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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景山)에서 내려다본 자금성. 명의 마지막 황제는 경산에서 목을 매 죽었다. photo 김시덕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에서 태어난 이자성은 기근으로 인해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참여했다가 점점 출세하였다. 1644년에 서안(西安)을 정복한 뒤에 그는 순(順)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선언하고 황제로 즉위, 북경을 향해 진군한다. 같은 해 3월, 북경이 함락되고 당시 명의 황제였던 숭정제(崇禎帝)가 자금성 북쪽 경산(景山)에서 목매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망하게 된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의 군대는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에게 투항을 요구하니, 충성을 바칠 군주를 잃은 오삼계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는 산해관을 열어 도르곤의 청군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오삼계가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농민군에 대한 적대감에서였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북경에 있던 애인 진원원(陳圓圓)을 이자성 군에 빼앗긴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후대에 제기되었다.(이시바시 다카오 ‘대청제국’ 휴머니스트, 143쪽) 오삼계가 명나라를 배신했다고 생각한 한인들이 그를 원망하여 이런 설을 만들어 낸 것인데, 한인 왕조를 멸망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오삼계에 대한 원한의 정도를 보여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런데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열고 도르곤의 청나라 군을 맞이하는 역사적 현장을 지켜본 조선 사람이 있었다.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 인질로 청나라에 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였다. 중국의 동북지방, 옛 만주 지역의 중심지인 심양(瀋陽)에 거주하던 소현세자는, 청나라군이 산해관을 돌파하고 북경을 정복하는 원정군에 참가하도록 요구받았다. 청나라는 단순히 만주인만의 국가가 아니라 만주인·몽골인·한인의 연합 체제였으며, 조선인 역시 정묘·병자호란 전후로 이 연합 체제의 일원이 되었다. 청나라의 근본이 되는 시스템인 팔기(八旗·jakūn gūsa) 가운데에는 ‘고려 니루’라는 조선인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으며(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116쪽),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서는 임경업 등이 이끄는 조선군도 참가하였다. 1644년의 북경 공격 역시 이러한 연합군 체제로 수행된 것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거주하고,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청나라 측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군대가 만리장성 너머 북경에 진입한 것은 한반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으로서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는 고구려의 유민인 고선지(高仙芝)가 당나라군을 이끌고 티베트군을 격파, 중앙아시아 연합군과 탈라스(Talas) 평원에서 맞붙은 사건 이후, 한반도 출신인들이 군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활동한 드문 사례라 할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가 거주하던 심양에서는 고려의 충선왕(忠宣王)이 만권당(萬卷堂)을 만들어 원나라의 엘리트들과 인맥을 쌓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大汗·Khagan)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인 쿠빌라이(世祖·Qubilai)의 외손자였던 충선왕은 제8대 대칸이자 원나라 제4대 황제인 바얀투(仁宗·Buyantu)의 즉위를 도와주면서 원나라 내에서 정치력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바얀투가 죽으면서 그는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인 사스캬(Sa-skya)와 도스마(mDo-smad)로 유배가게 된다.(지영재 ‘서정록을 찾아서’, 푸른역사) ‘역옹패설(翁稗說)’의 저자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정치인 이제현(李齊賢)은 티베트에 유배되어 있던 주군을 찾아간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몽골제국 체제의 중국 지역을 구석구석 다닌 한반도 주민들의 모습을 오늘날에 전한다. 고선지, 충선왕, 이제현, 소현세자, 그리고 인도아대륙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신라의 혜초(慧超), 이들은 수동적인 상황에 처하여 또는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유라시아 대륙을 걸어다녔다. 오늘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인들의 또 하나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 정성공과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 마쓰의 상. 대만의 타이난에 있다. 위키피디아
이 항복문이 전달된 일주일 뒤인 23일,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고 도르곤에게 정식으로 항복한다. “밝을 녘에 청나라 군대가 진군하여 관문 앞 5리쯤까지 다가갔다. 포탄 연기 아래 포성이 크게 일어나더니, 이윽고 오삼계가 장수 십수명과 갑옷 입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맞이하여 투항하였다.” 그리고 이제 오삼계와 도르곤의 연합군은 이자성 군과 교전하기 위해 산해관으로 진입한다. “한인과 청인이 자주 왕래하더니, 청나라 군대의 좌우 진이 동시에 관문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 성 위에 백기를 세운 뒤 구왕(九王·도르곤)이 뒤이어 관문으로 들어갔다. 오삼계 장군이 바야흐로 유적과 교전을 벌이다가 성을 나왔던 것이다.”(같은 책 97쪽) 여진인의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명나라와 대립하던 누르하치나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킨 홍타이지는, 과연 자신이 건설한 국가의 군대가 산해관을 통과하는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 예상했을까?
성 아래 채소밭 가운데 담장에 기대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세자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따라가야 하겠소”라는 도르곤의 요구에 따라 ‘몸소 갑옷을 입고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곳에’ 섰다. 그리고 오삼계와 도르곤이 이끄는 연합군과 이자성 군 간의 천하를 건 일전을 지켜보았다. “포성이 우레 같았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청군이 세 번 뿔피리를 불고 세 번 함성을 지르더니 동시에 적진을 향해 돌진하며 화살을 여러 차례 쏘고 검광(劍光)을 번뜩였다. 이때 바람이 크게 일어나며 한 떼의 누런 먼지가 가까이에서 일어나 멀어지므로 비로소 적병이 패한 것을 알았다. 한 식경이 지나자 텅 빈 전장에 시체가 이리저리 뒤엉켜 쌓여 큰 벌판에 가득하였다. 달아난 적의 기병들은 20리를 뒤쫓아 성 동쪽 해구에 이르러 모두 죽였다.”(같은 책 97~98쪽). 이리하여 이자성의 봉기는 좌절되었고, 청나라라는 강대한 세력을 만리장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열도의 전국시대 종결과 임진왜란으로 촉발된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치적 연쇄반응이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순간이었다.
