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한·중·일이 함께쓰는 역사 - 러.일전쟁, 이또와 안중근, 만주국, 대동아공영권

이강기 2015. 10. 4. 16:40

전쟁 본질은 “한국지배” ‘자의적’ 해석 넘어 새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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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일 전쟁은 ‘한반도’ 열강 각축 인식 실마리
  • 100년전 잉태 ‘개전론’ 자위대 파병까지 비약

  • 한 중 일 '미래를 여는 역사' 공동교과서 집필

     

    “다른 강국 한반도 점령땐 일본위협 ” 논리 소개

     

    사상 첫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인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가 오는 5월 세 나라에서 동시 출간된다. 세 나라의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이 3년에 걸쳐 토론과 집필을 거듭한 결실이다. 2차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아 ‘공동의 역사인식’ 위에 동아시아 평화의 밑거름을 마련하려는 노력이다.

    <한겨레>는 이 작업을 주도한 한국 쪽 시민단체인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와 함께 앞으로 12차례에 걸쳐 공동 교과서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동시에 세 나라의 시선이 엇갈리는 역사 쟁점의 의미와 최근 논의를 공동교과서 집필위원들이 직접 살폈다.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의 시민사회가 ‘국사’에 갇혀 있던 역사인식의 공백과 기울어짐을 고쳐잡고 동아시아 평화의 주역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이 전쟁은 한국에 대한 지배와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이하 ‘미래를 여는 역사’)는 ‘러-일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서술한다. “전쟁을 한 장소가 일본도 러시아도 아닌 한국과 만주”였다는 점에 “이 전쟁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한겨레>가 입수한 <미래를 여는 역사> 최종 원고를 보면, 러-일 전쟁에 대한 서술은 책의 제1장 ‘개항과 근대화’ 대목에서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다. 세 나라의 편찬위원들은 왜 러-일 전쟁을 ‘새롭게’ 쓴 것일까?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인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러-일 전쟁이) 각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현재 처지에 따라 다르게 설명돼 왔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일본사> 고등학교 교과서는 “일본 내에서 만주를 점령하고 철병의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점차 높아졌다”고 서술한다. 개전의 책임이 러시아에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전쟁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구했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반면, 중국 초급중학교에서 쓰는 <중국역사> 교과서는 러-일 전쟁보다는 ‘청-일 전쟁’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한국의 중학교 <국사> 교과서는 러-일 전쟁을 전후한 복잡한 국제관계의 변화를 서술하지 않고, 일본의 침략적 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일본이 러-일 전쟁을 ‘자의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중국과 한국에서 러-일 전쟁은 ‘잊혀진 전쟁’ 또는 ‘몰라도 되는 전쟁’으로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미래를 여는 역사>는 러-일 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한·중·일 공동의 역사인식을 풀어가는 데 핵심적 사건이라고 본다. 신주백 연구원은 “세 나라의 근대사는 침략과 저항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으며, 이를 올바로 전달하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며 러-일 전쟁에 대한 공동 역사서술의 의미를 평가했다. “한·중·일의 학생들이 러-일 전쟁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계를 반성적으로 살펴보게 하는 교육은 최근 동아시아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미래 지향적인 역사교육”이라는 것이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당시 일본이 러시아에 공격받을 위험성은 없었다”며 일본의 개전 책임을 분명히했다. 동시에 러-일 전쟁으로 한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의 민중들까지 큰 피해와 부담을 안았다는 점을 적었다. 전쟁 중이던 1904년 5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정치상, 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상 점진적으로 이권의 발전을 도모한다”고 결정한 내용도 소개했다.

    이는 특히 러-일 전쟁의 긍정적 의미를 부각시켜온 일본 역사교과서와 대비된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일본 학생들을 의식한 듯, 전쟁 당시 일본 정부의 ‘논리’도 소개했다.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러-일 전쟁 개전 반 년 전에 쓴 글을 인용한 대목은 이렇다. “만일 다른 강국이 한반도를 점령하게 된다면 일본의 안전이 위협받는다. 이를 예방하는 것이 예부터 내려온 일본의 정책이다.” 전쟁의 배경을 깊이 인식하게 하려는 배려다. 침략전쟁이라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세계 일등국이라는 의식도 높아갔다”며 일본인의 빈약한 현실인식을 꼬집는 대목도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서로 다른 ‘흥아의 길’ 대충돌

     


    △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되는 안중근.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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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 러·일 전쟁



  •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② 이토와 안중근

     

