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제주 4․3의 역사적 성격과 국가기념 방향

이강기 2015. 10. 5. 11:19

[시론] 제주 4․3의 역사적 성격과 국가기념 방향


[김광동 |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시대정신, 2014년 여름호

 

Ⅰ. 국가적 추모에 따른 검토 사항

 

제주 4․3사건과 관련 박근혜 정부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지난 4월 3일부터 정부가 주재하는 첫 위령제를 지냈다. 그 공식 명칭은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로 확정했다. 국가차원의 추념(追念)이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희생을 회상하고 고귀한 희생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내일을 살아가야할 우리 모두의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다. 따라서 추념해야할 역사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가추념일 지정이 있기 전, 4․3과 관련한 기념사업과 명예회복 조치의 근거가 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제주 4․3 특별법’이었다.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 하려고 한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제주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기에 진실을 밝혀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는 목적에 따라 시작되었다.

적어도 4․3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반대를 위한 폭동이자 유엔(UN)주도의 민주공화제를 건립하기 위한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적 제헌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사건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랬기에 김대중 대통령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임을 분명히 했었고, 다만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하자는 취지였다. 한국의 좌파 이론가이자 재야언론인이었던 송건호 역시 제주 4․3사건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선거 반대를 위한 ‘폭력 전술’의 하나였고, 폭도들에 의한 ‘무장폭동’임을 분명히 해왔다. 그러나 엄연했던 역사적 사실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추모의 대상이 불법폭동을 진압하다 희생당한 분과 그 과정에 발행한 무고한 희생자인지, 아니면 폭동을 주도한 세력들인지 조차도 불분명해진 상황이 되었다.

특히 4․3 특별법으로 만들어진 〈제주 4․3 위원회〉와 현재 서울시장을 맡고 있는 박원순 주도로 만들어진 「제주 4․3 진상보고서」는 역사의 앞뒤를 뒤바꿔놓았다. 제주 남조선로동당이 주도한 무장에 의한 불법폭력을 오히려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 만들었으며,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자는 무장투쟁을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막기 위한 ‘숭고한 통일운동’으로 뒤바꿨다. 4․3 사건보다 1년여 전인 1947년 3월 제주에서 있었던 경찰 발포를 사건의 원인이라 규정지으면서, 좌익의 무장폭동보다는 제주 주민이 미군정에 저항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이었다고 뒤바꿨기 때문이다. 1948년 5․10 선거반대와 정부수립 반대는 곧 대한민국 건국을 막고 공산제를 만들자는 무장봉기였음에도 그 성격을 감추고 사건의 본질을 ‘통일정부 수립운동’이라 규정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도 폭동을 진압해야 했던 군과 경찰에 의한 주민희생 사건으로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공산전체주의의 폭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덮고, 국가공권력의 잘못만을 거론하며 정부차원의 사과를 했으며, 그 취지에 따라 제주 4․3 평화공원과 박물관을 건립․운용되도록 하였다.

현재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제주 4․3 사건에 대한 국가기념일 지정도 그런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의 연장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18일 국무회의 통과와 대통령 재가를 거쳐 공포된 국가기념사업에 따라, 첫 정부주재 4․3 기념행사에 참석한 정홍원 총리도 10여 년간의 특별법 제정과 공식 사과, 평화공원과 기념관 건립, 그리고 위령 사업 등에 많은 노력이 있었고, 그 연장선에서 국가기념일 지정이 있었음을 밝혔다. 그렇기에 약 1만 4천 명의 주민희생이 초래되었고, 제주 2지역에서의 좌절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적 선거에 흠결을 남긴 이 사건이 정당한 국가추념사업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건의 성격이 정확하게 규정되어 국민적 이해의 바탕 위에 서야 할 것이다. 추념의 의미가 정확하지 않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역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적인 개인과 단체의 개별적 추념행위를 국가적 추념 사업으로 만든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Ⅱ. 공산주의 확장과 좌익의 친소․반미투쟁

