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글

1910年과 2010年-植民地에서 世界中心國家로

이강기 2015. 9. 26. 16:45

[특집] 1910年과 2010年-植民地에서 世界中心國家로

(시대정신 2010년 봄호)


[편집부]

좌담전체.JPG
토론주제
1. 글로벌리즘과 한국자본주의의 성립
2. 문명권의 이동과 제도적 변화
3. 고도성장과 선진화
4. 캐치∙업과 한국사적 배경

사회
안병직 (사)시대정신 이사장

토론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
노재봉 전 서울대 교수
박지향 서울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일시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장소 (사)시대정신 회의실


글로벌리즘과 한국자본주의의 성립


안병직 : 금년 2010년은 1910년의 식민지화로부터 1백 년, 1960년의 4∙19의거로부터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근현대사는 그간에 침략과 저항이 라는 측면도 있었습니다만, 세계자본주의에의 종속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특히 1910년의 식민지화와 2010년의 세계중심국가화를 대비해보면, 근대 1백 년간에 선진제국의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혁명적 변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선생님들께서 이런 놀라운 변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부터 들어보고 토론을 진행해 볼까요.

노재봉 : 지금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현실과 이상을 얘기해보자는 말씀 같은데, 과거 1세기를 통해 한국은 과정과 내용 면에서 사실상혁명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생각해보면 안 선생께서 늘 얘기하시는 캐치∙업이라는 용어도 생각이 납니다.
한국의 1백 년은 서양의 영향을 받고 서양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 활동의 기준에 맞춰서 적응해 나간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서양은 두 가지 사건에 의해서 형성이 되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산업혁명이고, 둘째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뒤늦게 그 두 흐름을 따라잡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서 사회변화를 도모하게 된 것이 과거 한국의 100년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두 가지 전부 서양에서도 혁명이었거니와 한국에서도 혁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외부와 고립된 대한민국만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큰 흐름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라고 하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것을 우리 역사와의 관계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오랜 기간의 농경사회에서 불과 한두 세대를 통해 산업사회로 진입한 것 자체가 혁명이고, 과거 전제왕조체제에서 근대국가체제, 즉 오늘날의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한 것도 엄청난 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안병직 : 지금 노 선생 말씀은 근대 한국의 1백 년이라는 것이 대단히 혁명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근대혁명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산업혁명이고 둘째는 민주혁명, 즉 시민혁명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백 년 이내에 압축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하여튼 그 변화가 빨랐다
는 점에 있어서 혁명적이었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노재봉 : 단순히 빠르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지요.

김주성 : 우리의 1백 년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혁명적인 문명전환기였지만 전 세계인들에게도 문명의 대전환기였다고 보입니다.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탈바꿈되어오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문명전환의 세계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은 가장 극적으로 성공한 나라입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현대문명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가장 극적으로 완성한 나라는 한국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한 세기 이전에 벌써 현대문명의 기본틀을 완성했던 미국이나영국을 빼놓는다면, 후발국으로서 현대문명의 두 축을 독자적으로나 동시대적으로 캐치∙업 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20세기 초에 이미 선진국대열에 들어갔던 일본이나 독일은 우리처럼 동시대적으로 또는 독자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유입된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소화해낸 나라는 비서구국가로서는 일본이 유일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본에게 나라까지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자본주의 발전에는 성공했었지만, 민주주의는 스스로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민주주의란 전쟁패배의 부산물입니다. 태평양전쟁 뒤 미국의 일본주둔군이 민주주의를 일본에 이식시켰던 것이지요. 독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는 바이마르공화국으로 대표되는데, 이것도 본질적으로 전쟁패배의 부산물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에 전후의 독일에서는 권위주의세력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수립된 것이니만큼, 독자적으로 권위주의세력을 몰아내고 세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나마 바이마르 공화국도 대중의 지지를 얻은 나치세력이 무너뜨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의 민주주의도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주둔군이 이식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이와 전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참혹한 전쟁에 시달린 나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켰고, 우리 스스로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하였습니다. 최악의 처지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고 독자적으로 그리고 거의 동시대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본이 나 독일보다도 더욱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식민지를 겪었거나 가난의 늪에 빠져있는 모든 나라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우리의 지난 백 년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후발국들에게 가장 소중한 역사경험이지않나 싶습니다.

안병직 : 김 선생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노 선생과 같은 것 같습니다만,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강조해주셨습니다. 박 선생은 어떻게 보십니까?


박지향 :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요. 지금 김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인데, 자본주의의 중심 국가들이 제국이 되면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제국의 영역에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지구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죠. 그 시
대는 동시에 제국주의로 인해서 대단히 많은 민족, 혹은 국가들이 식민지가 된 시기였습니다.
이때 자본주의를 이식받고 식민지가 된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00년 후에 우리만한 업적을 성취해 낸 사회는 거의 없다는 것이죠. 1910년 당시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100년 후에 두각을 나타낸 나라로는 아일랜드와 핀란드 등 극소수의 나라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국에 속해 있다가 독립해서 발전을 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쟁취한 극히 드문 몇 개의 나라 가운데 하나가 한국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난 100년을 긍지를 가지고 평가하는데, 물론 식민지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특히 1945년 이후의 우리 역사가 세계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안병직: 선생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근대 한국 100년간의 역사라는 것이 혁명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이고, 이 시기에 한국은 자립적으로 역사적 전개를 해왔다기보다는 세계 자본주의화라는 세계사적인 틀 속에서 그 변화를 겪어왔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 역시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역사논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한국 근현대사를 보는 우리 역사학계의 시각이라는 것이 좀 좁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한국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조선후기 자본주의맹아론이라든지, 개항이후의 민중운동사라든지하는, 아무래도 한국근현대사를 일국사적(一國史的) 시각에 가두어 버리는 경향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한국근현대사가 세계사적 움직임의 일부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야 있겠습니까만,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랄까, 주로 침략적∙억압적인 것이며 역사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고, 역사발전의 추동력은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분들이 한국근현대사를 일국사적으로 보려는 데는 무리가 많다고 봅니다. 세계사적으로 시각을 열어놓고 보아야 제국주의체제하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가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한 나라의 역사는 일국사적으로 관찰해야 될 것도 있고 세계사적으로 관찰해야 될 것도 있습니다만, 한국근현대사는 세계사적 시각을 결여하면 그 본질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노재봉 : 안 선생이 말씀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자고로 어느 사회든지 외부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사회는 아주 원시시대적인 사회아니고는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항상 외부적 자극에 의해서 다른 문화의 문명적인 요소를 흡수∙융화하고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얘기인데, 문명충돌이라고 하는 것은 문명 역시 하나의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는 민족적 배타주의(nationalistic chauvinism)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독자적으로나 내재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도 배타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맹아론이라고는 하지만 산업이라는 것은 고대도 있었고 근대도 있었고 현대에도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막스 베버가 고대자본주의라는 말도 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자본주의맹아론같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듯 공식에 맞춘 사고방식, 말하자면“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자본주의가 되고, 다음 단계는 사회주의다”라는 식으로 연결하는 역사이해 방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과거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서구화된 일본의 제도가 한국에 이식됐는데, 이는 일본에게나 우리나 소위 근대성(modernity)인 것이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좋든 나쁘든지 간에 근대적인 요소와 영향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강하게 한국에 들어왔다고 봅니다. 따라서 외부적인 영향을 무시하고 내재적인 요인만으로 역사를 보는 것은 협소하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이기동 : 현재 역사학계의 한국사 연구와 서술을 보면 대체로 외부로부터의 문화유입에 대해서 소극적이랄까
부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그 같은 경향은 근현대사 연구와 기술에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을 보이고 있지요.
단적으로 말해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서양의 근대 문물이 이식됐는데, 이것은 전파의 주체가 식민 통치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타율성을 띠게 되었지요. 다만 이것을 비주체적이라고 비하하고 나아가 수용된 근대적인 제도와 문화까지도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외래문화의 이식과 수용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지난날 문화인류학에서는 전파이론(diffusionism)이라는 것이 유력했습니다. 즉 외부로부터 어떤 사회에 문화가 들어오는 것을 일방적인 전파 내지 이식으로만 봤지만 요즘와서는 인식이 크게 달라졌어요. 그러한 외래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 내부의 저력, 어떤 사회적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수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파∙전래보다도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외래문화가 이식된 사실에 못지않게 오히려 이를 소화할 수 있었던 사회내부의 어떠한 고유한 힘이랄까 사회 내부의 제반 조건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국내의 역사학계에서는 식민지시대에 나타난 일련의 근대화 현상을 어디까지나 식민지 근대화라고 낙인찍으면서 이를 서양의 근대화에 대한 왜곡이라고까지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각각의 사회에서 성숙하고 있던 근대성을 지역적 차이라든지 혹은 독립국인가 식민지인가에 따라 전형과 변형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안병직 : 지금 이 선생의 말씀은 역사발전의 계기로서는 창조와 전파가 있다는 것인데, 저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항상 이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우리의 학습과정을 보면, 창조와 전파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과정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논어』에서 학습방법으로 제시되어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옛 것을 연구함으로써 새로
운 것을 자연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아는 측면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연암(燕巖)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고도 했는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죠.
하여튼 창조냐 전파냐 하는 것은 어디에다 중점을 두느냐 하는 문제는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역사발전의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창조라고 할 때 창조의 주체가 돋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전파를 할 때에도 방금 이 선생의 말씀대로 반드시 수용하는 사람들의 수용능력이 있어야 전파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이 창조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냥 그대로 전파가 되는 일은 없고, 제대로 된 전파는 항상 수용하는 측의 수용능력이 전제가 되어 재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아주 귀중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박지향 : 맞습니다. 산업화가 왜 하필이면 서유럽, 특히 영국에서 시작되었나를 둘러싸고 학자들은 영국에 여러 장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 왔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즘 캘리포니아 대학의 일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사실은 중국이 18세기까지만 해도 더 발전했고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역사적인 우연에 의해서 유럽이 먼저 치고 나갔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근대적 기술발전이 모두 동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침반, 인쇄술, 항해술 등 중요한 기술들이 다 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을 가져다 쓴 서양이 지금 와서 잘난체 한다는 것인데, 제가 생각할 때는 안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창조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누가 만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고 어떻게 수용되어서 더욱 유용하게 재창조되고 사용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고 그 점에서 유럽이 월등하게 우월했다는 생각입니다. 기원만 주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이“선생님, 축구가 중국에서 발명됐다는 말이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발로 차는 운동은 인류역사상 어디서나 발견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영국을 축구의 종주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발로 차는 운동을 제일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규칙과 법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게임화 하는 과정이 영국에서 최초로 일어났기 때문이죠. 하여튼 기원이 어디냐를 두고 우리가 너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래의 것을 수용했다 하더라도 얼마나 더 사회에 유용하게 사용하는가가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김주성 : 저의 경험으로 보면 기원론이 갖고 있는 강점이 있어요. 우리 집안은 소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집안이어서, 모두들 일제교육은 한 분도 안 받으셨어요. 그렇게 고집스럽게 고유문화를 지켰으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나쁘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덧붙여 희망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기에 그랬는지, 가끔
한국 사람들은 안 된다는 절망적인 얘기들을 하셨거든요. 어린 마음에도 그런 얘기는 크나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크게 위로되는 것이 뭐였냐면, 초등학교 수업에서 배우는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려자기가세계 최고이고, 우리가 철갑선을 최초로 만들었으며 금속활자도 최초로 만들었다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저에게는 무척 위로가 되는 거예요. ‘ 야, 우리나라도 굉장한 나라구나’하고. 그때 무슨 일까지 있었느냐 하면, 거북선 함대가 현대의 잠수함 함대로 탈바꿈되는 꿈도 꾸었던 거예요.
나중에 돌이켜보니까, 제가 플라톤의 말대로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더군요. 무슨 말이냐, 플라톤은 어린아이에게는‘고상한 거짓말(noble lie)’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무조건 “너희들은 이 땅의 자식들이고, 이 땅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다 ”고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 땅을 사랑하는 자연적인 감정을 갖게된다는 것이지요. 사춘기를 지나서 아이들에게 이성이 발달하는 대학쯤의 나이가 되어서는 이제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얼마나 형편없냐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비판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판의식을 키워주면, 이제 청년이 된 아이들은‘앞으로 내가 우리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지’하는 의지에 불타게 된다는 거예요. 이처럼 기원론이라는 것은 교육적으로 효용가치가 있기도 합니다.