    이토 “러 위협 막으려면 조선 필요” 외교전
    안중근 “이토 있는한 전쟁 되풀이 평화 요원”
    현대 중·북한 위협 들먹이는 ‘제2이토’ 활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그는 침략의 선봉장일 뿐이다. 오히려 그를 살해한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든다. 두 인물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동아시아를 둘러싼 대립된 두 ‘이상’의 실체가 등장한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한·중·일이 함께 짚어야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리석은 녀석과 간웅(奸雄)의 충돌= 1909년 10월26일 아침, 이토는 안중근에게 세 발의 총을 맞았다. 30분만에 절명한 그는 자신을 쏜 사람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듣고 “그런가, 어리석은 녀석이다”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죽으면 조선의 식민지화가 더 앞당겨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는 뜻이었다. 이토는 조선에서 자치식민지를 고려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이토를 가리켜 “영웅이 아니라 간웅”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다달이 발전하며 평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신문에 떠들면서 일본 정부와 세계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요원하고,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보았다.

     

    아시아를 위한 두 선택=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토는 그 해 6월에 특사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미국을 움직여 러시아와 종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미국도 반대하지 않았다. 전쟁 승리의 숨은 공로자 이토는 초대 조선 통감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결과는 안중근에게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은 흥한(興韓)의 길인 동시에 동양평화를 지키는 흥아(興亞)의 길이었다. 그래서 1907년 7월 정미7조약 이후 블라디보스톡 부근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의병’ 안중근에게 이토는 조선은 물론 아시아의 ‘역적’이었다. 이토가 흥아의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외교와 무력, 병합과 독립= 이토는 전쟁이 아닌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차지하려 했다. 1873년의 ‘정한(征韓)논쟁’에서 이토는 내치(內治)를 우선해야 한다는 세력을 단결시켜 당장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파’를 물리쳤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할 방파제인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며 ‘만한(滿韓)교환론’을 제기했다. 만주는 러시아에 주고, 대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한다는 논리였다. 외교적 협상으로 조선을 독점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평화를 위해 무력을 피하지 않았다.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이 없는 손바닥 직인의 ‘대한국인(大韓國人)’이란 글자의 주인공이 안중근이다. 1909년초 12명의 동지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하고 단지를 결행한 것이다. 그 뜻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동시에 추구하자는 데 있었다. 의병활동에 이어 이토 살해를 결심한 그는 1909년 10월23일 차디찬 여관방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은 노래 한 수를 읊었다. ‘동풍이 점점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제2의 이토와 안중근= 1950·1960년대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대한제국의 황태자와 이토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실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이토가 한국의 발전을 도와준 인물인 것으로 기억한다. 1963년부터 1984년까지 그가 1000엔권 화폐의 모델이 됐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이토를 존경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일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조선이 필요하다는 이토의 논리는 오늘날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인식과 일치한다. 이제 일본 우익은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과 북한이 위협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양심세력들은 민주화와 통일을 통한 한반도의 안정이 동아시아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아시아 미래를 결정짓는 한국의 위상은 바뀌지 않았다. 제2의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 살아 있다. 그들이 다시 ‘파국’을 맞을지 여부는 이 시대를 사는 한·중·일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한 “침략의 원흉”- 일 “근대화 아버지- 중 “…“

     

    국제정세속 이토 행보 상술
    저격배경 15가지 동시 살펴

     

    공동교과서에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한·중·일이 불러내는 역사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한국의 중학생용 <국사> 교과서는 두 사람을 이렇게 서술한다.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초대 통감으로서 우리 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고등학생용 <국사> 교과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국지사들의 의거활동’이라는 짧은 글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을 비롯하여 이봉창, 윤봉길 … 등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고 소개한다. ‘원흉’이라는 원색적 표현은 고등학생용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한국 근현대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

    그러나 일본 교과서가 설명하는 이토는 다르다. “초대 총리대신이 되어 메이지 국가건설의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다. … 이토는 타협에 의해 대립을 완화하고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다. … 이토는 항상 이상과 현실 쌍방을 바라보며 입헌국가 일본을 건설해낸 것이다.” (<새로쓰는 일본역사> 후소샤) 거의 한 쪽에 걸쳐 이토를 건국의 주역으로 칭송한다. 안중근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토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기록돼 있지 않다. 서술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동경서적판 <역사> 교과서는 이토와 안중근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곳은 중국 하얼빈이지만, 중국 교과서에도 이 사건은 물론 두 인물에 대한 일체의 서술이 없다.

