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다른 나라에 폐 끼치는 중국이 大國이라니… 한국과 일본이 힘 합쳐야”-시오노 나나미

이강기 2015. 9. 23. 21:39
[독점 인터뷰]

‘로마인 이야기 ’ 전사 (戰士) 시오노 나나미
“다른 나라에 폐 끼치는 중국이 大國이라니… 한국과 일본이 힘 합쳐야”

 

 

 

서영아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 일러스트 최남진

 신동아2007.05.01 통권 572 호


승부 걸지 않는 남자는 매력 없다
말 많은 아베 총리는 지도자보다 남편감
‘다신교 일본인’이기에 ‘다신교 로마’ 들여다볼 수 있어
한국은 너무 원리주의적…이탈리아보다 프랑스 닮았다
일본의 해악은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
로마는 자유·관용 추구한 열린 제국, 중국은 닫힌 제국
한국엔 창조의 기반인 ‘잉여의 시스템’이 없다
문명, 가치관 공유 않는 아시아는 ‘공동체’ 이루기 힘들 것

 

15년 전의 일이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70)씨가 매년 한 권씩, 적어도 10권 이상 ‘로마인 이야기’를 써내겠다고 선언한 것이. 하지만 그때는 그 약속이 실현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아마 그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학생시절부터 품어왔지만 어디서도 답을 찾을 수 없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말하자면 ‘로마인 이야기’는 그 답을 스스로 찾기 위한 항해였다. 왜 로마인만이 민족이나 종교를 넘어선 보편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냐는 게 그 질문이었다.

그는 다른 일을 일절 끊고 로마 역사 살려내기에만 몰두해 지난해 말 제15권 ‘로마시대의 종언’을 펴냄으로써 약속을 지켰다. 그 사이 50대 중반이던 그는 어느덧 70세가 됐다.

로마가 건국된 기원전 753년부터 서기 565년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죽음까지, 1300년 동안의 로마사와 더불어 살면서 그는 유럽 생활에서는 당연한 여름휴가 한 번 쓰지 않고 취재와 저술, 편집에 몰두했다. 완간 인터뷰에서 그는 “혹 나쁜 병이라도 발견되면 일을 중단해야 하고, 일단 중단하면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간 병원에도 한 번 가지 않았다고 고백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취재 자료는 그 20년 전부터 모았다니, 말 그대로 ‘라이프 워크’인 셈이다.

15년 동안 병원도 안 가

시오노씨와는 네 번 만났다. 첫 번째는 지난해 말 제15권 완간을 기념해 도쿄에서 한 단체 인터뷰 때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3월26일과 28일,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모두 4시간에 걸쳐 대화했다. 4월2일에는 그로서는 15년 만에 한다는 도쿄의 하나미(花見·벚꽃놀이) 모임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까다롭고 기가 세기로 유명한 그이지만 자신의 방에 기자를 부르고는 “여자라서 좋은 점은 이럴 때”라며 손수 차를 끓여주는 모습은 이웃집 할머니 같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여느 할머니처럼 때때로 질문내용과 상관없이 옆길로 빠지는 얘기를 한참 하기도 했다. 26일에는 인터뷰 중간에 다른 약속이 있다며 벌떡 일어나 가버리기도 했다.

‘세계인’으로서 자유분방하고 열린 자세로 말하는 그에게서는 1300년 로마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작가다운 통찰력이 느껴지는 동시에 ‘역시 일본인’이란 점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로마의 역사 빼고는 잘 모른다는 걸 전제로 하긴 했지만, 국제 문제라든지 한일관계 등에 대한 언급에서는 일본 중심적인 대목도 적지 않았다.

▼ 완간 이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지난 연말보다 얼굴이 좋아진 듯합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실직상태라고 할 수 있죠. 아직도 얼이 빠진 상태입니다. 1년간은 쉴 생각입니다.”

▼ ‘로마인 이야기’를 쓰는 15년 동안 단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몇 달 쉬면서 검진은 받아봤습니까.

“아뇨. 이 나이면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게 당연할 거고 알아봤자 마음고생만 할 뿐이죠.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데 억지로 오래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눈이 너무 나빠져서 눈 검사를 받으려 합니다. 작가 생활을 하려면 눈만은 괜찮아야 하니까요.”(시오노씨는 4월8일 로마로 돌아갔다.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안과 검진 결과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됐다고 한다. 5월에 다시 일본에 와서 수술을 받을 예정이란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대단한 멋쟁이다. 늘 고급 정장 차림에 화려한 액세서리로 단장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좋은 향수 냄새를 풍긴다.

