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복수심
趙甲濟 月刊朝鮮 대표이사
1918년 10월 히틀러는 독일군의 서부전선인 벨기에 참호에서 영국군이 쏜 가스탄을 맞고 실명이 되었다. 장님이 된 동료들은 그래도 시력이 약간 살아 있는 병사에 이끌려 후방으로 달아났다. 이들 부상병은 독일동부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후방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헛소문이라고 믿지 않았다.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이 전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위대한 독일인들이 후방에서 조국의 등에 칼을 찌르는 배신행위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독일해군내의 공산당원이 병원으로 찾아와 공산혁명에 동참할 것을 선동했다. 이들 공산당원중 세 명이 유태인이었다. 그들중 아무도 일선에서 근무한 것 같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아 회복되었던 시력을 다시 잃었다고 한다. 그는 흐느끼면서 맹세했다고 한다. 시력만 회복된다면 정치에 뛰어들어 조국을 배신한 빨갱이들과 유태인들을 응징하겠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정치인이 될 것인가 건축가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증오심, 즉 조국의 등에 칼을 꽂은 유태인과 빨갱이들 때문에 ''우리가 잘 지켜낸 전선''이 무너졌다는 울분은 권력에의 의지로 전환되었다. 그 권력은 유태인과 공산당을 처단하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 증오심과 복수심이 히틀러의 정치적 에너지였다.
三國史記를 읽어보면 신라의 삼국통일 또한 증오심과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신라 통일의 三大인물들이 모두 그런 분노를 갖고 있었다. 김유신은 "적들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플 지경"으로 백제를 증오하여 소년기 때 석굴에 들어가 신묘한 힘을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태종무열왕이 되기 전에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합천(대야성) 싸움에서 백제군에게 잃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종일 멍하니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증오와 복수심이 唐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치는 삼국통일의 의지로 승화된다.
[貞觀年中撫慰新羅王詔(정관연중무위신라왕조)라는 문서가 중국에 현존한다. 이는 서기 645년2월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낙양을 출발하기 직전에 신라의 善德여왕 앞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내용은 唐軍이 고구려를 치는 데 신라도 파병해달라는 요청이다. 이때는 아직 羅唐 동맹이 결성되기 전이다.
그 3년 전 신라는 백제, 고구려 연합군으로부터 한강유역의 당항성을 공격 받았고 大耶城(합천)을 백제군에게 빼앗겼다. 이듬 해 신라는 사신을 당 태종에게 보내 援軍의 파병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킬 때 죽은 도독 金品釋 부부는 뒤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삼국사기 선덕여왕條에 따르면 인간적인 대목이 나온다.
<춘추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이 앞을 지나가도 살피지 않더니 이윽고 말하기를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는 없애지 못하겠는가"하고,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고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겠습니다"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백제가 멸망했을 때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金法敏. 문무왕)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누님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레닌이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그의 형이 러시아 황제 암살을 꾀하다가 잡혀 사형된 데 대한 복수심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좌경화시키고 있는 친북좌파 세력의 핵심에는 남로당 가족이 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장인이 남로당으로 활동하다가 처벌(또는 처형)당하고 본인은 연좌제에 걸려 사회생활에 지장을 당하면서 마음속에 체제와 국가에 대한 원한을 쌓아갔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그 증오심과 복수심이 끈질긴 좌익투쟁의 원동력이 되었고 드디어 그들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해방 직후의 좌우익 대결에서 좌경화를 막는 데 일조했던 우익행동대 서북청년단도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뭉쳤다. 이들은 북한에서 공산당으로부터 탄압을 당해 남쪽으로 내려온 청년들로서 공산당이라면 이가 갈리는 사람들이었다.
세계사를 바꾼 것은 의외로 이러한 감정인 경우가 많다. 한국 근대화의 기수인 박정희는 특정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나 복수심을 가졌던 적은 없으나 가난에 대한 한을 가졌고 그 한풀이를 개인적인 것이 아닌 거족적인 것으로 끌어올려 근대화를 성공시켰다. 이념은 감정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우익인가, 좌익인가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체험속에서 우러나온 감정이고 그 감정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나중에 이론이 등장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지금 대한민국을 지킬 분노를 마음에 품은 집단은 없는 것인가. 김정일 집단과 친북좌익들에 대해서 증오심, 분노, 정의감, 복수심을 품은 집단은 없을까.
먼저, 탈북자들이 있다. 이들은 김정일의 탄압에 항거하여 탈출하면서 처자식을 死地에 남겨두고 왔다. 약5000명에 이르는 탈북자들의 숫자가 불어난다면 이들은 친북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행동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25 당시 좌익으로부터 학살당하거나 납북된 사람들의 가족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이 피살자 납북자의 아들 딸들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국가로부터 제한을 받은 경우가 없어서 그런지 의외로 분노나 복수심이 약하다.
한국인의 집단적 정의감을 발휘하게 할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김정일과 이 자를 추종하는 친북세력이다. 김정일의 민족반역적 죄과와 인간말살, 그리고 친북세력의 가증스러운 위선과 악랄함을 폭로하여 한국인이 분노하고 응징을 다짐하도록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정치인과 언론인이다. 문제는 사회전체의 좌경화 속에서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이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민족반역 세력의 범죄행위를 은폐, 축소함으로써 한국인의 건전한 正義감각을 마비시킨 점이다.
한국인의 마음밭에 정의로운 분노의 씨앗을 뿌리는 것, 그 분노를 통일의지로 조직하는 것이 지식인들이 져야 할 과제이다. 역사를 바꾼 위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결구도는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없는 사람들과 있는 사람들의 대결이다. 즉 惡을 미워하는 사람과 惡을 방관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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