    이런 점에서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이하 ‘미래를 여는 역사’)는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에 대한 지향을 강하게 표상하고 있다. 제2장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한중 양국의 저항’ 편에서 따로 한쪽 짜리 칼럼을 두어 안중근과 이토를 동시에 서술했다. 1909년 10월26일 아침, 중국 하얼빈에서 발생한 ‘사건’을 상세하고 담담하게 적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도록 도운 데 있다. 먼저 1장 ‘개항과 근대화’ 편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상세하게 서술해 이토가 주도한 개혁의 성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토를 본격적으로 다룬 칼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편에서는 “안중근은 이토를 단죄한 이유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한 죄,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등 열다섯 가지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치외법권 지역인 하얼빈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일본이 관동도독부를 통해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했음도 밝히고 있다. 안중근과 이토를 ‘동시에’ 살펴보면서, 이 두 인물을 사로잡은 이념적 지향도 함께 곱씹어 보도록 한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역사노트

     

    메이지헌법 초안…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하급무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을 근대국가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68년 메이지유신에 참여했으며 1889년 메이지헌법의 초안을 마련하고 1890년 중의원·추밀원의 양원제를 도입했다.

    근대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이토의 노력은 외교를 매개로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토의 사망 1주기 추도회 자리에서 “이토의 성품과 행동, 국가 이익 모두가 외교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관대한 통감정치가 “세계의 의심을 풀고 세계의 질투를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군대해산 맞서다 항일의병 투신

     


    안중근(1879-1910)= 황해도 해주에서 부유한 향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 점이 있어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했다. 1897년 1월 도마(Thomas)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가톨릭과의 만남은 신식학문을 배울 기회를 주었다. 1906년에는 삼흥(三興)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에 뛰어들었고, 1907년에는 국채보상회 관서지부에서도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이 서울에서 전투를 벌였다. 안중근은 안창호 등과 함께 시가전에 뛰어들어 50여명의 부상병을 입원·치료시켰다. 이때의 체험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이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신주백 연구원

     


     

     

     일 치외법권 무시 안중근 불법재판

     

    속전속결…다섯달 만에 사형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한 현장에서 ‘대한만세’의 러시아어인 ‘코레아 우레’를 외치다 러시아 군인에 체포됐다. 그는 1909년 10월30일부터 1910년 1월26일까지 모두 11차례에 걸쳐 취조받았다.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정치재판이었다. 일본 내각은 이미 1909년 7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병합계획에 방해되는 것은 신속히 없애야 했다. 재판의 신속한 진행도 여기서 비롯됐다.

    안중근은 예심도 거치지 않았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로부터만 변론를 받았다. 그의 법정 발언은 전체 내용이 아니라 ‘요약’된 부문만 통역돼 재판부에 전달됐다. 재판은 2월7일부터 14일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그는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재판에서 안중근은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저격한 것이지 자객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라며 “포로를 처벌하려거든 국제 공법(公法)에 따라 처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을사조약이 외교에 관해서만 일본 통감부의 권리를 인정할 뿐,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외국에 있는 한국인은 일본 관헌이 보호한다’는 을사조약의 내용을 확대해석한 일본은 당시 만주통치기관인 관동도독부에 재판을 맡겼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동양의 평화를 해치기 때문에 이토만을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토를 살해한 것 이외에 현장에서 함께 사망한 3명의 수행원에 대해서도 안중근이 살해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강변했다. 재판부가 극형의 판결을 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네 명을 살인한 죄의 병합’이었다. 재판부는 살해의 사실만을 판결에 적시하고 살해의 목적과 동기는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이토가 죽은지 꼭 다섯 달만인 3월26일 사형당했다. 그 사이 그는 <안응칠역사>의 집필을 끝냈지만, <동양평화론>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신주백 연구원

     

    일 만주국의 ‘괴뢰정권’ 명확히

     


    △ 1940년을 전후해 만주국경지역에서 군수물자를 수송중인 일본 관동군이 열차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정성길 UN평화박물관장 제공/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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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러·일 전쟁
  • ②이토와 안중근
  • 친일-항일 뒤얽힌 공간

