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마할을
만든 무갈 帝國 이야기
전성기 때 인구가 1억5000만 명으로 중국의 淸보다 많았다.
조갑제닷컴 2015. 1.11 |
무갈제국의 창설자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쪽 혈통으로는 칭기즈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詩를 지었으며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 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 잊어 한
것은 땅이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512년 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南征의 피날레는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1512년 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南征의 피날레는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무갈은 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이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再現, 스스로를 달랬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못하고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동상에 걸렸다. 이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戰士들을 불러 모아 굴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重病(중병)으로 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病床(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얀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延命(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약320만 평방킬로미터를 정복, 너그럽게 다스렸다. 전성기인 1700년의 무갈제국의 인구는 약1억5000만 명으로서 중국(당시 청, 1억2000만)보다 많았다. 國力과 인구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당시 무갈제국의 판도를 지금에 대입하면 인구가 16억 쯤 되어 역시 중국보다 많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세력은 페르샤 관료들과 이슬람 文化였다. 수니派 이슬람에 속했던 무갈의 왕들은 힌두교 등 他종교를 존중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들을 잘 다스리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활력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무갈제국의 전성기는 아크바르 大王 시절부터 약150년간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4代 王이다. 그는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세 번째 부인을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무덤인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건물이다. 눈부신 돔은 지름 35m, 높이 35m이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공된(1653년) 직후 아들에 의하여 廢位되어 2.5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의 한 건물에 幽閉되었다. 발코니에서, 사랑한 王妃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왕비 옆에 안장되었다.
파키스탄의 古都(고도) 라호르에도 무갈제국의 城 안에 궁전과 모스크가 있다. 궁전은 동시대의 베르사이유에 못지 않은 규모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도 장대하다. 주황색 砂岩으로 만든 이 모스크는 1678년에 완공되었다. 정원은 170×170m의 정사각형으로서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가졌다. 1986년까지 313년 동안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지금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잘 모스크가 가장 크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파키스탄의 라호르城이란 2대 볼거리를 만든 나라의 이름이 몽골(무갈)제국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17세기 세계 6大 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몽골계 북방유목민이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 淸, 무갈제국이었다. 몽골계 騎馬(기마)군단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소총이 발명되고 艦船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이 19세기 중반 무갈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때부터 중국, 인도가 100년 이상 서양 제국주의의 東進으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제 30억 인구를 가진 두 巨大 국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무갈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몽골-투르크族의 군사집단이 토착국가를 점령하고 인도에 건설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도 무갈帝國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은 많지만 몽골(무갈)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인도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이교도의, 이민족의 지배를 왜 그리워하고 자랑하는가.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3代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이 아닌 문화적인 기반에 제국의 정통성을 뿌리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의, 화목,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갈제국의 지배층은 57%의 몽골-투르크族과 나머지는 이란人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아크바르는 지배층을 확대 개편하면서 어떤 종족도 4분의 1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슬람을 힌두교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의 문화와 관습을 궁정에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를 통치했던 前 왕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현지화(現地化)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통합과 폭넓은 참여 위에서 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시인이자 작곡가로, 또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명문입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교양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反英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文化的 번영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서만 보장된다는 점에서 무갈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몽골-투르크의 전통을 이어 받은 기마군단에다가 바부르는 오스만 터키에서 도입한 총포부대를 별도로 편성했습니다. 군대조직도 10진법으로 잘 돼 있었고 전술도 독창적이었습니다. 바부르의 1만2천 기마군단은 10만이나 되는 적을 예사로 무찔렀습니다.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앙 이외에 항상 예비대를 편성해놓았습니다. 적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고 기습·매복·유인전술로 적을 피로에 지치게 한 뒤 생생한 예비대를 최후에 투입하여 전투를 끝장내는 식이었죠』
무갈제국 인구 2억 추정
무키아 교수는 『초대 황제 바부르는 몽골族의 용모였지만 3代 아크바르는 어머니가 이란 여자였으므로 서양인의 용모를 다소 닮았다』고도 했다. 바부르는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을 늘 그리워했는데 특히 우즈벡의 맛있는 과일을 먹고싶어 했다고 한다. 전투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부하가 사마르칸트에서 수박을 갖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투를 잠시 중단시킨 뒤 수박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무키아 교수는 전성기인 16∼17세기에 무갈제국의 국력은 오스만 터키나 어느 유럽나라들보다도 충실하여 사실상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무갈제국의 인구는 1억∼2억명 선으로 추산된다. 경제력이 충실해진 것은 무갈제국이 상인들을 지식인보다는 위에, 무사 다음의 제2계급에 놓을 정도로 우대하여 무역이 번창했고 인도 북부의 농촌이 높은 생산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유럽의 거의 열 배나 되었습니다. 6월에 땡볕이 내리쬘 때 유기물을 태운 뒤 비가 오니까 부패가 일어나 땅이 기름질 수밖에 없지요. 17세기에 유럽 나라들이 앞다투어 인도로 몰려 온 것은 무갈제국의 경제적 번영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은 인도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하게 하게 하는 역사적 근거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인도는 자연的, 人的 자원이
풍부하므로 무갈제국과 같은 좋은 조직경영자를 만나면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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