이기동 : 같은 얘기지만 고대국가건 현대의 신생독립국가건 간에 초창기에는 새로운 민족의 상징을 발굴하여 국가신화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모든 것이 무에서 출발하니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는 자기의 영토, 조상에 대한 무한한 영광, 자신감 그것밖엔 없어요. 국가는 시간을 초월하여 동질의 성격을 띠고 있지요. 지난날 아프리카 민
족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가나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쿠와메 엥크루마의 자서전(1959)을 보면 노예무역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는 가나의 고대문명에 대한 자랑이 대단합니다. 즉 팀부쿠투의 고대도시는 과학∙문화∙예술이 뛰어나서 그리스와 헤브라이에 영향을 주었다는 등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늘어놓고 있어요.

김주성 :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했냐 하면, 어려웠을 때에는 기원론의 교육적인 효용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 자연적인 민족사랑의 감정을 확보하려는 기원론은 민족생존문제를 초미의 관심사로 앞세우는 민족사관의 주요 자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로써 확보된 민족 사랑이 회고적인 정서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미래지향의 합리적인 집단의지를 북돋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뒤에는 별로 효용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성공한 국가로서‘앞으로 이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미래지향적인 과제 앞에서는 기원론은 전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노재봉 : 지금 말씀하셨듯이 기원이 상당히 신화적인 상징의 역할을 합니다만, 그 정도의 역할만 가지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아까 논의로 돌아가면 전파관계를 말씀하셨는데, 전파관계는 물론 일방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전파자가 있고 수용자가 있어요. 이것을 한말 상태에 비춰보면 당시 개화파를 비롯해서 어느 나라의 영향력을 통해 근대국가를 이
룰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여러 입장들이 있었어요. 사실 개화파 김옥균은 친일파가 아니고 향일파(向日派)입니다. 향일파의 경우, 근대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고, 러시아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향로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우리 사회에 다양한 서양문화가 들어와 있었고, 어디서 들어오게끔 하느냐 하는 노력이 여러 갈래로 갈려져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전파는 수용자가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전파의 내용이 굴절현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굴절현상에서 굴절한 각도만큼 이 수용자로서 우리가 노력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것도 전파의 영향인데, 다만 그중 굴절이 우리가 노력한 부분이라고 할 때 그것이 어떤 내용이고 어떤 성격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겠지요.


문명권의 이동과 제도적 변화


안병직 : 지금까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모두 근대 100년 동안에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고 이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근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선후기까지 한국은 근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가 근대에 들어와 근대문명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그때 일어난 큰 변화는 다음의 두 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는 문명권이 바뀌었다는 사실인데, 전제주의(專制主義)에 사로잡혀 있던 전근대의 유교국가가 근대자본주의 문명권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명권의 이동은 서서히 이루어지다가 식민지기에 들어와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문명권의 이동과 더불어 일어난 사회변화로 사회발전원리의 교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보면, 별다른 발전의 계기가 없었던 조선후기의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가 경쟁을 기본원리로 하는 시장경제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장경제의 도입은 당연히 시장경제를 가능케 하는 여러 가지의 제도적 변화를 수반하지요. 특히 식민지기에 이루어졌던 화폐개혁, 재정개혁, 토지조사사업 및 도량형제도의 도입이 중요한 제도적 개혁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개혁에다가 항만, 도로 및 철도 등의 인프라를 건설한다던가, 은행 및 회사 등이 진출하면서 시장경제체제는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것은 일본자본주의였습니다만, 이러한 시장경제체제의 형성은 조선인경제도 그 속으로 빨아들입니다. 식민지시대에는 식민지부문이 따로 있고 조선인부문이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경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노재봉 : 처음에 이야기했다시피 산업혁명과 정치적인 시민혁명의 두 가지 내용은 전부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문화였지요. 국제관계적인 측면에서 보면 유럽의 그러한 문화는 유럽권의 외곽지대가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컸습니다. 그게 일본이에요. 일본이 국제정치적으로는 유교권에서 영향을 가장 덜 받는 외곽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수용력이 빨
랐던 겁니다.
우리는 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으로 해서 외부에서 무언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저항이 대단히 강했거든요. 저항이 대단히 강했던 만큼 역으로 형편없이 타격을 받는 상태가 돼버렸어요. 그것이 바로 식민지화인데, 이것이 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말하자면 근대 산업화를 추구하는 데 비교적 저항을 덜 하게끔 만드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안 선생도 잘 알지만 일제시대를 통해 산업이 상당히 발달을 하면서, 화폐제도, 공장제도 이런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단 말이에요. 그래서 해방 이후에는 그러한 것이 이미 생활에 젖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됐고, 게다가 전통과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지게 됐죠. 비근한 예를 들자면 내가 미국 유학 할 때, 한국 사람이 한복두루마기를 입고 갓이 아닌 서양중절모를 쓴 모습을 서양 사람은 가장 이상한 풍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점잖게 보이는 굴절현상이 생기고 그것이 또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일제시대를 통해서 서구문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전통이라는 힘이 약화되었고, 개인의 힘이 분출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저는 한국전쟁이라고 봅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상반(常班)관계가 철저히 파괴됩니다.
그리고 평등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 한국만큼 강한 국가가 없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한국전쟁처럼 사회의 저력이 동원될 적엔 엄청난 에너지가 발현됩니다.