  •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중국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프라센짓 두아라 시카고대 교수는 ‘만주국’을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식을 대표하는 나라”로 평가했다. 그만큼 만주국은 ‘풍부한’ 역사적 텍스트다. 1930년대 동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만주국을 둘러싼 한·중·일의 역사인식은 크게 어긋나 있다. 우선 한국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만주국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일제 시기 만주에 이주한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서술만 있다.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만주국이 역사교과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배운 만주라는 공간이 가상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중국과 일본도 ‘자국 중심의 기억’을 토대로 만주국을 다루고 있다. 중국의 초급중학교용 <중국역사>와 고급중학교용 <중국근대현대사>는 일본의 중국 침략의 한 과정으로 만주국 수립을 서술하고 있지만,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항쟁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만주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증’이 드러난다. 중학교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동경서적판 <역사> 교과서는 관동군의 만주국 수립과 이에 대한 일본 내각의 반대, 국제연맹의 관동군 철군요구,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거부 및 국제연맹 탈퇴 등을 ‘평가없이’ 나열하고 있다. 관동군의 ‘돌출적’인 행동으로 만주국이 탄생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일본 정부가 이를 용인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당연히 이 지역의 중국인·한국인 등의 저항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본 후소샤판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약체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였던 (일본) 국민은 관동군의 행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 왕도낙토건설을 슬로건으로 일본의 중공업 진출 등에 의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등의 서술을 통해 군부가 중심이 된 만주국 수립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한중일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런 어긋남의 통합을 시도했다. 3장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 편에서 1절 전체를 만주국 관련 설명으로 채웠다. 만주국을 당대 한·중·일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으로 삼은 것이다.

    1931년 9·18 사변-1932년 1·28 사변-1932년 3월9일 만주국 선포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적었다. “일본·만주족·한족·조선족·몽골족 등 다섯 민족이 ‘화합하는’ 국가를 수립했다고 선전했지만, 사실상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장악한 괴뢰정권이었다. 모든 기구는 위에서 아래까지 완전히 일본인 관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게 <…미래를 여는 역사>의 판단이다. 일본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관동군의 만행과 만주 지역 민중들의 저항을 상세히 서술하는 한편, 한국·중국 교과서에 없는 ‘조선족·한족 공동투쟁’도 소개했다. 아울러 만주국의 사회와 경제 체제를 상세히 소개해, ‘국가적 실체’를 분석했다.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만주국 둘러싼 일-중 양국 시각

     

    일본 “중국 근대화 촉진”
    중국 “피땀 짜낸 수탈”

     

    만주국은 개발의 유산인가, 수탈의 온상인가.

    대다수 일본인은 만주국의 성립이 만주를 개발·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견해에 공감한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역이 주요 공업지대가 된 것도 일본의 식민지 유산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본다. 만주국 시기에 건설된 각종 중공업 시설이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기초가 됐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만주국의 수립으로 이 지역이 부분적으로 개발되긴 했지만 그 개발은 ‘앙계취란(養鷄取卵·닭을 키워 계란을 취함)’, 즉 수탈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만주국 시기 광공업의 발전은 중국 인민의 피와 땀, 생명의 대가이므로 ‘개발’ 역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사람들을 부려먹고 약탈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파생된 뜻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국내 학계의 ‘식민지 개발론(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사이의 논쟁과도 관련이 있다.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이 논쟁의 밑바탕에는 △해당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파악할 것인지 내재적으로 발전하던 사회로 볼 것인지 △해당 사회분석에 세계사적인 보편적 연구 방법론을 적용할 것인지 일국사적인 특수성에 연구 초점을 맞출 것인지 △‘식민지적 근대화’와 ‘근대화’ 개념을 구분할 것인지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만주국의 근대화 문제는 이 화두를 풀어갈 실마리다.

     


     

     

    제국주의 싣고 달린 ‘만철’

     

    박정권 ‘개발독재’의 모델


     

    만주국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1906년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다. 일본의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추진하는데 중심역할을 한 것이 바로 만철 조사부였다.

    만철조사부는 만주의 철광석·석탄 등을 활용해 철강·석유화학 산업 등을 일으키고 철도·도로망의 확충을 통해 자동차·수송·기계·항공기 산업까지 육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입안했다.

    만철의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관동군은 만주국 관료와 만철조사부를 손발처럼 부리면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초창기 만주국의 경제부문은 관동군의 통제하에 만철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만주국의 중요한 정책의 입안이나 집행은 관동군사령관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만주국 황제는 단지 관동군이 결정한 사항을 추인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관동군의 폭력과 만철의 개발이 만나는 ‘개발독재’의 원형이 바로 만주국에 있다는 평가도 있다.

