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리포트 - 일본 최중심, 황거(皇居)를 말한다
도쿄발 ‘울트라 우향우’ 진원지 될까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월간중앙 201507호 (2015.06.17)
일본의 국가적
자신감 고조되면 황실에 대한 국민 관심도 증폭 … 새 천황 등극시 한·일 민족주의 정면충돌 가능성 높아
일본 전역이 가코 붐이다.
국민적 아이돌이다. 거의 매일 신문·방송 어딘가에 실린다. 천황 둘째 아들의 차녀, 가코 나이신노(佳子内親王)다. 황가의 직계로, 영어로는
프린세스(Princess, 공주)로 불린다. 보통 일본인들은 ‘가코사마(さま)’로 알려져 있다. 탤런트 욘사마(ヨンさま)처럼, 친밀하게 상대방을
높이는 ‘님’에 해당되는 말이 사마다.
가코 공주는 1994년
12월생으로 현재 21세다. 지난해 황족과 구(舊)귀족들의 교육기관인 가쿠슈우인(學習園)대학에 입학한다. 성인으로서 황가를 대표하는 새로운
얼굴로 데뷔한다. 미디어가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뉴스메이커로 떠오른 것은 올해 들어서다. 국제기독대학으로 전학을 하면서 시작된다. 영어를
기본으로 하면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인문미학)에 주목하는 곳이 도쿄(東京) 국제기독대학이다.
천황 아키히토(明仁)는 2남1녀를 두었다. 직계 두 명의 아들을 통해 세 명의 손녀와 한 명의 손자가 있다. 차기 천황인 황태자 나루히토(徳仁)와 황태자비 마사코(雅子)의 딸인 아이코(愛子) 공주. 둘째 아들 후미히토(文仁)의 자식인 마코(眞子) 공주, 가코 공주, 히사히토(悠仁) 왕자다. 이들 4명의 손자 ·손녀 가운데 유독 미디어의 각광을 받는 인물이 가코 공주다.
필리핀 대통령을 위한 국빈 만찬은 가코 공주가 황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선 대표적인 행사다. 6월 3일 도쿄에서 열린 베그니노 아키노 대통령과의 만찬 때다. 이날 행사에는 천황 부부를 비롯해 황실 가족 모두가 모였다. 아키노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한 행사지만, 주인공은 가코 공주다. 병중이던 황태자비 마사코가 무려 1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공식만찬이지만, 21세 가코 공주가 하이라이트다. 엷은 분홍색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가코 공주가 샴페인 잔으로 건배에 나서는 모습은 다음 날 텔레비전 뉴스에 반복해서 방영됐다. 샴페인을 입에 댄 가코 공주의 수줍어하는 모습은 청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다.
아이돌 가코 공주의 출현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 주목했다. 첫째 ‘좋은 일본(Good Japan)’의 도래다. 황실 구성원이 국민적 관심사가 된다는 것은 일본이 승천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국민들의 황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 일본의 미래도 밝게 느껴진다.
일본의 부활과 황실 인기의 함수관계
22년 전 황태자의 결혼식은
좋은 예다. 황태자 나루히토가 평민 출신 외교관 마사코와 결혼한 것이 1993년 6월 9일이다. 1993년은 일본 버블경제의 피크에 달하던
시기다. 한 달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면 여자친구와 1주일간 유럽 여행을 하면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할 수 있었다. 루이비통 가방도 아르바이트
2주일 분 수입에 불과했다.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버블경제가 열도를 달굴 때 황태자 부부가 탄생했다. 국민들의 엄청난 관심과 박수 속에서
이뤄진, 일본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황태자 결혼에 얽힌 기억들이다.
그러나 그 같은 아름다운 추억은 경제가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사라져간다. 더불어 마사코가 왕자를 못 낳으면서 황실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결혼 8년 만인 2001년 12월 아이코가 탄생하지만, 잠시 주목받을 뿐 금방 잊혀진다. 아들이 아니라, 천황 자격이 없는 딸이기 때문이다. 마사코가 40대에 접어들면서 출산 가능성도 멀어져간다. 마사코가 우울증에 빠지면서 외국 방문이나 공식행사도 빠진다. 아들을 못 낳은 상황에서 국민들은 무관심을 넘어서, 비난의 화살을 황실로 보낸다. 화장실 변기가 막혀도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시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도 똑같다. 10년, 20년 경제 동면기에 들어서면 황실을 보는 시선은 한층 차갑게 변해간다. 잃어버린 20년은 경제만이 아니라, 황실의 침체기 나아가 수난기에 해당된다.
