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뭔지 좀...] - 우리가 ‘환만주 문화권’ 중심이었다‘

이강기 2015. 9. 17. 18:49
 
 
우리가 ‘환만주 문화권’ 중심이었다‘



다이내믹한 묘제가 나타난 체르냐치노 5유적의 발굴 당시 모습. (정석배 교수)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옥저 쪽구들 아궁이. (정석배 교수)
청동기시대 고조선~발해 2000년…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

선사시대와 초기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는 크게 3개의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유목 문화권, 중국의 중원 문화권 그리고 동북 3성과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한반도를 포괄하는 가칭 ‘환(環)만주 문화권’이 그것이다.

우리의 활동공간이 ‘환만주 문화권’의 중심지인 만주였던 때는 청동기시대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근 20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아마도 청동기시대 이전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에도 ‘환만주 문화권’ 지역은 우리 선조들의 중심 활동공간이었을 것이다.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중심 활동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것은 장구한 역사에서 본다면 불과 1000년 남짓할 뿐이다. 아니, 이 시기에도 간간히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은 역사·문화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활동공간 그 자체였다.

역사시대에 한반도는 중국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가 올라갈수록 우리 문화는 서쪽의 초원지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과 훨씬 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한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요녕지역과 중국을 포함하여 유공부라는 도끼가 있다. 날이 있고, 등 쪽에 날과 일직선상으로 소켓 모양으로 자루 구멍이 뚫려 있는 도끼다. 이 도끼는 알타이지역에서 발원한 세이마-투르비노 문화에서 기원한다. 기원전 17~15세기에 심을 넣어 대롱 모양의 창과 도끼를 주조할 수 있는 복잡한 모양의 거푸집을 발명한 세이마-투르비노인들은 전사 집단으로서 나중에 서쪽으로 핀란드지역까지 이동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은허에도 유공부가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동쪽지역으로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 무인들의 투구에 쇠뿔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시베리아 하카시아-미누신스크 분지의 신석기시대 후기 타스민 문화 석상에 보면 사람 얼굴에 쇠뿔 모양의 뿔이 머리에 양쪽으로 달려 있는 표현이 많다. 신라의 금관에 보이는 출(出)자 모양의 문양 모티브는 시베리아와 몽골의 동기시대 유물에서도 적지 않게 보인다.

마제석검의 수수께끼적 현상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한반도, 중국 동북 3성 그리고 연해주지역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 있다. 마제석검이 그것인데, 이 마제석검은 중국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고, 유목 문화권에도 보이지 않는다. 환만주 문화권에만 특징적인 현상이다.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마제석검이 초원 유목민 문화의 청동단검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마제석검은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된다. 부여 송국리 석관묘에서 함께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마제석검이 그 좋은 예다. 청동 단검과 마제석검을 제작한 집단은 두 종류의 단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청동으로 주조해서 비파형 동검만 만들고, 돌을 갈아서 아카나크 식의 마제석검만 만들었을까.

아키나크식 마제석검 이전에는 검신이 세장한 삼각형 모양인 마제석검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의 동검과 형태가 흡사하다. 두 가지 계통의 주민들이 한 곳에 거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종류의 단검은 실용적인 기능을, 다른 한 종류의 단검은 의례적인 역할 혹은 상징적인 기능만 가졌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북방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반도 및 ‘환만주 문화권’은 초원 유목 문화권 및 시베리아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사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화들은 항상 서쪽에서 동쪽, 북쪽에서 남쪽으로만 전파되었을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나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건국의 주체들이 모두 북쪽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첨저 혹은 원저의 토기를 보이는 시베리아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세로보 문화는 한반도의 첨저 빗살무늬토기보다 연대가 오히려 더 늦다. 두만강 가까이에 자리 잡은 연해주 보이스만 문화 인골은 형질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신석기시대 전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주민들의 이동이 있었고, 지금의 에스키모인들은 바로 두만강 유역에서 이주한 보이스만 문화인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몽골의 거란성터 주인공은 발해 유민

최근 조사하고 있는 몽골의 거란 성터도 마찬가지다. 발해 멸망 후에 몽골로 잡혀간 발해 유민들이 몽골지역에 발해 계통의 성터를 쌓고, 선진 발해문화를 퍼트렸음은 자명한 일이다. 유사성이 반드시 문화의 전파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문화집단 간의 관련성 혹은 친연성은 입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한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전파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사실 중국은 우리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 북방과 서방 그리고 동방의 모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 등 당연한 우리의 북방역사가,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상 흔적을 보이는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는 아직은 적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도 러시아 연해주에서 올해까지 5년 동안 매년 여름에 발해 유적을 조사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발해 체르냐치노 5 고분군에서는 발해의 고분을 120여 기 조사했고, 체르냐치노 2 주거유적에서는 발해와 옥저의 쪽구들을 조사했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답사를 거듭할수록 발해와 고구려와의 관련성, 계승성은 더욱 드러나고 있다. 특히 쪽구들은 옥저에서 기원하여 고구려로, 발해로 그리고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고 지키는 데도 힘이 부치지만, 점차 문헌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정석배|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문화유적>
(뉴스메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