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은 셋만 모이면 파벌로 나뉜다면서 일본인 사학자들이 예로 들었던 게 당쟁과 사화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논의의 단초를 제공한 사학자가 다름아닌 외국인이었다.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가 그이. 1959년 박사학위 논문에 이어 1961년 ‘중종 14년의 현량과:조선전기 정치사의 위상’, 1980년 ‘정치사적으로 본 조선시대 사화의 성격’ 등의 논문을 내어 이같은 논의를 굳혔다. 당쟁은 조선이라고 유별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사화와 당쟁을 통해 ‘정당한 절차’라는 통치양식이 발달함으로써 중국과 일본에 비해 조선왕조가 길게 존속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화가 폭군에 맞서 유교 도덕주의자들이 충돌한 결과라는 일반론과 다르고, 훈구파-사림파 대결이라는 사화의 구도 자체도 부정하는 것이다. 또 사림파가 중소지주에 경상도 출신, 훈구파가 대지주에 한양 부근 거주자라는 통설도 비판한다. 사화에 연루된 부류는 이질적인 집단이 아니라 대부분 한양권에 거주했으며 정치적 이해와 이념에 따라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도 되었다고 말한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 일세대인 와그너의 논문들이 번역돼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으로 묶여 나왔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 사화를 포함해 35년에 걸쳐 추진·발표된 18편의 논문이 실렸다. 논문의 특징은 방대한 자료 정리작업,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과 병행하여 이뤄졌다는 점.
1663년 서울 ‘북부장 호적’을 분석하여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 해체가 진행되면서 양반이 급속하게 늘었다는 통설과 궤를 달리하는 내용의 논문도 발표했다. 북부장 호적은 신분 집단을 구분하는 기호가 명기된 문서인데, 이를 분석함으로써 양반에서 평민 이하로, 평민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하향이동이 증가추세이고, 인구중 노비가 75%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와그너는 1946~48년 미군정 외무부서 문관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역사와 동아시아언어학)를 받았다.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으로 1993년까지 근무했으며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영역한 바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화=당쟁' 거부한 미국의 한국사가>
|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무오사화에서 기묘사화에 이르는 각종 사화(士禍)를 새로운 통치양식의 발달로 해석한 역사학자가 있다. 그러면서 이 역사학자는 사화가 폭군에 맞서 정직하고 올바른 유교 도덕주의자들이 충돌한 결과라는 일반론도 거부했다.
그에게 사화란 이론적으로는 무제한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군주와 유교윤리를 통해 이런 왕권을 한정하고 구속하려는 양반 엘리트 성원 사이에 전개된 격렬한 구조적ㆍ제도적 갈등의 산물이다.
그는 또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라는 사화의 밑그림 자체도 부정했다. 조선사회 지배엘리트는 이질적 존재가 아니라 동질적 존재였으며, 그에 따라 사화에 연루된 엘리트 대부분은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거주자로서 정치적 이해와 이념에 따라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도 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조선민족이란 원래가 당파적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의 해묵은 악선전을 한국학계가 돌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 단초를 마련한 이는 한국인이 아니라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라는 미국 역사학자였다. 미군정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하버드대에 정착해 1950-6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한국사를 개척한 '원훈대신'이다.
그는 조선왕조 지배엘리트 분석을 위해서는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司馬榜目)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조선왕조가 개국한 1392년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748회에 걸쳐 실시된 문과 급제자 1만4천607명은 물론이고 이 기간 동안 배출된 생원ㆍ진사시 급제자 4만649명의 개인신상카드를 작성했다.
전북대 송준호 교수와 함께 한 이 프로젝트는 완성에 40년을 소요했으며, 그 성과는 2003년에 CD-롬으로 국내에 출반되었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와그너는 홍경래 난이 일어난 평안도 정주가 조선 후기에는 한양 다음으로 문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에서 홍경래 난이 비롯되었다는 역사학계 통설이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는 족보와 호적의 가치에 주목한 대표적 초기 연구자로 꼽힌다. 1663년 서울' 북부장호적'이란 자료를 분석했더니 전체 인구 중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5%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비록 특정 지역 사례이긴 하지만, 이는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 해체가 급격화하고 그에 따라 양반이 급속하게 늘었다는 또 다른 학계 통설을 근본에서 흔들었다. 신분해체가 초래한 현상은 양반증가라는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 노비를 불린 '하향 평준화'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성과들을 담은 와그너 교수의 각종 논문이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동아대 이훈상 교수와 같은 대학 손숙경 강사에 의해 번역출간됐다.
이 교수는 와그너 역사학에 대한 음미가 국내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원인 중 하나로 "한국의 역사는 한국 사람만이 파악하고 기술할 수 있다는 일종의 본질주의"를 지목하기도 했다. 527쪽. 3만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美학계 한국학 연구 개척 와그너 前 하버드대 교수 별세
| |||
와그너 교수는 1995년 하버드대 은퇴 이후 최근까지 치매로 투병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투병 생활 중에도 고인은 전북대 송준호 명예교수와 함께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는 문과급제자를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하와이대 슐츠 교수와 함께 미국내 한국학 연구를 개척한 1세대로 꼽히는 고인은 하버드대 동양학 연구의 핵심을 이루는 옌칭연구소에서 오래도록 봉직했다.