안병직 : 노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가 근대문명권으로 진입을 할 때 수용과 저항의 두 가지 경향이 다 나타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위정척사파는 새로운 문명에 저항하고, 실학의 전통을 잇는 개화파는 그것을 수용하는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1876~1910년의 개항기에는 역시 수용보다는 저항이 훨씬 강하지요. 그래서 자주적 개화운동이라 볼 수 있는 광무개혁은 그 기본철학을 구본신참(舊本新參), 즉‘옛 것을 기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대적 개혁에 실패합니다. 이러한 저항을 결정적으로 두드려 부숴버린 것이 바로 식민지화입니다. 일본이라는 외부권력이 들어와 한반도를 자기의 모습으로 개조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명치유신과 같은 근대사회로 한국을 개조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은 국권을 상실하죠.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선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해버립니다. 그 때문에 일제 36년과 개항기 35년은 그 기간이 대략 같았으나, 한국사회의 변화라는 면에서는 서로 비교가 안 됩니다.
그리고 6∙25사변이 한국을 엄청나게 변화시킵니다. 제 기억으로는 식민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더라도 농촌과 도시가 서로 다른 생활권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6∙25사변을 겪으면서 도시와 농촌의 생활권이 융합하게 됩니다.

노재봉 : 6∙25사변 이전에는 지방에서 서울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도 못했죠. 요즘 해외로 유학 가는 일보다 더 희귀한 일이었죠.

안병직 : 그리고 6∙25사변 때 많이 변한 것이 뭐냐 하면,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회가 엄청나게 유동적으로 됐다는 사실 이외에도, 3년만에 그 임기가 교대되는 60만 군대를 유지했기 때문에 농촌청년들이 대부분 군대에 들어가서 군대교육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있고, 또 군부세력이 한국최대의 사회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박 선생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지향 : 1876년의 개항부터 1910년까지의 기간이 35년, 그리고 합병후 해방까지의 기간이 35년인데, 그 두 번째 시기에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변했다는 안 선생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식민지 모국이었던 일본 국가의 성격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가 200년간 영국통치를 받았지만 그처럼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았는 데 비해, 일본이라고 하는 대단히 근대화에 몰입돼 있고 대단히 경직된 강성국가가 우리를 식민지로 통치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선 말기에도변화에 대한 제스처는 있었지요. 예를 들어 갑오개혁은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제시하는 조항을 담고 있기는 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만약 우리가 식민지가 안 되었다면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맹아론과는다른 의미에서지만요.
그러나 그 변화의 속도가 대단히 느렸을 것이고, 우리의 실제 경험과 는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본이라고 하는 근대화에 몰입된 경성국가가 제국으로서 우리를 통치하는 바람에 우리가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국가가 요구하는 여러 제도가 우리 사회에 확립되었고 그것이 우리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서양의 경우에도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제국』,『 콜로서스』등 의 저자로 요즘 역사가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니얼 퍼거슨은 서양, 특히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인으로 주식회사 제도를 듭니다. 즉 사람들이 투자를 하여 이득을 얻으면서 동시에 위험 부담을 분산할 수 있게 해 준 주식회사 제도가 자본주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유재산권을 보장해 준 여러 제도적 장치도 중요했죠. 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법제가 일제시대에 확립되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 점은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다시피 법치가 확립되고 제도가 마련되었다는 것의 반대급부는 뭐냐 하면 대단히 폭력적인 국가상(國家像)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국가를 대단히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이 제국일 때는 그런 인식이 더 강해지는 식으로 우리 역사가 진행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기동 :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그와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한국근대사라고 하는 것이 130년 전 개항에서 시작이 되는데, 이것이 어찌보면 1차 세계화에 편승하여 참여하게 된 그런 과정의 시초였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개항기 35년, 일본에 의한 통치 35년, 해방 이후 65년간으로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볼 수 있지요.
그런데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면 세 시기를 단절론에 입각해서 파악하는 경향이 우세한 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됨으로써 개항기의 흐름이 끊어졌고, 1945년 일본통치가 끝난 후 독립을 되찾으면서 또 식민지시대의 흐름이 단절됐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처럼 한국근현대사를 크게 두 차례 단절을 겪은 그러한 역사로 꾸며가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사회 내면적으로는 개항기, 일본통치시기, 해방 이후를 통해서 기본 흐름이랄까 그 작동원리가 연속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연속설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지난 120~30년간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시기가 일본통치시기입니다만, 지금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아주 단순화해서 처리합니다. 즉 이 시기를 일제에 의한 경제적∙인적 수탈이 극도에 달한 시기였다라고 단순하게 치부하고 마는 견해가 매우 유력한데요. 일본통치시기가 한국사 전체에서 보면, 아주 특이한 변태적인 시기임에는 틀림없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가 내포하고 있는 어떤 의미를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본통치라는 것이 전반적으로 강제와 복종을 강요한,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굴종의 시대였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특히 중일 전쟁 이후 해방 당시까지의 마지막 7~8년간은 수탈과 탄압이 극도에 달했던 암흑시대였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에 의한 동화정책이라는 것을 표방했습니다만, 그 배후에 민족차별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다만 일본 사람들이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광범위한 제도개혁을 꾀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대적인 행정제도, 사법제도, 교육제도, 이것은 실제로 개항기 후반기에 한국이 추구했던 일련의 근대화정책의 연속, 연장이기도 한 것입니다만, 총독부는 이를 강력하게 수행했고 가령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1930년대 전반기에 소작제도를 개선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지역에 국한된 것이긴 합니다만,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한국이 1945년 해방되었을 당시 일본 통치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근대적인 여러 제도와 약간의 공업시설, 이를 통해 익힌 기술이 미약하나마 저력이 됐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근대화 문제와 관련해서 조금 부각시킨다면 저는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하지 않았던 근대화 효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본디 역사의 진행에는 도처에 역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와 비슷한 사례는 외국의 역사에서도 간간이 발견되고 있지요. 가령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는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계급갈등을 연구한 갈등론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만, 그가 1965년에 내놓은 유명한 가설이 있어요. 그것은 히틀러 통치하 나치스의 독일 지배가 1945년 이후 독일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큰 자산이 된 사회혁명이 이루어진 시기라는 가설입니다. 즉 나치즘은 그 엄청난 전체주의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그때까지 독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자기의 지역사회,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단체, 가족, 교회, 대학 등에 바치고 있던 충성심을 산산조각 파괴했고, 또한 나치스 운동을 통해서 그때까지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 있던 하층계급 출신자들을 대량으로 권력 엘리트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이동성을 크게 촉진시켜 그때까지 독일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전근대적 요소가 나치스 치하에서 철저하게 파괴된 결과 1945년 이후 서부 독일에서 민주주의가 발전∙정착하는 데 큰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도 나치스 치하 독일의 경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진정 한국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근대적인 시설∙제도를 도입한 것은 분명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식민지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해방 후 한국이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공업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이 된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컨대 근현대사의 중간에 낀 식민지시대라고 하는 것을 한국사의 체계 속에 확실하게 집어넣어서 연속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주성 : 제 생각에는 일본이 서구의 자본주의를 잘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구 전체를 보면 산업혁명이 일어난 곳에서 제일 먼 데가 일본이더군요.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제일 먼 일본을 정복하기가 곤란했던 겁니다. 게다가 이념성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제일 약했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은 외래문명을 소화해낼 수 있는 이념적 여건과 지리적 여건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경우에 지리적 여건은 일본과 같았겠지만 이념적 여건은 전혀 달랐지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병자호란에서 군사적으로 굴욕을 당했으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소중화의식의 자부심을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 ‘ 우리가 중화이고 청나라 너희는 오랑캐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죠. 조선후기에 들어서서는 조선중화의식을 발전시켜서 ‘우리 조선이 바로문명의 중심이다 ’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문명자부심이 이렇게 확고부동했었는데, 서양 사람들이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미개사회로 보니까 도저히 못 참았던 것입니다. 안 선생님 말씀대로 가장 저항적인 사람들이 유교의 문명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배계층의 완고한 문화저항성을 우리 스스로 해소하기는 너무 버거웠을 것입니다.그렇지만 외부세력에게는 지배계층의 저항성을 깨부수는 데 어려울 턱이 없었다는 말씀 아닙니까?