2015년 초여름의 가코 공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1993년 황태자의 결혼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황실을 사랑하고 응원하던 모습이 ‘가코사마’를 통해 재연되고 있다. 21세 미인 공주를 통해 좋았던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더불어 황실의 권위와 영광도 다시 살아나고 있다. 좋은 일본의 부활을 알리는 증거다.
둘째는 차기, 나아가 차차기 천황으로 나아가기 위한 10년 대계, 100년 대계로서의 가코 공주다. 먼저 차기 천황을 보자. 현재 천황 아키히토는 1933년생이다. 82세다. 당장 1주일 뒤에 최악의 상황에 처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따라서, 천황의 감기나 작은 병색이라도 항상 톱기사로 처리된다. 병에 걸릴 경우, 병원에서 완치될 때까지 신문·방송이 따라다닌다. 후임 준비를 해야 할 시기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지 않다. 마사코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높아지면서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천황이 세상을 떠난다고 할 때
나루히토가 갑자기 나타나 후임이 된다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와 닿을 수 있다. 곧 닥칠 큰 변화에 앞서, 황실에 대한 친근감을 조장할 필요가
있다. 아이돌 가코 공주의 임무는 바로 황실을 대표하는 치어리더 같은 것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차기 천황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을 가코사마의
인기와 미소로 해결해보자는 의도다.
가코 공주가 차차기 천황을 위한 ‘여름 불꽃’이 되는 이유는 황태자의 무남독녀 아이코를 둘러싼 잡음과 연결될 수 있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황태자비 마사코의 딸 아이코는 국민들로부터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됐다. 황태자의 장녀지만 무관심의 대상이다. 딸이기에 천황이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모나 행동이란 측면에서 국민적 인기를 끄는데 실패한다. 필자만의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아이코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어머니인 마사코의 우울증을 답습한 듯한 모습이 아이코의 이미지다. 마사코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차기 천황인 나루히토 황태자는 물론, 아이코에게 이어진다.
천황을 이해하는 현실로서의 황거
가코 공주는 이 같은 환경
아래서 황실 전체를 친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황태자의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나루히토를 잇는 차차기 천황은 가코 공주의 남동생이 된다.
2006년도 출생 히사히토다. 황태자의 딸로 다섯 살 위인 아이코에 대응되는 인물이다. 황실의 최근 상황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황태자의 딸
아이코에 대한 뉴스가 사라지고, 히사히토 관련 소식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키히토가 세상을 떠날 경우 곧바로 나루히토가
천황에 오를 것이고 곧이어 히사히토도 각광을 받게 된다. 결국, 가코 공주는 차기 천황, 그리고 차차기 천황인 동생을 위해 일하는 황실의 꽃인
셈이다. 일본 미디어의 흐름을 안다면 가코 공주가 갑자기 나타난 아이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천황이나 황실은 터부 중의 터부에 속한다. 천황에 대한 예가 잘못되거나, 뭔가 폐가 되는 행위를 할 경우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더 모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잘 모르지만, 멀리 있기에 한층 더 가치를 높게 둘 수 있다. 천황이 그런 존재다. 머리를 그릴 수 있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천황과 그 가족에게 투영한다. 사실 천황가는 스캔들이 없는 곳이다. ‘일본 최고의 갑(甲)으로서 권력을 남용했다’, ‘왕자들이 여성 문제로 소동을 피웠다’, ‘공주가 비싼 물건을 흥청망청 구입했다’와 같은 얘기가 천황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로열패밀리인 동시에 일본 최고의 모범 가족으로 비쳐진다.
일본인이 존경하는 천황은 바로 그 같은 인간적인 완벽함에서 비롯된다. 만약 자신보다도 더 못난 천황이 나타날 경우 권위와 존경은 사라진다. 황태자비 마사코에 대한 불만은 바로 그 같은 상황 아래서 설명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나도 꾹 참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아들을 못 낳고 궁내성의 규율을 지키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생기고 우울증까지 갔다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식행사에 불참하고 황태자 혼자 외국 순방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한두 번은 그럴 수 있겠지만, 마냥 그런 자세로 황태자비 역할을 한다는 것은 천황가 나아가 일본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일본인의 의식이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천황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교육 현장 중 하나로 황거(皇居)를 빼놓을 수 없다. 황거란 천황이 사는 집, 다시 말해 천황과 그 가족을 위한 궁궐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는 집과 주변 환경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과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방안의 가구나, 정원 내 화초의 종류나 배치만 봐도 그 사람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황거를 살펴볼 경우 천황의 의미나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코 공주가 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거기에 대한 답도 가코 공주를 키워준 황거를 통해 알 수 있을 듯하다.
점령군으로 에도성을 몰수한 메이지 천황
황거는 일본 도쿄에서도
최중심에 해당된다. 일본 열도 전체의 핵(核)이라 보면 된다. 황거 중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된 곳은 히가시교엔(東御苑)이다. 황거의 동쪽에 자리
잡은 정원이다.
