을 치켜 뜨고 강하게 나오니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결국 달보고 개 짖는 것 같은 우스운 꼴이 되더이다. 세월이 흘러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이젠 오히려 외국자본 끌어들이고 외국사람에게 은행이나 기업 매각하는 것을 무슨 장원급제나 하는 것처럼 우쭐대는 세상으로 변하더이다만, 이 또한 보기가 민망하긴 매 한가지더이다. 참 세상사 우습지 않나이까? 당신들 편에 좀 더 가까워 보이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자 오히려 외국자본 노래를 더 높이 부르고 있으니 말이오이다.
꿩 아니면 닭이라고 그런 대로 당신들 입맛에 맞는 정권 들어서고 난 후 당신들 중 일부에서 기고만장해 하는 꼴이란 차마 두 눈뜨고는 못 보겠더이다. 며느리 궁둥이 흔드는 꼴 보기 싫어 액막이 굿 안 하기로 작정한 시어머니 심사인지는 모르겠더이다만, 꽤 많은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현 정부를 지지하고싶어도 당신들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돌아서는 일이 많은 줄 알고 있나이다. 당신들 중 몇몇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계 신문 죽이는 일에 아예 전업을 한 모양이더이다만, 이상한 일은 새 정부 들어서고 난 후 그들의 눈에 핏발이 더 서고 입이 더 험해졌다는 점이외다. 이젠 외고 펴고 대목장이며 겁날 것이 없다는 뜻이오이까, 아니면 지금까지 당해왔다고 당신들 마음대로 가정을 해 놓고 그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오이까? 어떤 거창한 이름의 무크지에 도배질을 해대는 한 언론전공 교수는 그 특유의 도전적인 문체로, 때로는 자문자답식으로, 또 때로는 상대방의 마음속까지 제 멋대로 읽어가며 신문이고 사람이고 자기 맘에 들지 않은 것들을 종횡무진으로 베고 찍고 후려치는 게 조자룡이 헌 칼 쓰듯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것 같더이다. 그런데도 이 양반의 글을 몇 개만 읽어보면 그 단조로움에 당장 던져버리고 싶은 맘이 굴뚝같이 드는 것은 웬 일이오이까. 허구한날 조선일보(때로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곁들여)와 조선일보 필진들 물고 늘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다 묘하게 호남지역주의까지 가미하고 있으니 첫 머리 몇 줄만 읽어보면 아 또 그 소리! 하는 탄식이 어찌 안 나올 수 있겠더이까? 전공이 언론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학교수가 오죽이나 할 일이 없으면 일개 신문 죽이는 일에 신명을 바치다시피 하고 있다니 그간 쌓아온 학문이 아깝지도 않은지 모르겠더이다. 김수환추기경이 지나가는 말로 조선일보에 덕담 몇 마디 했다고 그걸 트집을 잡지 않나, 같은 진보계열 지식인들이라도 일단 조선일보에 글만 썼다하면 당장 죽일 놈 살릴 놈하며 배신자취급을 하지 않나, 심지어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독자들마저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을 하지 않나 정말 살벌하기 그지없더이다. 젊잖게 조용히 있는 사람들을 - 주로 좀 이름난 사람들만 골라 - 공연히 건드려 트집을 잡고 이슈를 만드는 양이 어쩌면 이 사람이 유명해질 요량으로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솔직히 들더이다.
더욱이 요즘 들어서는, 본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은근히 정부 피아르하는데 열심인 어떤 신문의 간부와,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한다는 어떤 "택시 운전수"까지 나서고 또 무슨 괴상한 이름의 인터넷 사이버 마당까지 생겨, 예의 그 교수와 비슷한 논리와 문체로 조선일보 죽이기에 정신들이 없더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지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극우"니 "수구보수"니 하는 소리도 이젠 정말 신물이 나나이다. 아, 참 사이버 파들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더이다. 이들도 문제의 그 "신문파"나 "잡지파"와 마찬가지로 "극우"와 "수구보수" 씹는 것을 업으로 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레토릭에 불과하고 사실은 디제이나 "국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는 것에 주목적이 있는 것 같더이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 비판한다고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칭찬하면 무슨 다른 뜻이 있어 그러는 거라며 궁시렁거리고 있는 것이 이들 후자들의 특징이더이다.