▼ ‘로마인 이야기’는 흔히 지도자론이자 조직론, 국가론이라고 평가됩니다. 그중에서도 리더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죠. 시오노씨는 이상적인 지도자로 로마 제국의 토대를 닦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꼽는 것으로 압니다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지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지속하는 의지, 자기제어의 다섯 가지를 갖췄습니다. 경제와 외교 등 여러 분야에 정통했고 귀족 출신이기에 오히려 혁신적일 수 있었지요. 바람둥이에 낭비벽이 있다는 점도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극적입니다. 타인에게 자극을 준다는 뜻이지요.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권력은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힘이 됩니다.”

▼ ‘로마의 국부(國父)’로 일컫는 동시대의 보수 정치가 마르쿠스 키케로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지방 출신 수재입니다. 변호사로 각광받다가 정계에 들어갔지만 로마의 엘리트로서는 신참이었습니다. 키케로가 왜 자신이 속하지도 않던 원로원파로서 수구파를 대표했는가. 인간이란 자신을 받아준 시스템에 은혜를 느끼는 법입니다. 난생 처음 엘리트가 된 키케로는 그 엘리트를 구성하는 시스템을 지키려 한 거죠.

반면 카이사르는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한 엘리트, 명문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 체제를 부수는 것에 저항감이 없었습니다. 키케로와 달리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고마워할 게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배경이 좋은 사람은 거기서 나오는 여유로 창조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나는 로마인’ 자부심

▼ 로마 지도자의 특징으로 무엇을 꼽습니까.

“지도자에게는 ‘현상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는 능력, 상대의 속을 읽는 인텔리전스’가 중요합니다. 카이사르는 시민이나 병사의 집단심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한 이도 카이사르죠.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평화는 먹을 것과 안전을 보장하는 안정된 국제질서의 형성을 뜻했습니다. 로마가 팽창한 것은 정복당한 패자(敗者)가 신질서에 적극적으로 동화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책은 로마의 건국단계부터 일관됐습니다. 카이사르는 그걸 명확히 한 것입니다.”

▼ 일종의 다국적기업 같군요.

“로마는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 도버 해협을 넘어선 브리타니아까지 통치했지만 당시 이들 지역 민족은 반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로마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여러 지역을 정벌하고 나면 그곳에 도로와 수도를 건설하고 빵을 배급했습니다. 빵은 일정한 배급소에 가서 줄을 서서 받으면 됐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에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줄을 서지 않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저는 로마인의 이런 면모를 사랑합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지요.

“로마의 힘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인프라 구축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공회당 같은 공공시설 유적은 많지만 개인의 성 같은 건 없습니다. 현대 로마인은 유럽의 거대한 성을 보고 감탄은 할지언정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한 개인을 위해 저렇게 큰 성을 짓다니, 대신 우리는 다른 걸 지었다’는 겁니다. 이런 공공건물들은 대개 로마의 리더들이 평생 모은 재산으로 지어 국민에게 기부한 것입니다.”

▼ 로마는 일종의 다국적기업이었고, 그 소프트웨어는 ‘로마법’이라고….

“노력하면 누구나 로마 시민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다국적 기업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하드웨어로는 ‘로마 도로’라는 고속도로망이고 소프트웨어로는 로마법이었습니다. 5현제(賢帝)의 한 사람인 트라야누스는 먼 데서 오는 메일에도 일일이 답장을 하는 세심한 사장이었고, 하드리아누스는 그 지점망 전부를 돌며 사원을 격려하는 정력적인 사장이었습니다. 황제의 얼굴과 표어를 새긴 화폐는 시정방침을 전하는 미디어였죠.”

▼ 역사를 만든 사람들, 승자는 어떤 점에서 보통사람하고 달랐다고 봅니까.

“역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해야겠죠. 좋은 자질을 타고났어도 자신의 시대와 맞아야 리더로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금 부족해도 시대를 잘 만나면 그런대로 한세상 보내기도 하지요. 역사에는 시대와 맞지 않아 스러져간 리더도 무수합니다. 저는 그들에겐 그들대로 애정을 느낍니다. 승리에도 방정식은 없습니다. 훌륭한 전술, 전쟁에 이기는 시스템을 찾아낸다고 해도 싸우는 방식은 적(敵)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장에 따라서도 달라지죠. 다만 승부 걸지 않는 남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 로마가 ‘평화’를 실현했다고 하지만 수많은 전쟁도 치러야 했습니다.

“로마인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기고 난 뒤에는 양보했습니다. 이긴 뒤에 양보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기지 않고 양보하면 질서가 생기지 않으니까요. 요즘 사람들이 모여서 민주적으로 토론해 평화를 얻겠다는 시도가 많지만, 세상은 평화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만 있지요. 로마인은 피정복민에게도 시민권을 주고 과감히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피정복민 출신 로마 황제가 줄을 이었지요.”

정치가는 지옥을 봐야

▼ 전쟁은 많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 아닐까요.

“로마는 전투보다도 병참을 중시했습니다.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으면 최고였죠. 대개 전쟁에서 승리 여부는 지도부가 얼마나 모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편 군사나 백성이 얼마든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이기는 거죠. 반면 로마는 전략전술을 중시했습니다.”