히가시교엔의 면적은 전체 황거의 60% 정도에 달한다. 나머지 40%는 천황과 가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영빈관과 집무실, 궁내성을 포함한다. 접근금지 지역이다. 히가시교엔은 평일에 한해 부분적으로 개방된다. 정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을 일상사와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갖가지 역사적 조형물과 설비도 들어서 있다.
황거는 원래 에도(江戸)시대를 이끈 도쿠가와 쇼군(徳川 将軍)의 거주지다. 원래, 황거가 아니라, 에도성이라 불렸다. 에도는 도쿄의 옛말이다.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4년간 이뤄진 무신정권의 수도다. 에도시대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교토(京都)에 사는 천황을 방호벽으로 활용했다. 자신의 권위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지만, 사실상 현실정치와 무관한 무력한 천황이다.
메이지(明治) 유신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천황파가 주도한 개혁이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교토를 떠나 도쿄를 새로운 시대의 수도로 잡는다. 도쿠가와 막부의 집과 재산이 점령군인 천황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천황의 거주지로서의 황거의 역사는 1868년 이후 지금까지, 전부 147년에 불과하다. 황거라고 하지만, 근본을 보자면 도쿠가와 막부의 흔적이 서린 곳이라 볼 수 있다.
히가시교엔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다케바시(竹橋)역에 내려 황거로 향했다. 황거는 인공호수를 통해 일반세상과 나눠져 있다. 40m 정도 폭의 인공호수가 황거 전체를 에워싸는 식으로 둥글게 이어져 있다. 버드나무와 백조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호수지만, 원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성(水城)’에 해당된다. 한·중·일 3국의 수도에 들어선 성벽을 보면 각국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중국 자금성(紫禁城)의 경우 성벽이 얼마나 높은지 안쪽의 모습이 전혀 안 보인다. 입구의 천안문은 30m 높이는 됨직하다. 길게 이어진 담 높이도 5m 정도가 될 듯하다. 높이와 크기로서 적을 막아내는 것이 중국식 성의 특징이다.
한국은 어떨까? 중국과 비슷한
형식이다. 높이나 크기를 통해 적을 막아내는 식이다. 경복궁, 경희궁 앞의 성벽 크기나 담의 높이를 보면, 안이 전혀 안 보인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보다 조금 낮은 수준에서 만들어져 있다. 중국 자금성을 공략할 수준의 무력이라면 조선의 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반대로 물론,
조선의 성벽을 못 넘을 경우 자금성 공격도 어렵다.
황거의 성벽은 적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인공호수를 지지하는 축대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다. 인공호수의 수심은 5m 정도라고 한다. 겉에 드러난 축대의 높이도 5m 정도다. 중국이나 한국처럼 높은 성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적을 공격하는 구조가 아니다. 인공호수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나 화공(火攻)을 이용하는 구조다. 성벽은 낮지만, 인공호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인공호수의 폭 40m가 성벽으로 활용된다고 볼 수 있다.
에도성이 인공호수를 이용해 건립된 것과 관련해 갖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는 총이다. 도쿠가와가 전국을 통일할 당시 일본 전역은 포르투칼산 철포(鐵砲)로 넘쳐나고 있었다.
17세기 에도성에 세워진 고려문의 유래
전국 통일 후 총을
금지시키면서 사라져가지만, 도쿠가와는 이미 총의 위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국처럼 높은 성을 쌓는다 해도 바로 밑에 다가와 철포로 공격할 경우
수비가 취약해진다. 인공호수는 그 같은 총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최적의 방안이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정확히 사격하기도 어렵고, 반대로 숲 속에
가려진 수비진들이 뻥 뚫린 벌판에 선적들을 공격하기 쉬워진다. 에도성 내부는 나무로 가려진 데 비해, 인공호수 바깥쪽은 숨을 곳 하나 없는
들판으로 만들어졌다.
히가시교엔의 출입구는 세 개의 문으로 나눠져 있다. 오테문(大手門), 히라카와문(平川門), 키타하네바시문(北桔橋門)이다. 방문한 곳은 다케바시역에서 가장 가까운 히라카와문이다. 황거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에도시대 당시 성안의 죄인이나 죽은 사람을 바깥으로 실어 나를 때 사용됐다. 인공호수 위에 걸쳐진 히라카와바시(平川橋)를 건너 황거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뜻밖의 문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히라카와 고려문(高麗門)이다. 정식문인 하라카와문 바로 앞에 위치한, 비교적 간단하게 세워진 작은 문이다. 고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흥미롭다. 고려는 1392년 망한 왕조다. 황거의 전신인 에도성이 세워진 것은 17세기다. 어떻게 고려라는 이름이 일본에 등장했을까?