안병직 : 그것은 중국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은 우리보다 저항이 훨씬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결국 모택동이 승리할 수 있었고, 농촌사회가 그만큼 더 지속할 수 있었던 거예요

김주성 : 외부세력 때문에 우리의 문화저항성은 중국보다 빨리 무너지게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굉장히 중요한 지적으로 보입니다.
사실 스스로 문화저항성을 해소하기도 어렵고 나아가 신문화를 소화해내기란 너무도 어려울 것입니다. 스스로 문화저항성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신문화를 소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대화 초기에 일본 사람들은 서양의 도서들을 이해하느라고 얼마나 난리를 쳤습니까? 그때 밀의『자유론』이 번역되었는데요, 정판이 십만 권이나 팔리고 해적판은 무려 90만 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밀의 문장이 만연체일 뿐만 아니라 번역 당시의 지성 수준을 고려한다면 밀의 책은 난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만 권이나 팔린 겁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유행 따라 무조건 사가지고 다녔던 것이죠. 그걸 가지고 다녀야 신식사람이 되는 거 같으니까, 읽지도 않거나 못하면서 무조건 끼고 다녔던 겁니다. 외래문화를 소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혼돈과 스트레스를 일으키는지 이를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이 미리 소화해놓은 것을 재차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최근 제3세계에서 한류가 왜 그처럼 거센지도 짐작이 갑니다. 일본이 현대문명을 소화한 모습은 이미 오래되어서 현실감이 적고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한국이 한 겹 더 소화해낸 모습은 훨씬 더 실감이 나고 쉽사리 이해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을 통해서 근대제도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저항감이 한결 여리고 이해하기도 쉬웠을 텐데,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한테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안병직 : 그런 점도 있고 제일 중요한 점은 일본이 조선을 자기와 닮은 사회로 만들어 버리려고 철저하게 개혁을 하는데, 아까 박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그만큼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황제라는 절대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억압적인 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개혁이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김주성 : 급격한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 외부세력의 존재가 오히려 우리의 근대화에 공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우리들이 어렵게라도 근대화를 이뤘다면 그것은 우리의 합의기반에 서있는 것이니까 괜찮은데, 그러한 합의기반 없이
강제로 이루어진 근대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복잡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기동 : 타율적으로는 결코 근대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매우 이념적이고 맹목적으로 근대화 문제를 재단하고 있습니다.

박지향 :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근대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지워야 한다는 것이 일부 한국사 전공자들의 주장이죠.

김주성 : 제가 정리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것을 찾아 주체적인 근대화 가능성을 증명하려는 맹아론으로는 사태의 진실에 다다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맹아론은 문명시각이 결여된 민족사관과 보편시각이 결여된 민중사관이 어우러진 사론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사관부터 얘기해 봅시다. 민족사관으로는 신채호 선생이 얘기했듯이“아(我)와 피아(彼我)의 투쟁”으로만 역사가 보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민족사관으로 보면 임진왜란 때 일본하고 싸워서 패배한 사건이나, 근대에 일본한테 패배하여 식민지가 된 사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은 본질적으로 무력충돌의 사건이고, 근대의 국난은 문명충돌의 사건이라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민족사관에서는 근대의 국난사건을 임진왜란과 동일한‘아와 피아의 투쟁’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파악하면 근대의 국난사건에 개제된 문명의 문제가 간과될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아와 피아의 투쟁’으로만 본다면, 역사는 끝없이 무력투쟁만 한 것만으로 보일 것입니다.
문명전파의 역사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셈이지요. 이것이 민족사관의 편협성입니다.
민중사관도 편협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민중사관이란 피지배계층의 시각에서 문명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파적입니다. 마르크시스트들은 본래 당파적이어야 삶의 진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혹시나 그럴지는 몰라도, 여하튼 당파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중사관은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을 못 보게 됩니다.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아우르는 시각이 아니면 파악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맹아론은 민족사관과 민중사관이 어울린 역사이론 같아요. 우리에게도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으니 자율적으로 근대화될 수 있었는데, 외부세력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함의를 맹아론은 갖고 있으니까요. 민족사관처럼 문명의 변수를 빼버리고 역사를 투쟁과정으로만 파악하려 하고, 민중사관처럼 전체적인 흐름을 도외시하고 일방적인 피해국면만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아론은 문명의 대전환이란 세계사적인 국면을 도외시하고 탈맥락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안병직 : 한국의 근대화과정은 자생적이고 자립적인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캐치∙업 과정입니다. 한국과 같은 캐치∙업 과정을 통하여 근대화되는 사회는 그 전 단계로서 반드시 저개발화나 식민지화 과정을 겪습니다. 이러한 근대화과정을 겪는 사회를 서구의 자생적 및 자립적인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시각에서만 관찰하면, 제대로 된 연구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캐치∙업 과정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보면, 오히려 이런 사회의 변화가 고전적 자본주의사회의 변화보다 훨씬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종래에 대외종속적인 것으로만 보이던 여러 현상들이 오히려 이러한 역동적인 변화를 떠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친일적, 친미적이라는 현상도 외국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또 식민지적 개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노재봉 : 개혁이라는 용어보다 탈바꿈 혹은 변형(transformation) 이런 식으로 해야 욕을 안 듣습니다.(웃음)

안병직 : 그렇습니까? (웃음) 그 다음에 제가 중시하는 것이 이승만 박사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이 제도는 한국사회 발전의 기본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씨가 추진한 수출지향적 공업화정책은 잘못 보면 완전히 매판제도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저개발국 발전의 기본모형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도입한 자유민주주의체제라던가 박정희 대통령이 정립한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책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 특히 선진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김주성 : 일본은 헌법을 맥아더 장군이 써 줬더라고요. 평화헌법을 자기들이 쓰지 못했는데, 우리의 헌법은 우리가 쓰지 않았습니까? 우리 스스로 써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기동 : 일본 신헌법은 마쓰모토 조지(松本烝治)라는 시데하라 내각의 헌법문제 담당 국무대신이 사안(私案)을 만들었는데, 맥아더 총사령부의 민정국에서 별도로 만든 것을 채택하도록 일본정부를 강압한 것이지요.

안병직 :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 우리의 제헌헌법은 우리가 만들기는 하였지만 결국 외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사회활동을 통해 터득해서 얻은 것이고, 그분의 노력을 통하여 한국으로 이식된 것이 아닐까요.

김주성 : 그런 사실은 밝혀질 것 같아요. 사실 자유민주주의를 실제로 알았던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밖에 없었다고들 합니다. 다들 동북아 망명지에서 간접적으로 보고 들었던 것이고, 국내의 유진오 박사 같은 분은 모두 책에서 설명된 것을 보고 확신을 가졌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이 대통령은 40년 가까이 자유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제헌헌법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은 막대했을 겁니다.

안병직 : 이승만 박사의 정치를 보면 한편에서는 자기가 미국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해보려고 그것을 헌법으로 제도화하지만, 실제의 정치과정에서는 권위주의를 행사합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이승만 박사가 민주주의를 하기 싫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시기에 그러한 고급스런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한국에선 제대로 없
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중산층이 있어야 하고, 국민군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고, 재정적 자립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러한 조건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민주주의 하자는 사람들에게 “어떤 민주주의를 하겠냐” 물어보면 내용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정치를 하다보니까 권위주의를 행사할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노재봉 : 그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정치적인 문제가 좀 개입이 돼야 된다고 보는데, 이 박사는 그 당시에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위치에 설만큼 국제정치 지식이 해박했습니다. 이 박사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이념은 만들어 놨는데 경제기반이 있나 군대가 있나, 자율적인 민족국가로서 움직여 나갈 기반은 아무것도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시점의 문제가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의 투쟁이 붙었다는 겁니다. 이 박사는 민족국가를 본격적으로 건설해야 되는데,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들고 나온 거예요. 여기에 대해 이 박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라고 생각한 거죠.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 박사였고, 자유주의적 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이니 코민포름이니 하는 것이 들어올 성격은 전혀 아닌 것이죠. 그렇게 이 박사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전 생애를 바쳐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투쟁을 하게 된 겁니다.

안병직 : 지금 노 선생 말씀은 이 박사가 자유주의이면서 권위주의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의 이념투쟁, 공산주의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유주의를 지킬 수가 없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죠?

노재봉 : 그러니까 국가체제를 무엇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이었지요.

김주성 : 체제 선택 및 정착문제가 건국시기의 가장 큰 정치과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국기의 정치를 권위주의의 문제로만 평가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험난할 수밖에 없는 건국기의 엄중한 정치과제를 생각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잘해내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노재봉 : 이 박사의 투쟁은 일종의 혁명적인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죠. 국제주의는 안 된다, 특히 공산주의적 국제주의는 다른 탈을 쓴 제국주의이지 독립적인 민족국가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라는 것이 이 박사 생각이었어요. 그러한 국제주의에 대한 투쟁은 건국과정에서 토론하고 합의할 여지의 성격이 아니었죠.

