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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웨일즈 공의 정부였던 릴리 랭트리.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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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웨일즈 공은 1870년에 한 이혼 소송의 증인으로 거명되면서 스캔들을 일으켰고, 1891년에는 카드게임 사기와 관련된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가 이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의 정부인 릴리 랭트리는 ‘저지의 릴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저지의 주임사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우가 되었고 당시 매우 뛰어난 미인이었지만, 사진을 잘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언론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신중한 편이었지만, 한 스포츠 신문이 한 줄짜리 만평을 통해 이 스캔들을
기사화한 적이 있었다. “황태자와 릴리 랭트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약 1주일 후 이 신문은 이렇게 덧붙였다. “담요 한
장조차도.” 그녀의 애인이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이미 재혼하여 릴리 드 바스라는 이름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유명한 경주마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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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가 황태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세인트폴 성당 계단 앞에 도착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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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비는
이혼 직후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이었다고 소회했다. 이 왕실 로맨스는 전 세계적인 동화가 되었다. 12억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머지않아 깨질 이
로열 커플의 혼인서약을 지켜보았다.
찰스 왕자는 유부녀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오랜 연분 관계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파커 볼스의 첫아이의 대부였다.
예의가 좀더 중요했던 시대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왕실의 중매결혼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디 다이’는 결코 묵묵히 인내하는 대륙형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위그 계열 귀족 가문의 혈기 왕성한 후손이었다. 1980년 무렵 스캔들을 캐내는 일은 피를 보는 스포츠처럼 과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파편적인 전화도청 내용, 훔쳐낸 사진들, 그리고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전하Royal Highness’라는 칭호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기습 공격에 그녀는 자신이 ‘하트의 여왕Queen of
Hearts’이라고 맞받아쳤는데, 그녀의 대조상이자 군인이었던 말버러 공작이 그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아마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북폴리오> 제공
마거릿 공주는
아버지의 공중 경호대원이자 전투기 조종사였던 피터 타운젠드와 사랑에 빠졌다. 1974년 왕실의 남아프리카 순방 때 촬영된 이 사진에서 그는 차
앞쪽에 타고 있다(왼쪽/사진 이언 로이드). 당시 열일곱 살이던 그녀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왕과 왕비 앞쪽에 앉아 있다.
타운젠드는 1955년에 이혼했지만, 공주는 “기독교에서 결혼은 영구불변의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를 수
없어” 두 사람의 로맨스가 끝났다고 발표했다. 타운젠드가 참석한 마지막 주말 야유회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오른쪽/사진 데릭 버윈).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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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식. 사진/레그 스펠러.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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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옆에서
턱을 괴고 있는 찰스 왕자는 이제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즉위식의 위풍당당함에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 두 번째 줄에는 그의
친할머니이자 필립 공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가 그곳의 화려한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 그녀 특유의 종교적인 복장을 하고서 근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즉위식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첫 번째 대형행사였는데, 윈저 왕조는 나중에 이 대중매체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될
운명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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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왕실 근위대원과 귀족 부인이 1911년 조지 5세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옆에 지나가던 그들보다 덜 고귀한 신분의 백성들이 쳐다보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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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셜
백작이 하객들의 자리 안내를 위해 선발한 50명의 ‘황금 부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근위대 장교의 생활은 매우 유쾌한 것이어서 대령의 경우
1년에 6개월, 소령의 경우에는 5개월간이나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군인 급여만 가지고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품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사적 수입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 밖에도 귀찮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전쟁에 나가 싸워야 했고, 근위병 연대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하는 사항들도 여럿 있었다. 버지니아 담배를 피운다든가, 왈츠를 출 때 뒷걸음질친다든가, 공공장소에서 우편물을
나른다든가, 애스컷 동쪽 지역에서 갈색 신발을 신는다든가 하는 행동은 금물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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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 전체의 작위귀족들이 1953년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에 위치한 상원으로 모여들고 있다. 사진/해리 토드.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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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기념 초상화를 그리는 세실 비턴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세실 비턴.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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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식 복장을 하고서 아이들과 포즈를 취한 말버러 공작부인.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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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금고가
바닥나면 언제든 미국의 부자 상속녀를 수입하여 다시 채울 수 있었는데, 말버러 공작부인이 그런 경우다. 그녀가 약간 뻣뻣해 보이는 것은 보석으로
치장된 꽉 조이는 목걸이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런 영국식 예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콘수엘로
밴더빌트였으며, 미국에서 증기선과 철도를 통해 돈을 벌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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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크 공작인 동생 조지(왼쪽)와 웨일즈 공인 에드워드가 보즈 라이언 가문의
저택인 글래미스 성을 방문 중인 모습.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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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5세가
서거하자 둘 가운데 형이 즉위하여 에드워드 8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리스 심슨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이혼녀였다. 왕은 결코 그녀와
헤어질 마음이 없었고, 영국 국교회는 절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부 웨일즈의 아이들은 뛰어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길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래요.
심슨 부인 참 예쁘죠?
벌써 두 번이나 결혼했는데
이젠 에드워드의 방문을 두드리네요.
퇴위 후 에드워드와 월리스는 프랑스로 영원한 망명길에 올랐다. 수줍음 많고 말도 더듬던 요크 공작은 마지못해
즉위하여 조지 6세가 되었다.
그의 용기는 형이 나치와 파시스트에 대해 괴팍한 태도를 취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고, 국민들은 둘 가운데 더
훌륭한 사람이 왕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북폴리오> 제공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서 많은 군주들의 조상이었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되었다. 끝이 뾰족한 윙
칼라 셔츠를 입고 있는 독일의 빌헬름 2세 역시 빅토리아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여기서는 또 다른 손자인 잉글랜드의 조지 5세로부터
영접을 받고 있다. 메리 왕비가 그들 사이에 서 있다. 항해복 차림의 왕자와 공주들 중에는 미래의 에드워드 8세와 그 동생인 조지 6세가
보인다. <북폴리오> 제공
지난 1월, <인터넷한겨레>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중국의 세기>에
이어 영국인들의 독특한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2-영국의 세기> (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머나먼 외국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책임졌던 젊은 외교관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패션을 모방하곤 하는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한 사람들, 디킨스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빈민가의 귀화인들, 우풍당당했지만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왕족들,
조지 오웰 등 천재 문학가들...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영제국 100년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식민지의 아버지 2. 왕실스캔들 3. 노동자들의 삶 4. 전쟁수행역할 5. 여왕여제 6. 예술가의 초상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