먼저 고려문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일본 건축사에서 고려문은 성문 구조의 한 형식으로 통한다. 간단히 말해 문을 90도로 열었을 때 좌우 문 위에도 지붕을 갖는 구조가 고려문이다. 보통 성문의 경우, 좌우 문을 활짝 열 때를 기준으로 위에 큰 지붕을 하나로 덮는 식으로 이뤄진다. 고려문은 하나로 크게 덮는 큰 지붕을 대신해 중간 부분을 가능하면 줄이고,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좌우 문 위의 지붕만을 별도로 크게 만드는 식의 구조다. 보다 간단하고 효율적이다. 대문 위 중간 지붕을 줄이는 과정에서 안쪽에서 바깥쪽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질 수 있다. 아예 큰 지붕 하나로 크게 덮인 히라카와문이 위엄과 권위로서의 대문(大門)이라고 할 때, 히라카와 고려문은 효율과 간단으로서의 소문(小門)에 해당된다.
어떻게 고려문이 에도성에
전해졌는지, 고려가 한반도 내 고려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보면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 당시
평양성까지 탈환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통해 도입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북쪽으로 올라갔던 왜군들이 당시 성문의 모습을 보고 본뜬
것이다. 고려문은 대마도(對馬島)와 나고야(名古屋)에서도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고려문에 대한 한국 내 연구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고려문
양식이 언제 어떤 식으로 구축돼 활용됐는지, 국내의 성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학문적, 체계적 연구가 드물다. 일본이 한국 성문 제작법을
배워갔다는 자랑에 앞서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아쉽다.
성문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바이린자카(梅林坂)란 작은 고개가 눈에 띈다. 이름 그대로 매화나무로 가득 찬 곳이다. 전부 50개 정도 된다고 한다. 일본의 성은 적이 안에 들어온다 해도 다시 한 번 더 저항할 수 있는 요새로 구축돼 있다. 적이 성 안에 들어오는 즉시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안으로 밀려온다 하더라도, 성 안에 구축된 갖가지 방어시설을 이용해 끈질기게 저항한다.
황거를 보면 내부 방어전선이 전부 5개 정도는 됨직하다. 바이린자카는 경사 20도 정도의 고개로, 바로 양쪽에는 돌로 쌓은 10m 높이의 성벽이 또 구축돼 있다. 성안의 성벽으로 바이린자카를 뚫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더 싸워야 한다. 내부의 성벽 외에도, 황거 안에 들어선 두 개의 인공호수도 내부의 적을 격퇴할 수 있는 좋은 요새다. 성안에 방어전선이 많다는 것은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는 의미다. 자살공격으로 생을 마감하는 옥쇄(玉碎)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문화다.
일본 갑의 최선봉 치요타쿠 1번지
매화 고개를 지나
5분 정도 걸어가자 천수대(天守台)가 눈에 들어온다. 형태만 남아있는 언덕 위의 유적으로 원래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수각(天守閣)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1638년 건립 당시 6층 건물로, 높이 58m에 달하는 높은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1657년 불이 나면서 전소된 뒤 터만 남게
됐다. 위로 올라가 보니까 황거 주변을 에워싼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파워는 전부 황거를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정부·기업·언론사·문화 심지어 글로벌 기업조차 황거를 둘러싸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 황거의 주소는 치요타쿠 1번지(千代田区千代田1番1号)다. 일본인으로 도쿄 치요타쿠로 시작되는 주소를 가진 곳에서 일한다면 갑의 최선봉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비교할 때 황거는 청와대, 조선의 경복궁·경희궁에 해당된다. 청와대와 조선 궁궐이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형 건물인데 비해, 황거는 사방팔방이 탁 트인 들판 위에 들어서 있다. 한국 권력의 중심을 풍수지리에 의거해 설명하지만, 일본 황거에 비교해보면 뭔가 닫혀진 느낌이 든다.
마츠노
오오후로카(松の大廊下)는 황거를 찾는 일본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곳이다. 일본 국민성을 압축한 실화, 추신쿠라(忠臣蔵) 47인 사무라이 스토리의
원점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1701년 3월 14일 오전 10시 실제 발생한 사건이 추신쿠라의 출발점이다. 당시 아코우(赤穂) 지역의 수장
아사노(浅野)가 에도 관료인 기라(吉良)를 살해하려다 실패한다. 오오후로카는 바로 당시 살해 현장이다. 기라가 뇌물을 요구하면서 아사노를 모욕한
데 대한 복수다. 다타미(畳)로 길게 이어진 복도에서 벌어진 참극이다.
