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읽는다는 것의 역사』 역자 후기

이강기 2019. 1. 13. 18:17

읽는다는 것의 역사 역자 후기

 

 

 

   

읽는다는 것의 역사

 

 

정말 대단한 책이다. (번역)진도가 나갈수록 책에 푹 빠져들었다. 원문을 대충 훑어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흥이었다. 이 책이 아직 생성단계에 있는 독서역사학의 효시로서 서유럽 독서사의 첫 통사(通史)라는 신기축을 이루는 책이어서 만이 아니다. 그 같은 의미는 관계학자나 연구자들이 이 책에서 얻을 또 다른 가치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감동한 것은 이 책의 주제인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 역사적 사실들의 거대한 재현이었다. 그리스, 로마에서 중세, 르네상스, 18.9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와 독서혁명을 거쳐 현대의 탈정전화(脫正典化)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책과 독서에 얽힌 갖가지 에피소드가 지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500년 전 그리스에서 상연된 칼리아스의 희극 알파벳의 정경(情景)은 현대의 어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글자모음(子母音)이나 외국어 알파벳을 가르치기 위해 그대로 재현한다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으며, 아직 문자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고대 로마의 벼락부자나 벼락출세자들이 저택에 고급 장서를 가득 진열해 놓고, 웬만한 지식 없이는 읽기 어렵다는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스 신도를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거나, 프랑스 독자들은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 새 책만을 골라 읽는다며 루소가 빈정거리는 모습이라든지, 마치 현대의 부유한 집 젊은이들이 자동차에 비싼 치장을 하는 것처럼 책 미용에 거금을 들이는 르네상스시대 지식인들의 허영심 등, 이런 숨은 이야기들이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의 역사가 이렇게 방대하고 흥미진진한 분야인 줄은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미처 몰랐다. 아니 몰랐던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던 듯 하다. 독서역사학이란 학문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이고, 이 책이 최초의 종합독서사라는 것을 보면 학자들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등한히 해 왔던 것 같다. 이 책의 일본어판 역자이기도 한 도쿄대학의 스키무라 다쓰오(月村辰雄)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독서사 분야는 문화사나 문헌사(文獻史) 또는 서지사(書誌史) 등에서 오다가다 약간씩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들어와 역시 이 책의 원전 편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제 싸르티에 교수(파리 사회고등과학원 교수)가 그 개념을 정립하고서부터였다고 한다.

 

싸르티에의 독서역사학에 대한 이론은 이 책의 머리말 시작부분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프랑스학자 특유의 매우 난해한 이론을 펼치고 있어 처음 읽는 사람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얼른 이해되지 않을 듯하다. 이 책을 옮기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철학적인 이론 때문이 아니라 그 이론을 풀어내기 위해 머리말의 나머지 부분(‘그리스의 헬레니즘세계 이하)을 포함한 1장에서 13장까지 펼친 독서역사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이 머리말 시작부분은 맨 나중에 읽기를 바란다. 그 몇 쪽을 보고 무척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인상을 받을까봐서다. 이 부분만 제외하면 절대로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다국적 작품이다. 모두 13명에 이르는 저자들의 국적이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8개국에 이르고 사용된 언어도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4개국어였다. 예컨대 머리말과 1, 4, 8, 9, 10장은 프랑스어로, 3, 5, 7, 12장은 영어로, 2장과 6장은 이탈리아어로, 그리고 11장은 독일어로 씌었다. 이 개개의 논문을 앞서 소개한 로제 싸르티에 교수와 굴리엘모 카발로 교수(로마 사피엔사 학원 교수)가 편자가 되어 1997년에 프랑스의 세유(Seuil)출판사에서 History de la Lecture dans le Monde Occidental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어서 1998년에는 이탈리아의 라테르자(Laterza) 출판사에서 Storia della Lettura라는 이탈리아판이 나왔고, 1999년에는 미국의 플리티 프레스(Plity Press)사가 A History of Reading in West라는 영어판을 내게 된다. 그러나 각국에서 출간할 때 각 저자들이 원고를 다시 손본 듯, 간혹 단락을 추가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맨 나중에 낸 판이 완성도가 더 높다는 말이 되겠다.

 

이처럼 이 책은 각 시대 별로 해당분야 전문 학자들이 독자적으로 쓴 논문들을 유기적으로 집대성했기 때문에 각 장의 내용이 웬만한 책 한권의 무게를 지닌다.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예컨대 ’7장 인문주의자의 독서는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고, ’6장 중세유럽 유대인 사회의 독서는 이시도르 에프스타인의 유다이즘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번역은 위의 영어판과 다이슈칸쇼텐(大修館書店)에서 간행한 일본어판을 저본으로 사용하였다. 영어판은 리디아 코크린(Lydia G. Cochrane)이 주로 번역했다. 일본어판은 도쿄대학의 다무라 다케시(田村毅)교수를 비롯한 7명의 학자가 4개 언어로 된 오리지널 원고를 원본으로 하고 이탈리아판과 영어판을 참고하여 번역했다고 후기에서 적고 있다. 그러나 영어판과 일본어판을 비교해 보면 간혹 상대 판본에 없는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다. 특히 머리말 가운데 근대 독서의 지리적 편차‘,’독서혁명‘, ’인쇄술 발명 이후의 변화‘, ’속박과 저작물 사이의 독서항목은 일본어판에선 통째로 빠져있다. 이 책은 영어판의 내용을 주축으로 했다.

처음 이 책의 원전을 대했을 때는 솔직히 두려움이 앞섰다. 이메일을 통하여 10여 쪽의 번역 테스트까지 치른 뒤에 최종 의뢰가 왔을 땐 기뻐해야할지 난감해 해야할 지 모를 정도였다.오죽 번역하기 힘든 책이었으면 일본판의 경우 저명 대학교수 7명이 달라붙어(원본이 4개국어로 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작업을 했겠느냐 싶기도 했다. 그러나 슬슬 내용에 재미가 붙고 감동을 받기 시작하고부터는 그런 두려움도 잊고 신들린 사람처럼 브리태니커와 위키페디아 홈페이지를 부지런 들락거리며 되도록 읽기 쉬운 말로 옮기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럼에도 필시 미숙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끝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갖고 큰 일을 맡겨주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소장님과 늘 정감있게 조언을 주시고 내 문장의 구태스런 표현을 깔금한 현대어로 바꿔주신 편집자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나를 과분하게 소개해 주시고 늘 격려와 용기를 주시는 박행웅 선생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20062월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