    만철의 운영은 철저하게 일본인 중심으로 이뤄졌다. 만철 종업원 가운데 육체노동자는 대부분 중국인과 조선인이었고, 기획·운영·기술·개발 부문에는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만철의 주요 자금원은 철도·광산·탄광 분야의 노동자는 대부분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만철은 중국인과 조선인의 피와 희생을 동력으로 삼은 ‘식민지의 수탈자’인 동시에 ‘식민지 개발의 장본인’이었다.

     


     

    ‘아시아 해방’ 탈 쓴 ‘침략’ 까발려


      관련기사

  • ① 러·일 전쟁
  • ② 이토와 안중근
  • ③ 만주국



  •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④ 대동아공영권

     

    사상 첫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인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 발간을 앞두고, 공동교과서 집필위원들과 함께 그 내용과 쟁점을 매주 수요일마다 소개한다.

     

    3국 교과서에는
    한·중, ‘대동아’ 용어 부정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위한 인적·물적자원 수탈과 저항 실어
    일 “남방진출 아시아 독립 앞당겼다” 미화

     

    ‘대동아’ ‘대동아전쟁’ ‘대동아공영권’ 등의 개념은 일본 역사교과서에만 등장한다. 한국과 중국 교과서에는 대동아라는 낱말 자체가 없다. 태평양 전쟁 또는 2차 세계대전 등의 용어를 쓰면서, 이 시기 일제의 수탈과 침략, 그리고 이에 맞선 저항을 서술하고 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일본 제국이 창출한 정치적 구호인 ‘대동아’를 적극적으로 불러와 그 실체와 논리를 보여준다. 다만 그 시각은 비판적이다. 3장 2절 ‘일본의 침략전쟁’ 편에서 여러 쪽을 할애해 ‘대동아공영권의 환영(幻影)’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중국 학생들의 시선을 넓히는 동시에, 일본 학생들의 마비된 비판의식을 일깨우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동아공영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되살아나는 대동아공영론의 실체는 현행 일본 교과서에 있다. “일본 정부는 전쟁목적이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후소사판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서술이다. 이 교과서는 노골적으로 ‘대동아전쟁’이란 용어를 쓰면서 그 이상에 은근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말레이 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영국을 격퇴하면서 쾌속진격해 … 영국의 동남아시아 지배를 무너뜨렸다”고 적었다. 특공대원의 유서를 실으면서 “일본군은 항복하지 않고 차례차례로 옥쇄”했다고 강조한다. “일본군의 남방진출은 아시아의 독립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는 서술도 계속된다. 대동아전쟁은 후소사 교과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된 대목이다.

    공동 교과서 집필위원인 하종문 한신대 교수(일본학)는 “일본 우익들이 대동아공영론을 복권하려는 것은 과거 침략전쟁을 식민지해방·자존자위·인종차별철폐 전쟁으로 미화하는 것이자, ‘정치군사대국’ 일본을 만드는 선전전이자 전초전”이라고 비판한다.

    도쿄서적판 <역사>는 중립적 개념인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식민지를 얻고 자원을 획득하려고 일본이 동남아에 진출했다”거나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시아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서술했지만, 대동아공영론의 허상을 본격적으로 짚지는 않았다.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단계를 밟아 대동아공영론의 실체에 접근한다. 우선 1940년 7월 고노에 내각이 발표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의 구상을 소개했다. 1943년 11월 도조 수상이 소집한 대동아회의의 내용도 담담하게 적었다. 이 두 단계를 거치며 학생들은 대동아공영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를 되짚어 본 뒤, 마지막으로 대동아공영권의 실태를 살피게 된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구미 열강을 대신하는 일본의 지배를 치장한 논리인 대동아공영권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 자재, 노동력 조달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고개 드는 ‘대동아공영’ 망령

     

    일 우익 ‘제국’ 복권 꿈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 하종문 한신대 교수

    대동아공영권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한·중·일의 평화공존을 가로막는 중대한 걸림돌이다. 파산한 대동아공영권의 미망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 일본 학계에는 동남아시아의 반일저항운동에 대한 실태연구들이 소개됐다. 아시아의 독립에 일본군이 기여했다는 전혀 다른 주장도 교과서에 등장했다.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본격적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대동아공영권의 복권은 일본 우익들의 가장 큰 책무가 됐다.

    1998년 발간된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전쟁론>은 100여만부에 육박하는 판매량을 올렸다. 동양인을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라 여겼던 백인들의 “절대 차별의 세계를 뒤바꾼 것이 일본이었다!”는 고바야시의 메시지는 일본인들의 원초적 내셔널리즘을 부추겼다.