이후 아사노는 궁중에서 칼을 휘두른 죄로 할복한다. 아사노의 부하들은 원인 제공을 한 기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2년을 기다린다. 눈이 오던 어느 날 기습공격으로 기라를 공격해 살해한다. 주군의 원수를 갚은 뒤 47인 사무라이 모두가 할복한다. 추신쿠라는 연말이 되면 가부키(歌舞伎), 드라마, 영화로 반복해 만들어진다. 한국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스토리다.
황거의 남쪽에 해당되는 곳에는 후지미야구라(富士見櫓)라는 관측소가 들어서 있다. 후지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해당된다. 관측소를 지나 동쪽으로 걸어가자 왼쪽으로 햐쿠닌반쇼(百人番所)라는 이름의 1층 목조 건물이 나타난다. 50m에 달하는 긴 건물이다. 햐큐닌반쇼는 문자 그대로 100 명의 경비병이 지키던 곳이다. 청와대 경비실에 해당된다. 하루 4교대로 24시간 주변을 지킨, 철포로 무장된 사무라이 경비대다. 햐쿠닌반쇼의 바로 뒤쪽은 천황과 가족의 거처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천황의 거처는 위치상으로 남동쪽에 해당된다.
새로운 천황 탄생과 한일 민족주의의 충돌
경비실을 지나 황거 중간으로
들어가면 니노마루(二の丸) 정원이 나타난다. 일본 고유의 정원으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곳이다. 차도를 즐길 수 있는 다실(諏訪の茶屋)도
만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일본 열도 전역에서 보내온, 지역을 대표하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부분은 각양각색의 소나무다. 일본에 소나무
종류가 많은 이유는 개량종으로 개선해나갔기 때문이다. 빨리 자라고 병충해에도 강하며, 굵고 높게 자라는 것이 일본산 소나무의 특징 중
하나다.
자연적인 미는 누구나 강조하는 예술적 이데올로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람이나 나라에 따라 자연적인 미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한국에서 말하는 자연적 미는 인공을 부정하는, 문자 그대로 ‘무위(無爲)의 세계’로 해석된다. 일본에서 말하는 자연의 미는 인간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면서, 자연의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꿔주는 작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나무 하나를 보더라도 잎을 아주 세밀하게 자르거나 솎아주고, 가지도 수시로 치거나 다듬는다. 필자가 들른 날에도 황거 곳곳에서 자르고 솎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본사이(盆栽) 즉, 분재는 일본인이 말하는 자연미의 상징이다. 매일 인간의 손으로 다듬고 또 다듬는다. 니노마루(二の丸) 정원은 일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의 손을 대는 자연이 어떤 것인가를 증명해주는 본보기다. 핵심은 인간의 손을 대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다. 인공이 없는 듯하지만, 인간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비자연적인 자연’이 일본 정원의 특징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천황이 탄생할 것이다. 현재의 일본 분위기로 보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결속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코 공주의 얘기는 곧 한국으로 밀어닥칠 도쿄발 ‘울트라 우향우’의 전조처럼 느껴진다. 2015년 한일 관계를 보면, 새로운 천황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양국 간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 듯하다. 양국간의 민족주의 경쟁과 충돌은 그중 하나다. 천황이 아니라 일왕이라 부르면서 반일에 열중한다고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7인 사무라이를 하나로 결집해 생사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일본이고, 천황은 그러한 나라의 정점에 해당된다. 곧 닥칠 새로운 천황 탄생은 결코 강 건너 불은 아닐 듯하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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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아키히토(明仁)는 2남1녀를 두었다. 직계 두 명의 아들을 통해 세 명의 손녀와 한 명의 손자가 있다. 차기 천황인 황태자 나루히토(徳仁)와 황태자비 마사코(雅子)의 딸인 아이코(愛子) 공주. 둘째 아들 후미히토(文仁)의 자식인 마코(眞子) 공주, 가코 공주, 히사히토(悠仁) 왕자다. 이들 4명의 손자 ·손녀 가운데 유독 미디어의 각광을 받는 인물이 가코 공주다.
필리핀 대통령을 위한 국빈 만찬은 가코 공주가 황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선 대표적인 행사다. 6월 3일 도쿄에서 열린 베그니노 아키노 대통령과의 만찬 때다. 이날 행사에는 천황 부부를 비롯해 황실 가족 모두가 모였다. 아키노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한 행사지만, 주인공은 가코 공주다. 병중이던 황태자비 마사코가 무려 1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공식만찬이지만, 21세 가코 공주가 하이라이트다. 엷은 분홍색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가코 공주가 샴페인 잔으로 건배에 나서는 모습은 다음 날 텔레비전 뉴스에 반복해서 방영됐다. 샴페인을 입에 댄 가코 공주의 수줍어하는 모습은 청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다.
