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동북아시아 불교사상의 전개
최연식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1. 동북아시아 불교사상의 기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大乘起信論』은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신앙되는 불교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大乘起信論』을 근본 문헌으로 내세우는 종파는 없지만 禪宗과 華嚴宗, 天台宗 등 주요한 불교종파들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읽히면서 기본적 문헌으로 중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특정 종파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이러한 『大乘起信論』에 대한 폭넓은 관심은 이 책에 대한 해설서의 다양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전통시대에 이미 수많은 주석서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현대에 들어와서도 『대승기신론』에 대한 해설서들은 계속하여 간행되고, 읽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大乘起信論』은 동북아시아 불교인들의 공통적인 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상당 부분은 이 책의 내용에 의거한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를 ‘『大乘起信論』(에 입각한) 불교’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여기에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동북아시아 불교의 사상적 특색이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1)
그런데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처음부터 『대승기신론』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고, 『대승기신론』이 불교계의 주류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많은 역사적 전환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전환은 동북아시아 지역 각국의 불교인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낸 사상적 모색의 결과물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불교는 중국에서 한국, 다시 한국에서 중국으로 전해졌지만, 『대승기신론』을 기본적 사상토대로 하는 ‘동북아시아 불교’의 특성은 동북아시아 각 지역 불교도들의 상호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호 영향은 고대는 물론 중세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근대사회에 이루어서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승기신론』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초기의 단계, 즉 6세기에서 10세기까지의 시기에 더욱 활발하였다. 이 시기는 동북아시아의 불교계가 활발하게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동북아시아 불교’의 보편적 기반이 성립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대승기신론』은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문헌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동북아시아 불교’인들의 공통의 이론적 기반으로 확립되어 갔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 시기 동북아시아 불교계에서의 『대승기신론』 수용의 과정을 개략적으로 검토함으로서 『대승기신론』을 매개로 동아시아 불교계가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대승기신론』의 성립배경
후일 동북아시아 불교계의 사상적 기반이 된 『대승기신론』이지만 처음 어떻게 동북아시아 불교계에 출현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이 문헌은 인도의 마명(馬鳴)보살이 짓고, 6세기 후반 남중국에 건너와 譯經활동을 한 인도출신의 진제삼장(眞諦三藏)이 漢譯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실제 사실이 아닌 假託이라는 견해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대승기신론』의 출현 및 저술자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들이 점차 보강되어 가고 있다.
근대 불교학계에서 처음으로 『대승기신론』의 성립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는 진제삼장의 漢譯활동에 관한 초기의 기술 중에 『대승기신론』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진제삼장의 번역일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책의 사상내용과 용어 등의 면에서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찬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2) 이후 『대승기신론』의 인도찬술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학계에서 꾸준히 논의되었고, 특히 논리체계 및 사용된 용어 등에 대한 비교 등을 토대로 남북조시대 地論宗 승려들을 찬술자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구체적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의 전승을 수긍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고, 특히 인도불교를 전공한 학자들이 『대승기신론』의 내용에서 남북조시대의 중국불교인들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인도적 불교이해의 모습을 찾아내면서 중국찬술설을 반박하기도 하였다.3)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중국 혹은 인도찬술설과는 구별되는 제3의 견해 즉, 인도출신 승려의 강의를 토대로 한 중국 지론종 승려들의 찬술이라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이는 인도출신으로 중국에 지론학을 소개한 보리류지(菩提流支)와 늑나마제(勒那摩提)가 번역한 문헌들과 『대승기신론』에서 용어 및 어법에서 일치를 보이는 사례가 적지 않고,4) 또한 보리류지의 번역으로 알려진 문헌들 중에 실제로는 그의 강의를 중국 승려가 정리한 문헌들이 있다는 연구들에5) 기초한 것인데, 최근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보리류지가 번역한 『法集經』과의 유사점을 치밀하게 분석한 위에 보리류지의 문헌을 토대로 하여 중국인들이 필요에 의하여 윤색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연구가 제시되기도 하였다.6)
