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가 바싹 다가오고 있다
("모두가 알아둬야할 21세기의 인도" 역자후기)
이 책은 짜임새부터가 독특하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 메모’, ‘감사의 글’ 및 ‘서론’을 제외하고 총 8부에 모두 묻는 말로 된(원문으로는 What, Who, How, Why 등 의문사나 Do, Be 동사로 시작하는 의문문) 항목이 무려 160개나 된다. 얼핏 보면 무슨 문답집 같아 보인다. 자그마한 책에 인도에 관한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담으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런데도 내용이 문답집 같이 단조롭게 요약되었다 싶거나 정감 없이 딱딱한 맛이 나거나 하지 않고 모든 항목에서 정성어린 충분한 설명을 들었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한마디로 이 자그마한 책 한 권 읽으면 인도에 대한 웬만한 지식은 다 습득할 수 있게 섬세하게 꾸며져 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인도는 우리에게 멀고 먼 나라였다. 지리적으로는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들 보다 몇 배나 가까이 있지만, 인적.물적.문화적 교류면이나 친근감에서 그들보다 훨씬 먼 나라였다. 심지어 1970년대 초반 석유가격 폭등 이후엔 중동의 아랍국들보다도 더 멀리 느껴지던 나라였다. 인도를 관심 있게 공부한 사람이 아닌 일반 지식인들에게 인도라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 불교와 석가모니,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타골의 시 <동방의 등불>, 간디의 무저항주의, 그리고 6.25 사변 때 의료지원을 해주었고 인도군이 포로교환을 주선한 것들 중 한 두 가지를 떠올리는 것이 인도에 관한 지식의 거의 전부였다. 매일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외신에서도 인도에 관한 뉴스나 해설은 극히 드물어, 그저 남아시아의 비교적 국토가 넓은 한 나라로 기타 지역의 군소국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여길 정도였다.
인도가 과연 그런 대우를 받을 나라인가? 세계적인 종교인 불교,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의 발상지, 인구 세계 2위, GDP 세계 5위(IMF 2020.2월 기준), 국토면적 세계 7위, 그리고 인구는 오래지 않아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될 것이며, GDP도 중국과 세계 1, 2위를 다투게 될 날이 머지않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나라가 우리와는 멀고 먼 나라가 된 데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비록 6.25 때 의료지원부대와 포로감시부대를 파견한 나라이긴 하지만, 냉전 시대에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과 대치하는 최 일선의 나라였고, 인도는 제3세계의 지도국이었다. 인도의 네루 총리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비동맹 중립국의 수반이라는 이점을 앞세우며 ‘위세’를 부리던 시절에 인도인들의 눈에 한국이 제대로 보였을 리가 없겠고, 또한 한국인들의 눈에도 인도는 소련, 중공 등 공산권 국가들과 은근히 통하는 적색국 비슷한 나라로 비쳐 휴전회담 반대 시위를 할 때는 이들 중립국들이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인도를 가까이 느낄 리가 없었다. 한국과 인도의 수교가 1973년에야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양국 관계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인도가 경제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나라이고 보니 한국에서 경제개발이 한창일 때 수출회사 직원들이 공산국을 제외한 온 세계를 누비면서도 인도가 있는 남아시아 지역엔 발길이 뜸 했다.
그러나 1989년 소련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냉전 구조가 무너지고 경제 실리주의가 부각하면서 서로를 보는 눈이 변하기 시작했다. 1993년 인도의 나라심하 라오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지금껏 정치·외교 중심의 의례적인 관계에서 무역·투자를 중심으로 한 실리적인 관계로 양국 관계가 몇 단계나 격상되었다. 그 이전엔 양국 사이에 맺은 협정이라곤 무역, 문화 등 5개에 불과했는데 그 이후엔 지금껏 20개 이상의 협정을 체결했다. 우리 정상의 방문도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최초 방문 이후 후임 대통령들이 모두 인도를 방문했다. 또한 인도 정부는 2020년 7월 30일부터 한국어를 인도 정규 교육과정의 제2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했으며, 나랜드라 모디 현 총리는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인도의 경제발전 모델로 삼고있다고 했다.
인도가 어떤 나라인지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바로 이 책 서론의 시작 부분에서 나온다.
인도는 세계를 문화로 사로잡고 잠재력으로 자극하며, 전통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도는 복잡성으로 사람을 당혹하게 하고 폭력, 빈곤, 부패로 충격을 준다. 하지만 인도가 갖고 있는 엄청난 영어권 인구와 특히 그들의 민주적 제도와 기관들은 세계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바로 이 문장에서 제기하는 주제들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먼저 인도의 문화(문명)와 전통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대략 기원전 3000년부터 시작된 인도의 문화(문명)는 그 중 상당한 부분이 중국으로 흘러가 동양문화(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 중 하나가 삼종지도(三從之道)에 관한 이야기다. 즉 여자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3가지 도리가 여태껏 유교의 산물인 줄만 알았다. 아니 지금도 사전을 찾아보면 삼종지도가 “예기(禮記)의 의례(儀禮) <상복전(喪服傳)>에 나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 원산지를 중국이라고 딱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중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짐작하게끔 되어 있다. 잘못된 것이었다.
