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명성황후 弑害상황 은폐 드러나" '명성황후 시해장소 명시' 日문건발굴한 이태진 서울大
교수
입력 : 2005.01.13
18:11 56'
―‘우치다 문건’은 기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나?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는 1895년 11월에도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12월 21일에 작성한 이번
문건은 처음 밝혀진 것이다. 11월의 보고서는 일본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건 주범을 일본인이라고 명시해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 문건의 신뢰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당시 경성 주재 일본 일등영사였던 우치다는 을미사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사건을 주도했던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도 매우 사이가 나빴다.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된다. 이번 보고서는
당시 일본 외무차관이었던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에게 보낸 것인데, 하라는 나중에 총리대신까지 지낸 유력 인사였다. 우치다란 인물은
국내학계에 알려져 있으나 을미사변 이후 행적 등은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문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보고서의 작성 시점이 을미사변 범인들에 대한 히로시마 재판이 열린 1896년 1월 20일보다
1개월 앞선 점을 주목해야 한다. 히로시마 재판 법정에는 우치다 문건과 같은 내용이 전혀 제출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 보고서에서
보듯이 진상을 파악하고서도 그동안 철저히 숨겼다는 것이 된다.” ―우치다는 동학운동을 주도한 전봉준(全琫準)이 체포된 뒤 신문을 했던 경력의
소유자인데? “이 사건과는 별개로 놓고 보아야 한다.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솔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문건은 어떻게 찾아냈나?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한·일관계 자료를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 모두 네 권으로 이뤄진
문서철의 일부다. 문서철의 다른 부분에는 공판 기록과 다른 조사 기록들이 있다.” ―보고서에 실린 지도에서 또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나? “그동안 일부 그림에서만 존재 여부가 알려졌던 경복궁 내 ‘시계탑’이 건청궁 서쪽에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궁궐 안에 신문명의 상징을 세웠다는 것은 당시 왕실의 개화 의지를 보여준다.” ―명성황후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명성황후가 ‘나라를 망친 여인’ 정도로 폄하됐던 것은 일제가 주도한 역사 왜곡의 결과다. 실제로는 고종의 개화 정책을 도와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긍정적인 인물로 봐야 한다.”
日帝 기밀문서에서 드러난 진상 高宗 침소밖 10m 땅바닥서 황후를
난도질
입력 : 2005.01.13
03:57 47'
늦가을 새벽, 조선의 황후는 침전 바깥 뜰 위로 내팽개쳐진 뒤
난자(亂刺)당했다. 새로 밝혀진 일본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는, 명성황후의 최후가 지금까지 뮤지컬이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위엄을 갖추고 실내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12일 기자가 찾은 명성황후 시해 장소인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는 내년
6월까지 계획된 복원공사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1929년 일제에 의해 철거된 건청궁 터에는 공사를 위한 잡석이 수북이 쌓여
있었을 뿐 을미사변의 비극적인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복원현장 사무소측은 “발굴 결과 을미사변 당시 이곳 마당은 박석(薄石)을 깔지
않은 흙바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우치다의 보고서를 토대로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여기서 일어났던 비극을 재구성해
본다. ◆폭도들, 경회루 서쪽을 통해 난입 새벽 5시, 60여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광화문 앞에 나타났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일본 견제에 나선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9월에 조선공사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은 일본인 검객과 낭인패들을 불러모아 경복궁 난입 작전을 세웠다. 폭도들은 광화문 안쪽에서 기다리던 일본 수비대의 협조로 광화문을 열었다. 일본 수비대와 폭도들의 진격로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번 보고서에선 광화문을 통과한 일본인들이 흥례문(興禮門) 서쪽의 용성문(用成門)을 통해 침입한 뒤 경회루 서쪽으로 나 있던 도랑을 따라 들어가 신무문(神武門) 앞을 지나 건청궁까지 이른 것으로 표시했다.
◆흙바닥 위에서 황후를 짓밟고 찔러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과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
장군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건청궁에 난입한 폭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황후가 어디 있느냐”며 윽박질렀다. 일본인들은 황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황후와 용모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궁녀 3명도 살해했다. 일본인들은 건천궁의 한 지점에서 황후를 찾아내 내동댕이친 후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함께 칼로 찔렀다. 지금까지는 ‘방안에서 황후를 보았다’는 증언이 많았기 때문에 살해 장소가 곤령합의 일부인
옥호루(玉壺樓)일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번 보고서는 이 장소가 침전 밖 흙바닥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은 그때 고종이
머무르고 있던 장안당(長安堂)의 뒷마당이었고, 장안당에서 시해 지점까지는 불과 10m 정도였다. 그럼에도 고종이 명성황후가 죽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시신을 불태운 곳은 녹산 폭도들은 죽은 네 여인 중에서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이번 보고서는 그동안 피살 장소로 알려졌던 옥호루가 임시로 시신을 안치한 장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 뒤 궁에 들어온 미우라는
이곳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화장을 지시했다. 그동안 폭도들이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웠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보고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남쪽 지점에 표시했다. 우치다는 “타고 남은 땔나무들이 아직도 녹산 남쪽에
흩어져 있었고, 그 곁엔 무엇인가 파묻은 자리가 보였다”고 썼다.
아! 명성황후 입력 : 2005.01.13
17:54 35' / 수정 : 2005.01.13 19:17 16'
110년 전인 1895년(을미년) 10월 7일 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선 파티가 벌어졌다. 명성황후가 친정 조카인 민영준이 궁내부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해 베푼 자리였다.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처참한
궁중 비극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일어났다. 일본 낭인 60여명이 새벽 6시쯤 국왕 부부의 처소인 건청궁에 난입,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운
것(을미사변)이다.
▶낭인 무리 중에 후지카쓰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8·15 광복 후 죽었을 때 집에서 길이 120㎝ 가량 되는 칼이 하나 발견됐다.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계속 ‘민비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떨고 있는 궁녀들 중 용모와 복장이 아름다운 두 명을 참살했다. 또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 옆방의 옥호루로 끌어내 살해했다.…’왕비의 관자놀이에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세 구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쓰노다 후사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던 지엄한 국모였다. 폭도들 중 하나였던 고바야가와는 “방 안에 들어가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 위에는 짧은 흰 속옷만 입고 있었고 아래는 흰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는 맨살이다”고 썼다. 또 한 사람의 폭도 이시즈카 에조는 “정말로 이것은 쓰기 어려우나…”하며 황후를 향해 말 못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을 고백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전하는 또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당시 서울 주재 일본 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옥호루 실내에서가 아니라 마당에 끌려가 여러 사람이 짓밟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것이다. 시해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황후가 누구인지 목표를 정하고 군사작전하듯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진실의 일부일 뿐이다. 폭도들 중에는 하버드대학과 도쿄대를 나온 지식인, 훗날 국회의원 장관 외교관을 지낸 인물들도 많았다. 시해의 주모자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권력의 핵을 이루고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실무책임은 육군 중장 출신 주한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맡았다. 그러니 사실상 일본 정부가 저지른 범죄였다. 폭도들은 훗날 형식상으로 재판에 회부됐다가 모두 풀려나 영달의 길을 걸었다. 힘이 없으면 언제 능욕을 당할지 모르는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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