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삼국의 개화사상
하 원 호 (성균관대학교) 1. 들어가는 말 19세기 후반에 들어 동아시아의 韓中日 삼국은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 근대로 이행되고 있었다. 서구문명의 충격은 삼국의 전통사회 전반에 변화를 강요했고, 삼국은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새로운 사유체계가 필요했다. 그러나 전통을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했고, 전통의 연속선상에서 근대를 수용하는 새로운 인식론이 요구되었다. 아무리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충격이 강력하고 서구의 근대문명이 보다 높은 사회적 생산력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空間은 전통 사회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의 단절과 연속의 위기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각기 자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새로운 인식론을 제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중국의‘中體西用’, 한국의‘東道西器’, 일본의‘和魂洋才’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사회의 도덕이나 사회체제를 각기 體, 道, 魂으로 설정하고, 서구의 근대문명을 用, 器, 才로 하여 전통사회에 근대 서구 문명을 접목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근대화 사상은 삼국 상호간 유사성을 띠면서도 각기 고유한 역사적 조건과 관련해 내적 논리에서 차이가 있었고, 시기적으로 논리의 변화과정도 각기 다르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中體西用論, 東道西器論, 和魂洋才論이 모두 전통의 단절과 연속이란 역사적 과정에서 나왔다는 외면적 유사성에만 주목할 수는 없다. 실제로 상호간 차이는 삼국의 근대화과정을 달리 하게 하고, 근대 이후 삼국이 각기 다른 역사적 진행을 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삼국의 開化思想, 곧 근대화 사상으로서의 中體西用, 東道西器, 和魂洋才의 내적 논리와 그 변화를 각국의 역사적 조건과 관련해 살피고, 나아가 상호 대비해 봄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근대이행과정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2. 삼국의 개화사상의 전개 1) 중국의 中體西用 阿片戰爭에서의 참패 이후 중국인의 서양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졌고, 林則徐나 魏源은 서양의 長技인 기선이나 대포의 제작을 배우자는 海防論의 입장에서‘師夷長技’를 주장했다. 해방론은 中學에 대한 독자적 西學의 영역을 인정한 것은 아니어서 본격적 의미의 중체서용론은 아니었다.1) 1860년대 양무운동이 전개되는 초기만 해도 여전히 해방론의 연장에 있었다. 하지만, 1861년 馮桂芬은 “중국의 倫常名敎로써 근본을 삼고, 諸國富强之術로 그것을 輔한다”고 하여 西學의 선진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배우자고 했다. 풍계분에 의한 中學과 西學의 관계 설정은 중체서용론의 단서를 제공했다고 평가된다.2) 1860대 후반에 이르러 洋務派들은 程朱學派 관료인 倭仁일파와 同文館의 天文, 算學館의 설치논쟁 등을 거치면서 서구의 근대문물을 만들게 된 자연과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자연과학과 기술이 중상주의적 부국강병의 방법으로서 인식되자 자연과학의 公利的 성격이 궁극적으로는‘中體’인 정주학적 가치체계에 대립되는 요소로 인식한 왜인일파의 수구적 淸議論은 유교적 윤리와 政體를 고수하는 입장에서 이에 반발하게 되었다. 양무파의 입장에서는‘西用’의 실용적 측면을 받아들여 서학이란 독자적 학문체계를 中西의 보편적 공리로 수용하고 그 도입을 촉진할 필요에서 중체서용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기 중체서용론은 ‘中體’의 구체적 내용 및 서학과의 모순 측면에 대해서는 근본적 인식과 해결을 추구하지 않았다.3) 1870-80년대의 양무운동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수용하기 위해 근대적 상공업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0년대에는 서양의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정치제도와 인문사상까지 중체서용의 내용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1880년대 후반에는 서구의 정치체제를 수용하고자 하는 초기변법론이 나타났다. 초기변법론자들은 의회 중심의 행정 개편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무파의 서양 기술문명 수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근본적 개혁을 통한 정치체제의 개선이 아니라 의회라는 서양의 부분적 제도를 분리해 중국의 정치제도에 결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戊戌變法派와 달랐다.4) 이들의 정치제도 개선은 여전히‘西用’의 범주에 있었다. 청일전쟁 패배 후 급진 변법파는 서양의 정치제도를 도입해 중국 政體를 개혁하려 했다. 초기변법파가 의회나 선거라는 제도를 君民 결합에 이용하는 수준이었던 반면, 무술변법파는 民權이나 憲法을 주로 거론했다. 민권이나 헌법은 중국의 전통적 전제정치에 대한 견제나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이들의 변법은‘중체’에 대한 침해를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때문에 보수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성공할 수 없었다. 康有爲를 비롯한 무술변법파에 의한 구체제의 위기는 보수파로 하여금 중체서용론의 내용을 재구성하게 했다.5) 1898년에 발표된 張之洞의 ??勸學篇??은 이 시기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중체서용론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힌다. 