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종파투쟁은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을 축출하려고
일으킨 '8월종파사건'을 계기로 전개되었습니다.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양일간 열린 당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가 있었는데요. 여기서 일부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소련식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했죠. 이들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내외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시도했던 겁니다. 당시 김일성은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착수하기 위해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조건도 십분
활용하고자 했겠죠. 그러나 김일성세력의 발빠른 대응과 김일성이 급히 귀국하면서 소련파와 연안파는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말았답니다. 종파사건에
가담한 전원이 출당되거나 철직 처분을 당했습니다.
수습을 위해서 소련의 미코얀과 중국의 팽덕회가 북한을 방북했구요. 9월
전원회의에서 전원에게 내려진 출당, 철직 처분이 취소되는데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죠. 다음해에 들어 최창익, 박창옥, 양계, 강성민,
김민산, 장평산 등 소련파 연안파의 거두들이 국가반란음모죄로 대거 숙청을 당했구요, 다음해인 1958년 김두봉과 한무가 숙청되었습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흔히 '반종파투쟁'이라고 합니다
'반종파투쟁'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기초적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기존 연구들은 대개 김일성 개인독재와 반대세력간의 권력투쟁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데요, 최근 들어 이 사건이 단순히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점차 대두되고 있데요.
당시 북한지도부내에는 전후 복구 문제와 사회주의로의 이행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는데요. 김일성세력은 중공업우선의 경공업 농업의 동시적 발전을 주장했고, 반대파들은 소비재 부문의 우선적 발전을
주장했답니다. 이와 함께 반대파들은 앞서 얘기했듯이 김일성 중심의 당 조직지도체계에도 반대하였고, 이론적 충돌도 있었던 것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얽혀서 반종파투쟁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났다는 거죠.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김일성
중심의 수령제 정치체제와 주체노선의 사회로 나아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사건으로 북한내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은 한국전쟁때 남한에서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군대지휘권을 갖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연안파가 득세를
했는데요. 전후에도 연안파가 중국을 배후로 상당한 영향력을 휘둘렀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 가능한 사실이죠. 소련 역시 북한 정부 수립부터 전후
복구 건설 시기까지 소련국적을 가진 많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기반으로 북한에서 영향력을 증가시키고자 했을 겁니다. 북한을 두고 중국과 소련
둘사이의 경쟁도 있었겠죠. 당시 김일성이 주체노선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국내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북한을
둘러싼 국제적 역학관계를 연구한 논문이나,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아직은 없다는 점이겠지요.
마지막으로 1950년대 북한의 주요한 정치세력들을 구분해 봤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여기 적힌 주요 인물에 대해서도
소개하기로 하죠.
□ 항일빨치산파(갑산파) : 김일성 지지 세력. 최용건, 김일, 박금철, 박정애 등이 있음 ■ 소련파 :
대개 소련계 한인들로 소련시민권을 가짐. 박창옥, 박영빈, 박의완 김재욱, 김승화 등이 있음 □ 연안파 : 조선독립동맹 계열의
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이 있고, 조선의용군의 무정, 김창만, 박일우 등이 있음(무정은 1950년에 숙청됨)
(20세기
근현대사 연구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