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789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고 10여년간 몇가지 벼슬을 지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맞아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다산은 거기서 학문 연구에 전념한다. 1818년 유배가 풀리자 다산은 고향 집에 칩거하면서 저술에 전념했다.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그는 1836년 파란의 일생을 마쳤다. 그런데 유배지에 묻혀 산 18년간은 그의 학문과 철학의 개화기였다. 그러니까 이 시기는
정약용 개인에겐 불행이었으나 한국학으로선 더 없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다산의 소품 ‘일본론(日本論)’도 아마 이때 쓰인 글로
보인다.
‘일본론’에서 다산은 ‘이제 일본에 대해선 걱정할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걱정할 게 없다’라는 말은 임진왜란과 같은
재침략은 물론 과거 왜구(倭寇)와 같은 노략질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그 근거로 다섯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실패로
돌아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그 후계들이 그대로 답습할 리 없다. 둘째, 일본의 일부지방은 지금 영남의 쌀을 얻어 먹고 사는데
침략해본들 맹약만 깨질 뿐 아무 실익이 없다. 셋째, 조선을 우호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가 일본이라는 사나운 오랑캐가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넷째, 분열시대의 일본은 뿔뿔히 흩어져서 제각기 노략질에 나설수 있었으나 통일된 일본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다섯째, 지금 일본은 중국과
무역하고 문물도 교류하는데 구태여 조선의 재화를 약탈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산의 이와같은 장담이 그 후 100년도 채 못돼 허구로
돌아간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은 쇄국주의를 고집한 조선을 노략질이 아니라 완전 병탄(倂呑)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다산 숭배 학자들도 이 대목에선 그의 단견을 아쉬워한다. 특히 조선과의 연대를 중요시하는 청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장탄식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고 다산의 성화(聲華)가 별볼일 없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유배기간에 일본문제를 낙관했던 그는 유배가 끝난 뒤 생애를 마칠 때까지의 또다른 18년동안은 일본의 대두를 경계하며 지냈다고 한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일본 경계론이 드문드문 나온다고 다산학자들은 말한다. 아마 그는 1820년대와 1830년대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본격화하는 것을 보고 나라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일본을 낙관적으로 보게 된 그의 심리적 저변은
지금도 천착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는 조선통신사들이 가지고 온 일본 서적을 보고 일본 학자들의 글에 문채(文采)가 있음을 격찬하고 있다. 그가
읽은 일본 글은 주로 오규 소라이(1666∼1728) 등이 지은 유교 경전에 관한 연구 책자들이다. 다산이 격찬한 ‘문채가 있다’는 말은 글에서
‘문자의 광채가 난다’는 뜻이다. 고래로 동양의 선비들은 글에서 광채가 나려면 성정(性情)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곧 사상과 감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 그것이 문장의 꾸밈인 문채로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다산은 이를 근거로 문물이 없으면 오랑캐의 본색이 드러나지만 이미
문물이 풍부한즉 오랑캐의 풍속은 사라졌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일본에서도 ‘조선을 노략질합시다’라고 충동하는 자가
있으면 ‘도적이란 이름만 남을텐데 그러면 안된다’고 간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요, ‘군대를 동원 합시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군대를
동원했다가 나라가 망한 과거를 잊었는가’하고 깨우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산은 ‘그 나라에는 반드시 예의를 숭상하고 나라의
원대한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고 서두를 장식했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된 일본은 지금 문물의 왕성(旺盛)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러니 다산이 말한 그 때의 일본론과 지금의 일본론이 다를 리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김성호 /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