박지향 : 이승만 박사가 대단한 분이란 걸 최근에『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만드는 과정에 여러 논문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저도 사실 그 전까지는 이승만 박사를 4∙19로 물러난 독재자 정도로 생각했었죠. 제가 어렸을 때 이기붕 씨 집 근처에 살았는데, 4∙19 때 학생들이 노도와 같이 이기붕 씨 집에 쳐들어가는 것을 따라가서 봤어요. 그래서 독재자로서의 기억이 대단히 강하게 남아있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사를 좀 더 깊숙이 공부하면서 이 박사가 독특하고 특출한 분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최근 윤치호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윤치호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미국경험을 한 사람이죠. 1865년 생으로 조선시대에 태어난 인물인데, 한 5년 못 미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와서는 평생 영어로 일기를 씁니다. 윤치호는 당시 국제정세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윤치호는 3∙1 운동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친일파 이완용보다 더 못된 놈이라고 욕하는데, 그에 대한 윤치호의 변명은 “만세를 외치는 거지에게는 아무도 독립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선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죠. 윤치호는 또한 다른 실력 양성론자들과 달리 뛰어난 국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력만 양성해서는 독립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국제정치적으로 기회가 올 때 그것을 잡아야 되는데 아직은 그 기회가 안 왔다는 것이 윤치호의 지론이거든요.
그런 윤치호는 해방이 되자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를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인민한테 민주주의를 주는 것은 마치 장난감밖에 못 다루는 아이한테 소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는 해방이 되자 당연히 민주주의를 해야 되는 걸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한 입장의 차이가 윤치호가 국내 사정에 더 밝아서 그랬던 것인가, 이승만 박사가 민주주의가 당연하게 실행되는 외국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조선사회의 당시 수준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인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불가능하다 했을 때 이승만 박사는 그것을 당연시했다는 것이죠. 나아가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저는 이 박사가 굉장히 독특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면 노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당시 한국은 근대국가로서의 기반이 없는 나라로 1950년대에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원조로 살면서도 미국에 대해서 할 말 다하고 미국을 자기마음대로 조정해가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만들어내고 한,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닫게 되었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런 분이 지도자였다는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재봉 : 그 말씀에 부연을 하자면 지금은 1월 1일이지만, 상당한 시기까지 우리나라 회계연도의 시작은 6월 1일부터였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미국에서 원조액이 확정이 되고 수권 법안이 집행이 되고, 수권 법안이 통과가 돼야 그것을 가지고 예산을 짜야 되기 때문에 6월 1일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의 원조가 완전히 끝난 게 73년입니다. 그때부터 우
리의 세금으로 나라살림을 합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어릴 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전부 원조물자로 생활했으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음 헌법문제, 그러니까 국가의 방향이죠. 이것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유진오 선생이 상당히 참조를 해서 작성한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완전히 바이마르 헌법을 베낀 것이라며 실망을 했었죠. 이 헌법에 대해서 당시 서양 사람들이 비하해서 뭐라고 표현을 했냐 하면 이것은 의미론적 헌법(semantic constitution)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회에 이념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어쨌든 이것을 바탕으로 교육은 전부 자유민주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교육 내용과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선거는 보통∙평등∙직접∙비밀 원칙에 의해서 실시한다고 배웠는데,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자 ‘이게 뭐냐 ’해서 4∙19가 터지게 됐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유지를 해 왔던 공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제적으로 아무것도 없는데서 그나마 부족하지만 자유주의적 민족국가의 기반을 하나 만든 것입니다. 간과되기 쉬운 점은 이 박사가 그 투쟁 속에서 강제력 장치라고 하는 근대국가의 필수요건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아까 70만 군대라고 했는데, 그게 다 폭력장치, 강제력 장치거든요? 이러한 바탕이 후에 5∙16 세력이 사회를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던 거예요. 이건 흔히 얘기가 안 되는데, 그러한 점 없이 근대국가가 성립하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합니다.

안병직 : 그 점과 관련해서 조금 설명을 드려야 될 것이, 아까 이승만 박사는 자유주의와 권위주의를 서로 양립시키려는 측면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국민교육은 자유주의에 입각해서 했지만, 권력을 행사할 때는 권위주의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말씀인데, 결국 그 권위주의를 이어받아서 박정희 씨가 유신체제를 바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했습
니다. 그러한 권위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방금 노 선생이 이야기했듯이 정치적 폭력장치(暴力裝置)인 60~70만 군대, 경찰, 정보기구 등 이런 것들이 없으면 유신체제가 존재할 수가 없죠. 그리고 독일, 이태리 및 일본 등 후발자본주의국가의 중화학 공업화도 전부 전체주의체제하에서 이뤄집니다. 바로 그 유명한 파시즘, 나치즘 및 일본의 군국주의가 중화학 공업화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정치기구였고, 그 국가들은 국가적 폭력을 동원해서 중화학 공업화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이태리나 독일 및 일본보다도 더 후발국인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 중화학 공업화가 가능했을까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만 및 싱가포르도 권위주의체제하에서 공업화를 이루지 않습니까? 홍콩은 영국식민지라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만.

노재봉 : 그런데 자극적인 말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용어를 좀 섞어서 씁시다.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국가권력이나 경제정책이나 ‘신중상주의적’인 방법으로 추진했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웃음)

안병직 : 너무 자극적인 용어를 남발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한국적인 근대화의 특징을 제대로 지적하자면 권위주의라는 용어를 써야지 중상주의 같은 고전적 용어는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

박지향 : 제가 봤을 때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대국가를 만드는 과정은 어디서나 평화롭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느 나라에서든 어떤 제도를 채택하느냐의 결정은 대단히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안병직 : 세계사를 크게 보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병행하는 것은 영국이나 미국 등 고전적 자본주의국가뿐입니다. 독일, 이태리 및 일본은 산업혁명은 있어도 민주주의 혁명은 없었습니다.

노재봉 : 내부적으로 폭력투쟁 없이 건국된 나라는 없습니다.

안병직 : 지금까지의 논의 중에서 중요하게 확인되어야 할 것은 한국의 산업화에서는 권위주의를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노재봉 : 역설적인지만 권위주의하에서 민주화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더 견고하게 되었죠. 시민화가 진행되면서 평등의식이 가속화되고, 사회의식이 고취되었습니다.


고도성장과 선진화


안병직 : 지금부터는 한국의 고도성장 과정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식민지시대에도 높은 편입니다. 1910~1940년까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3.7%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선진 각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 1.5%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성장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성장률이 들쑥날쑥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2~3% 정도를 지속하다가 60년대 들어서는 우리가 다 알듯이 6~8%씩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제성장률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높은 성장률입니다. 세계의 제해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던 영국의 18세기 연평균 GDP성장률은 0.9%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전 선진자본주의나 후진자본주의국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도 평균 1.5% 내외였죠. 미국이나 일본같은 예외는 있었습니다만, 평균적으로 그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경제만 보면, 우리는 영국이 400년간에 걸쳐서 달성했던 것을 60년 만에 달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혁명적 경제성장에 관해 아직도 제대로 된 인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이후의 신흥공업국들의 경제성장률이 대개 그러하니까 우리는 그러한 경제성장률을 상식적인 것으로 아는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것입니다. 한국근현대사의 혁명적 변화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김주성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수출주도의 고도성장전략은 선진국 쪽에서 전수받은 게 아니고 우리 쪽에서 창안한 것이랍니다. 당시 국제기구에서 우리에게 추천했던 정책은 농업개발정책이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쌀 생산에 비교우위가 있으니까 쌀농사에 특화하라”는 것이었지요. 이런 정책제안은 정태적인 비교우위설에 근거한 것으로서, 우리 쪽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못 사는 농업국이 될 것이라고 반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미래에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수출업종을 전략적으로 선택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짜고 공격적으로 추진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동태적 비교우위설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것은 한국의 독창적인 정책창안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지금 세계 모든 후발국의 발전모델이 되었지요.