 

대한민국이 건국되던 1948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사건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체제 대립,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 먼저 만들어진 소비에트 공산체제의 성격과 그 체제가 한반도 전체로 노도처럼 확산되던 과정이 이해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와 소련체제를 지향하던 세력들은 한반도에서 공산체제의 확산의 걸림돌이었던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막는데 모든 투쟁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레닌(Marx-Lenin)혁명 사상의 구현과 소비에트식 공산체제를 지향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전역에서 극단적인 폭력투쟁을 벌였다. 이에 1948년 4월 3일을 전후한 제주에서의 대대적 무장투쟁이란, 곧 1946년 10․1 대구 폭동이나 1948년 여수․순천의 제14연대 반란사건 등을 포함한 1945년 8․15 광복 직후부터 1953년 6․25전쟁 종결까지 계속된 한반도 전역에서의 각종 무력충돌과 대규모 전쟁의 일부이자 일환이었던 것이다.

당시 소비에트 공산체제를 만들었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불과 6일을 앞둔 1945년 8월 9일 일본에 대항하는 전쟁의 막바지에 참전해 전후 동아시아 질서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점령지역에 소비에트혁명이자 소련 제국주의의 위성국가를 강요했던 동유럽에서처럼 동아시아에서도 그런 소비에트 확산전략을 그대로 적용했다.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자마자 공산전체주의로 편입시켰고, 소련 제국의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8․15 해방 전부터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았고 소련의 힘을 빌려 그들이 권력을 주도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자주독립 국가보다는 일본을 대신해 소련이 지배하는 질서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공산체제를 지향했던 것이다. 공산진영인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인민위원회〉는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광복 직후부터 정치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조선인민공화국’을 일방적으로 먼저 선포하기도 했다. 또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은 스스로 ‘국가’와 ‘정부’를 참칭하고 소련의 정책과 노선을 추종하면서도 일관되게 미군정과는 폭력적으로 대립했고 충돌했다.

한국의 좌익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인민민주주의’라 불렀고 공산체제를 만드는 폭력투쟁을 ‘인민해방’ 투쟁이라 불렀다. 조직적으로도 일원화되어 북한에 이미 들어선 소련 군정의 지시에 복종하면서, 남한 내에서는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을 따르고 있었다.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최대 조직인 조선공산당 책임자 박헌영도 소련의 지시를 받들었고 신탁통치는 물론 한국이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남조선노동당은 1946년 10․1 대구폭동, 1947년 3․1투쟁 및 1948년 2․7투쟁 등을 감행하며 일관되게 친소, 반미투쟁을 벌여나갔고 한국에 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무장폭동 방식으로 전개했다. 남로당은 3․1투쟁과 2․7투쟁 등으로 불리는 각종 폭력투쟁을 감행하면서 한반도 전역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고, 미국을 ‘제국주의(帝國主義)’로 규정지으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북조선최고인민회의가 발표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임시헌법초안」을 지지하였다. 남로당은 그들의 목표가 남한을 북한에 건설된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에 흡수시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제주도의 공산계열의 폭력투쟁 역시 공산주의자들의 1947년 3․1 투쟁과 1948년 2․7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제주도 남로당(안세훈, 조몽구)과 통일전선단체인 민전은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 공산주의자의 총책인 김일성, 박헌영을 제주 남로당의 ‘명예의장’으로 추대하고, 대구 10․1폭동과 연계투쟁을 선언했다. 무장대인 인민해방군과 구국투쟁위는 1948년 4월 10일자 포고문을 통해 “단선․단정을 죽음으로써 반대하고,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당시 소련 모스크바로부터 평양-서울-제주로 이어지는 공산조직의 목표와 투쟁의 일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3․1투쟁 전에 있었던 미군정에 대한 좌익단체의 최초 저항인 ‘양(洋)과자 반대운동’을 보면, 제주지역에서 경찰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충돌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미 군정청 앞에서 제주농중 오현중 등 중학생 1천여 명이 <표 1>과 같이 소련의 의도대로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짓는 구호를 내세우며 반미투쟁과 양과자 반대운동을 결합시켜 전개했다. 그 사건은 제주 미군기지 방화사건 등과 함께 당시 공산주의 조직의 역량을 시험하고 반미투쟁을 동원해 본 중요한 초기 사례였고, 그 연장선에 3․1투쟁이나 4․3투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특히 제주 남로당은 1947년 3.1폭력투쟁을 준비하며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로의 방향으로 전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을 지시했다. 물론 ‘민주주의 임시정부’란 ‘인민민주주의 정부’, 즉 북한에 만들어진 공산주의 정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각 읍․면 위원회에 하달한 「3․1운동 기념 투쟁의 방침」은 미군정 체제를 거부하고 한국의 질서를 파괴하며 나아가 ‘공산정부’를 수립하는 단계적 투쟁을 제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각 야체이카(당 세포)에 하달한 「3․1운동 기념투쟁 방법」 등은 구체적 투쟁방침과 방법을 지시하며 미군정 반대투쟁을 이끌어갔다. 또한 제주 남로당 3․1투쟁 지령문은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근로인민은 남조선노동당 깃발 아래로!” 등을 투쟁 표어로 제시했고 “최고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투쟁이 남조선로동당의 정권 탈취 투쟁의 계속이었으며 반미․친공 투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제주에서의 3․1투쟁이란 곧 4․3투쟁의 전조였을 뿐이다.