이제 보수언론 얘기는 그만하고 남북문제 얘기로 옮겨볼까 하오이다. 우리 나라 진보주의자들 중 특히 앞서가는 사람들 치고 북한 비난하는 소리 아직 한번도 듣지 못했나이다. 남한의 인권문제라면 서슬이 시퍼렇게 설치던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문제엔 한결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이다. 그걸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우리들은 군사정권시절에 웬만했었나 하며 되받고, 우리하고 그들하고 인권의 차원이 다르지 않나 하고 반문하면, 우선 우리부터 철저히 하고 난 후 남을 탓해야 할게 아니냐며 이 땐 또 유달리 겸양의 미덕을 보이더이다. 참으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도 이들의 궤변은 당할 수 없을 것 같더이다. 프랑스의 어떤 인권단체가 북한의 인권상황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 바로 파리에 살며 프랑스 좌파지성들의 동정을 무성영화 변사처럼 잘도 국내신문을 통해 전달해 주던 한 "망명 논객"은 그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들먹이지 않더이다. 만약 그 단체가 남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라도 했다면 절대로 그 "호재"를 놓치지 않을 인사인데 말이오이다. 북한 인민들 200만이 굶어죽었네 300만이 굶어죽었네 해도 동포애로서 그들을 도우자는 소리만 요란할 뿐 그런 천추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해야 마땅할 북한 정권 담당자들에겐 지나가는 말로도 책망 한마디 안 하더이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동구공산권이 무너지고 몇 년간 천재지변을 당해 불가피했다고 하더이다. 가령 남한에 기근이 일어나 몇 백 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태산이 무너진 양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오이다.
평양에서의 그 극적인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친정부 언론에서 소위 분위기 조성에 정신이 없어 보이더이다. 어떤 신문 논설위원의 칼럼에는, 한강의 기적과 천리마 운동 모두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한강의 기적이 라인강의 기적을 능가하고 천리마 업적이 중국의 대 약진 운동보다 월등히 성공적"이었다고 하더이다. 한강의 기적이 라인강의 기적을 능가했다는 그 분의 주장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더이다만, 엉뚱하게 천리마 운동과 중국의 대 약진 운동을 끌어들이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더이다. 천리마 운동이 그렇게도 성공적이었는데 왜 북한 경제가 저 모양으로 지리멸렬되어 수백만이 굶어죽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국제 거지가 되다시피 했는지 생각이나 해보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더이다. 또, 어디에 빗댈 데가 없어 3천만의 인민들을 굶어죽게 해 역사상 스탈린의 집단농장운동과 함께 가장 처참한 비극의 경제정책이었다는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에다 비교를 하오이까?
또 그 신문의 어떤 간부의 칼럼은, "2000년 노벨 평화상, 김대중 그리고 김정일" 이라는 희소식을 오는 세밑에 듣길 기원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아, 김정일에 노벨상이라! 노벨 평화상이 길가는 사람한테 광고쪽지 나눠주듯 아무한테나 주어버리는, 그리고 받는 사람도 곧장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 그런 휴지조각 같은 상인지는 모르오이다만 지하에 있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배꼽을 잡고 웃겠더이다. 베긴과 사다트, 키신저와 레독토가 중동과 월남의 평화 달성의 공으로 공동수상 한 것을 떠올리고 하는 소리 같긴 하더이다만, 아직 테러 국가 딱지도 떼지 못한 나라의 독재자에게 노벨 평화상을 갖다 붙이는 그 발상이 정말 가관이더이다.
또 엊그제 보도를 보니까 남북정상이 손잡고 있는 사진을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게재한다고 하더이다. 누구의 발상인진 모르겠더이다만, 이젠 김정일이 자라나는 남한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고, 봄가을로 떼지어 평양으로 수학여행가서 금수산 궁전의 "김일성 어버이수령님" 시신 앞에 참배 드리고 그걸 품행성적에 반영할 날도 멀지 않겠더이다. 정말 왜 이리 호들갑이오이까? 왜 이리 간이라도 못 빼줘서 안달들이오이까? 조선일보가 북한에 비판적이라 하여 적십자회담 취재 풀 기자로 선택된 조선일보기자의 북한입국을 거절하더니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평양방송은, 조선일보만이 6.25 남침을 모략했다며 절대로 북한에 발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더이다. 대표단 풀 기자라면 대표단의 일원이기도 한데 그 일원의 입국을 거절하는 상대방과 마주앉아 회담을 진행시킨 정부당국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이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오이까? 그렇게 서둔다고 모든 게 척척 풀려갈 줄 아시오이까? 앞으로도 서로간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얼마나 많이 벌여야 할지를 정말 모르고 있사오이까? 이러다간 평양서 남한 언론에 감놔라 배놔라하고, 누구는 "극우"니까 장관 앉혀서는 안 된다고 나올 날도 멀지 않을 것 같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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