박지향 : 보통 신생 공업국들이 수입대체 공업화를 하는 데 반해, 박정희가 수출지향형 공업화를 시작했다는게 우리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변화이고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는 점은 요즘 경제학자들이 다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안 선생님 말씀에 약간의 토를 단다면 1960년대 이후에 우리가 6~8%, 어떤 때는 10%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것은 대단히 높은 성장률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을 19세기의 영국과 비교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전반적인 세계경제의 성장속도가 워낙 느린 때였기 때문에 가장 높은 영국이 연 1.5%, 프랑스가 0.9% 정도의 성장률을 보입니다. 그런데 1950~60년대에는 독일 같은 경우, 연평균 성장률이 6.5%가 될 정도로 고도성장을 하는 곳이 생깁니다. 전반적으로 세계경제가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대를 만났다는 행운도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을 연구하는 정치경제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제일 중요한 게 지금 제가 말씀드렸듯이 수입대체형 공업화를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승만 박사는 1950년대에 수입대체형 공업화를 시작했죠. 그래서 설탕이니 비료니 하는 것을 조금씩 만들어 냈는데,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이 거기서 머무르는 데 비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완전히 발상의 전환을 해서 수출지향 공업화를 추진했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제가 알기로는 우리 사회의 좌파학자들도 우리가 대단한 고도성장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고, 우리의 경험이 상당히 독특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국제적인 상황이 좋았다는 사실에서 찾고 지도자의 독창적인 추진력, 사고의 전환 같은 요인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가 독특한 경험, 고도성장을 했다는 것은 다들 인정하지만 그게 누구 덕이냐에 있어서 의견이 다른 겁니다. 우리는 박정희의 결단력과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수출지향형 공업화로 의 전환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 데 비해서 저쪽 사람들은 국제상황이 좋아서, 한국이 경공업으로 뚫고 들어갈 틈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박정희 대통령을 높이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 양반이 만들어 놓은 것이 물론 발전국가 모델이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이를테면 정주영, 이병철 같은 기업인들이 살아남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줬다는 것이에요. 제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결국은 경제성장에서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한계가 있고, 그 다음은 결국 기업과 기업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발견되는 발전국가 모델은 기업인들이 성장하고 자기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지 않고 단순히 권위주의적인 발전국가에서 끝나버리고 마는데, 우리는 이병철, 이건희, 정주영씨 등의 기업인들을 키워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 역사의 독특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주성 : 좌파학자들이 주장하는 구조적인 요인에 주목한다면, 저는 이런 생각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가끔 모택동이 굉장히 고마울 때가 있어요. 모택동이 만약 죽의 장막을 안 치고 중국의 수많은 인구로 우리처럼 성장정책을 썼다면, 우리가 과연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의 장막을 두텁게 쳤다
는 사실이 우리에는 정말 다행스러웠다는 말입니다. 인도의 간디도 고맙습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려서 내수용 산업화 쪽으로 경제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성장 시기에 인도도 잠들어 있었죠. 또 고마운 사람이 쿠바의 카스트로에요. 1960년에 혁명을 해서 좌파 생각을 불어넣어놓으니까, 남미가 구미복지국가의 생산기지로서 전혀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구미의 복지수요에 맞추어 생산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마도 남미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좌파 감각의 종속이론으로 무장하고 경제쇄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문을 걸어잠갔습니다. 이에 따라 구미의 복지수요를 감당해야 할 과제를 우리가 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좌파 쪽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구조적 측면에서 우리가 유리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거라고 봐요.
그런데 구조적인 요인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성공했던 데에는 물론 행운이 따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뛰어난 전략과 피어린 노력을 인정하는데 그렇게 야박해야 할 까닭이 뭐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병직 : 김 교수가 말씀하신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국제적 조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산업화할 수 있는 적극적 조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냉전체제와도 관련됩니다만, 자유진영 내부에 자유무역체제가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저개발국이 선진제국과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이 미국에 의하여 해방되고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제원조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자유로이 교역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소득수준도 높고 가장 큰 시장을 가진 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이점은 여간 크지 않지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조건은 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의하여 일본과도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선진제국과의 자유교역이 왜 중요한가 하면, 거기로부터 우리에게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할 수 있고 거기에서 수출입시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앞에서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한국은 저개발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산업화에 필요한 거의 모든 수단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선진제국과의 교역이 아니라면 이러한 것을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선진제국과의 관계는 자동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힘겹게 확보된 것입니다. 예건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1953년의 한미방위조약이나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 그러한 것이지요. 그 이외에도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의 정립이라든지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이라든지, 이러한 정책적 노력이 가지는 중요성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앞에서 말씀드린 고도성장은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박 선생이 50~60년대가 미국을 뺀 선진제국의 고도성장기라는 점을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재봉 : 사실상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위기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었거든요. 어떤 때는 외화가 이틀밖에 결제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몇 번 있었고, 어려운 과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는 몇 가지 요소가 합쳐졌다고 봅니다. 첫째는 강성국가체제라고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근대화에 대한 의지가 아주 강했다는 겁니다. 그 의지가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강성체제로 인해 가능했고, 의지의 실천으로 일본모델을 전적으로 차용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자이바츠(zaibatsu)가 있듯이 여기서는 독특하게 권력으로 만들어낸 재벌을 육성시킵니다. 중소기업을 계열화시켜서 대기업을 만들어 밀고나가는 식으로 해서 일본모델을 도입했었고, 그 다음 아까 지적했듯이 일본과 미국이라는 수출시장이 있었다는 이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박사 때는 수출품목으로 아무것도 없고 원조만 가지고 사는 나라에서 그나마 한다고 한 게 텅스텐 하나 수출하고, 나중에 불법정치자금도 그것과 관련이 되기도 하죠.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을 맺고 그에 따라 들어온 자금을 가지고 경제발전에 투입을 하게 되지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경공업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려 했지요. 소비재 중심으로 국내를 먹여 살릴 필요도 있어서 경공업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해나가는데 자본이 없어서 강제저축 방식을 취해서 자금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업들이 자본 압박을 엄청나게 받는데, 그때 사채 이자가 몇 십 %로 되고 하니까 기업들이 다 망하게 생겨서 취한 것이 8∙3정책입니다. 그때 전부 사채를 동결하고 기업에 숨구멍을 틔어주고 공업화를 밀고 나갔지만, 경공업으로 나가는 데 비용은 엄청나게 들고 자본은 달리니까 국가가 보증해서 외자를 들여오는 것이죠.
그런데 경공업도 그때 수출한다고 했지만 가발이니, 와이셔츠니 주로 섬유니 하는 것들이 주종이었습니다만, 외국에 나가면 백화점 지하실에 들어가는 품질이지 지상으로 올라올 품질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이제 경공업은 끝났다고 해서 이제 중공업으로 돌릴 적에도“무슨 자금으로 이걸 하느냐”하는 등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서 아주 위기가 많았지요. 그런 식으로 성장이 이루어진 겁니다.

안병직 : 공업화 때 기업가들의 사정이 어땠나 하면, 8∙3조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 시기에 기업가다운 기업가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공업화 자체가 기업가를 양성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지금은 번듯한 재벌이 되어있지만, 8∙3조치 이전만 하더라도 많은 기업들이 자기기업에 고리채를 놓아 이자를 확보하고 회사는 적자를 내고 그랬지요.

노재봉 : 그래서“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연속되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재벌을 국가가 주도해서 강하게 만든 결과 지금까지 계속 무시되어 온 것이 중소기업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중소기업은 어려움에 처해지게 되면 회생이 힘들다는 겁니다.

김주성 : 저는 유신 즈음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한테 지지를 못 받는 것으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국민들이 반대하는데도 권위주의를 통해서 집권한다는 느낌들이 많았는데, 다시 돌이켜 살펴보면 그러한 감이 반드시 맞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재봉 : 그래도 농민의 지지가 압도적이었지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김주성 : 우리의 산업화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눈물겨운 사연이 많았습니다. 아까 우리에게 자본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였을 겁니다. 포항제철을 세울 때 박태준 씨는 한일협정의 청구권자금까지 갖다 쓰더군요. 이 사람은 포항제철 공사장에서‘우향우 정신’으로 직원들을 독려합니다. “우리가 망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으로 달려가 빠져죽자”는 정신 말입니다. 민족의 피를 판돈을 가져다 쓴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이 굉장히 컸었던 것이지요. 감동적인 일화가 또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서 한국의 광부들하고 함께 흐느끼며 울었던 사건입니다. 나라가 어려워 돈을 꾸러 독일을 방문했는데, 막상 독일은행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서러워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광부들은 앞으로 받을 20년 동안의 월급을 담보 맡기고 차관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돈을 가지고 눈물겹게 귀국합니다. 또한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젊은 병사들은 얼마나 죽어나갔어요? 그때 병사들은 피어린 전장에서 받은 달러월급을 모두 본국으로 송금했잖아요. 그 돈은 모두 산업화에 요긴하게 썼지요. 마산 보세공장에서는 농촌에서 온 여공들, 우리의 누이들 말이에요. 정말 열심히 일했잖아요? 중동 붐 때에는 건설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땀을 흘렸고요.
이들처럼 당시에 피땀을 쏟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우리 대학생들처럼 박정희정권의 산업화정책에 반대만을 했겠느냐,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경제개발이라는 테제, 또는 잘 살아보자는 테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국민합의가 있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병직 : 경제개발을 해서 직장이 생기고, 먹을 것이 생기면서 국민들의 지지가 거기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교육수준이 폭발적으로 높아집니다. 자유당 시절에는 겨우 초등학교 수요를 충족하는 정도였는데, 경제개발에 따라 소득이 높아지면서 중∙고등학교에의 진학률도 높아지고 80
년대에 들어오면 대학진학률도 선진국 수준에 도달합니다. 그러니까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전체 사회 구조를 기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고 생각됩니다.

박지향 : 제가 71학번인데 당시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 가운데 대학 진학자의 비율은 7%였어요.

노재봉 :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대학이 많이 생겼을 때 박 대통령이 “엉터리 대학이 많다”고 해서 학원제 정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됐냐 하면, 군인들이 정치를 하려고 하니까 학벌이 낮은 거예요. 그래서 야간대학에 진학해서 적당히 하면 대학은 등록금만 받고 학위증을 내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교가 없어지게 되니까 반발하
는 것이죠. 그런 이유 때문에 대학이 정리가 안 된 겁니다.

