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역사 속에 나타난 일본인의 軍國性

이강기 2015. 10. 8. 22:13

[역사산책] 역사 속에 나타난 일본인의 軍國性

글 : 金丁鉉 역사저술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월간조선 2014년 10월호

 

⊙ “倭는 잔인하고 혹독하고 각박하고 독한 것은 秦나라보다 더하다” (유수원, 《우서》)
⊙ “和親에는 거짓이 많고, 仁義를 가장하여 敵國을 현혹게 한다” (明나라 허의준)

金丁鉉
⊙ 77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戰國時代 일본 무장들의 싸움을 그린 그림. 명나라 허의준은 “왜인들은 열 살만 되면 칼 쓰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왜인(倭人)을 두고 흑치족(黑齒族)이라 하였다. 왜인은 오늘의 일본인을 뜻한다.
 
  일본인의 선대(先代)인 흑치족은 칼싸움을 곧잘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일본인에게 이어졌다고 하는 설이 있는 것이다. 무사도는 무(武)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갈 길을 말한다. 흑치족, 그들의 갈 길은 나름대로 신념과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칼을 뽑았으면 찌르고 봐야 하는 그런 신념이고 행동이었다.
 
  조선시대 중국 명(明)나라 사람인 허의준(許儀浚)이 항해 중 왜인들에게 나포되어 오랫동안 억류된 일이 있다. 그런 그가 명나라 조정에 보낸 상소문(上疏文)이 있다. 이 상소문에서 돋보이는 대목이 있다. “우리 명나라 군사들은 절대로 맹자(孟子)의 인의(仁義) 따위의 말엔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하는 글귀다.
 
  이 글귀는 당시 일본인들이 어떠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무사도 정신은 곧 침략의 근성으로 발전해 갔다. 허의준이 이런 말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섬나라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정신은 무사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정신으로 한때 강국(强國)의 면모를 보였다.
 
 
  “온 나라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의 풍속은 가장 광폭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후지산은 흑치국의 진산(鎭山)”이라는 기술(記述)도 나온다.
 
  조선 영조 때 학자 유광익(柳光翼)은 그의 저서 《풍암집화(楓巖輯話)》 중 <기문집(紀聞集)>에서 “흑치들은 옛날에 성씨(姓氏)가 없었는데 중국의 제(齊), 양(梁)나라 때 가서 산성주(山城州) 주인인 윤공(允恭)이란 사람이 비로소 성(姓)을 칭했다. 여기서 등씨(藤氏)가 먼저이며 평씨(平氏), 원씨(源氏)가 그다음인데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자손이 평씨, 원씨가 되었다고 한다”고 했다. 등씨는 일본어로 ‘후지’, 평씨는 ‘다히라’, 원씨는 ‘미나모토’를 말한다.
 
  조선시대 야사류(野史類)의 하나인 《우서(迂書)》에는 흑치족의 심성과 행동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우서》는 조선 영조 때 문신(文臣)이며 학자였던 유수원(柳壽垣)이 집필한 저서로, 그 내용에는 위정자・지식인의 심금을 울리는 대목들이 많다.
 
 < 왜인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된 것은 신라・고려 때부터 그러했는데 고려 말기에 와서 더욱 심하였으니 대개 구주(九州)의 도망자들이었다.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왜인으로부터 근심은 별안간 없어졌으니 참으로 이상하였다. 300여 년 만에 단지 명종(明宗・1545~1567) 때 삼포왜란(三浦倭亂)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을 뿐이다. 임진왜란 뒤에 왜국의 원씨가 집권한다고 전해졌는데 그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역적이 없었기 때문에 구주에서 도망다니는 자들이 없어서 왜인들은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옛날과 지금에 이르러 없었던 일인데 왜인들의 성정(性情)은 불똥이 튀는 것 같아서 100년이나 조용히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지금까지 이렇듯 그들이 조용한 데서 오래도록 우리가 태평하니 이것은 조선이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고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 이런 내용도 있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하에 백성을 학대하고 망하지 아니한 자가 없는데 홀로 왜인만이 통치자가 백성들을 독려해서 농사짓게 하고 그 곡식을 빼앗아 가져갔다. 그래서 백성들은 곡식은 한 알도 얻어먹지 못하고 다만 토란, 무, 쌀겨나 먹고 지내는 것이 이미 중세(中世)부터 그러하였다. 그들의 그런 행동이 몇백 년이나 그러했는지 알 수 없다. 포학무도한 그들 지배자들인 것으로 지금까지 어찌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대개 그들의 지배자 한 사람이 취하는 곡식이 50만 석, 혹은 100만 석이 된다 하니 그들은 그것으로 용맹한 군사를 기르며 그 군사에게만 후하게 급료를 주고 하여 강한 군인으로 만들었다 한다.>
 
 < 왜국은 중국의 진(秦)나라와 흡사한데 잔인하고 혹독하고 각박하고 독한 것은 진나라보다 더할 뿐만 아니라, 관백(關白) 이하 여러 장수까지 여러 대대로 물려받은 자인데 글은 전연 알지 못하고 오직 승려만이 글자를 안다 하는데, 승려로서 문서를 맡은 자는 녹(祿)이나 타 먹고 헛된 직함만 있었다. 그들은 권력만 잡고 일 처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죄는 크고 작고 간에 논할 것 없이 모두 목을 베는 형벌을 보였다. 정사(政事)는 지극히 간략하였고 진나라가 분서(焚書)한 것처럼 의사(意思)에 일률적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진시황(秦始皇)과 이사(李斯)의 지혜를 훔쳐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찌 진나라 같은 행태인지 알 수 없다. 동해(東海) 밖에 또 하나의 진나라가 있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내용들에서 당시 왜인의 심성과 침략성·군국성(軍國性)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통치자인 관백은 아래로부터 복잡한 의견 전달 같은 것은 받지 않는 군국적 독재성이 강했다.
 