현재까지의 연구들에 의거할 때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학설에 기초하여 중국불교계에서 찬술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성립연대는 6세기 중반 즉 55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아있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사상경향이나 형식면에서 『대승기신론』과 비슷한 문헌들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대승기신론』은 그러한 일련의 사상경향의 문헌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문헌이라고 생각된다.7) 즉 중국불교계 내의 특정한 사상적 집단에서 스승으로부터 전해오는 자신들의 입장을 여러 단계를 거치며 최종적으로 정리한 문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馬鳴보살의 저술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이 문헌을 만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보다 정당화하기 위하여 가탁한 것으로 보이며, 眞諦삼장이 漢譯하였다는 전승 역시 그러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대에 진제삼장의 명성과 권위를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假託은 『대승기신론』 성립 당시까지는 아직 이 책에 제시된 사상이 당시 불교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다른 의미에서는 당시에 새롭게 제기되었거나 논쟁의 대상이 되는 사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사상은 주지하듯이 모든 존재가 眞如의 드러남이라는 眞如緣起說이며, 또한 현상세계[世間]와 진리의 세계[涅槃?出世間]가 동일한 진여의 두 가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一相平等’의 입장을 가진 것인데, 오늘 날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불교의 정설로 되어 있는 이러한 견해가 당시에는 아직 ‘하나의 견해’로서 제시되어 있는 단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6세기 초에 十地論의 번역과 함께 중국에 소개된 유식사상 중에는 현상세계의 근원이 되는 알라야식과 진리의 세계의 근원이 되는 如來藏(=眞如)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느냐 이질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었는데, 그러한 이견은 이윽고 지론종 내부에서 南道派와 北道派라는 학파적 대립으로 표출되었다. 사상적 측면에서 『대승기신론』은 바로 지론종 남도파의 입장을 대변 혹은 발전시킨 것이며, 자신들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인도 마명보살의 찬술서로서 『대승기신론』을 성립한 것은 당시 불교계에서 유식사상 이외의 집단 및 같은 유식사상 내부의 반대자(=북도파)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진제삼장이 漢譯한 문헌들의 사상을 토대로 성립된 攝論學派는 동일한 眞如緣起說의 입장을 취하는 지론종 남도파와 융합되어 갔는데, 『대승기신론』이 진제삼장의 번역으로 이야기 된 것은 바로 이 두 학파의 융합을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그만큼 불교계에서 이들의 입장이 확대,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8) 북조말기 이후 지론종 남도파는 섭론학파의 주류와 결합되면서 유식사상계 내부는 물론 불교계 전반의 주류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9) 『대승기신론』이 불교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던 것이다.
3. 『대승기신론』의 위상확립과 元曉의 역할
지론종 남도파의 발전으로 『대승기신론』이 불교계에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지만 곧바로 지론종과 섭론종 이외의 사람들에까지 그 영향력이 파급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수나라의 대표적 불교사상가로서 天台宗의 실질적 개창자인 智?의 문헌에는 『대승기신론』이 거의 인용되고 있지 않으며,10) 三論宗의 吉藏은 일부 인용하고 있지만 『대승기신론』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지론종 남도파 승려 慧遠의 저술을 재인용한 것에 불과하였고,11) 같은 삼론종 慧均의 저술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위작이라고 이야기하였다.12) 당나라 초기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특히 같은 유식학파로서 당나라 초기에 성립된 法相宗에서는 알라야식과 여래장(=진여)를 다르다고 보는 입장이었으므로 『대승기신론』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었고, 실제로 이 책을 거의 무시하였다. 화엄종의 경우 여러 종파의 견해들을 통합하여 전체 불교학을 망라하는 이론 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대승기신론』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론체계에서 『대승기신론』은 어디까지나 화엄경과 화엄종의 이론에 미치지 못하는 하위의 이론으로로 위치지워져 있었다.13)
