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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26일 런던의 ‘국립초상화미술관(NPG)’에서 열린 ‘초상화에 담긴 1차 대전(The Great War in Portraits)’ 전시회에 걸린 1차 대전 기간 영국인의 얼굴 사진들. photo AP |
- ▲ 영국에서 현충일 날 사람들이 가슴에 다는 개양귀비꽃. 1918년 미국 여성 모이나 마이클이 1차 대전 부상병들을 돕기 위해 이 꽃을 다는 운동을 시작했다.
영국에서 현충일이 가까워지면 많이 보이는 구호가 ‘Lest We Forget!’이다. ‘잊지 말자!’라는 말이다. ‘편안히 잠들라(Rest In Peace)’가 그 대구(對句)로도 많이 쓰인다. ‘우리들은 당신을 잊지 않을 터이니, 편안히 잠들라!’는 죽은 자를 향한 따듯한 마음이 담긴 구절이다. 대할 때마다 옷깃이 여며진다.
올해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다. 100년 전에 일어난 대전(大戰)은 4년 뒤에나 종전 기념일을 맞을 예정이니 앞으로 4년간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은 거의 1차 대전 무드로 지낼 것 같다. 영국의 기념행사는 오는 8월 4일 6개의 ‘국가행사(state occasions)’로부터 시작되지만 올해 들어서자마자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영국 정부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예산으로 5000만파운드(900억원)를 책정했다. 이 중에는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종전도 안 된 1917년에 이미 완공) 개보수와 학생들의 전쟁터 방문 예산도 포함되어 있다. 영국 전역 지자체들에서 행사를 치를 예산은 로또 자금 1200만파운드로 따로 준비되어 있다. 1차 대전 유산을 보존 전시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는 제국전쟁박물관은 3500만파운드를 들여 수리와 전시 준비를 거의 마쳤다. 영국 내의 모든 공공박물관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나름대로 100주년 행사에 참여를 한다. 정말 거국적인 행사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4년 뒤인 2018년이면 종전 100주년이 되는 1차 대전은 아직도 영국인에게는 끝난 전쟁이 아니다. 하긴 2012년 2월 8일에야 1차 대전 마지막 참전군인 플로렌스 그린이 110세로 사망했으니 이들 말로는 1차 대전은 ‘지금 당대(contemporary)’의 일이다. 현재의 50대 이상 중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로부터 1차 대전 경험을 안 들은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도 영국 정부는 1차 대전 후손들로부터 ‘조상이 1차 대전 군인으로 묻혀야 한다’는 신청을 받아 심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새롭게 발굴된 유해를 영국으로 가지고 와서 군인묘지에 묻기도 했다. 작년 케임브리지시는 97년 만에 동네 위령탑에 새겨진 20세에 전사한 병사 조지 사무엘의 이름 철자를 친척들의 요청대로 ‘Samuels’에서‘Samuel’로 수정했다. 세워지자마자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을 요구했으나 시청이 거절해 그동안 친척들은 진흙으로 마지막 S자를 메워 왔었다. 시청은 수리 비용뿐만 아니라 특별 예배도 같이 거행했다. 이렇게 영국인들에게는, 1차 대전을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 버리기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은 듯하다.
영국은 1차 대전에서 교훈을 얻는 일을 학생들로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전체 행사예산 중 약 10%인 530만파운드(100억원)가 전국 중고등학교에서 각각 학생 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유럽의 군인묘지로 보내는 데 쓰기 때문이다. 이들은 솜, 베르덩, 프로멜레스 같은 벨기에와 프랑스 전투지를 둘러보고 거기서 자기 동네 출신 전사자를 찾아내는 조사를 한 후 돌아와 전교생에게 자신들이 보고 느낀 점을 들려 주게 된다. 내가 수년 전 프랑스 노르망디의 독일군 묘지를 보면서 느꼈던 애틋함을 비롯해 슬픔, 죄책감 같은 것을 감수성 강한 영국 청소년들은 몇 배는 더 느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내가 독일군 묘지에서 목격한 것은 적국 프랑스 땅을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고 누워 있는 2만1000여명의 독일군 청년 무덤이었다. 끝도 없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십자가(영국인들은 이 십자가를 ‘희생의 십자가(Cross of Sacrifice)’라고 부른다)를 보고 아연해하면서 피지도 못하고 스러진 젊은이들이 애틋해 울컥했던 적이 있다. 영국 청소년들도 이런 묘지들을 보고 오면 동료 학생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전해주리라 믿는다.