    우경화 추세는 역사교과서로 옮아갔다. 2001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주축이 되어 만든 후소사 교과서는 “(전쟁 초기의 승리는) 수백 년에 걸친 백인의 식민지배에 신음하고 있던 …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독립의 꿈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진짜 목적은 일본 정부의 ‘남방점령지 행정실시요령’(1941년 11월20일)에 잘 나와 있다. “점령지에 대해서는 우선 군정을 실시하여 치안을 회복하고, 중요 국방자원을 서둘러 획득하여 작전군이 자활할 수 있도록 한다.” 수렁에 빠진 중일전쟁을 돌파하기 위해 구미 열강과 전면전쟁을 벌인 것이다.

    아시아 해방을 내건 대동아공영권의 막바지 장면은 이렇다. 동남아 각지에서 옛 식민지배 종주국의 복귀에 저항하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이에 동조하는 일본군이 속출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수뇌부는 “민족독립운동에 현혹된” 많은 도망자를 “천황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해 이탈을 막았다. 일본은 시종일관 동남아시아의 ‘억압자’로 군림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식민지로서 동남아시아를 연합군에 되돌려주려 했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은 메이지 유신 이후 80여년에 걸친 일본제국주의의 종착역이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여정을 대동아공영권으로 치장했지만, 그 화려함은 허상이었고 추락에 날개는 없었다. ‘내선일체’를 앞세운 한반도, ‘오족협화’를 내건 만주국, 식민지해방을 강조한 동남아시아 등에서 일본제국주의의 목표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과 수탈이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의 허상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우익들은 다시 제국의 재현을 꿈꾼다. 지난 2001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바라는 한·중·일 시민들이 힘을 합쳐 후소사 교과서의 채택을 저지했다. 이제 그 2라운드가 시작되려 한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


     

    동남아 독립 열망 이용 ‘서구축출’ 교묘한 접근

     

    동남아시아에는 한국인들이 언뜻 이해하기 힘든 대동아공영의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다. 대만이 대표적인 경우다. 역사적으로 대만에서는 대륙 출신과 토착 세력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차지한 일본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세이던 토착 세력을 우대해 원활한 지배를 꾀했다.

    대륙 출신 중심의 국민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토착 세력은 일본을 ‘변함없이 좋은 이웃’으로 여겼다. 일본 우파도 대만 민주화 이후 집권한 리덩후이와 천수이벤 정권에 노골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는 대만 토착세력을 거든 것이다.

    대만을 둘러싼 복잡한 역학구조는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변주’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다. 이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전선으로 흔히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동남아시아의 상황은 이런 대립구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의 민족독립운동 세력이 맞서 싸운 상대는 미국·영국 등 식민지 종주국이었다. 동시에 이들 국가는 독일·일본과 맞선 ‘반파시즘 진영’에 속했다. 동남아에서 민족독립과 반파시즘 투쟁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이 불가능했던 이유다.

    일본제국주의는 바로 이 점을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대동아공영권의 흡인력은 서구 세력의 축출과 식민지 해방이라는 이념을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독립 전략’으로 선전한 데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미사여구의 본질이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배라는 것을 간파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동남아 지역의 식민지 독립은 이미 시대적 대세로 굳어지고 있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과 전면전쟁을 펼칠 때, 대부분의 인도 지방자치정부는 이미 인도인의 손에 이양된 상태였다. 필리핀과 미안마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에 가장 협조적이었다는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들여다 보자. 일본 우익들은 “미·영의 세력이 격멸되지 않는 한 아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안전은 불가능하다”고 연설했던 인도네시아 건국의 영웅 수카르노를 대동아공영권을 두둔하는 증거로 내민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일본군은 여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에 질 것이고 우리는 그들도 쳐부술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공공연히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카르노가 자서전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다.