아이돌 가코 공주의 출현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 주목했다. 첫째 ‘좋은 일본(Good Japan)’의 도래다. 황실 구성원이 국민적 관심사가 된다는 것은 일본이 승천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국민들의 황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 일본의 미래도 밝게 느껴진다.
일본의 부활과 황실 인기의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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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같은 아름다운 추억은 경제가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사라져간다. 더불어 마사코가 왕자를 못 낳으면서 황실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결혼 8년 만인 2001년 12월 아이코가 탄생하지만, 잠시 주목받을 뿐 금방 잊혀진다. 아들이 아니라, 천황 자격이 없는 딸이기 때문이다. 마사코가 40대에 접어들면서 출산 가능성도 멀어져간다. 마사코가 우울증에 빠지면서 외국 방문이나 공식행사도 빠진다. 아들을 못 낳은 상황에서 국민들은 무관심을 넘어서, 비난의 화살을 황실로 보낸다. 화장실 변기가 막혀도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시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도 똑같다. 10년, 20년 경제 동면기에 들어서면 황실을 보는 시선은 한층 차갑게 변해간다. 잃어버린 20년은 경제만이 아니라, 황실의 침체기 나아가 수난기에 해당된다.
2015년 초여름의 가코 공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1993년 황태자의 결혼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황실을 사랑하고 응원하던 모습이 ‘가코사마’를 통해 재연되고 있다. 21세 미인 공주를 통해 좋았던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더불어 황실의 권위와 영광도 다시 살아나고 있다. 좋은 일본의 부활을 알리는 증거다.
둘째는 차기, 나아가 차차기 천황으로 나아가기 위한 10년 대계, 100년 대계로서의 가코 공주다. 먼저 차기 천황을 보자. 현재 천황 아키히토는 1933년생이다. 82세다. 당장 1주일 뒤에 최악의 상황에 처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따라서, 천황의 감기나 작은 병색이라도 항상 톱기사로 처리된다. 병에 걸릴 경우, 병원에서 완치될 때까지 신문·방송이 따라다닌다. 후임 준비를 해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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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코 공주가 차차기 천황을 위한 ‘여름 불꽃’이 되는 이유는 황태자의 무남독녀 아이코를 둘러싼 잡음과 연결될 수 있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황태자비 마사코의 딸 아이코는 국민들로부터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됐다. 황태자의 장녀지만 무관심의 대상이다. 딸이기에 천황이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모나 행동이란 측면에서 국민적 인기를 끄는데 실패한다. 필자만의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아이코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어머니인 마사코의 우울증을 답습한 듯한 모습이 아이코의 이미지다. 마사코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차기 천황인 나루히토 황태자는 물론, 아이코에게 이어진다.
천황을 이해하는 현실로서의 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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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천황이나 황실은 터부 중의 터부에 속한다. 천황에 대한 예가 잘못되거나, 뭔가 폐가 되는 행위를 할 경우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더 모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잘 모르지만, 멀리 있기에 한층 더 가치를 높게 둘 수 있다. 천황이 그런 존재다. 머리를 그릴 수 있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천황과 그 가족에게 투영한다. 사실 천황가는 스캔들이 없는 곳이다. ‘일본 최고의 갑(甲)으로서 권력을 남용했다’, ‘왕자들이 여성 문제로 소동을 피웠다’, ‘공주가 비싼 물건을 흥청망청 구입했다’와 같은 얘기가 천황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로열패밀리인 동시에 일본 최고의 모범 가족으로 비쳐진다.
일본인이 존경하는 천황은 바로 그 같은 인간적인 완벽함에서 비롯된다. 만약 자신보다도 더 못난 천황이 나타날 경우 권위와 존경은 사라진다. 황태자비 마사코에 대한 불만은 바로 그 같은 상황 아래서 설명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나도 꾹 참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아들을 못 낳고 궁내성의 규율을 지키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생기고 우울증까지 갔다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식행사에 불참하고 황태자 혼자 외국 순방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한두 번은 그럴 수 있겠지만, 마냥 그런 자세로 황태자비 역할을 한다는 것은 천황가 나아가 일본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일본인의 의식이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천황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교육 현장 중 하나로 황거(皇居)를 빼놓을 수 없다. 황거란 천황이 사는 집, 다시 말해 천황과 그 가족을 위한 궁궐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는 집과 주변 환경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과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방안의 가구나, 정원 내 화초의 종류나 배치만 봐도 그 사람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황거를 살펴볼 경우 천황의 의미나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코 공주가 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거기에 대한 답도 가코 공주를 키워준 황거를 통해 알 수 있을 듯하다.