 

Ⅲ. 대한민국 건국 저지와 공산체제 수립투쟁

 

`제주 4․3사건의 직접적 동기는 5․10선거 저지를 통한 한국에서의 제헌의회 구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투쟁이었으며, 그것은 곧 대한민국 건국저지 투쟁이었다. 유엔(UN)총회에서 가결된 대한민국 통일정부 수립안에 의거 1948년 1월 유엔한국위원단이 입국하게 되자 공산주의자들은 〈남조선 반국제련합(UN)조선위원회〉를 조직하고 유엔반대 총파업을 주도했다. 남로당은 <표 2>와 같은 반(反)유엔 구호와 더불어 5․10 제헌의회 저지시키기 위한 ‘2․7투쟁’을 전개했었다. 미군철수는 물론 이승만, 김구 등을 제국주의자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유엔활동 저지와 정부수립 저지투쟁의 목표는 <표 3>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제주 남로당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결국 1948년 3․1투쟁 및 3․10총파업, 그리고 2․7투쟁을 이은 제주 4․3 무장투쟁은 대대적 폭력행위 및 질서파괴행위로 제주에서만 2개 선거구에서 제헌의원 선출을 좌절시켰다. 투쟁 목표였던 유엔결의의 저지와 대한민국 건국의 저지라는 무장투쟁의 목표를 일정부분 관철시킨 것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과 달리 제주의 4․3사건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군(軍)조직을 갖춘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준비된 계획과 군사적 훈련을 토대로 감행했다는 것이다. 1947년 3․1투쟁과 3․10총파업투쟁 이후 조직을 개편한 제주 남로당은 1947년 8월 이미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체제를 갖추고 몇 개월의 군사 훈련 후 계획적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 4․3반란 직전 320명의 병력으로 편성 완료되어 있었고, <그림 1>에서 나타나듯이 군사부를 두고 그 산하에 도(島) 군사위원회를 두어 제주 중앙 및 각 면별로 총사령관과 부사령관 및 총사령 등이 활동하도록 했다.