 
  倭人의 戰術
 
왜구는 조선과 명나라 해안지대를 약탈했다. 그림은 명나라 수군과 싸우는 왜구들.
  흑치족의 군국적 근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명나라 허의준이 조정에 보낸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 왜인들은 태어난 후 열 살만 되면 칼 쓰는 법을 배우고 활 쏘는 것을 배웁니다. 사서(四書), 《주역(周易)》 등을 배우기는 하나 문(文)과 이(理)에는 통달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알며 대신에 싸우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평상시 그들은 자제(子弟)들에게 “열 살이나 백 살이나 모두 한 번 죽는 것은 같으니 웅크리며 조심해 살 수는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짧은 옷과 짧은 소매에 맨발과 깎은 머리에 긴 칼과 짧은 비수(匕首)를 사용하여 스스로 몸을 보호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데 높은 산에다 성을 쌓고, 못을 파서 강을 만들고, 적이 오면 먹을 양식이 있는 사람은 성(城)으로 올라가 지키게 하고, 양식이 없는 사람은 적군에게 다 잡혀 죽어도 돌보지 않는다 했습니다. 적을 공격하러 나갈 때는 병사더러 자기 양식을 먹도록 하고 장수는 언제나 뒷전에 서서 가고 병사들만 앞장서게 했습니다.
 
  복병(伏兵)하는 계교와 거짓으로 패퇴하는 지략 같은 것은 없고 깃발을 많이 세워서 적의 기세를 꺾는 솜씨만 컸습니다. 병사 한 명이 깃발을 10개나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고 이상하게 꾸민 옷의 빛깔로써 적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탈바가지를 쓰고 전장(戰場)에 나가는 놈도 적잖았고 싸움에서 이기면 곧장 휘몰아 나가면서 뒤도 안 돌아보며 패하면 정신없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기고 나면 패한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또 패배하면 회복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육전(陸戰)은 잘하지만 수전(水戰)은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공(火攻)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장수에게는 정해진 숫자의 군사는 없고 군사는 두서너 달 먹을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나라 안을 텅 비워놓기까지 하면서 군사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뒤로 엄습할 때는 적잖은 화를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쫓아가 싸우기만 하고 편안하게 기다렸다가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전법(戰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돈을 뿌려 이간의 술책은 잘 쓰긴 하나 싸움에서 이기면 그 돈을 도로 빼앗아갔습니다. 같이 죽자는 맹세를 하는 것이 있으나 사적(私的) 이익에는 맹세고 뭐고 팽개치기만 했습니다. 화친(和親)에는 거짓이 많고 상대를 속여서 공격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을 잘 쌓아서 적군을 막고 인의(仁義)를 가장하여 적국을 현혹게 하며 욕심은 한이 없고, 법은 대소(大小)를 불문하고 털끝만 한 죄에도 목을 베었습니다. 급히 쳐들어오는 것에는 두려워하고 천천히 싸우는 것만 잘하였습니다.
 
  살마(薩摩)와 관동(關東)에 사는 사람은 강직하고 싸움을 잘하며 수도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간사하고 꾀를 잘 썼습니다. 적군이 적으면 기운이 배나 나고 적군이 많으면 스스로 움츠리는 행세였습니다. 싸우는 데 진(陣)치는 건 없었고 죽이는 데 제한 또한 없었습니다. 형세만 떠벌려 군사를 놀라게 하니 군사 중에 능히 싸울 사람은 겨우 반밖에 안 되었습니다. 배는 면이 넓고 밑이 뾰족하고 움직이기 어려우니 그런 데서 조금만 움직이면 흔들려 엎어지려 해서 빨리 달아나기가 어려웠습니다.(이하 생략)>
 
  허의준은 이 상소문을 올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곧 조선을 침범할 것이란 언급도 하였다.
 
 
  일본, 과거사 솔직하게 반성해야
 
  허의준의 글에서 보면 일본인의 옛 선대 기질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오늘날에도 그런 피가 남아 있어서 과거사 같은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새삼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흑치족 근성과 함께 군국주의에의 회귀성(回歸性)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였다.
 
  위정자에게는 역사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선대가 남겨놓은 흔적에서 국정(國政)의 바른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역사에 관한 무지(無知)는 국정에서의 오류로 이어진다.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역사지식으로 바른 국정을 펼치는 것은 위정자의 도리다. 지금 일본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다.
 
  신라인의 피를 받은 이들도 적잖게 있을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서 백제인이 공헌한 바도 익히 알 것이다.
 
  과거 한일(韓日)의 역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버릇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이웃과 화해(和解)는 요원하다. 일본인들의 무사도 정신에는 ‘앗사리’란 말이 있다. ‘솔직하게’란 뜻의 말이다. 과거사 문제도 이런 솔직하게 반성하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이제 일본은 잘못된 군국근성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아베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은 곧 군국성으로 되돌아가는 행위임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