점령군으로 에도성을 몰수한 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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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교엔의 면적은 전체 황거의 60% 정도에 달한다. 나머지 40%는 천황과 가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영빈관과 집무실, 궁내성을 포함한다. 접근금지 지역이다. 히가시교엔은 평일에 한해 부분적으로 개방된다. 정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을 일상사와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갖가지 역사적 조형물과 설비도 들어서 있다.
황거는 원래 에도(江戸)시대를 이끈 도쿠가와 쇼군(徳川 将軍)의 거주지다. 원래, 황거가 아니라, 에도성이라 불렸다. 에도는 도쿄의 옛말이다.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4년간 이뤄진 무신정권의 수도다. 에도시대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교토(京都)에 사는 천황을 방호벽으로 활용했다. 자신의 권위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지만, 사실상 현실정치와 무관한 무력한 천황이다.
메이지(明治) 유신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천황파가 주도한 개혁이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교토를 떠나 도쿄를 새로운 시대의 수도로 잡는다. 도쿠가와 막부의 집과 재산이 점령군인 천황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천황의 거주지로서의 황거의 역사는 1868년 이후 지금까지, 전부 147년에 불과하다. 황거라고 하지만, 근본을 보자면 도쿠가와 막부의 흔적이 서린 곳이라 볼 수 있다.
히가시교엔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다케바시(竹橋)역에 내려 황거로 향했다. 황거는 인공호수를 통해 일반세상과 나눠져 있다. 40m 정도 폭의 인공호수가 황거 전체를 에워싸는 식으로 둥글게 이어져 있다. 버드나무와 백조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호수지만, 원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성(水城)’에 해당된다. 한·중·일 3국의 수도에 들어선 성벽을 보면 각국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중국 자금성(紫禁城)의 경우 성벽이 얼마나 높은지 안쪽의 모습이 전혀 안 보인다. 입구의 천안문은 30m 높이는 됨직하다. 길게 이어진 담 높이도 5m 정도가 될 듯하다. 높이와 크기로서 적을 막아내는 것이 중국식 성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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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거의 성벽은 적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인공호수를 지지하는 축대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다. 인공호수의 수심은 5m 정도라고 한다. 겉에 드러난 축대의 높이도 5m 정도다. 중국이나 한국처럼 높은 성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적을 공격하는 구조가 아니다. 인공호수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나 화공(火攻)을 이용하는 구조다. 성벽은 낮지만, 인공호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인공호수의 폭 40m가 성벽으로 활용된다고 볼 수 있다.
에도성이 인공호수를 이용해 건립된 것과 관련해 갖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는 총이다. 도쿠가와가 전국을 통일할 당시 일본 전역은 포르투칼산 철포(鐵砲)로 넘쳐나고 있었다.
17세기 에도성에 세워진 고려문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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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교엔의 출입구는 세 개의 문으로 나눠져 있다. 오테문(大手門), 히라카와문(平川門), 키타하네바시문(北桔橋門)이다. 방문한 곳은 다케바시역에서 가장 가까운 히라카와문이다. 황거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에도시대 당시 성안의 죄인이나 죽은 사람을 바깥으로 실어 나를 때 사용됐다. 인공호수 위에 걸쳐진 히라카와바시(平川橋)를 건너 황거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뜻밖의 문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히라카와 고려문(高麗門)이다. 정식문인 하라카와문 바로 앞에 위치한, 비교적 간단하게 세워진 작은 문이다. 고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흥미롭다. 고려는 1392년 망한 왕조다. 황거의 전신인 에도성이 세워진 것은 17세기다. 어떻게 고려라는 이름이 일본에 등장했을까?
먼저 고려문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일본 건축사에서 고려문은 성문 구조의 한 형식으로 통한다. 간단히 말해 문을 90도로 열었을 때 좌우 문 위에도 지붕을 갖는 구조가 고려문이다. 보통 성문의 경우, 좌우 문을 활짝 열 때를 기준으로 위에 큰 지붕을 하나로 덮는 식으로 이뤄진다. 고려문은 하나로 크게 덮는 큰 지붕을 대신해 중간 부분을 가능하면 줄이고,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좌우 문 위의 지붕만을 별도로 크게 만드는 식의 구조다. 보다 간단하고 효율적이다. 대문 위 중간 지붕을 줄이는 과정에서 안쪽에서 바깥쪽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질 수 있다. 아예 큰 지붕 하나로 크게 덮인 히라카와문이 위엄과 권위로서의 대문(大門)이라고 할 때, 히라카와 고려문은 효율과 간단으로서의 소문(小門)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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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바이린자카(梅林坂)란 작은 고개가 눈에 띈다. 이름 그대로 매화나무로 가득 찬 곳이다. 전부 50개 정도 된다고 한다. 일본의 성은 적이 안에 들어온다 해도 다시 한 번 더 저항할 수 있는 요새로 구축돼 있다. 적이 성 안에 들어오는 즉시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안으로 밀려온다 하더라도, 성 안에 구축된 갖가지 방어시설을 이용해 끈질기게 저항한다.