제국전쟁박물관도 엄청난 작업을 시작했다. 1차 대전에 참전한 600만명과 후방(Home Front)에서 도운 200만명을 합친 800만명의 모든 남녀 군인들의 기록을 디지털화해서 남기기로 했다. 정부가 갖고 있는 정보는 물론 참전군인들의 후손으로부터도 관련 정보를 받아 수록하고 있다. 가족들이 들은 참전 이야기, 사진, 편지 같은 모든 것이 수집 대상이다. 모든 자료는 인터넷으로 제출이 가능하고 일단 수록 정리가 되고 나면 누구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후세들이 참혹한 전쟁의 비극 속에 존재했던 소박한 인간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전쟁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하겠다는 것이 이 야심차고 방대한 작업의 목적이다. 역사 속의 역사를 찾아내서 역사를 만드는 영국인들이니, 역사 속의 교훈을 얻는 데는 정말 따라갈 민족이 없을 듯하다.
1차 대전을 바라보는 영국인의 심정은 복잡하다. 자신들의 안위에 직접적 영향이 없는 남의 전쟁에 괜히 개입해 600만명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236만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으니 말이다. 직접적 책임이 없더라도 전 국민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는 진창의 참호전, 살이 타 들어가는 독가스, 날아와 터지는 포탄의 소리와 빛에 눈이 멀고 고막이 터지는 지옥 같은 전투로 묘사되는 서부전선 격전의 참상은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어떤 전쟁의 승전도 별로 즐기는 것 같지 않다. 나이팅게일 플로렌스가 간호사로 참전해 유명해진, 런던 리젠트 거리 끝에 있는 크림전쟁(1853년 10월~1856년 2월) 기념비도 승전비라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슬프다. 여신은 얼굴을 팔에 묻고 애도하고 있고 병사들의 표정은 승전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라 오로지 슬프기만 하다. 그래서 많은 영국인들은 서울 세종로같이 정부기관들이 모여 있는 런던 화이트홀 거리에 있는 현충탑(Cenotaph)에 크게 적힌 ‘영광스러운 죽음(Glorious Dead)’이란 문구를 불편해 한다. ‘죽음은 그냥 죽음이지 죽음에 무슨 영광스러운 죽음이 따로 있어?’라는 반문이다. 굳이 반전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런 느낌을 받는 듯하다.
- ▲ 영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만든 1차 대전 일기(operation war dairy) 웹사이트 화면. 1차 대전을 기록한 3만권의 일기가 디지털화되어 수록됐다. photo 연합
그래서인지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1차 대전에 관한 반전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정말 많다. 특히 참전군인들이 쓴 시가 ‘대전쟁’ 혹은 ‘위대한 전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Great War’를 보는 시각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중에서도 윌프레드 오언이 가장 유명하다. 장교로 참전해서 종전 딱 일주일 전에 전사한 불운의 시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전부가 다 슬프다. 오언의 시를 읽다 보면 이 시들을 쓰면서 시인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보이는 듯하다. 참전 중에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그린 그의 시 중에는 특히 ‘가축처럼 죽어가는 저들에게 조종(弔鐘)이 무슨 위안이 되나?(What passing-bells for these who die as cattle?)’라고 시작하는 ‘죽어가는 청춘을 위한 송가(Anthem for Doomed Youth)’와 ‘친구여! 애타게 영광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에게/ 조국을 위한 죽음은 달콤하고 옳은 일(Dulce et decorum est pro partria mori)이라는/ 아주 오래된 거짓말을 할 것인가?’라고 끝나는 ‘달콤하고 옳은 일(Dulce et Decorum Est)’이라는 시가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또 ‘다음 전쟁(The Next War)’이라는 시에서는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시인 지그프리드 사순(1886~1967)의 시 구절 ‘너와 나에게는 전쟁이 농담이지(War’s a joke for me and you)’를 서두에 인용하면서 전쟁을 비웃었다. 이를 통해 전쟁을 미화하던 당시는 물론 후세들에게까지 전쟁의 위선과 비극을 알리는 큰 여운을 남겼다.