김주성 : 경제성장과정에서 실행했던 우리의 교육투자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계속 우리의 교육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사실상 통계수치로 GNP에서 차지하는 교육투자액의 비중을 비교해보니까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보다도 높더군요. 사교육비까지 합치니까 세계 최고더라고요.

노재봉 : 숫자만 놓고 본다면 세계 최고인데, 저는 그것이 반드시 좋은 현상이라고 안 봅니다. 우리가 근대화를 하고 지금까지 오면서 교육열이 강해지긴 했는데, 평등의식이 강조되다 보니까 사회적인 지위경쟁이 격화가 된 거에요. 전부 지위 획득의 지름길이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이라고 해서 지금 교육에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로서 무엇이 희생되고 없어져 버렸느냐 하면, 천직(天職)의식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잘 발달된 가족기업이라는 것이 거의 없어져 버렸어요. 전멸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소기업 같은 게 가족단위로 나아가야 출산도 되고 할 텐데, 그런 것이 지금 전무하고 전부 돈에 매이고, 부의 추구가 압도적 가치로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기동 : 노 선생님 말씀은 평등주의자들이 볼 때 아주 극단적인 엘리트주의론이 됩니다.(웃음)


노재봉 : 지금 소위 명분상으로 고학력 실업자가 얼마나 많아요. 직업이 없어서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고, 있지만 안 갑니다. 지금 직업 종류는 4만여 종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 4만 몇 천 종에 대한 직업에 맞는 인력을 양성해 내느냐, 지금 그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거든요.

안병직 : 저는 지금 우리가 어느 정도 선진화 됐고, 한국사회도 선진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국가가 되기까지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도입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산업화도 중요했습니다만, 또 1987년의 6∙29 선언에 의한 민주화도 굉장히 중요했다고 봅니다. 한국이 그때 와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민주
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를 가능케 할 만한 경제발전이 있었기 때문이겠습니다만,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운동의 역할도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등을 뭉뚱그려가지고 대중운동이라고 한다면, 이 대중운동이 한국근현대사에서 한 역할은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잠깐 언급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노 선생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재봉 : 현재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여태까지 중진국의 카테고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안 선생 말씀대로 난 선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이만큼 잘 사는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적어도 물질적인 면이나 그에 따르는 의식 면에 있어서는 살아도 너무 잘 살아요. 자꾸 우리는 선진국에 포함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경제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선진국입니다.
우리가 처음 이야기했던 것으로 되돌아가자면 경제적인 혁명이 먼저 완성이 되고 이후에 민주주의라고 하는 혁명이 이루어지는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후자는 정치에 대한 피치자의 참여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피치자의 참여라는 것이 지금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피치자가 참여를 하려면 우선 법질서가 제대로 지켜져야 하고, 공덕심이라고 하는 것이 정착되어야 하는데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이 아직 까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의 대중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외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사람들은 집단히스테리에 걸린 것 같다는 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평등화가 됐고 그 평등화의 과정이나 현실 속에서 개성이라는 것이 아주 발달한 것 같은데, 사실상 몰개성적인 현상이 많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고 다른 나라도 이런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괴리라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반성하려는 입장도 강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물질적으로 잘산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냐, 무엇을 위한 풍요냐 하는 고민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상적 시발점은 장 자크 루소입니다. 이성과 감성이라고 하는 양면성의 조화, 이성을 경제발전과 같은 것이라 하고, 감성을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과 공동체 문제라고 볼 때 둘의 양면성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의 문제, 공동체 파괴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물질을 추구하고 평등화 된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남과 나의 비교의식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만, 남자들이 부인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아파트 평수가 왜 남들보다 좁냐, 왜 애들 일급과외를 못시키느냐, 또 우리 자동차는 왜 이리 작냐”하는 비교 때문에 남성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시중의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만, 문제는 이러한 비교의식에서 나온 주체할 수 없이 커진 욕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양 사람들도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던 것이고 지금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물질적으로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만 강조를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안병직 : 그 점에는 평등주의가 상당히 크게 작용을 했다고 봅니다. 한국사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본래 뚜렷한 계급이 없었습니다. 다산(茶山)에 의하면 한국에는 분(分)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군신지분(君臣之分)이고, 다른 하나는 주노지분(主奴之分)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뚜렷한 계급적 차별은 노비 정도라고 해야 하고, 그 이외의 반상(班常)
관계는 분의 차이가 아니고 등급(等級)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에 따라서 다르기는 합니다만, 한국사를 통관해 보면 노비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역대 토지제도인 고려시대의 전시과(田柴科)나 조선시대의 과전법(科田法)은 기본적으로 균전법(均田法)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굉장히 평등 지향적입니다.
그래서 한국전통사회에서는 평등의 개념은 강한데, 자유의 개념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선진화된 국민윤리를 정립하려면 자유에 입각한 자기책임의 윤리를 어떻게 정립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박지향 : 저는 두 분 선생님 말씀에 직접적인 반대 의견을 내야겠는데, 우리가 현재 경제적으로 좀 여유 있게 사는 것이지 선진화된 사회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선생님이 질문하신 내용도 너무 경제 위주이고, 노 선생님 말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18~19세기 유럽 사람들이 상정한 문명이라는 개념이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화의 개념하고 아마 비슷할 거예요. 무엇이 문명인가에 대해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의견을 냈는데, 제가 볼 때 가장 명쾌하게 문명이 무엇인가를 요약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1830년대에 밀이‘문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산업 발달과 도시화, 경제발전 등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밀이 생각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협동, 법에 의한 통치, 타인으로부터 개인과 그의 재산을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협동입니다. 문명을 이룬 인간이 동물이나 비문명의 인간과 다른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문명화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이익의 일부를 희생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밀은 주장합니다.
저는 그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어느 정도 개인적이해관계를 희생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협동해 나갈 수 있느냐라는 지수로 본다면 저는 우리나라는 거의 낙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가족, 혹은 내가 속한 좁은 공동체를 넘어서는 공덕심이라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우리가 선진화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봅니다. 패거리 문화라든가 법을 넘어선 떼법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증거죠. 그래서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어떤 공동의 목표에 복종하고 그것을 향해서 같이 노력해나갈 뿐만 아니라, 협동을 하더라도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는 식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있을 때 진정한 선진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선진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봅니다.

노재봉 : 안 선생과 나는 물질적인 수준에서는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스스로 일컬어도 손색이 없는 단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밀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당시 밀뿐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밀은 토크빌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기주의는 떠났습니다. 이기주의는 극단적 사고, 공격적인 성향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개인주의의 시대입니다. 개인주의는 대단히 조용하고 주변과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아주 부드러운 성향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그런 식으로 변했는데, 이것이 물질주의와 합쳐지면 고약한 형태가 됩니다. 아까 밀의 문명이야기를 했는데, 칸트는 문명만 가지고는 안 되고 개성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개인주의는 있는데 개성은 거의 약화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산업화 과정에서 서양의 사상가들이 전부 고민했던 것이고, 우리도 그걸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공동체만 강조하다보면 또 전체주의가 돼 버립니다. 사익과 공익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은 동양에도 있는데, 맹자가 얘기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살려서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내고 문화적인 풍요를 어떻게 만들고 가꿀 것이냐 하는 문제들에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거죠.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민주화라고 하는데, 앞으로 인간이 황폐화되는 건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새로운 문제에 부닥쳤어요. 지금 사회에 대한 사상적인 제의가 달라져가고 있는데 공동체주의(communalism),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공화주의(republicanism) 등이 조화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제기된 것이고, 그러한 문제를 지금 우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기동 : 요즘 언론에서는 삶의 질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세계 42위라고 해요. 그러니까 경제소득에 비해서는 매우 낮습니다. 저는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을 막연히 행복지수쯤으로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내용 설명은 없고 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방금 노 선생님 말씀 중에 측은지심이라는 데서 생각난 것이 일본의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라는 수학자가 5년 전에 쓴『국가의 품격』이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이 주장한 것은 서구적인 논리만 추구하면 황폐화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일본적인 정서를 구축해야 된다면서 측은의 정(情)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일본 무사도의 윤리에 측은의 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평등의식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지요.
안 선생님이 마침 경제학을 전공하시니까 그중 하나 재미난 것은 후지와라가 현재 자본주의가 매우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한 예로서 들고 있는 금융파생상품(derivative)입니다. 이 사람은 수학자의 입장에서 금융파생상품이 확률미분방정식에 입각한 아주 높은 수준의 수학을 응용한 경제이론이라고 하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했어요. 이 책이 2005년에 나왔으니까 정확히 3년 후에 터질 부동산 버블과 금융파생상품 문제를 예견한 셈입니다. 그가 동양적인 윤리를 회복하자고 제창하면서 국가의 품격을 강조한 것은 꽤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김주성 : 이 주제로 저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먼저 언급할 것은 우리가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하고 나서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다행스런 사실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민주주의를 먼저하고 산업화를 추진했다면, 필리핀이나 인도처럼 다시 권위주의체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묘하게도 산업화를 하면서 먼저 중산층을 키우고 그 중산층을 기반으로 민주화를 달성했습니다. 사회비용이 적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도 어렵잖게 공고화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선진화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들은 모두 우리더러 선진국가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마음에 걸려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어봅시다. 이 문제는 좌파이론으로는 잘 분석되지 않습니다. 중산층이 두터운 다극적인 현대사회의 문제를 양극적인 계급논리로 어떻게 분석해낼 수 있겠습니까? 현대사회에서 좌파이론이설득력을 잃어버렸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자유사회의 핵심문화인 개인주의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가 제대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실상 개인주의에 기초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인민민주주의가 실패한 궁극적인 이유는 개인주의가 설 땅을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개인들의 특성들이 존중되는 정치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과제는 나를 존중하듯이 남을 존중하고, 내 권리가 중요하듯이 남의 권리도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의 정치문화를 성숙시키는 것일 겁니다. 협동문제나 사회연대문제도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풀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속에 팀워크를 이루어내고, 사회에서 발생하는 소외부분은 따뜻하게 배려하여 껴안아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세를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개인들의 실존이 확충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문화아이템들입니다. 이런 문화아이템들이 풍부해지면 앞서 말한 떼법이나 집단히스테리의 증상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는 이제 명실 공히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병직 : 여러 선생님들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마르크스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마르크스가 초기에 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을 때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자유로운 인간의 자각적 결사(結社)’, 바로 박 선생이 말씀하시는 공동체입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비극적으로 끝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인간상에 입각한 공동체를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강제에 의한 비자발적인 결사는 당에 의한 인민들의 노예화를 강요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궁극적인 문제는 개인의 이기심과 공공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귀착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니까,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면서 공공선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은, 김 교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교양을 통한 공동체에 대한 봉사밖에 없는 것 같네요. 아주 인간의 슬픈 자화상인데, 박 선생이 비판했듯이 한국사회는 아직도 여기에 도달하기에는 상당히 멀어 보입니다.