황거를 보면 내부 방어전선이 전부 5개 정도는 됨직하다. 바이린자카는 경사 20도 정도의 고개로, 바로 양쪽에는 돌로 쌓은 10m 높이의 성벽이 또 구축돼 있다. 성안의 성벽으로 바이린자카를 뚫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더 싸워야 한다. 내부의 성벽 외에도, 황거 안에 들어선 두 개의 인공호수도 내부의 적을 격퇴할 수 있는 좋은 요새다. 성안에 방어전선이 많다는 것은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는 의미다. 자살공격으로 생을 마감하는 옥쇄(玉碎)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문화다.
일본 갑의 최선봉 치요타쿠 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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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파워는 전부 황거를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정부·기업·언론사·문화 심지어 글로벌 기업조차 황거를 둘러싸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 황거의 주소는 치요타쿠 1번지(千代田区千代田1番1号)다. 일본인으로 도쿄 치요타쿠로 시작되는 주소를 가진 곳에서 일한다면 갑의 최선봉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비교할 때 황거는 청와대, 조선의 경복궁·경희궁에 해당된다. 청와대와 조선 궁궐이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형 건물인데 비해, 황거는 사방팔방이 탁 트인 들판 위에 들어서 있다. 한국 권력의 중심을 풍수지리에 의거해 설명하지만, 일본 황거에 비교해보면 뭔가 닫혀진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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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사노는 궁중에서 칼을 휘두른 죄로 할복한다. 아사노의 부하들은 원인 제공을 한 기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2년을 기다린다. 눈이 오던 어느 날 기습공격으로 기라를 공격해 살해한다. 주군의 원수를 갚은 뒤 47인 사무라이 모두가 할복한다. 추신쿠라는 연말이 되면 가부키(歌舞伎), 드라마, 영화로 반복해 만들어진다. 한국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스토리다.
황거의 남쪽에 해당되는 곳에는 후지미야구라(富士見櫓)라는 관측소가 들어서 있다. 후지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해당된다. 관측소를 지나 동쪽으로 걸어가자 왼쪽으로 햐쿠닌반쇼(百人番所)라는 이름의 1층 목조 건물이 나타난다. 50m에 달하는 긴 건물이다. 햐큐닌반쇼는 문자 그대로 100 명의 경비병이 지키던 곳이다. 청와대 경비실에 해당된다. 하루 4교대로 24시간 주변을 지킨, 철포로 무장된 사무라이 경비대다. 햐쿠닌반쇼의 바로 뒤쪽은 천황과 가족의 거처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천황의 거처는 위치상으로 남동쪽에 해당된다.
새로운 천황 탄생과 한일 민족주의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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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인 미는 누구나 강조하는 예술적 이데올로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람이나 나라에 따라 자연적인 미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한국에서 말하는 자연적 미는 인공을 부정하는, 문자 그대로 ‘무위(無爲)의 세계’로 해석된다. 일본에서 말하는 자연의 미는 인간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면서, 자연의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꿔주는 작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나무 하나를 보더라도 잎을 아주 세밀하게 자르거나 솎아주고, 가지도 수시로 치거나 다듬는다. 필자가 들른 날에도 황거 곳곳에서 자르고 솎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본사이(盆栽) 즉, 분재는 일본인이 말하는 자연미의 상징이다. 매일 인간의 손으로 다듬고 또 다듬는다. 니노마루(二の丸) 정원은 일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의 손을 대는 자연이 어떤 것인가를 증명해주는 본보기다. 핵심은 인간의 손을 대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다. 인공이 없는 듯하지만, 인간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비자연적인 자연’이 일본 정원의 특징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천황이 탄생할 것이다. 현재의 일본 분위기로 보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결속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코 공주의 얘기는 곧 한국으로 밀어닥칠 도쿄발 ‘울트라 우향우’의 전조처럼 느껴진다. 2015년 한일 관계를 보면, 새로운 천황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양국 간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 듯하다. 양국간의 민족주의 경쟁과 충돌은 그중 하나다. 천황이 아니라 일왕이라 부르면서 반일에 열중한다고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7인 사무라이를 하나로 결집해 생사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일본이고, 천황은 그러한 나라의 정점에 해당된다. 곧 닥칠 새로운 천황 탄생은 결코 강 건너 불은 아닐 듯하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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