산해관 전투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5월 2일, 청나라 연합군은 북경에 진입한다. 소현세자를 모시던 조선의 관료들에게 이 사건은 어떻게 비쳤을까? “청나라 군대가 성 동쪽 5리쯤 되는 곳으로 진군하자 도성 백성들이 곳곳에 모여 군병을 맞이하였다. 명함을 가지고 와서 바치는 자도 있었고, 문 밖에 둔 꽃병에 꽃을 꽂고 향을 사르며 맞이하는 자도 있었다.… 도성 사람들이 성대하게 의장(儀仗)을 갖추어 청나라 군대를 맞이하였다. 구왕(즉 도르곤)은 수레를 타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궁궐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오직 무영전(武英殿)만 남아 있었다. 구왕이 어탑(御榻·황제가 앉는 의자)에 올라 앉아 명나라 대소 관리들의 배례를 받고, 성 안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또 유적의 패잔병들 중 마을에 흩어져 사는 자는 모두 참수형에 처하도록 하니, 성 안에 숨었던 피란민들이 차츰 돌아와 모였다.”(같은 책 103쪽) 조선의 사대(事大) 대상이었던 명나라를 농민 출신의 이자성이 이미 멸망시킨 상태였기 때문인지, 기록자는 안타까워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오삼계나 소현세자를 모시던 조선인들은 이자성과 같은 농민들이 명나라 황제에 반기를 든 데 대해 계급적 거부감을 가졌을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투항한다거나, 상국으로 섬기던 명나라의 수도에 군대와 함께 들어간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충격을 이러한 거부감으로 상쇄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 연극 ‘고쿠센야갓센’의 팸플릿. 정성공의 명나라 부흥을 위한 분투가 줄거리다. 19세기. 개인 소장
이자성 농민군과 청나라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중국 남부의 한인 세력들은 명나라의 황족인 주(朱)씨 출신자를 모시고 각지에서 왕조를 세워 이에 저항했다. 이들 망명정권을 통틀어 남명(南明) 정권이라고 한다. 이들 남명 정권 세력은 구원군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永曆帝)는 서양 세력의 힘을 빌리기 위해 로마 교황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남명 세력 가운데 일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청나라군과 남명 세력 간의 전쟁 양상을 전하는 ‘대중국사(Imperio de la China:I cultura evangelica en èl, por los religios de la Compañia de Iesus)’를 쓴 알바루 세메루(Álvaro Semedo), ‘타타르 전쟁사(Bellum Tartaricum)’를 쓴 마르티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당시 남명 정권과 함께 활동하다가 남명의 멸망 후에는 청나라 측으로 돌아서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학자 주순수(朱舜水)는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건너가 있다가 전황이 도저히 뒤집힐 것 같지 않자 그대로 일본에 망명하여 주자학을 뿌리내렸다. 명나라의 멸망 후 전 세계 세력들의 각축장이 된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는 이처럼 어지러이 전개되었다.
명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한 구원군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맞섰던 일본에 요청했다는 사실이 얼핏 모순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당시 남명 정권이 궁지에 몰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정성공(鄭成功)이라는 인물이 개입되어 있다. 1645~1646년 사이에 복주(福州)에서 활동하다가 청군에 체포되어 자살한 남명의 융무제(隆武帝)는 정지룡(鄭芝龍·Nicholas Iquan Gaspard)이라는 해적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는데, 정지룡은 해적으로 일본에 머물던 중 규슈 히라도(平戶)라는 곳에서 다가와 마쓰(田川マツ)라는 사무라이 계급 출신 여성과 결혼하여 정성공을 낳았다. 즉 정성공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이 맞붙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주순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남명 구원군을 요청하고자 하는 카드가 정성공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성공은 융무제로부터 황족과 마찬가지로 ‘주(朱)’씨 성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황송하다며 거절했는데, 훗날 사람들은 그를 ‘임금의 성을 받은 어른’이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고 불렀다. 당시 서구에서 그를 부르던 호칭인 ‘콕싱가(Koxinga)’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근세 일본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인 국성야 정성공이 명나라의 부흥을 위해 전개한 활동을 ‘일본인’의 위업으로 받아들였다.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이라는 극작가가 ‘명청투기(明淸鬪記)’ 등 명청 교체기의 중국 측 기록을 바탕으로 집필힌 작품 ‘고쿠센야갓센(國性爺合戰)’은 오사카에서 17개월 연속 상연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열광은, 당시 일본인들이 정성공의 활동을 단순히 ‘남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연극 ‘고쿠센야갓센’은 정성공의 군대가 남경을 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명나라의 황제를 복위시킨다는 내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연극에서와 같이 정성공은 1658년에 대군을 이끌고 남경을 공격하였으나, 폭우로 병력의 상당수를 잃고 남경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그러자 정성공은 장기전을 대비한 진지를 마련하기 위해 1661년에 대만으로 넘어가, 당시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였으나 이듬해 사망한다. 정성공이 추대하던 남명의 영력제 역시 동남아시아의 버마로까지 후퇴하며 항전하였으나, 1644년에 청군에게 산해관을 열어주고 투항한 바 있는 오삼계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이로써 명의 멸망은 결정적이 되었다. 동시에 대만에서는 정성공 일족이 독립국가를 수립했는데, 이는 이후 대만섬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다음 호에서는 대만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남명 정권과 예수회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주신 미국 블룸버그사의 유대혁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