뿐만 아니다. 1960년대 들어와 영화를 비롯한 각종 공연물들이 1차 대전을 희화화해서 성공을 거두면서부터 반전 정서는 더욱 심해졌다. ‘오! 이 아름다운 전쟁(Oh! What a lovely war!)’이라는 연극은 나중에 영화로까지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쳤고 지금도 런던 시내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BBC TV시리즈로 만들어진 ‘블랙애더(Blackadder)’는 더 유명하다. 1983년 처음 제작되어 모두 네 편의 시리즈까지 방영되었다. 주인공 블랙애더 역은 코미디 시리즈 ‘미스터 빈’으로 세계적인 팬을 가진 영국 배우 로완 앳킨슨이 맡아 명연기를 펼쳤다. 현재 다섯 번째 시리즈를 준비 중인데 영국 왕세손 윌리엄 왕자도 카메오로 출연할 의향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이 두 작품으로 인해 1차 대전은 ‘사자가 당나귀의 지휘하에(lions led by donkeys)’ 치러진 전쟁이라는 일반인의 인식이 더 굳어져 버렸다. ‘용감한 장병들이 바보 같은 장군들에 의해서 거의 학살당하다시피 치러진 전쟁’이라는 뜻이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의 조사 결과도 내놓지만 이미 굳어져 버린 일반의 인식을 돌리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런 ‘좌파적 시각을 가진 공연물’ 때문에 생긴 일반인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용감한 시도가 있어서 요즘 영국이 시끄럽다. 발단은 마이클 고브 교육부 장관이 개전 100주년을 맞아 1차 대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짚어보자고 하면서 위에서 든 반전 성향의 공연물이 일반의 1차 대전을 보는 시각에 끼친 악영향을 예로 들면서 시작되었다. 고브 장관은 이런 좌파적 시각을 가진 공연물이 “위대한 전쟁의 의미를 훼손시켜 국민을 오도했으니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 자라는 학생들에게나마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브 장관의 발언은, BBC 최고 시사탐사 프로그램 사회자 제러미 팩스맨의 말처럼 아주 ‘비영국적(Un-British)’이다. 영국에는 이런 식으로 어떤 사회적 인식이나 경향을 의도적으로 고치려고 드러내놓고 시도하는 예가 별로 없다. 더군다나 정부 고위인사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적 인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시간을 두고 바뀌는 것이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누가 고치자고 한다고 고쳐지는가 하는 냉소적인 반응만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영국인 누구나 다 안다.
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의 방향을 놓고 강한 주장을 펴는 일은 정말 전대미문이라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그래서 언론과 코미디언들은 고브 장관을 ‘고브애더(GovAdder)’라고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장관의 이름과 블랙애더의 주인공 이름을 합쳐서 만든 단어이다. 야당인 노동당은 물론 심지어는 보수당 동료의원들까지 괜한 논란을 불러일으켜 1차 대전 기념 분위기를 망쳤다(hijack)고 불만이 많다. 이미 오래전에 1차 대전은 ‘제국주의적 야심 때문에 정치인들이 벌인 무모한 전쟁’이라는 국민의 합의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 굳이 이제 와서 거국적 승리니 애국적이니 하는 말로 전쟁의 의미를 돌리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하고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원래 현충일의 의미대로 그냥 1차 대전으로부터 교훈이나 받고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 국민과 여야 정치인들의 일치된 합의인 듯한데도 말이다.
그래도 고브 교육부 장관은 1차 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War to end all Wars)’이었고 ‘순고한 목적(noble cause)과 자유를 위한 정당한 전쟁(just war)’이었다고 국민을 설득하려고 한다. “1차 대전은 좌파지식인과 코미디언들에 의해 억울하게 참혹한 도살장(misbegotten shambles)이라는 매도를 당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고브 장관이 어떤 시도를 해도 영국의 여론은 바뀔 것 같지 않다. 어떤 경우에도 제국주의적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영국민의 합의는 최근의 시리아 사태에 개입하려는 캐머런 정부의 시도가 여론에 의해 저지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30명의 보수당 의원과 9명의 자민당 의원, 도합 39명의 집권 여당 의원들이 반란표를 던져 285 대 272로 캐머런 총리의 시도는 부결되었다.
그래서인지 정부 내에서도 고브 장관과 다른 의견이 나온다. 전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교실의 교사들이 각자가 알아서 가르칠 일이지 정부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는 논지이다. 노동당의 그림자 내각 트리스트람 헌트 교육부 장관도 “1738만명이 죽고 4192만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부상한 인류의 최대 비극인 1차 대전을 두고 다시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점수를 따겠다는 시도 자체가 정말 충격적이고 추악(ugly)하다”고까지 혹평했다. 더군다나 영국독립당(UKIP) 같은 시대착오적인 극우파 정당이 힘을 얻는 시점에서 정상적인 정치인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우둔한(crass)’ 짓이라는 특이한 단어를 써 가면서까지 혹평했다.