    하종문


     

    미얀마 독립약속 일본 군정…천황숭배 강요

     

    아웅산 항일봉기 몰아내

    미안마 독립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아웅산(노벨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은 대동아공영권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영국 지배 하에서 민족독립운동을 펼치던 아웅산 그룹은 미안마 독립의 약속 아래 일본군과 접촉해 버마국군을 조직했다. 1942년 5월 아웅산이 지휘하는 미안마국군은 일본군과 나란히 양곤(랭군)에 입성했다. 주민들은 독립의 상징인 미안마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미안마를 점령한 일본군은 군정을 펴고 독립을 지연시켰다. 이후 출범한 미안마 중앙정부도 일본군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았다. 전황이 불리해지던 1943년 8월, 일본은 미안마의 독립을 뒤늦게 인정했지만, 군사·외교·경제 등은 여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있었다. 불교도가 대부분인 미안마인들에게 가해진 천황 숭배 강요를 비롯한 일본군의 일상적인 폭행과 약탈, 군표 남발과 강제동원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4년 8월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한 아웅산은 이듬해 3월 인민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미안마 정권에 대항해 봉기했고, 같은 해 5월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양곤을 해방했다. 서구의 지배로부터 동남아시아가 해방된 것은 결코 일본이 ‘원하지 않았던’ 역사적 필연일 따름이다.

    하종문


    민족 넘은 ‘반제투쟁’ 별도로 삽입




    사상 첫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인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 발간을 앞두고, 공동교과서 집필위원들과 함께 그 내용과 쟁점을 매주 수요일마다 소개한다.
    후원:2005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⑤ 한·중·일 연대투쟁


     

    ‘천황’ 폭살 도모한 가네코 후미코
    조선·대만인 변호한 후세 다쓰지
    반전운동 벌인 일본군
    한-중 손잡은 항일연합전선…
    평화위한 저항연대 사건별 첨부
    3국교과서 인물 아예 안다뤄


     

    상대의 입장에 서 보는 것. <한중일이 함께 쓰는 미래를 여는 역사>의 지향이다.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이런 특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대목이 있다. ‘국경을 넘어선 연대투쟁’에 대한 서술이다. <미래를 여는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역사주제다. 핵심은 한국·중국·일본이 침략에 함께 맞섰던 역사적 장면과 대표적 인물을 되짚는 노력이다. 그 노력은 교과서 곳곳에 녹아 있다.

    한국의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을 서술하는 2장에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를 소개하는 별도의 칼럼이 있다. 가네코는 조선인 박열과 함께 천황을 폭살하려다 사전에 체포돼 감옥에서 자살한 혁명가다. 후세는 이들을 변호하고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특히 후세는 일본과 조선, 대만에서 ‘피억압민중’을 위해 평생을 바쳐, 최근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기도 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국경을 넘은 연대와 우정을 나눈 이들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소개한다.

    제3장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 편에서는 ‘특공대와 청년학도’, ‘일본병 반전동맹’ 등을 따로 칼럼으로 실었다. 여기서는 제국주의의 실상에 눈뜬 일본군들이 벌인 반전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 한 특공대원의 유서는 인상 깊다. “자유의 승리는 명백하고 권력주의 국가는 일시적으로 흥했다가도 결국에는 망한다. … 내일은 출격이다. 내일 자유주의자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런 인물은 한·중·일 어느 나라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국경 중심의 일국사관’에 의해 역사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조국 일본은 물론, 그들이 헌신한 한국·중국의 민중들로부터 잊혀졌다. 그들을 다시 불러와 ‘평화를 위한 저항연대’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미래를 여는 역사>만의 힘이다.

    한·중 연대에 대한 서술이 두드러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만주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동북지역의 각 민족은 일본에 대한 노역을 거부하고 공동 투쟁을 전개했다”고 적었다.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연군’에 대한 소개도 눈길을 끈다. 민족의 경계를 넘은 연대의 정신과 함께,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의 한 장면을 양지로 끌고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공동 교과서는 항일연군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동북민중과 손을 잡고 전투를 벌였다”고 적었다.

    일본 후소사판 역사교과서는 물론 도쿄서적판 역사교과서에도 ‘저항의 연대’에 대한 서술은 아예 없다. 중국의 초급중학교용 <중국력사>, 고급중학교용 <중국근대현대사>도 마찬가지다.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에 대한 서술로 일관하고 있을 뿐, 동북지역 등에서 펼쳐진 한국과의 연합전선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그나마 한국의 중·고등학생용 <국사> 교과서는 당시 중국과의 연대 투쟁을 일부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대했고 윤봉길의 의거가 중국의 협력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식의 짧은 서술에 그치고 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저항의 연대에 대한 한·중·일의 냉대에 다시 한번 저항한다. 침략에 맞선 시민연대의 역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게 이 교과서의 메시지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동아시아 ‘연대의 역사’ 복원 양심세력 평화벨트 구축해야

     

     


    △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한·중·일 연대투쟁에 대한 <미래를 여는 역사>의 관심은 동아시아의 ‘오늘’에서 비롯됐다. 지금 동아시아는 ‘역사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 한 축에 일본 우파가 우뚝 서 있다. 우파의 주류는 미국의 세계전략 아래 우선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이어 대만을 독립시켜 동맹으로 끌어들일 계산을 갖고 있다. 대신 남한의 노무현정권을 ‘친북좌파’로 몰아 동맹에서 제외시키고, 중국과 북한을 봉쇄하려 한다.