박지향 : 저는 우리 역사에서 제일 부족한 부분이 조금 전에 김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제왕조 시대로부터 식민지를 거쳐서 바로 민주주의로 넘어가면서 자유주의 시대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몇 백 년 동안의 자유주의 시대, 그때가 바로 개인의 독립과 자립, 개인의 이기심과 공덕심의 갈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결해가는 단계였거든요. 그런데 자유주의 단계가 우리나라에는 없었습니다. 식민지사회에서 급격히 민주주의 사회로 진행하면서 노 선생님이 설명하신 것처럼 집단적인 히스테리의 측면이 노정되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자유주의를 거친 다음 민주주의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그런 집단히스테리적 문제가 발견되지 않죠. 덧붙여 개발 국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강한 국가와 약한 개인이라는 대립이 더 심각해진 측면이 있고요.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의 자립과 올바른 판단, 그리고 나의 권리를 누리려면 남의 권리도 그만큼 인정해야 한다라는 절대원칙이 확립될 수 없었다고 봅니다.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이것을 설명하면서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지적하면 학생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합니다. 학생들의 의식에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같은 것이에요.


캐치∙업과 한국사적 배경


안병직 : 저는 실학(實學)을 전공해봐서 그런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조금 낙관적입니다. 조선후기 사회는 정치제도도 엄청나게 낙후된 전제국가(專制國家)이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빈곤했습니다. 상업이 발전했다고 강조를 하지만, 그 발전 수준도 대단히 낮거든요. 그런 상황임에도 불국하고 실학자들이 쓴 저술들을 읽어보면 실학자들의 지적 수준은 굉장히 높습니다. 특히 저는 정다산을 연구했습니다만, 그의 의식과 지적 수준은 근대인에 가깝습니다. 그러한 지적 수준은 결국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러한 인간상(人間像)이 근대에 들어와서도 사회발전의 기초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박지향 : 정다산이나 박지원 그들이 대단한 지적 수준이었다는 데 동감하지만, 다산이 죽고 나서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과연 얼마나 유포되었습니까? 고종 시대에 와서 다산의 전집을 만들 때까지 제대로 소화가 안 되고 유통이 안 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엘리트층의 지식이 과연 사회 전체에서 어떤 추동력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저는 부정적입니다. 자꾸 영국 얘기를 합니다만, 영국이 세계 최초의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이 발달했고 석탄이 많았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유용한 지식이 사회에 널리 퍼질 수 있는 채널이 많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유용한 지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안병직 : 우리는 좁은 범위 내에서 고급지식인이 있었고 하층은 굉장히 무식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조선사회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실학과 같은 아주 첨단적인 지식은 서울 근방에서만 유행했지만, 유학 일반은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당이 지방말단까지 있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보급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지방에도 유학자
라든지 공부를 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1910년에 남학생만을 보면 서당진학률이 약 10%로 취학률이 굉장히 낮았습니다. 지방에 따라서 다릅니다만, 일본은 테라코야(寺小屋)에의 취학률이 높은 경우 7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당에 가지 않는 부인네들이라고 해서 문화수준이 형편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제 어머니는 학교라는 델 가본 일이 전혀 없는데도 개인사에 관한 넋두리가 주요내용이기는 하지만 추도문이나 축하문 등을 잘 지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의 부인네들이 모여서 저녁에는 그 글을 읽으면서 즐기곤 했습니다. 사실은 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언문(諺文)도 잘 모르는 부인네들이지만 그 어려운 한문들이 뒤범벅이 된 글을 읽어주면 다들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양이나 교육수준을 문자해독력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많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지역사회의 문화수준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지향 : 그러니까 제가 조금 전에 유용한 지식이라고 말씀드렸거든요. 근대화라는 문맥에서 따져봤을 때 유용한 지식이라고 하면 실학이었을 것입니다. 일반지식이라면 유학을 깨닫고 한문을 읽는 것이었겠지만 우리한테 정말 필요하고 유용한 지식은 아마 실학이었을 텐데, 그 유용한 지식이 다산이나 박제가에 머물지 않고 사회에 전반적으로 유포될 수 있는 메커니즘은 없었다는 거죠. 그것이 우리의 근대화를 지체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안병직 : 이론에는 논리성과 사상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상성이 낮다고 해서 논리성마저도 낮으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학의 경우는 비록 근대사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사상성과 논리성이 매우 높습니다. 성리학의 경우는 중세적 사상을 조금도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그 논리성은 매우 높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근대를 생각할 때 전통학문의 수준을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기동 : 본 좌담의 부제가 식민지에서 세계중심국가인데, 세계화 추세 속에서 앞으로 남겨진 과제는 평화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국가전략으로서의 선진화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민족주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며 환경문제와 법치주의를 어떻게 확립하고 지역갈등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앞으로 충분히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노재봉 : 캐치∙업과 한국사적 배경과 관련해서 한국이 오늘날처럼 근대화하기까지 어떻게 국력을 동원했으며, 또 어떤 제도를 통해서 동원이 가능했느냐 하는 주제와 관련,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중앙집권적 통치제도가 강화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중앙집권제는 조선시대로부터 계승된 것이지만 이를 통해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들어와 효과
적으로 국력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죠. 소위 신흥국들의 발전을 논의할 때에 왜 한국은 성공하고 다른 데는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를 했냐 하는 점에 대해 논의가 많은데 미국의 폴리라고 하는 사람이 한국을 포함해서 몇 나라를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뛰어난 성과를 얻은 국가가 한국인데, 비민주적인 시스템과 파워를 가지고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비민주적인 근대화라고 하는 것의 비용을 본다면 얼마나 무자비한 것이냐라는 반론이 있는데, 폴리의 대답은 “그럼 서양을 보자. 후발자본주의로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근대화한 예를 하나라도 들어봐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근대 혁명에서 서양과는 다른 방식의 캐치∙업을 하려고 나온 것이 볼셰비키 혁명인데, 그것부터 시작해서 민주적인 수단을 통해서 근대화를 이룬 예는 한 케이스도 없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의 이념적인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이념적인 지표에 대해서는 요지부동이었는데, 정부의 운영만은 역시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였습니다. 이어 박정희 정권도 강력한 중앙통제식 방법으로 근대화를 추진했는데, 그 과정의 비민주적인 측면에 반발해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안 교수나 나나 자유민주주의적인 입장에서 그 과정의 비용이 너무 크다는 식의 입장으로 늘 비판을 했지요. 그런 브레이크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브레이크가 없으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니까요.

안병직 : 이거, 좌담이 너무 길어졌군요. 마지막 주제인 한국근현대사의 혁명적 변화를 가지고 온 한국사적 배경에 관해 본격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벌써 좌담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 장시간 아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