중국 불교계에서 『대승기신론』이 널리 읽히고 그 사상이 여러 종파의 이론 체계에 수용된 것은 화엄종의 이론을 집대성한 法藏(643-712)이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大乘起信論義記』라고 하는 후대에 가장 널리 읽히게 되는 『대승기신론』주석서를 저술하였고, 이 책의 영향으로 『대승기신론』의 입장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면서 화엄종은 물론 불교계 전반에 널리 이해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法藏의 경우도 『대승기신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선양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가 체계화한 敎判論에서 『대승기신론』은 5단계 중 세 번째인 大乘終敎의 이론에 불과하였다. 그에게 있어 『대승기신론』의 이론은 기본적으로는 당시 대립하고 있던 法相宗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후 그의 주석서는 그의 문도들은 물론 다른 종파의 사람들에 의해 널리 읽혔고 그에 따라 『대승기신론』의 입장을 최상의 이론 중 하나로서 수용되게 되었다. 그의 주석서는 『대승기신론』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선양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화엄종 내에서는 『대승기신론』의 이론을 활용한 觀法에 관한 문헌들이 출현하면서 그의 이름에 가탁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화엄종을 비롯한 당나라 불교계에서 『대승기신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상적 배경에는 悉有佛性의 如來藏思想을 부정하는 법상종에 대한 비판 및 실천수행을 통한 마음[心]의 체득을 주장하며 새롭게 등장한 禪宗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이 있었다. 본래 『대승기신론』의 眞如緣起說은 법상종의 五姓各別說과는 대척적인 이론으로서 법상종의 입장을 배척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유효한 것이었고 - 법장의 『대승기신론』 활용 기본 의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 모든 것을 마음의 발현으로 보는 『대승기신론』의 이론은 다른 종파의 사람들이 선종에 맞설 觀法을 체계화하는데 있어 대단히 유용한 이론체계를 제공하였던 것이다.14) 즉 당시 불교계의 상황이 『대승기신론』의 이론을 필요로 하고 있던 차에 그 이론을 체계적이고 활용가능하게 정리한 법장의 주석서가 출현하면서 『대승기신론』은 불교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法藏의 주석서는 그 내용이나 이론체계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신라 元曉의 『대승기신론』 주석서에 의지한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원효는 당시 불교계의 다양한 사상체계를 종합화할 수 있는 이론을 『대승기신론』에서 발견하였고, 이에 대한 수많은 저술을 지어 『대승기신론』 사상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선양하였다.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체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실로 원효 이전에 없던 것이었고, 그의 주도면밀한 이론화를 통하여 『대승기신론』에 대한 이해는 비약적으로 진전될 수 있었다. 이전의 주석서들과 비교할 때 원효의 주석서는 단순한 용어와 문구해석을 넘어서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해명하는 이해의 틀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이론의 체계화를 통하여 그러한 목적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실로 『대승기신론』은 원효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法藏은 화엄종의 입장에서 『대승기신론』을 제한적으로 인정하였지만 적어도 그의 주석서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적극적으로 선양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저본으로 삼다시피한 원효의 주석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법장이 이 주석서를 저술하게 된 구체적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 황실이나 고위층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 비교적 단기간에 저술한 것으로 보이며 자연히 기존의 주석서인 원효의 것을 활용하면서 필요한 부분에서 화엄사상의 입장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 아닌가 한다.15)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불교계에서 『대승기신론』이 주요한 문헌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는데에는 元曉의 『대승기신론』 선양과 그 사상을 해명하려는 노력이 기본적 토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불교계의 상황에 의해 촉발되었고 직접적으로는 법장의 주석서에 의한 영향이었지만 원효의 역할이 없었다면 『대승기신론』이 당시 불교계에서 과연 그와 같은 위상을 단기간 내에 차지할 수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동북아시아 불교계에서 『대승기신론』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확립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 한국과 중국 불교계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사람들에 앞서 『대승기신론』의 사상적 유용성을 인식한 원효의 선구적 노력이 중요하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4. 『대승기신론』사상과 기존 불교사상의 통합을 위한 시도들
『대승기신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대승기신론』의 사상을 각 종파의 기본적 입장에서 통합하려는 노력들도 나타났고 그에 따라 각 종파의 사상 경향에도 일정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화엄종의 경우 澄觀(738-839) 이후 화엄교학과 『대승기신론』을 性宗의 입장에서 통합하는 이론체계를 성립시켰고, 이러한 이론은 이후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화엄종의 기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천태종과 선종에서도 『대승기신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초기의 사상 경향과는 달리 唯心論的, 眞如緣起說的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심지어 『대승기신론』과 배치되는 입장을 취하던 법상종에서도 - 비록 신라에서만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 『대승기신론』을 포괄하려는 흐름이 나타났다.16)