고인은 조선사화 연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고 조선의 지배층 집단에 대해 가장 정밀한 연구업적을 낸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1959년 존 페어뱅크 교수에게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인 ‘조선사화 연구’를 통해 고인은 조선의 빈번한 사화가 당파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간 정치적 충돌로 해석했다.또한 고인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목록인 ‘문과방목’을 분석한 결과가 최근 ‘보주 조선문과방복’이라는 이름의 CD롬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고인은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가 집필한 ‘한국사신론’을 슐츠 교수와 공동번역해 영문판으로 냈으며 하버드 교수 재직 때에는 이기백,이광린 서강대 명예교수,한우근 고 서울대 명예교수 등을 미국으로 초청해 미국내 한국학 연구를 활성화시켰다.
이준희기자
- [책과 삶]美 한국학대부 눈으로 조선 양반사회를 보다
이런 인식이라면 한국사 연구에 비(非)한국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외국인의 뛰어난 한국사 연구도 쉽사리 인용되지 못한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럴 리가 있겠느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일정 부분 사실이다. 연구 방법론의 차이일 수도 있고, 언어의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민족주의적 학문’을 강조하는 국내 학계의 풍토도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학계의 풍토와 관계없이 1960년대 이후 서구의 한국사 연구는 꾸준히 발전했다. 국내 연구를 뛰어넘는 성과도 적지 않다.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국책과 조선의 제도’, J 덩컨의 ‘조선왕조의 기원’,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의 유교적 변환’,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등은 한국사 연구의 기념비적 저작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팔레와 덩컨의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도이힐러와 헨더슨의 저서는 최근에야 국내에 소개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의 연구성과가 이제야 국내에 소개된다고 해서 하등 놀라운 일은 아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와그너는 제임스 팔레와 함께 미국 한국학의 대부이다. 1959년 이후 30여년간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그는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한국학 자료실을 구축하며 미국 내 한국학 연구를 주도했다.
60년대 이후 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사관 극복과 이를 위한 내재적 발전론 정립에 파고들 때 와그너는 한국사 자체의 특성과 역동성을 찾아나섰다. 와그너의 화두는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어떻게 유례없이 긴 왕조를 유지시켰는가’를 밝히는 것. 그는 양반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문과급제자·생원진사시 합격자 목록, 족보, 읍지 등의 자료를 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했다.
특히 ‘와그너-송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송준호 교수(전 전북대)와 함께 조선시대 문과시험 급제자 1만4607명의 혼맥·인맥 지도를 만든 것은 지금도 한국사 연구의 일대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와그너의 한국사 연구는 거시적 구도와 미시적 접근을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학계에 대한 와그너의 영향력은 연구성과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다. 한국에 와그너를 본격 알리는 이번 책에는 ‘조선시대 출세의 사다리’ ‘정치사의 입장에서 본 조선시대 사화의 성격’ 등 와그너의 주요 논문 18편이 실렸다. 번역은 동아대의 이훈상 교수와 손숙경 강사가 맡았다. 이교수는 와그너의 한국사 연구경향을 정리한 보론을 책 말미에 덧붙였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한국사연구 업적 美 와그너교수 별세를 애도하며
| |||
와그너 교수는 세속적인 욕심이 없는 순수한 학자였다. 그는 사료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소홀히 하지 않는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학설을 세우려하였고, 또 그렇게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세상의 어느 곳을 가도, 특정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고 비뚤어진 해석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그러한 경향을 누구보다도 싫어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일반의 관심을 외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먼 훗날까지 남아서 학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결국 그러한 착실한 연구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화(士禍)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한 와그너 교수는 조선시대의 정치기구와 이를 움직인 양반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고 뒤에는 중인(中人)으로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제도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그 합격자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단순히 문과방목에 기재된 합격자의 가계(家系)뿐 아니라 그 인척 관계를 아울러 조사하여 카드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자연히 족보(族譜)를 이용할 수 밖에 없게 하였다. 그래서 하바드-옌칭 연구소의 동양도서관 한국부는 한국의 어느 도서관보다도 가장 많은 한국 족보를 소장하게 되었다. 원본의 구입이 불가능하면 이를 복사하여 소장하였다. 이같이 족보의 학문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의 업적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광범하게 수집하여 정리된 자료가 공개되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게 지대한 편익을 제공하리라는 것은 국내외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가 한국사의 학문적 연구에 정성을 다하여 온 실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또 그가 얼마나 세속적 욕심이 없는 순수한 학자였나 하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오늘날 어디서나 학문의 세계가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것 같다. 순수한학자가 그리운 때다. 이런 때에 진정한 학자 한 사람을 또 잃었다. 가랑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서 와그너 교수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 마음은 쓸쓸하기만 하다. 길이 영혼의 평안을 누리길 빌 뿐이다.
이기백(한국사·학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