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의 활약(?)으로 중국은 치유하기 힘든 상흔을 안았다.류사오치(劉少奇) 등 고위급 공산당 간부로부터 밑으로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일반 민중까지 문화대혁명의 대오에 서지 않거나 참여에 미온적이었던 사람, 사회주의 혁명의 잣대로 볼 때 과거 조그마한 흠결을 갖춘 사람, ‘봉건주의 잔재’를 옹호하던 사람, 부르주아식 연애를 했던 사람 등 애꿎은 사람들이 군중재판의 심판대에 올라 생을 마감하거나 일생일대의 상처를 떠안아야 했다.
文革과 홍위병이 거론되는 이유
아직 문화대혁명의 정확한 원인과 배경을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마오쩌둥에 의해 촉발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의미를 평가하는 시각은 아직 다양하며 그 가치 판단 역시 아직 유보적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함으로써 상당한 속도로 서양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자체적으로 문혁에 관한 자료들을 하나씩 공개하고 있고, 이를 다시 재구성하려는 중국 내의 저작들도 활발하게 선보이고 있다. 최근 한국에 소개된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특별취재반의 “마오쩌둥 비록”(문학사상사)은 그 중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저작이다.
공개된 중국공산당의 문건과 중국내 저작들을 취합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전모를 살피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책이다.책이 지니는 단점은 문화대혁명의 전 과정을 오로지 마오쩌둥의 권력욕에 중심을 두고 살피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점이 책의 무게를 다소 경감시키기는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일대 ‘비극’으로 치부되는 문혁(文革)의 전후 인과관계를 소상하게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노작이자 수작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요즘 국내에서는 문혁의 막전막후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이나 대중 선전과 동원, 음모와 술수, 모함과 비판 등 여러 양상을 21세기 한국 정치판에 대비해 보려는 시도가 잦아지는 느낌이다. 당대의 중국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인 ‘홍위병’이라는 단어가 국내의 여러 담론의 장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비교적 잘 정리된 “마오쩌둥 비록”과 여타 자료들을 통해 문혁의 전말, 그 주역이었던 홍위병의 정체를 살펴보는 작업은 의미가 적지 않겠다. 권력의 의지와 상관없을지 몰라도 어쨌든 분열과 혼돈, 국민들 간의 극심한 반목(反目)으로 치달았던 문혁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정치권력과 사회의 갈등적 국면을 자성해 보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문혁의 서막“비가 오려 하니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다”(山雨欲來風滿樓)
중국 사람들은 흔히 문화대혁명을 ‘10년 간의 대재난’(十年大浩劫)이라고 부른다. 류사오치와 허룽(賀龍) 등 중국 건국 과정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영웅들과 뤄루이칭(羅瑞卿)·펑전(彭眞)을 비롯한 고위급 당 간부들이 홍위병의 모진 ‘비투’(批鬪·비판투쟁)와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자리에서 쫓겨났다. 중국 전역에 걸쳐 절과 불상, 공자묘 등 국가적 문화재와 유적들이 ‘봉건잔재’라는 이름 아래 철저하게 파괴됐다.
1950년대말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휘청거렸던 중국경제는 이 기간에 더욱 피폐해지고 극좌(極左)적 모험주의의 횡행으로 중국 정국은 더욱 혼미를 거듭해 갔다. 현대 중국의 가장 큰 비극으로 꼽히는 문화대혁명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5년이다.
문혁의 시발점을 이해 11월 상하이(上海) “원후이바오”(文匯報)에 실린 야오원위안(姚文元·후에 마오쩌둥의 처 江靑과 함께 4인방으로 활약한 문혁의 핵심인물)의 ‘신편(新編)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라는 글을 꼽는 데 중국 국내외 관계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이는 중국에서 흔히 ‘문공’(文攻)이라 불린다. 본격적인 정치공세에 앞서, 문장을 통한 비판을 내세워 분위기를 잡아가는 것으로, 정치투쟁의 서막이자 신호탄에 해당한다.문공의 소재로 떠오른 ‘해서파관’(海瑞罷官)은 당시 베이징(北京)시 부시장인 우한(吳·)이 1960년에 쓴 중국 전통극인 경극(京劇)의 대본으로, 그 내용은 명 가정제(嘉靖帝·1507∼1566) 때의 충신 해서가 황제의 실정을 간언하는 이야기로 짜여 있다.
한때 마오쩌둥도 칭찬했다는 해서의 충정(忠情)이 돌연 야오원위안의 문장에서 ‘우파(右派)적 오류’로 지적되며 신랄하게 비판당한다. 야오원위안은 원후이바오에 실린 글에서 ‘해서파관’에 대해 ‘지주계급을 미화하고 혁명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급조화론을 선전한 것’이라고 공격한다. 상하이의 해방일보(解放日報)가 뒤이어 이 글을 전재한 데 이어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전국의 각 매체들이 잇따라 야오원위안의 글을 실음으로써 문혁의 주류들에 의한 공격은 점차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당의 ‘목구멍과 혀(喉舌)’라고 불리는 중국의 매체(개혁개방 이래 매체의 환경은 많이 변했으나 당시에는 모든 매체가 당의 지시 아래 움직였다)가 전면에 나서서 정치적 선전을 펼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일반적인 통치술에 해당한다. 관제화한 매체를 통해 여론을 움직이고 대중을 선동하는 이 수법은 문혁 시기에 정점으로 치달았다.