▼ 살아 있는 리더 중에 예를 들면 어떨까요. 가령 일본의 정치가는 어떻습니까. 특히 시오노씨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 친한 것으로 압니다만.

“고이즈미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말하더군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마키아벨리의 ‘지도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숙지하고 있어야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라고. 그래서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고 지도자 본인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다, 괜찮냐’고 했더니 웃더군요. 정치가는 선인(善人)이 아닙니다. 지옥을 봐야 합니다. 또 정치는 결과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지 의도는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길만 말하는 사람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밖에 모른다며 다같이 손잡고 천국으로 가자고 하면, 자칫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게 됩니다.”

▼ 역시 차가운 리얼리즘의 세계군요. 일본의 경우 지난해 고이즈미 총리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로 바뀌면서 ‘리더 한 사람으로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베 총리는 변화구를 던질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한결같으면 질려버리지요. 정치는 필연적으로 싸움이고 드라마입니다. ‘고이즈미 극장’ 운운하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정치에는 싸움도 연출도 필요합니다. 그게 싫고 못하겠으면 정치가가 아니고 관료를 해야지요.”

▼ 아베 총리는 고이즈미 전 총리의 후계구도 아래 총리가 됐는데 어떻게 봅니까.

“내가 보는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후계 구도는 예수에서 베드로,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 가는 것입니다. 성격상 상반되는 인물이 전임자의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고이즈미▼ 아베의 후계 구도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하겠습니다(웃음). 보통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죠. 고이즈미씨는 그걸 믿었을 겁니다.”

 

아베 총리 말은 절반만 통역해야

▼ 지도자의 ‘말’에 초점을 맞춰봐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아베 총리가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협의의 강제성’이라고 한 발언 때문에 국제적으로 시끄럽습니다. 어찌 보면 미국이 ‘인권’이란 점에서 가장 반발하는 듯한데요.

“요즘 아베 총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지나치게 성심성의껏 설명하려 하는 데다, 속마음을 숨기질 못합니다. 최근의 위안부 발언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정치가는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돼선 안 됩니다. 아랫사람들에게도 불행이지요.”

▼ 고이즈미 전 총리의 ‘원 프레이즈 정치’(One Phrase Politics)와는 정반대인 셈이죠.

“위로 갈수록 해서는 안 될 말이 많아지고, 그걸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말이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고이즈미씨는 말을 잘 고른 편입니다. ‘원 프레이즈 정치’는 명료하게 말하되 기실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대중이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옳은 판단을 하는 편입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엉망이 됩니다. 성심성의껏 속을 드러내는 아베 총리는 지도자보다는 남편감으로 적당하지만, 고이즈미 같은 사람이 남편이라면 고생이 많을 겁니다(웃음).”

그에 따르면 과거 일본의 정치가들은 확실한 어조로 말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고이즈미 전 총리만은 사물을 확실히, 감성에 호소해 말하곤 했다.

“고이즈미씨의 특징은 단순화에 있습니다. 단순화한다는 것은 본질을 명확히 한다는 겁니다. 우정(郵政) 민영화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에 대해서는 아마 끝끝내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국민이 본 것은 이 정치인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정치가는 ‘도망갈 구멍을 찾는’ 것으로 비칩니다. 일본인이 고이즈미 총리 시절 우정 민영화를 주제로 해서 선거를 치른 것은 큰 경험이라고 봅니다. 지금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내려가는 것은 곧 뭘 좀 확실히 하라는 국민의 요구가 반영된 때문입니다. 다들 헤매는 상황에서 지도자마저 헤매면 나라가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 아베 총리에게 조언을 한다면.

“아베 총리가 고이즈미 총리를 흉내 내려 하면 안 됩니다. 천성이 다르니까요. 다만 제가 그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총리관저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관방장관으로 아베 총리와는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역 담당자로 유능한 사람을 기용해야 할 듯합니다. 아베 총리가 말하는 대로 일일이 통역하면 외국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절반으로 줄여서 명료하게 통역할 사람을 써야죠. 그게 일본의 국익에도 도움이 됩니다.”

통역을 잘 써야 한다는 그의 말이 기자에게는 실감나게 다가왔다. 본래 통역에겐 발언자의 말을 정확히 옮겨야 할 의무가 있을 테지만, 도쿄 특파원으로서 아베 총리의 모호한 발언을 들을 때마다 ‘저걸 영어로는 어떻게 통역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베 총리의 말을 축약해서 기사로 쓰려면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내용은 불분명하고, 얘기는 길고, 같은 말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로마인에게 일신교는 야만

▼ 두 전·현직 총리가 왜 그렇게 다를까요.