하지만 장지동의 경우‘중체’는 유교적 윤리와 政體였고, 그의 중체서용론은‘중체’를 개혁하려는 무술변법파의 기성체제 도전에 대한 반론이었다. 따라서 양무운동 단계의 중체서용론은 서학의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청의론에 대항해 서양의 근대적 생산력을 받아들이는‘서용’에 강조점이 있어 근대화 과정의 사상으로 기능했지만, 변법운동 당시의 중체서용론은‘중체’를 지키려는 보수적 논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2) 한국의 東道西器 大院君政權은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던 중국의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외세의 침략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쇄국정책과 천주교탄압은 그 결과였고, 이러한 정책은 반사적으로 자본주의 세력의 적극적 침략을 유발하여 프랑스에 의한 丙寅洋擾(1866)와 미국에 의한 辛未洋擾(1871)가 야기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중국으로부터 魏源의 ??海國圖志?? 등의 책이 들어와 지식인에게 널리 읽혀졌다. 그런데 대원군 정권기의 초기 개화사상은 海防論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책이 대부분 해방론을 다룬 것이었고, 대표적 초기 개화사상가인 朴珪壽도 北學사상을 토대로 국내의 海防論과 중국의 해방사상을 절충수용하면서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6)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 華夷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斥和論者들과는 달리 박규수는 화이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박규수는 김옥균 등 후일의 개화파에게 ??燕巖集??을 강의하고 청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견문에 의한 세계의 동향과 신사상을 고취시키면서‘時務의 學’에 힘쓸 것을 권하고 그들을 지도했다.7) 박규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西法이 동으로 오면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東敎가 서양에 들어갈 조짐이 있어 오랑캐와 禽獸가 장차 모두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8) 그는 서법과 동교를 대비적으로 사고하고, 그 동교가 장차 서양으로 스며들어 서양인까지 교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이렇듯 동교의 손상없이 서법의 수용을 인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박규수는 동도서기론의 단초를 열어간 인물이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국제정세와 외국의 근대문물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富國强兵의 개화정책이 국가적 정책으로 수용되어 갔다. 하지만 西學의 도입을 반대한 유생을 비롯한 척사론자들은 개화정책에 격렬하게 반발하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했다. 東道西器論이 그것이다. 동도서기론의 논리구조는 申箕善의 ?農政新編序?(1881)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西法이 곧 西敎인 기독교를 가리킨다거나, 서법의 수용이 곧 서교의 수용과 같다는 주장을 반박해서 法이란 문물제도라는 의미의 器, 또는 그것을 제작?운용하는 방법을 말하고 敎는 학문?사상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道와 같은 것, 또는 道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법 또는 서기를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東道를 서교나 서도로 대체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는‘道器相分’의 사고로 귀결된다. 그는 다시‘道器相須’의 논리로 도와 기가 서로 구분될 뿐 아니라 항상 맞대어 있다고 하여 동도와 서기가 서로 결합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도기상수’의 경우에도 동도가 서기보다 우선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근대적 생산력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서기로 인해 동도가 침해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9) 그런데 임오군란이후 청국군대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내정 간섭을 시작하자 金玉均 등은 청으로부터 정치?문화적으로 독립을 주장했다. 청의 압력이 가중되어 가고 민씨척족들이 청과의 연계 속에 김옥균 등 변법개화파를 권력의 핵심에서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이 주장은 더욱 강화되었고 변법개화파는 1884년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이들의 사상적 지향은 중국의 변법운동론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중국 변법운동과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지향이 유사했던 점은 무엇보다 개혁의 모델이 같았기 때문이다. 양자는 모두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의 모델을 일본의 명치유신에서 구했다.10) 김옥균은 일본의 근대국가로의 발전근거를‘변법’에서 찾았다. 그는 ??治道略論??(1882)에서“또 들으니 일본이 變法한 이후로 모든 것을 更張했다[又聞日本 自變法以來 更張萬端]”고 한다. 