둘째, 제주 남로당의 4․3투쟁이란 남조선로동당의 3․1투쟁과 2․7투쟁의 연속선에서 불법적 대중투쟁을 넘어 군, 경찰, 행정조직에 만들어진 침투조직을 기반으로 무장반란을 감행한 것이었다. 4․3투쟁 직전인 1948년 2월 만들어진 제주 남로당의 <구국투쟁위원회>는 <그림 2>에서 나타나듯이 중앙에서 파견된 조직지도자(Org.)로서 이두옥,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조직지도자로서 조창구 및 강창욱, 군 조직인 국방경비대 침투 조직으로 제11연대 문길상 중위, 경찰 침투조직으로 이기도, 행정조직인 도청 침투조직으로 이정석이 각각 책임자로 있었다. 조직과 훈련, 그리고 무장에 의한 폭동 전개는 물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것 등 모든 면에서 폭동과 저항의 수준을 넘어 반란의 수준에 가 있었던 것이다.

셋째, 남로당에 의한 4․3 폭동사건의 1차 목표는 무장조직으로 제주도 전역의 치안유지 기관을 공격해 경찰중심의 질서유지를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초기 인명 피해는 경찰 4명, 우익 인사와 가족 8명 등 총 12명이 살해되었고 약 27명이 중상 내지 부상당했으며 2명의 경찰이 소재 불명되었는데, 무장대가 경찰을 대상으로 했던 것은 치안질서를 와해시켜 자신들에 의한 새로운 질서체제를 기도한 것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공산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947년 2월의 민전 결성식 때 “제주도에는 악질 경관이 적은 만큼 인민의 대중적인 분노와 증오심을 발휘할 조건이 많지 않다”고 스스로 규정했던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 후 1년 만에 갑자기 경찰의 만행과 탄압이 이유 없이 늘 수도 없었는데도 ‘악질이 아닌 경관’을 공격한 것은 경찰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공산체제를 지향하기에 경찰에 의한 치안유지를 붕괴시키고자 했던 것일 뿐이다. 

넷째, 제주 남로당의 4․3 투쟁은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적 대한민국 건국저지 및 반미(反美)와 반유엔(反UN)활동이었다. 4․3폭동의 대상과 구호 및 삐라로 볼 때 제주도 무장반란대는 한국을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짓고, 미국을 ‘미제 식인종’이라 지칭하며 타격대상으로 지목했고, 공격을 선동했으며, 유엔의 결정과 활동을 거부하고, “유엔조선위원단은 빨리 돌아가라”는 5․10선거활동 거부 투쟁으로 민족사 최초의 민주선거인 5․10선거를 거부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 경찰 및 치안조직의 무력화와 무장해제,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은 물론 건국세력 및 민족세력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던 것이다.

다섯째, 제주 무장대는 당시 사회의 기본인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을 공유했다. 남로당 무장대는 무장시위와 공격 중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 만세!”를 불렀고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부르는 <적기가(赤旗歌)> 내지 <인민항쟁가(人民抗爭歌)>를 불렀다. 특히 5․10선거 이후에는 8․25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투표참여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참여 등 북한정부 수립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중앙 및 제주 남로당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남로당은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최고인민회의 360명을 선출했고, 남로당 제주위원회도 5만여 명의 투표용지를 제출해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등 6명이 제주도 인민대표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했다. 안세훈은 3․1투쟁의 책임자였고 강규찬과 김달삼은 4․3투쟁시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과 군사부 사령관이었다. 특히 김달삼은 4․3투쟁시 역할을 인정받아 허헌, 박헌영 등 좌파 거물들과 나란히 35명의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고, 8월 최고인민회의의 입후보자 토론 때는 5․10 대한민국의 제헌선거를 저지한 제주 4․3투쟁의 ‘전과(戰果)’ 등을 설명한 후 “민주조선 완전 자주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그들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4․3투쟁이란 1945-1953년까지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형성과정에서 그 목표를 공산체제 수립에 둔 좌익세력이 주도한 a. 찬탁투쟁(1946) → b. 대구10․1 폭동(1946) → c. 3․1투쟁(1947) → d. 2․7투쟁(1948) → e. 4․3투쟁(1948)→ f. 5․10투쟁(1948) → g. 6․25 침략전쟁(1950)으로 전개된 일련의 공산혁명 투쟁의 하나였고, 대한민국 국가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무장반란이자 전쟁행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Ⅳ. 제주 4․3사건에 대한 국가추념의 방향