“아베는 늘 주류였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총리였고 아버지가 총리 직전까지 간, 유력 정치가의 집에서 자랐죠. 늘 입만 열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로 남의 말을 들으라고 교육받고 자랐을 겁니다. 게다가 천성이 착하고 사람을 잘 믿습니다. 반면 고이즈미씨는 세습 정치인이긴 해도 늘 비주류였습니다. 역경을 딛고 선 정치가죠.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남의 이목을 끌수 있을지 늘 연구했을 겁니다. 고이즈미씨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그가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속을 잘 아느냐’며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지요. ‘난 1300년간 얼굴도 본 적 없는 로마의 남자들을 상대한 사람이다’라고(웃음).”

▼ 주변의 보좌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지마 이사오(飯島勳)라는 비서관의 헌신적인 보좌를 받은 반면, 아베 총리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보좌하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치의 세계란 본래 이해관계의 이합집산이라고 하지만 역시 리더에게는 ‘인간의 매력’이란 게 작용합니다. 성실함도 그중 하나이지만 타인에게 자극을 줘야 합니다. 또 하나, 요즘은 TV정치의 시대라고 하지요. 일본의 정치가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TV에 출연해 말할 때는 브라운관 저편의 단 한 사람에게 말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수백 수천만이 보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하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뜻도 전달이 안 됩니다. 오직 한 사람, ‘바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수천만명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고이즈미 총리처럼 ‘우정 민영화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식의 발언을 할 수 있을까요?”

‘로마인 이야기’는 현대 문명에 대한 시사로 가득 차 있다. 시오노씨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를 말하면서 200여 년 동안이나 넓은 지역에 걸쳐 팍스 로마나가 이뤄진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한 바 있다. 또 그것은 로마가 왜 쇠망했는지 알고 싶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등 많은 로마사 관련 저술이 있는데 굳이 로마사를 쓴 이유는 동양인의 눈으로 본 로마사를 써보기 싶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금까지 로마사는 대개 기독교도가 썼습니다. 기독교도의 시각에서 로마사를 쓰면 다신교(多神敎) 시절은 야만의 시절이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는 문명의 세계가 됩니다. 기독교도가 쓴 로마사가 로마의 패망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로마가 융성했는지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유와 관용, 다신교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일본이나 아시아가 대부분 그렇듯 일신교(一神敎)가 아닙니다. 다신교인 사람이 바라본 로마사를 정리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지요.”

▼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가 역사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로마의 특징은 자유와 관용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타자를 존중하는 태도가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라는 문명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건 다신교로부터 나왔지요. 로마인은 정복당한 민족의 신조차 모두 자신들의 신으로 모셔 로마의 신은 30만에 달했습니다. 이는 자신과 다른 것에 관용적이고 수많은 융통성이 생겨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일신교는 나의 종교만이 옳고 남의 종교는 그르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지요. 로마가 멸망한 것도 기독교(일신교)를 받아들여 거기에 용해됐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종언(終焉)은 지평선 저 너머에 이슬람이 다가오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두 개의 거대한 일신교가 부딪치면서 중세가 시작됩니다.”

흥한 이유가 패망의 원인

▼ 로마의 흥성과 멸망의 원인은 결국 종교의 문제였다는 얘기군요.

“저는 ‘타인에게는 타인의 신이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누구나 생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신은 그것을 응원해줄 뿐인 것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는 인간의 생을 지배하는 것은 유일신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로마인에게는 독선, 즉 불관용으로 비쳤을 겁니다. 로마인의 눈으로 보자면 일신교의 계보는 야만입니다. 오늘날의 ‘순교(殉敎)’도 ‘성전(聖戰)’도 ‘자폭 테러’도 야만일 뿐입니다. 일신교에 의해 다신교 문명이 사라지면서 로마가 패망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 역사의 흥망성쇠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국가나 조직 융성의 요인은 무엇입니까.

“기백, 즉 스스로를 보는 긍지입니다. 가장 나쁜 예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밖에 적이 있는데 내부 싸움에 빠져 붕괴한 아테네, 피렌체 같은 나라가 그런 예입니다. 작은 문제에 집착하면 큰 것을 놓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일본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대표적인 예가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입니다.”

▼ 제15권 ‘로마시대의 종언’ 말미에 ‘제행무상 성자필쇠(諸行無常 盛者必衰)’라고 쓰셨죠. 로마의 패망도 일종의 운명이었다는 생각인가요.

“한때 국가를 흥하게 만들었던 요소가 언젠가는 패망으로 이끄는 원인이 됩니다. 조직이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줄곧 자신을 돌아보고 개혁해야 하지요. 그게 안 될 때 조직은 망하게 됩니다.”