    이런 태도는 2005년도 후소사판 <역사> <공민> 교과서에 투영돼 있다. 중국공산당이 일본의 침략을 유도했다는 뉘앙스로 서술했다.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반면에 미국과 일본 사이의 우호를 강조하고 대만을 개발시켰다는 내용을 새로 추가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중·일의 평화·양심세력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하고 교류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침략사실을 숨기고 배제의 논리를 퍼뜨리려는 우파의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에 ‘평화 벨트’를 만들려는 시민연대가 절실한 것이다.

    사실 이런 ‘평화연대’의 경험은 1945년 이전에도 많았다. 한국인들은 민족운동사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만 배워 왔지만, 여기에는 동아시아 평화연대의 고리가 숨어있다. 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에 반대한 반침략운동이었으며 오늘날로 치면 평화회복운동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의 항일전쟁사는 ‘평화운동’의 이름 아래 한국의 민족운동과 만난다. 우리의 민족주의 단체 가운데는 중국은 물론 여러 약소민족과 ‘동일 전선에서 일치의 보조’를 취하며 싸운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화북지방과 만주지방에서 총을 들고 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한 경우도 있었다.

    동시에 중국은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해 주었고, 미국의 화교들은 공동의 적 일본과 싸우는데 필요한 자금을 미주 한인들을 통해 임정에 제공하기도 했다. 1932년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의 의거에 소요된 자금은 바로 이들이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인 가운데서도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반항하는 조선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일본인”이라며 식민지 지배를 비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야나기는 후일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을 파괴하려 하자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연대 투쟁의 역사’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모두 외면당하거나 소흘히 다뤄졌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런 연대의 역사를 다시 복원하려 한다. 그것이 동아시아 평화연대를 만드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중국인과 항일투쟁 조선인

     

    김산, 둑립 우회로이자 지름길 선택

     

    김산은 한중 연대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리에겐 그 이름보다 <아리랑>이란 책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사회주의운동가다. 그가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한 기간을 따져 보면, 조선독립보다 중국혁명을 위해 싸운 시간이 더 길다. 1938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인생을 끝마쳐야 했던 것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받은 간첩혐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혁명투쟁, 곧 조선혁명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조국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극동에서의 지도적인 혁명과제’가 중국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다. 공동의 적인 일본을 우선 중국 땅에서 몰아내고, 그 힘을 바탕으로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일제 침략시기, 중국을 기반으로 한 한·중 연대투쟁의 이면에는 바로 김산과 같은 숱한 조선혁명가들이 큰 역할을 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이 문제로 갈등하고 방황할 때도, 김산은 현지에 직접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도록 이들을 설득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을 때 중국공산당의 만주지역 조직이 곧바로 무장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조선인 대원들 때문이었다. 김산에게 있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에 뛰어든다는 것은 조선독립을 향한 ‘우회로’이자 동시에 ‘지름길’이었다. 

    신주백


     조선인과 항일투쟁 일본인

    가네코 국가주의 저항…박열과 ‘거사’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인들에게 무척 낯선 일본인 여자다. 23살의 짧은 생이었지만, ‘비극적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등 불우하게 자랐다. 소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9살때 조선에 사는 친척의 양녀가 됐지만 오히려 학대만 받았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일어난 3·1운동을 조선에서 목격했다. 그의 내부에서 자라던 강자에 대한 반감이 체계적 사상으로 다져진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감격했다”고 그 때를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온 가네코는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조선인 박열을 만난다. 이때부터 ‘비국민’이자 가족제도의 희생자였던 그의 삶은 확실히 바뀌었다. 혼자 공부하며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을 접했다. 이를 통해 “충군애국과 여자의 순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대표자가 천황”이라는 믿음을 굳혔다.

    이후 박열과 함께 천황 암살 계획을 꾸몄지만 사전에 발각돼 체포됐다. 그녀는 법정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인과의 공동투쟁을 당당하게 주장할 정도로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사형판결을 받은 뒤 천황이 내린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그는 사면서류를 찢어버렸다. 이후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임신중인 몸이었다.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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