고브 장관이 그런 무리수를 둔 이유로는 보수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절박함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3%를 얻어 원내의석 하나 없이 영국 3위 정당으로 올라선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 지지자가 원래 보수당의 강경보수 성향의 지지자들임을 감안하면 그들의 지지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뭔가 보수적인 일을 해야 하는 절박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 ▲ 1차 대전 당시 영국의 모병 포스터.
최근 룩셈부르크의 장 클로드 융커 총리는 ‘또 하나의 전쟁은 아직도 현실이고 우리 주위에서 악마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잠자고 있을 뿐이다’라고 경고했다. 그 예로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벌어진 비극을 들었다.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유럽 전체에 퍼져 있는 반독일 정서를 무시해서는 안 될 정도라며 현재의 상황은 100년 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때와 너무나 흡사해 공포를 느낄 정도라고 했다. 너무 많은 국가가 자국의 이익만을 좇아 ‘지역적이고 국수적인 정책(regional and national mind-set)’으로 바뀌고 있는 경향이 바로 그런 증거 중 하나라고 했다.
요즘 영국에서도 미국 노벨상 수상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과거는 죽지 않았다. 사실은 지나간 것도 아니다(The past is not dead. In fact, it’s not even past)’와 스페인 철학자 조지 산타나야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복되는 역사로 저주받는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
매년 영국에는 현충일 즈음이 되면 사람들의 가슴에 포피(poppy·개양귀비)가 달린다. 포피 판매 대금은 퇴역군인들을 돕는 데 쓰인다. 포피씨는 땅을 뒤집어 줘야 발아를 한다고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포탄으로 땅이 뒤집힌 벨기에의 격전지 들판에 그래서인지 1차 대전 종전 다음해 포피가 많이 피었다. 거기서 스러진 젊은이들의 피 색깔과 심장을 닮은 꽃들이 벌판을 뒤덮었다. 이를 보고 미국 여성 모이나 마이클(Moina Michael)이 부상병들을 돕기 위해 포피를 다는 운동을 1918년부터 시작했다. 그녀의 슬로건은 ‘당신들이 플랑드르의 들판에서 만든 교훈을 우리가 가르치리라(We’ll teach the lesson that ye wrought)’였다.
가장 유명한 1차 대전 시는 캐나다 출신의 군의관 존 매크레이 중령이 1915년 5월 2일 친한 친구와 제자가 전사하는 것을 보고 쓴 시다.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플랑드르 들판에 개양귀비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끝도 없이 늘어선 십자가들 사이에 우리가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늘의 종달새는 용감하게 날며 노래하건만
아래의 포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죽은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우리는 살아서 사랑했고 그리고 사랑받으며
그 안에서 여명을 느꼈고 불타는 석양을 보았었네.
이제 우리는 플랑드르 들판에 누워 있다.
적과의 싸움을 이어가다오.
꺼져가는 우리의 손으로부터 당신에게 던져져
이제 당신들의 것이 된 그 횃불을 높이 들어다오.
만일 당신이 우리들의 믿음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잠들지 않으리라.
비록 플랑드르 들판에 개양귀비꽃들이 핀다고 해도.