▼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이 부딪치는 양상이 ‘중세의 재(再)도래’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종교가 마치 기독교와 이슬람교밖에 없는 것으로 비치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그래도 기나긴 중세와 십자군전쟁,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두 번의 대전을 치르면서 자기반성의 기회를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한 번도 실패를 통한 반성의 기회가 없었지요. 스스로에게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원리주의가 힘을 떨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원리주의는 스스로에게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에 실패하면 타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래서 더욱 무섭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동쪽 바다’는 곤란하죠”

▼ 한국에도 ‘로마인 이야기’의 독자층이 두껍습니다. 특히 오피니언 리더층이 애독하는 것으로 압니다.

“‘로마인 이야기’ 같은 어려운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한국의 독자 수준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니까요. 그만큼 지적 수준이 높은 독자가 많다는 얘기라고 봅니다. 저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는 15년간 다른 일은 일절 거부하고 ‘로마인 이야기’의 인세만으로 살았습니다. 일본에서 많은 작가가 하듯 문예지 등에 먼저 연재하고 그걸 모아 책으로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독자가 내준 인세가 저의 15년 작업의 기반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책을 사서 읽어준 독자는 지난 15년간 내 작업에 참여하신 셈입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지금까지 한국에 두 번 가보셨는데, 시오노씨가 보는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에 가면 향수 같은 게 느껴집니다. 옛날 일본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실감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바다가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바다가 지켜줘서 외부로부터 침략이 불가능했습니다. 또 도쿠가와(德川) 막부 300여 년 동안 국내도 평화로웠습니다. 그 사이 장기적인 시야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하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지요. 반면 한국은 조선 400년간 자체의 영속적인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대응만 해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바로 곁에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중국이 있어 항시 의식하며 살아야 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얘기가 잠시 곁으로 새나갔다. 그는 “일본해를 한국에서는 일본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데 맞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동해’라고 하며, 바다의 호칭을 놓고 양국 사이 갈등이 있다고 답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동해, 즉 ‘동쪽 바다’라니 곤란한 얘기네요. 일본에서 보자면 바다가 서쪽에 있는데도 동해라고 부르란 말인가요? 본래 인접한 지명은 국가마다 자기 식으로 부르면 되는 거 아닐까요. 가령 지중해(the Mediterranean Sea)는 로마가 유럽 남부와 아프리카 북부를 포괄하는 제국이던 시절, 그러니까 로마에 둘러싸인 바다라는 뜻으로 불리던 지명이지만 지금도 지중해입니다. 플라톤을 미국에서는 플루토라 부르고 소크라테스를 이탈리아에서는 소크라테라고 부르지만 다 알아듣습니다. 서로 편한 대로 부르면 되는 것 아닌지요.”

그는 한국과 일본 역사의 특수하고도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와 인터뷰하는 중간중간에 이런 식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배경설명을 해줘야 했다.

한국, 지속가능한 시스템 갖춰야

▼ 한국은 중국이란 ‘강대국’에 인접해 있지만 5000년간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해왔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에도, 지금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길을 모색하는 신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샌드위치 국가’라는 유행어도 있습니다.

“한국은 요리를 봐도 그렇고, 모든 점에서 ‘낭비(쓸데없는 노력)’가 없는 것이 문제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령 일본 요리를 보면 쓸데없는 데 공들인 것이 많습니다. 뭐 하러 이런 데 이렇게 재료와 노력을 들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먹지요. 하지만 실은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은 이런 쓸데없는 노력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돈이 되지 않는 일에도 10년 앞을 생각하며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거기서 훗날 효자 노릇을 하는 것들이 생겨나지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잉여적 요소’가 잘 안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여자 피겨 스케이트 시합을 예로 들었다. 마침 그를 만나기 이틀 전인 3월24일, 도쿄에서 세계피겨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일본의 안도 미키가 1위, 아사다 마오가 2위, 한국의 김연아가 3위를 한 대회다. 대회 첫날 김연아는 사상 최고점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손에 쥘 것으로 보였지만 둘째 날 경기에서 실수를 거듭, 3위에 머물렀다.

“나는 이번 대회에서 1, 2위를 한 일본 선수들보다 김연아가 한 수 위라고 봅니다. 우아(elegant)하기 때문이죠.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우아함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부분도 아니지요. 다만 김연아가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요? 일본은 1등은 아니어도 비슷한 수준에 있는 선수가 5명쯤 있어서 한 사람이 망가지면 다른 사람이 도전합니다. 한국엔 누가 있습니까. 무언가에서 한 번 승리하는 것은 쉽지만 그걸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시스템을 마련해야 지요. 영화건 경제건 모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 한국이 워낙 여유없이 살아온 탓인 듯합니다. 당장 지금도 북한 핵 문제 등 동아시아 정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가끔 한국(북한을 포함해)은 너무 원리주의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거다’ 하면 그것밖에 모르고, 유연성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이탈리아인보다는 프랑스인과 닮았습니다. 요즘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미국에 반대하면 선(善)’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지요. 결과적으로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강박관념이랄까 원리주의는 사실 강자의 위협에서 오는 측면이 있습니다.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고 역사의 풍파에 시달릴수록 어떤 크고도 기댈 만한 원리에 집착하게 됩니다.”