이 변법은 명치유신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근대적 정치체제, 곧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지적하는 것이다.11) 그리고 변법은 종래의 정치체제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정치적 실천을 담보하여야 했고 이 점에서 청국 변법운동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변법개화파의 경우‘東道’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명치유신과 같은 정치체제의 개혁까지 지향하였기에 이 단계에서의 ‘동도’에 대한 침해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변법개화파의 法은 신기선을 비롯한 동도서기론의 器=法과 같은 개념이 아니고, 道와 대칭되는 의미라고 보기도 어렵다. 김옥균을 비롯한 변법개화파들은 당시 福澤諭吉 등 일본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동도에 대한 집착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동도서기론자들은 오히려 유교적 근본주의에 집착해 개화나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동도서기론이 처음부터 전통적?유교적 사고로부터 이탈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화가 일반화 되어가는 역사적 추세와 관련해 동도서기론자들이 서기수용보다는 동도보전의 논리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도서기의 논리는 대한제국의 光武改革에서 변형된 형태로 나타났다. 광무개혁의‘舊本新參’은 논리적으로 동도서기론의 연장에 있었다. 그런데 전통적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독립협회 등의 의회설립운동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專制皇權을 오히려 강화했다. 광무개혁은 정치체제에 관한 한 전통적‘동도’에 집착했고, 그 결과 개혁의 주체를 황실로 한정시킴으로써 식민지화로 길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일본의 和魂洋才 화혼양재론의 단초로 인정되는 佐久間象山의 ‘東洋道德, 西洋藝’란 개념은 1850년대에 이르러 攘夷派와 開國派가 분열하는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兵學의 대가이자 주자학의 신봉자인 佐久間象山은 서양과의 기술격차가 분명해짐에 따라 攘夷를 실현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서양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道理的인 것[所當然]으로서의 理는 여전히 주자학적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理의 物理的인 측면[所以然]으로서의 理를 서양의 학문에까지 일반화시킴으로써 서양기예의 수용을 합리화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理는 여전히 하나일 뿐이고, 유교는 자연과 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르침이었다.12) 결국 동양도덕?서양예술론은 유교, 그 가운데서도 주자학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일본의 개국론은 吉田松陰의 화혼양재론에 이르러 일본적인 특색을 많이 가미되었다. 그는 佐久間象山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무기와 군대조직의 수용을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유교의 經學을 중시하지 않음으로써 聖賢의 敎를 옹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神道思想을 핵심으로 하는 後期水戶學과의 접촉을 통해 尊王心을 확립하고 막부 타도의 행로를 열어갔다. 원래 일본고대의‘和魂’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선진중국문물에 대비되는 일본인의 심성,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의 지혜, 능력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천황과 결부된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다가 近世 國學者에 의해 처음으로 천황의 萬世一系의 정치전통 속에서‘화혼’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태동했다.13) 이 영향 아래 유교적 이념과 사회체제를 中體나 東道로 보는 중국과 한국과는 달리 吉田松陰은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和魂’의 개념을 일본 근대화사상에 접목시켜‘화혼양재’의 개념을 정립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세계에는 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라는 道가 존재하고 이는 만국에 공통되지만 일본의 君臣之義는 만국보다 탁월하다. 이것이 황국의 國體(『講孟箚記』)”14)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되는 점은‘東道’의 보편적 이념과‘和魂’의 특수성을 분리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점이다. 그런데 명치유신이후 일본에서는 중국과 한국과는 달리‘동도’에 대한 집착이나‘洋才’의 수용에 대한 저항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880년대 福澤諭吉의 脫亞論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일본의 인식론적 맥락과 맞닿아있다. 문제는‘화혼’의 정립과정이었다. 이미 幕府打倒 뒤에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天皇의 왕정복고는 정치체제에서 커다란 갈등 없이 입헌군주제를 수용하게 했다. 따라서 정치체제 면에서 變法은‘화혼’과는 무관한 논리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화혼’은 전통에 假託해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명치시대‘화혼’론을 일원화시키는 계기는 1879년 明治天皇이 스스로 밝혔다고 알려져 있는「敎學大旨」의 반포이다.「교학대지」는 교학의 근본을 仁義忠孝에 두고 이를 기반으로 지식, 才藝를 궁구해야 함을 강조했고 전문에는 인의충효, 君臣父子의 大義가 교육의 근본에 자리 잡아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儒學을 중시해야 함을 역설했다.15) 1881년에「교학대지」의 이념에 입각한『修身』교과서를 저술하여 이의 실천을 주창한 인물은 西村茂樹이다.16) 그의 저서인 『日本道德論』은 동서양의 사상과 역사적 경험을 인용하면서 결국에는 유교적 실천덕목을 완성시킨 저작으로 明治 시기 기본교육이념을 구현했다고 평가된다. 