삼종지도는, 인도에서 기원전 3000년 경에 처음 제정되어 구전으로 면면히 전해져 오다가 기원전 400-200년 경에 문자로 편찬된 <마누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였다. 가정과 사회구조가 엄격하게 가부장적이어서 여성들의 지위가 문명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이 인도라고 한다. 2011년에 '외국 원조 및 개발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를 포함하여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낮은 20개국 가운데서 인도가 여성들이 살기에 가장 나쁜 나라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70년에서 2010년까지 40년 동안 출산 전 성별선택에 따른 낙태, 여아살해(바로 얼마전에도 쌍둥이 여아를 생후 하루만에 아비가 우유에 살충제를 녛어 죽이려했다하여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양육소홀등 치명적인 성차별로 인해 "잃어버린 소녀들"이 총 4300만명에 이르고, 지참금 때문에 살해되는 여성 숫자가 한 해에 8000명에 이른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인도 정부가 2015년 1월 부모들이 여자아이를 소중히 여기게 하는 범국가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할 정도이다.
다음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도의 복잡성이다. 인도엔 섬기는 신이 수억 명이고 그에 따른 신화도 수억 개라고 한다. 인도 헌법이 인정하는 언어는 22개인데, 인도에는 공식으로 인정된 언어 외에도 2013년 조사에 따르면 78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일부 언어는 사용자가 1만 명 미만이이라고 한다. 법적으로는 금지되고 있지만 카스트는 아직도 엄연히 존속하고 있으며, 인구의 24%에 달하는, 불가촉천민이란 뜻의 달리트(Dalit)는 계속 끔찍한 차별을 받고 있다. 남편의 죽음은 흔히 아내의 잘못으로 여겨져 사티(sati), 즉 남편의 시체를 화장하는 불에 미망인을 함께 태워 죽이는(때로는 미망인이 자진해서 불에 뛰어드는) 관행이 법적으로는 엄금하고 있지만 아직도 시골구석에서 이따금 씩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여성 상위의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미국 같은 나라는 아직 한 번도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는데 여성 지위 최하위의 나라라고 하는 인도에선 인디라 간디 같은 여성이 두 차례나 총리가 되기도 했다. 인도는 이처럼 복잡한 나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도가 동양의 그리스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고대에 두 나라 모두 다신교 국가로 수많은 신과 신화를 만들어냈고, 두 나라 모두 법을 숭상하여 인도는 마누법전을, 그리스는 고르틴 법전을 만들었다. 학교에서 우리는 세계 4대 문명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배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즉, 세계에서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곳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인데, 그 문명의 한 가닥은 북서쪽으로 흘러가 초승달 지역과 이집트, 크레타 섬을 거쳐 그리스 반도에서 대 변신을 하여 서양문명의 토대가 되었고, 다른 한 가닥은 동쪽으로 흘러가 인더스.간지스강 유역에서 대 변신을 하고 황하유역으로 흘러가 다시 한번 변신을 하여 동양문명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동양문명의 바탕은 인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불교문명 하나만 보아도 그러하다. 중국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지만 내 생각엔 그런 것 같다. 아니, 이미 학자들 사이에 정설로 굳어진 이야기를 내가 지금 뒷북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인도가 부상하고 있는 것은 동양문명의 발전을 위해 크게 환영할 일이다. 제발 인도와 중국이 한국, 일본과 함께 서로 경쟁하고 도우며 발전하여 동양이 서양을 능가하고 동양문명이 세계문명화 하는 시대가 꼭 오길 기대한다. 옛날 어느 때 서구 여러 나라에 수출하러 다니며 부러움과 함께 자격지심으로 설움 아닌 설움을 잔뜩 느낀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다.
끝으로 군더더기 같지만 인도를 이야기할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어 덧붙여야겠다. <인도의 향불>이란 유행가다. 내 생각엔 1952년에 나온 이 노래가 그 어떤 매개체보다도 한국인들에게 인도를 가장 많이 알린 것 같다. 현인(玄仁) 가수의, 양 손바닥에 뜨거운 호떡이라도 옮겨 쥐며 호호 부는 듯한 독특한 음조가 특색인 이 노래의 가사는 “공작새 날개를 휘감는 염불 소리/ 간지스강 푸른 물에 찰랑거린다"로 시작한다. 여남은 살때 어른들이 곧잘 부르던 이 노래를 어깨너머로 배워 홍알거리며(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동요보다 유행가를 먼저배웠다) 형의 중학 지리부도를 펼쳐놓고 마치 세모꼴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인도란 나라를 찾아보며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왜 인도인 같다'라고 할까 하고 혼자서 궁금해 했던 일이 새삼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붓 가는대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는다는 것의 역사』 역자 후기 (0) | 2019.01.13 |
---|---|
“강대국 일본의 부활” 역자후기 (0) | 2017.12.05 |
"비상하는 용 베트남" 역자후기 (0) | 2017.06.11 |
"이슬람주의와 마주보기" 역자후기 (0) | 2017.06.11 |
통계학자, 역사학자들이 일본을 과대 평가하는 이유는 뭘까? (0) | 2015.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