 

아시아는 ‘체면 문제’에만 열중

▼ 이상주의에 치우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불씨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는 유럽연합(EU)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봅니다만.

“본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접한 나라끼리는 사이가 안 좋은 법입니다. 유럽은 무려 1000년 동안 서로 전쟁을 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쳤지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성으로 ‘최소한 전쟁은 하지 말자’며 EU를 만든 겁니다. 과거 유럽 국가의 국경 근처로 가면 길이 좁아졌지만 EU 출범 이후는 길의 폭이 똑같아졌습니다. 그런데 아시아는 섬 이름이니 바다 이름, 신사참배 같은 체면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그는 아시아에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유럽연합 구성 국가들은 국가 규모나 인구, 경제규모 등이 대략 비슷합니다. 가까운 공간에 붙어 있고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라는 유럽 문명을 공유하고 있지요. 반면 아시아는 국가 크기도 인구도 제각각이고 섬과 바다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유럽처럼 체험을 통해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서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절감한 경험도, 공유하는 가치관도 거의 없죠.”

▼ 한일간 역사 문제는 전후(戰後) 6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국가별로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fact)에 대해서는 국가의 처지가 달라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지난해 개봉한 이오지마(硫黃島) 전투를 다룬 두 영화입니다. 적국으로서 각기 이 전투에 참여한 미국과 일본의 군인들 이야기를 두 편의 영화로 엮어냈습니다.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합니다. 쉬운 일이지만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아보는 게 먼저입니다. 역사 문제에 관해서는 지난 60년간 한국과 중국은 일본이 변명만 한다고 반발하고, 일본은 질려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대체 지난 60년간 뭘 했길래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느냐’며 반발하지요. 이런 경우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라고 봅니다.”

일본, 외국과 사귀는 데 서툴러

▼ 일제에 점령당한 35년이란 상처가 한국인에겐 매우 큽니다.

“이해합니다만, 한국이 역사 문제를 말할 때 지금의 일본인은 전쟁을 이끌었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입니다. 누군가 제게 전쟁 책임을 묻는다면 저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살아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 아닐까요.”

▼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만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일본은 외국과 사귀는 데 서툽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니까요. 민주니 자유니 하는 추상적인 것에 약한 대신 물건은 잘 만듭니다. 이런 일본이 ‘대국’ 운운하면 난 웃어버립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 정도 되는 나라죠. 서로 힘을 합해야 합니다.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서도 그렇습니다. 중국이 스스로 ‘대국’이라 하는 것도 저는 우습다고 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중국에서 오는 조직적 불법 이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타국에 폐를 끼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대국’도 있는지요? 중국이 패권을 장악하면 어떻게 될지, 역사를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 중국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합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중화(中華)사상을 견지했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란 거죠. 일종의 ‘대국병(病)’입니다. DNA에 각인된 민족주의에 가깝지요. 하지만 과거를 돌아봅시다. 기원전 2~3세기, 로마와 중국은 기술수준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한 일은 서로 달랐습니다. 로마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며 속주국가에 도로를 닦고 수도를 공급하며 교류를 활성화한 반면 중국은 이만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한쪽은 ‘열린 제국’이었고 한쪽은 ‘닫힌 제국’이었던 거죠.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고 봅니다.”

 

“‘제도권 공부’는 잘 못해”

▼ ‘현대의 로마제국’은 역시 미국입니까.

“군사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은 미국이죠. 로마 제국의 역할에 가까운 것을 기대하지만 미국은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제국’이란 단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요. 미국이 자국만을 생각하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 국제사회에 꼭 리더가 있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흔히 이상적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유엔 같은 곳에 모여 토론을 거듭하면 세계가 좋아질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그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조직이란 항상 강력한 리더가 있어야 움직입니다. 기관차를 예로 들면 차량만 늘어놓았다고 움직일 수는 없어요. 기관사가 있어야죠.”

그의 지도자론은 ‘최고지도자는 항상 유일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어록에 보면 ‘역량이 뛰어난 지도자 둘을 보내는 것보다 평범한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 현장 제압에 도움이 된다’는 구절이 나온다. 국제사회의 리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시오노씨는 일본에서는 과거 명문으로 이름높던 도립 히비야(日比谷)고교 출신입니다. 일본의 왕가나 귀족 출신들이 진학하는 가쿠슈인(學習院)대학에 진학한 것을 두고 대단히 보수적인 인물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저는 모범생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시는 졸업생의 3분의 2가 도쿄대에 갔습니다. 나머지는 ‘미야코오치’(都落ち·낙향이란 뜻으로 관청에서는 좌천을 뜻함)라 불렀지요. 저도 ‘미야코오치’입니다. 당시 교토(京都)대로 진학해 198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동창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도 ‘미야코오치’였습니다. 훗날 그와도 얘기했지만 당시 공부를 잘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첫째 기억력이 좋을 것, 둘째 교사가 말하는 내용에 의심을 품지 않을 것. 그러나 저나 도네가와나 교사가 뭔가를 말하면 곧 의심을 품었죠. 그러면 더 이상 교사가 말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질 않게 되지요. 저는 기성 틀로 평가되는 제도권 시험에는 약했습니다. 반드시 떨어지는 겁니다. 이탈리아 유학 뒤에 재미삼아 본 ‘아사히신문’ 입사시험에도 떨어졌지요.”