최악의 프랑스 솜전투…
영국군 첫날 1만9240명 전사
1차 대전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겪어본 유럽인에게조차 정말 ‘그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전대미문(unprecedented)’ 규모의 살육전쟁(carnage war)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가장 큰 전쟁이었던 나폴레옹전쟁(1803~1815)에서도 12년간 양측 군인이 350만명이나 죽었지만 그중 실제 ‘전투 중 전사자(Killed in Action·KIA)’는 37만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질병 같은 전투 이외의 이유로 죽었다. 영국군도 이 전쟁에서 육해군 합쳐 31만명이 죽었는데 그중 전투 중 전사는 3만명이 조금 넘는다. 전사자 전체의 겨우 10% 남짓이 전투 중 전사한 셈이다. 그런데 1차 대전은 겨우 4년 전쟁에 7000만명이 참전해 350만명이 죽었다. 90% 이상이 전투 중 전사이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무기들의 살상 능력은 약했다. 당시 주 개인 화기였던 머스켓 소총은 60~70m가 유효거리였고, 1분에 4발 사격이 최대였다. 탄환의 적중률도 좋지 않아서 맞아도 살상력이 약해 치사율도 높지 않았다. 나폴레옹전쟁의 전사자는 거의 대포에서 나왔다. 거기에 비해 1차 대전 때는 대포의 성능도 엄청나게 좋아졌지만 1분에 600발까지 발사가 가능한 기관총이 개발되었다. 거기다가 탄환의 위력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신체에 가해지는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1차 대전 기록을 보면 정말 추풍낙엽(秋風落葉)이라는 말 그대로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듯(drop dead like autumn leaves) 젊은이들이 죽었다’고 쓰여 있다. 영어의 ‘wholesale slaughter’, 즉 ‘대량도륙(大量屠戮)’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참호에 숨어 있다가 돌격 명령을 받고 양측 참호 사이의 악명 높은 진흙탕 ‘무인지대(No Man’s Land)’에 뛰어들었다가 기관총에 쓰러지는 사병들의 처참한 모습은 1차 대전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그중 제일 끔찍한 예가 1차 대전 중 가장 많은 영국군 사상자를 낸 프랑스 솜(Somme)전투(1916년 7월 1일~11월 18일)이다. 전투 첫날에만 영국군 1만9240명의 전사자와 3만8230명의 부상자를 냈다. 장기 참호 농성전으로 일관된 141일간의 전투 동안 영국군 42만명, 프랑스군 20만명, 독일군 50만명의 사상자가 났다. 매일 양측에서 거의 8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말이다. 연합군 전사자 14만6000명 중 7만3000명의 전사자 유해를 결국 못 찾았다. 얼마나 끔찍한 격전이었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1차 대전 4년 동안 총 6600만명의 군인들이 참전했다. 그중 연합군 937만명이 전사 혹은 실종됐고, 1283만명이 부상했다. 동맹군은 801만명 전사 혹은 실종, 3629만명 부상이라는 참극을 빚었다. 양측 도합 전사·실종 1738만명, 부상 4192만명의 끔찍한 기록을 남겼다. 겨우 74%의 군인들이 살아서 돌아왔고 그중에서 성하게 돌아온 숫자가 불과 10%가 조금 넘는 670만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영국은 600만명이 참전해 75만명의 사망자가 나와 88%의 군인들은 전쟁에서 돌아왔으니 평균 비율로 보면 상당히 행운인 셈이다. 그래도 영국에는 16만명의 과부가 생겼고 30만명의 어린이가 아버지를 잃었다. 정말 영국의 가정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없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 국민이 고통을 받은 전쟁이었다. 1차 대전 후유증은 정말 오래갔다. 1차 대전 참전 젊은이들을 두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는 말이 처음 나왔다. 이들은 살아서는 돌아왔으나 전쟁터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들만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다. 1921년 영국 인구통계에 의하면 1980만3020명의 여자에 남자가 1808만2220명이었다. 172만명이 차이가 나서 이를 ‘잉여 200만(Surplus Two Million)’이라고 불렀다. 특히 심각한 것은 당시 결혼 적령기인 25~29세 남성 1000명당 여성은 1209명이나 됐다는 점이다. 종전 후 한참이 지난 1931년에도 ‘잉여 200만’의 50%가 독신이었고, 35%는 결국 가임연령 동안 결혼을 못했다. 독일도 성인남자의 15%,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17.1%, 프랑스는 10%의 젊은이들을 잃었다. 이렇게 유럽의 어느 가정도 1차 대전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경우가 없었다. 영어에 ‘감사의 구역(Thankful Parishes)’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성공회의 1만4000개 교회가 관할하는 마을 구역 중에서 1차 대전에 참전한 모든 마을 청년들이 살아서 돌아온 50개 마을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마을들을 가 보면 자신들의 행운과 축복을 진심으로 감사해 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여러 가지 기념물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런 행운을 못 누린 대다수 영국의 시골 마을들은 아무리 마을 규모가 적다고 하더라도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물을 두고 있다. 영국에서는 전사를 하면 이름이 보통 5군데, 많으면 7~8군데 새겨진다. 마을 중앙광장에 세워진 위령비를 시작으로 동네 교회와 초·중·고등학교(대학생이었으면 대학)의 추모기념물에 이름이 새겨진다. 물론 무덤에도 당연히 새겨져 있을 터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군인묘지는 영국 내에만 1만3000개가 있고 거기에 17만개의 전사자 무덤이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묘지는 더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