그런데 『대승기신론』사상과 기존의 사상체계를 통합하려는 모습은 신라에서 특히 강력한 형태로 나타났다. 즉, 8세기 이후 신라에서 활발하게 나타났던 『대승기신론』사상과 화엄사상을 통합하려는 사상적 동향은 화엄종의 입장에서 『대승기신론』의 사상을 포섭하려 한 것과 달리 『대승기신론』의 입장에서 화엄사상을 포섭하려 한 것으로서 징관 등에게서 보이는 『대승기신론』을 포섭한 화엄사상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이러한 사상은 『대승기신론』을 중시하면서도 화엄사상을 포섭하려하였던 원효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보다 넓은 차원에서는 당시 신라 불교계의 주요한 두 가지 흐름인 원효와 의상의 사상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원효가 『대승기신론』과 화엄사상 양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한 것과 달리 智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義相과 그의 문하에서는 『대승기신론』을 특별하게 중시하지 않고 화엄사상에 미치지 못하는 낮은 차원의 사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는 지엄 단계의 화엄교학에 충실하면서 法藏의 이론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던 이 계열의 사상적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일찍이 법장의 영향으로 『대승기신론』을 중시한 중국의 화엄종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대승기신론』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 원효의 사상과 의상계의 사상은 둘 다 모든 존재의 통일성을 중시하려 한 점에서는 상당한 친연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효의 경우 『대승기신론』의 眞如緣起說에 입각하여 모든 존재와 현상의 본질적 동일성을 강조하였고, 의상계에서는 화엄교학의 法界緣起說에 입각하여 개개의 존재나 현상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볼 때 이러한 친연성에 입각하여 양자를 통합하려는 시도들이 제시될 수 있는데, 8세기 중엽에 나타난 『대승기신론』사상과 화엄사상을 통합하려는 시도들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원효의 사상과 의상계의 사상을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스스로 인도에서 찬술된『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석서임을 자처한 『釋摩訶衍論』은 바로 이러한 시도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17) 이 외에도 『대승기신론』의 입장에서 화엄사상을 통합하려한 시도는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제삼장의 제자 智愷가 찬술했다는 전승을 가진 『起信論一心二門大意』는 종래 일본 승려들의 僞作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流轉本際經』이라는 문헌이 한국에서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8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서 저술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여기에도 『대승기신론』 사상을 배경으로 화엄교학을 수용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18) 이러한 흐름은 이후에도 사상계의 일부에서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0세기 초경의 문헌으로 추정되는 『健拏標訶一乘修行者秘密義記』에는 『대승기신론』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의상계의 화엄사상과 동북아시아 토착사상까지를 통합하려는 사상적 동향이 나타나고 있다.19)
이처럼 8세기 이후 신라 불교계에서는 『대승기신론』의 입장에서 화엄교학을 포섭하려는 사상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흐름은 이후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석마하연론』은 중국에 전해져 대승의 대보살인 龍壽의 저술로서 널리 읽혔고, 특히 그 안에 포함된 밀교적 요소로 인하여 특히 밀교계 승려들에게 널리 활용되었다. 그리고 9세기초에 쿠카이(空海)가 중국으로부터 밀교를 수용하여 일본의 眞言宗을 성립시킨 이후에는 일본 불교계의 근본문헌 중 하나로 확실한 위상을 확립하였다. 『起信論一心二門大意』의 경우는 일본 불교계에서 중국의 문헌으로 오인된 가운데 『대승기신론』의 핵심내용을 정리한 책으로 여러 종파에서 널리 읽혔고 그에 대한 해설서들도 다수 저술되었다. 최근에 그 존재가 확인된 『健拏標訶一乘修行者秘密義記』의 경우 송나라 화엄학자들에게 비교적 널리 읽혔던 것으로 보이며, 金나라 불교계에서도 중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원효와 의상계의 사상을 통합하려는 동향, 즉 『대승기신론』과 화엄교학을 융합시키려는 흐름은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거나 일정한 계승자들의 집단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라 불교계에 꽤 폭넓은 흐름을 형성하였고, 그것이 주변 국가의 불교에도 간헐적이지만 사상적 자극을 미쳤던 것이다.20) 이와 관련하여 특히 일본 나라시대의 화엄종에서 元曉와 法藏의 사상을 통합한 이른 바 ‘法藏?元曉融合形態’의 교학을 발전시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全一의 이데아를 성립시켰으며, 여기에는 新羅로부터의 사상적 영향에 의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주목된다.21) 일본의 ‘法藏?元曉融合形態’의 교학이 실제로 신라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신라에서의 원효와 의상계 사상의 통합을 추구한 흐름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흐름이 서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에 있는지 아니면 간접적인 흐름에 의한 것인지는 앞으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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