▼ 노벨상 수상자가 동창이군요.

“제 동창은 대부분 관료, 학자, 변호사, 의사 등 일본을 이끄는 엘리트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전 수재형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일본을 ‘잃어버린 10년’으로 빠뜨린 것도 이들이지요. 그들이 성장해 사회에서 기반을 굳혀간 1960~80년대까지는 일본이 뭘 해도 성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체험만 한 사람들은 머리가 굳어버립니다. 곤경에 처하면 헤쳐나갈 방도를 못 찾지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 정세가 급변할 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한 거죠. 몇 년 전 졸업 40년 만에 동창회를 열었는데, 한 사람 빼고는 정말 재미없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대장성 관료였는데,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말하면 조직을 욕보이게 되니 침묵해도 사석에서 말하는 거죠.”

‘동물의 왕국’을 보라

▼ 요즘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도 교육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습니다.

“교육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름이 붙은 위원회 등에서 자문해 올 때마다 저는 ‘교육에 대해 배우려거든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어떤 동물이건 부모는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는 성심성의껏 돌보고 키워주지만, 목표는 자식의 홀로서기입니다.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부모건 학교건 빨리 잘 키워서 떠나보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연인이나 부부, 기업은 어떻게 잘 잡아놓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지만…. 요즘은 이런 각자의 역할을 알지 못한 채 마구 헷갈리는 듯합니다. 학교나 부모가 학생을 잡아놓으려 하고 기업이 인재를 떠나보내려 한다면 기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한국에도 유럽이나 일본처럼 부모 밑에 기생하는 젊은이가 많냐고 물어왔다. 취업난으로 과거보다 많아지고 있다고 대답하니 그는 서른 살짜리 아들을 얼마 전 독립시켰다고 했다. 스스로 벌어서 생활할 만큼의 능력이 안 되지만 약간의 지원을 전제로 한 자신의 결단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 걸어서 30분 거리지만 ‘따로 산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은 뭔가를 시작할 때 기반을 확실하게 닦는 게 중요하지만 젊은이의 경우는 일단 뛰어들어 움직이는 사이에 기반이 닦이는 것 같다고도 했다. 영화 관련 직업을 가진 아들은 독립한 뒤 오히려 수입이 늘고 스스로 생활을 책임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교육 논의에서 빠진 것이 부모의 가정교육입니다. 한참 전 일이지만 모 총리가 일본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대답은 ‘이탈리아에 있는 아들이 고교생이라 혼자 둘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아들을 세계 어디에 가도 살 수 있게 키우겠다는 다짐을 늘 염두에 뒀습니다. 혼혈이니까 더욱 그랬지요. 방학 때면 한 달씩 영국에 보내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습니다. 대학에 갈 때 미국 대학으로 갈지, 유럽 대학으로 갈지 스스로 선택하게 했더니 본인이 유럽을 택했습니다. 독립의 조건은 매주 한 번은 반드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약간의 응석도 허락합니다. 세탁물은 가져와도 좋다고. 그러고는 다림질까지 싹 해서 줍니다. 아이들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고, 자식은 어머니가 맡아보는 밥상머리에서도 자랍니다.”

 

‘로마인 이야기’, 한국·일본에서 1000만부 팔려

작가 시오노 나나미에게 ‘로마인 이야기(신초사(新潮社))’는 준비에만 20년, 집필에 다시 15년이 걸린 평생의 작업이다. 1992년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매년 1권씩 출간해 지난해 말 제15권 ‘로마시대의 종언’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에서는 단행본과 문고본을 합쳐 누계 770여 만부가 팔렸다. 매년 12월 중순경 책이 나와 유명인사나 지식인층이 연말연시 휴가 때 읽는 도서목록에 반드시 끼곤 했다. 한국에서는 1995년 한길사가 번역판 제1권을 낸 뒤 지난 2월 제15권을 발간했고 판매 누계 250만부를 기록한 스테디셀러다. 특히 기업인, 정치인에게는 탁월한 경영도서로 주목을 받았다.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에 있던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1000년 넘게 경영한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는 이 한 가지 주제를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 때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에 이르는 시기를 1∼5권 ‘융성기’, 6∼10권 ‘안정기’, 11∼15권 ‘쇠퇴에서 멸망’의 세 단계로 나눠 추적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되 사료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보충하지만 허구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오노씨는 고교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고 지중해 세계에 빠져들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할 정도로 ‘별난 소녀’였다.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했으나 마키아벨리에 심취하면서 회의를 느꼈다. 196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서양문명의 모태인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 현장을 찾아다녔다.
데뷔작은 1968년 일본에 귀국해 주오고론(中央公論)사에서 발표한 ‘르네상스의 여인들’. 그러나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1970년의 첫 장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으로 마이니치(每日)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그해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이탈리아 의사와 결혼해 피렌체에 정착했다. 이후 독학으로 이탈리아 역사를 공부하며 다양한 저서를 쏟아냈다.

