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받는 한국인들의 역사인식 수준
(2001년 5월9일 - 에머지)
"한국 중국 대만 학자들에게는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검증할만한 힘이 없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학력(學力)은 매우 낮다."
"한국과 중국에는 민주주의도 언론자유도 없고 감정뿐이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에 대해 한국, 중국, 대만으로부터의 항의가 거세어지자, 문제의 역사교과서를 집필한 일본의 소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주최의 심포지엄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주로 앞장서 규탄한 쪽은 한국이나 중국, 대만의 언론이나 일반 시민단체들이었고, 막상 이들 나라들의 역사학자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설사 나서더라도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애꿎게 이들이 날벼락을 맞은 꼴이다. 한마디로 역사학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또 민주주의도 언론자유도 없다는 말은 중국을 두고 한 말이라면 모르되 한국을 맨 앞머리에 들먹인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이 특히 새 정부 들어서서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다고 자랑하고있는 사람들에겐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말일 것이다. 물론 한국 언론이나 시민단체들은 이들의 언설을 일언지하에 "망언"으로 규정하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내뱉은 비하발언들을 이쪽에서 아무리 망언으로 규탄하고 무시해버린다고 해도, 일본에서는 그것들이 진짜 망언이 되고 무시돼 버리지 않는데 있다. 그런 언설을 늘어놓은 사람들이 일본의 국수주의적 우익지식인들임에 틀림없고, 그들의 주장이 일본 전체 지식인들의 성향과 맞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들 쪽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도 그것들을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보고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정치가, 학자, 언론인, 문화인, 기업가 등의 말이나 글의 행간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인들의 이중성, 이른바 다테마에(建前)나 혼네(本音)에 관한 이론을 펼칠 생각은 없지만, 우리들이 흔히 그들의 표면상의 명분 세우기로 하는 얘기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이번 역사교과서 일처럼 일본에서도 우리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여론이 높다고 좋아들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싶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과서가 우익편향하는 것에 분명히 우려감은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문부과학성의 검정자체를 뒤집어 '후소사'에서 만든 문제의 역사교과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한국측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내용의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국의 교과서정책이나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여론과 언론에 으쓱해 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라는 국가기관에서 오직 한가지 주장의 역사교과서만 만들고 있는 한국의 처지를 측은해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 일본인들은 우익이고 좌익이고 중도고 가릴 것 없이 한국인들의 역사인식 수준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기술(歷史記述)"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역사학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도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와 R.G. 콜링우드의 "역사의 이해(The Idea of History)"라는 책을 주마간산격으로라도 한번 읽어보았다면 역사에 대해 감히 함부로 말을 해서는, 그리고 섣부른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바락바락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것이다.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은 "역사철학"이라는 장르가 생긴지가 까마득히 오래 됐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구별하는 문제 하나 만으로도 수십 수백 편의 박사논문이 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한.일간의 역사교과서왜곡문제 논쟁에 이런 전문적인 이론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수준을 저만큼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일부 우익들만의 특수한 시각이 아니라 일본인 전체의 보편적인 시각이라는 점에 있다. 이래가지고는 역사교과서문제는 두 나라 사이에서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곡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서로간 역사인식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부터 마련돼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두 나라가 각각 자기들의 역사인식 자세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냉철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일부 우익편향적인 역사인식을 반드시 반성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럼 우리 쪽을 한번 살펴보자. 우리는 과연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 있는가? 역사인식에 지나치게 민족감정이 개입되고 있는 점은 없는가? 피해의식이 올바른 역사해석을 가로막는 일은 없는가? 실증사학을 사대주의니 황국사관이니 하며 몰아 부친 적은 없는가? 유물도 기록도 고증이 안된 상태에서 고대의 강토를 마음대로 늘여놓고는 뿌듯해 한 적은 없는가? 아니, "찬란한 5천년 문화민족"임에는 정말 틀림없는가? 북한이 제 맘대로 역사를 마구 날조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일본이 한국의 역사인식을 얏보는 데는 그들이 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있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 일제식민지 시대 한 부분만 떼어서 봐도 한국에서는 감정이 앞선 나머지 제대로 연구가 되고 있지 않다고 그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왜곡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가 35가지로 조목조목 지적해서 고치도록 차분하게 일본에 종용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일본의 진보 층을 대변하는 아사히신문이 그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교과서부터 고쳐라"고 한 요미우리신문의 역공이나, "한국의 요구는 역사인식을 둘러싼 한국 측의 주장일 뿐이다"고 한 산께이신문의 폄하도 한갓 일본 우익언론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표현을 안 했을 뿐 한국의 역사기술에 대한 불만은 아사히신문도 우익신문들과 대동소이하게 가지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적어도 일본 쪽에서 한국의 역사인식수준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한 결코 그들의 역사왜곡을 시정토록 하는 우리의 요구가 그들에게 정당한 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차제에 우리도 지금까지의 역사인식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자라나는 세대들에 대한 역사교육에 지나친 민족감정의 개입을 자제하는 용단이 필요할 것이다.
이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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