 

제주 4․3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시기 공산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국가 건설에 반대하며 벌인 무장투쟁이기에 이 사건으로 인한 대량 희생에 대한 기본책임은 물론 무장반란을 일으킨 좌익과 남로당에 있다. 남로당 무장유격대는 군경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판단한 양민들과 유격대에 협조하지 않거나 지원을 거부하는 자를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를 자행했다. 가령 1949년 1월 15일 봉성리 구몰동에서는 방화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날 새벽 무장대가 습격하여 40여 동 이상의 마을 건물을 불에 태웠다. 그 과정에서 35명 정도가 죽창, 철창 등에 의해 희생되기도 했다. 물론 폭동적 반란에 대한 진압과정에서 정부의 미숙한 대응과 과잉행위에 의한 광범위한 희생도 많았다. 근대적 법 원리와 규정을 내면화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고, 극한적 좌우대립이라는 공포의 상황에 있던 군경토벌대의 과잉행위가 있었다. 특히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이뤄진 대대적 진압작전에서는 재판절차 없이 즉결 처형되는 희생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진압작전 전 중산간 지역에 소개령(疎開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무고한 양민 희생이 발생하기도 했다. 극한적 대치 상황에서의 사실관계 확인 부족, 공포 및 보복 심리는 물론 미숙한 국가기구와 제도 등으로 대량의 양민 희생이 발행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공산세력의 폭동과 대규모 양민 희생이라는 역사적 성격이 분명한 만큼 정부는 4․3희생자 추념을 추념 취지와 대상을 명확히 세우고 추념의 성격이 이에 부합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미숙한 군과 경찰이 극도의 공포상태에서 벌인 과잉 진압을 탓하며 4․3 추념을 ‘경찰에 대한 정당한 항거로 규정’짓거나 유엔(UN)활동을 저지하며 대한민국 건국저지 투쟁에 나서고 군과 경찰을 공격한 사람들을 명예 회복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추념 대상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고, 폭력으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한 자들은 배제되어야 한다. 과거 제주 4․3 희생자 심의 때 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희생자로 결정되어 제주 4․3평화공원에 무고한 희생자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현재 제주 4․3희생자 추념의 의미를 부정하도록 만든다.

국가적 추념의 의미가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첫째,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성격을 바로잡고 정립시키는 일을 병행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무고한 양민에 대한 대량적 희생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4․3사건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무장 공산세력과 군․경에 의한 희생을 있는 그대로 밝혀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남로당 공산세력의 무장폭동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고 만들기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군인과 경찰관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과 자유와 번영의 토대를 만든 그 분들의 희생을 우리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조명되고 기려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성숙한 국가이자 대한민국의 당연한 의무다.

마지막으로, 미성숙한 시기의 무리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과잉행위에 따른 무고한 양민과 그 유족의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과 추념이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무장투쟁 등을 통해 공산체제를 지향하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반대했던 공산 및 좌익 핵심세력들을 추념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불법적 공산폭동으로 사법절차에 따라 사형내지 무기징역을 받을 주동세력까지 추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2001년 9월 헌법재판소가 “헌법의 기본원리에 따라 사건 발발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주도적․적극적으로 살인․방화 등에 가담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본질을 훼손한 자들을 희생자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한 바도 있기에 법적으로도 정당하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인민공화국 만세와 스탈린 만세’ 그리고 ‘인민공화국 국기와 적기가’를 부르며 불법 폭력투쟁을 했던 이들을 추념하거나, 우리가 국가차원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훼손하는 우(愚)를 피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럴 때 비로소 국가적 차원의 4․3사건 희생 추념이 국민 모두가 원하는 바대로 역사적 상처와 분열을 극복하고,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며 미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역사적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