그는 서양의 학술,정치,법률은 우수하다고 보면서도 도덕,풍속,습관 등은 동양이 서양을 능가하는 것도 많다고 하여 일본의 장점은 양성하고 서양인의 우수한 것은 취해야한다고 주장했다.17) 그의 화혼양재론은‘화혼’의 강조가 전통적 정치체제의 수호에 있지 않았고‘양재’의 범주도 서양의 기술문명만이 아니라 정치사회 제도까지도 수용하던 당시의 일본 국내 상황을 반영한다. 이 같은‘화혼’논리의 연장에서 1890년 敎育勅語에서는 천황에 대한‘忠’을 강조한‘忠孝一本論’의 형태로 단일화되어 國體論으로서의‘화혼’론을 성립시키고 있었다. 이 단계의 화혼양재론은 이미‘양재’의 수용이 문제가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의 內的 통합을 위해‘화혼’이 강조되었을 뿐이다. 그 결과 1905년 『海軍讀本』의‘大和魂’에는“君을 위해, 국가를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던지고 나의 가족도 一身도 돌아보지 않는 氣象이야말로 우리 大和魂으로서 이를 애국심이라고도 한다”18)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일본의‘화혼양재’는 明治시대를 거치면서‘양재’의 수용은 전혀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고 천황제에 충성하는‘화혼’의 논리만이 남게 되어 근대 일본의 軍國主義 체제를 가능하게 한 사상으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3. 동아시아 개화사상의 역사적 성격 삼국의 개화사상은 서구 열강의 침략이 강요한, 전통사상과의 단절과 연속의 시점에서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사유체계였다. 물론 그것은 외면적 類似性과는 달리 각국의 역사적 조건과 관련해 그 논리의 內包나 外延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용되었고, 역사적 의미도 각기 달랐다. 뿐만 아니라 그 차이는 삼국의 근대화 과정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 차이점에 대한 검토는 동아시아 내부의 역사적 전개과정의 차별성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동아시아 개화사상의 역사적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중체서용론과 한국의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사회규범과 專制的 정치체제인‘중체’나‘동도’를 전제로 한‘서용’과‘서기’의 수용이다. 물론 초기에는 西學의 수용을 목적으로 한 역사적 順機能을 가진 것이었지만, 서양의 근대적 생산력의 수용이 일반화되고 정치체제의 변용을 요구하는 變法으로 발전하게 되면 오히려 東道에 집착하는 보수적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한국의 경우‘舊本新參’을 내세우면서 대한제국이 전제황권을 오히려 강화했던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정치체제의 근대화를 수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의‘화혼양재’ 역시 초기적 형태는 역시 韓中과 다를 바 없었지만, 명치유신이후 입헌군주제가 수립되고‘양재’의 수용에 사회적 갈등이 거의 없었던 시기의‘화혼양재’는 정치체제의 문제와는 무관했고, 오히려‘화혼’은 일본의 근대국가 수립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화혼’은 일본의 근대 군국주의체제를 구성하는 바탕이 되었고 현재의 일본 사회의 보수성을 대표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근래 들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논의나 포스트 모던의 입장에서의 근대주의에 대한 반성은 그 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의 근대화 과정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게 한다. 동도서기론과 중체서용론, 화혼양재론은 각기 시기에 따라 차별성은 있지만 일정하게 유교적 근본주의?도덕중심주의의 영향 아래 논리를 전개하고,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중심으로 하여 부분적으로 근대 및 서양에로의 趨向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물론 각국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발전과정은 다르다. 하지만 삼국의 개화사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교문명이라는 동양사회의 특정한 문화?사상적 배경을 도외시할 수 없다. 근대와 전근대, 서양과 동양이 교착하는 상황에서 동양적 유교문명이 낳은 전형적인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동아시아의 문화적 유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면에 그 변용과정은 동아시아 내부의 각기 다른 역사전개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교라는 동아시아 문화의 외면적 類比에 무모하게 집착한 1990년대 儒敎資本主義의 한계에서 보듯이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적 차이를 전제하지 않은 유사성의 추출은 현재의 역사 전개마저 잘못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외면적 類比는 이미 동아시아의 범주를 넘어 세계사 속의 인간이 되어 버린 현재 동아시아인의 역사적 실체를 객관화시키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의 개화사상과 그 전개과정은 근대화의 결과로 볼 때는 20세기 각국간 세계체제 내에서의 차이를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가 前近代 역사진행과정의 優劣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문화충격에서 사상과 체제의 변화가 용이함은 그만큼 그동안의 사유체계가 현실세계를 이끌지 못한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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