▼ 시오노씨는 정치를 해도 잘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잘했을지도 모르죠. 인간이란 뭐라도 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해낼 수 있습니다. 아들은 ‘엄마가 정치를 하면 외교 문제를 일으킬 거다. 하고 싶은 대로 말해버리니까’라고 하더군요(웃음). 다만 유권자 앞에서 표 달라고 고개 숙이는 게 체질에 안 맞습니다. 하긴 그것도 혹 정치를 했더라면,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르죠. 속된 말로 ‘어떻게 하면 나를 가장 비싸게 팔까’하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거지요. 하지만 제겐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난 철저한 아웃사이더”

▼ 사회지도층 가운데 시오노씨를 만나려는 사람이 많은 걸로 압니다. 자리 제안도 많았다는 소문이고….

“시간이 없으니 VIP들과의 만남을 자제하려고 합니다. 그들과 만나고 나면 잠시 나도 함께 고양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만, 제 작업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지요.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면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거절의 방법이 늘 고민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제게 뭔가를 제안해오는 사람은 대개 제 책의 독자였습니다. 그럴 때 정해놓고 거절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장관이나 기관장은 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사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고대 로마의 역사를 15년에 걸쳐 쓰려는 바보는 저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대충 납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 15년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에고이스트로 지내왔습니다. 이제 그 핑계를 댈 수 없으니 다른 거절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는 15년분의 휴가를 쓰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조금씩 지워 나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내가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은 1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 해엔 그 10년간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20~30년 전이라면 나도 정치를 하라는 제안에 응했을 것 같습니다. 남은 시간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또 하나, 메이저리그 진출을 준비 중입니다.”

▼ 무슨 뜻입니까.

“‘메이저리그 진출’은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도요타자동차 고문의 표현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영역(英譯)을 준비 중이라고 했더니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믿을 만한 번역이 되도록 자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번역은 변호사와 학자 두 사람에게 맡겼지만 감수는 영국인 교수 한 사람에게 받습니다. 도쿄에 집을 사려고 모아둔 돈을 그리로 돌렸죠. 전 ‘로마인 이야기’를 특정 국가가 아닌 인간을 위해서 썼고, 좀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양인이 일본어로 쓴 서양사를 서양에 수출하겠다는 것이니, 일본의 자동차 수출이나 야구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닮은 것 아니겠습니까.”

▼ 작가의 작업은 대개 철저히 혼자 진행됩니다. 외롭지는 않았습니까.

“난 철저한 아웃사이더입니다. 학교에 적을 둔 것도 아니고,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 살며, 그것도 역사소설을, 그것도 로마사를 쓰는 것은 몇 중의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일본에 오면 작가라고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에 가면 보통사람이지요.”

“도쿄대 교수들이 나를 싫어해”

▼ ‘시오노식 역사서술’에 대해 학계에서는 반발도 꽤 있다던데요.

“이탈리아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내일 도쿄에서 유명대 교수들이 온다’며 만찬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곧 그 교수들이 저와 동석하기 싫다고 했다는 연락을 받거나, 마키아벨리 전집에 발문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좀 지나니 번역자가 시오노의 발문은 싫다고 했다는 얘길 들을 때 어땠겠습니까.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 그런 때 어떻게 했습니까.

“속으로 두고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들보다 더 큰 성과를 내면 된다고. 많은 독자가 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로마사를 본다는 것 자체가 성과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이 그 교수들이 정리한 책이 아니라 제 책을 읽고 교수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역사학 교수들에게는 ‘평생 월급 받으며 뭘 했냐’고 묻고 싶지요.”

그는 말 그대로 홀로 싸우는 전사(戰士) 같았다. 그가 쓴 역사 속에서도 항상 승부에 나서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을 살려내려 애썼듯이, 그 스스로도 나름의 승부처를 정하고 모든 것을 ‘올인’했다.

“승부에는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나선 것도 있고 회사원이 나선 것도 있습니다.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도 각자 나름대로 승부를 걸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작가 일이란 것도 어느 지점에 가면 결단력이 중요해집니다. 정하고 나면 가야 합니다.”

   (끝)

신동아2007.05.01 통권 572 호 (p160 ~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