눈여겨볼 대목은 마오쩌둥의 ‘입장 바꾸기’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마오쩌둥은 1959년 상하이에서 해서의 이야기를 다룬 상극(湘劇·후난 지역의 전통극)을 보고 “충성스러우며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는 ‘해서정신’을 제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오쩌둥은이어 그의 측근들에게 ‘해서’를 선전하도록 지시했다. 야오의 비판을 받은 작가 우한은 사실 알고 보면 마오쩌둥의 이같은 지시를 받아 ‘신편 해서파관’을 엮은 것이었으나 6년 뒤에는 거꾸로 비판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당의 여러 문건과 자료들에 의해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문혁이 전개되는 전 과정에는 마오쩌둥의 권력욕이 작용한다. 원후이바오에 실린 야오원위안의 문장도 당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실용주의(문혁 주류는 이들을 주자파라고 불렀다) 노선을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의 정점을 위협받던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붉은 포켓판 마오쩌둥 사상집을 흔들고 환호하는 홍위병들 |
권력의 의지가 작용하면 이렇듯 진실이 거꾸로 뒤집히기도 한다. 오늘날 문혁을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문혁의 표면에 내세워진 의미를 저만큼 깎아 평가하는 것도 권력자인 마오쩌둥의 권력을 향한 노욕(老欲)이 문혁의 모든 과정에서 자주 그 그림자를 내비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문혁의 서막(序幕)은 이듬해인 1966년 8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연출된 ‘홍위병 출범식’에서 거센 흐름으로 이어지며 향후 10년간 중국의 인민들을 참혹한 투쟁과 반목, 배반과 의심 속으로 몰아넣는다.
문혁이라는 바퀴를 굴러가도록 한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준동하는 우파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에서 모진 압박을 견뎌냈고 19세기 제국주의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종이 호랑이’와 ‘동아시아의 병부(病夫)’쯤으로 치부되던 국가를 일약 신생 사회주의 강국으로 출범시킨 중국 공산당원들의 자부심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갈 법한 얘기다.
1949년 건국한 중국은 50년대말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실험인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귀착하면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다. 건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던 마오쩌둥은 이같은 경제 실패로 그의 잠재적 라이벌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으로부터 도전받게 된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실용적인 노선이 점차 안정적인 궤도를 찾아가면서 당내 권력의 무게가 두 사람쪽으로 치우치는 조짐이 나타나면서부터다.
마오쩌둥은 이 흐름을 이른바 ‘대중노선’으로 간단히 반전시켜 버린다.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대중’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 이론은 본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활동 원칙이었지만 중국공산당, 특히 마오쩌둥에 의해 강력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문혁 기간 이 대중노선의 최일선에 나선 것이 ‘홍위병’이다. 굳이 그 말뜻을 풀어 본다면 ‘사회주의 이념(紅)을 지키는(衛) 병사(兵)’가 되겠다.
이들은 그 유명한 대자보(大字報)를 통해 등단한 세대다. 베이징대학에 처음 내걸린 대자보를 쓴 사람은 당시 베이징대학의 철학과 강사였던 녜웬츠(元梓), 중국에서 출간된 책을 근거로 해 “산케이신문”이 “마오쩌둥 비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녜웬츠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으로부터 우회적으로 대자보를 쓰도록 권유받은 것으로 돼 있다. 문혁과 홍위병 운동의 도화선이었던 대자보가 마오쩌둥와 장칭의 책동에 의해 내걸렸다는 얘기다.
1966년 이후 10년 동안 중국을 대재난의 상황으로 몰았던 5월25일의 이 대자보 내용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학교 지도부가 벽보를 붙이는 것을 막고 있으며 이는 후루시초프류의 반(反)혁명 수정주의 행태’라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문혁 기간 즐겨 썼던 “조그만 불씨는 넓은 벌판을 태운다”(星火燎原)는 말처럼 이 대자보는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 이 대자보에 대한 베이징대학 지도부의 반박문이 역시 대자보 형태로 붙었다.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지를 받던 대학 지도부가 잠시 승리를 거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녜웬츠의 대자보는 6월1일 밤 9시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라는 칭찬과 함께 중앙인민방송국의 뉴스를 통해 전국에 소개됐다. 당 기관지인 “런민리바우”에도 대자보의 내용과 함께 이를 옹호하는 내용의 논평이 실렸다. “마오쩌둥 비록”은 이같은 일련의 과정이 마오쩌둥의 지시였다고 밝히고 있다.
‘홍위병’이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베이징대에 대자보가 나붙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6월초. 베이징 칭화(淸華)대학 부속중학교에서였다. 베이징대 대자보를 지지하기 위한 이 학교 학생들의 자체 조직이 내건 대자보 맨 뒤에 ‘홍위병’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런민리바우 등 관영 매체의 전파력에 힘입어 순식간에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런민리바우는 부르주아 계급과 권위주의, 우파적 오류 등을 비판하는 사설을 5일 연속 실었다. 모든 통제를 ‘권위주의적’ ‘수정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국가주석이자 당 부주석이었던 류사오치 등은 이같은 사태를 통제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공작조’를 보내기도 했지만 거센 반발에 부닥쳐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류사오치는 당 주석인 마오쩌둥의 의견을 듣기 위해 항저우(杭州)로 내려갔지만 “흐트러지는 대로 그냥 놔두라”는 냉담한 답변만 얻었다. 실제적으로 중국을 이끌어 가고 있던 류사오치는 점차 궁지에 몰려 가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