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日 역사왜곡의 시작은 日王 단죄 안한 도쿄전범재판"

이강기 2015. 10. 11. 10:13
  • "日 역사왜곡의 시작은 日王 단죄 안한 도쿄戰犯재판"

  • 나지홍 블로그
    국제부 뉴욕특파원
    E-mail : willy@chosun.com
    199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편집부 경제부를 거쳐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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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1.15 03:06

 

['日역사 권위자' 美 허버트 빅스 교수 인터뷰]

"천황에 전쟁책임이 없다면 국민도 책임질 필요 없다" 일본인들 잘못된 인식 가져
과거史 스스로 반성 힘들어… 獨반성도 주변국 관계 때문, 日은 지금껏 美만 신경써와
일본이 반성하게 하려면 국제적 협력으로 압박해야

허버트 빅스 교수 사진

"일본 역사 왜곡은 뿌리가 깊어요. 히로히토(裕仁·1901~1989) 일왕의 전쟁 범죄를 단죄하지 않은 도쿄전범재판이 그 시작입니다."

미국 내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인 허버트 빅스(76·사진) 빙엄튼 뉴욕주립대 명예교수는 본지 이메일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주도하는 일본 역사 왜곡의 근원을 1946년 5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진행된 도쿄전범재판에서 찾았다. 미국이 주도한 도쿄전범재판에선 군부 강경파 수장이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 7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6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에 대해선 "전쟁에 직접 개입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빅스 교수는 "히로히토 일왕은 군부 강경파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가 아니라 중일전쟁과 진주만 침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배후 조종자였다"면서 "도쿄전범재판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면 일본 국민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일본이 작년에 히로히토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이 편찬됐을 때 한 일본 언론사로부터 코멘트를 부탁받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실록이 히로히토 일왕의 잘못에 대한 기록은 모두 삭제하고 미화에만 급급했고, 또 해당 언론사가 '비판적인 코멘트는 실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실록은 히로히토가 비정치적이고 형식적인 입헌군주에 불과했다는 잘못된 전제에 근거해있다."

―히로히토도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실록에는 히로히토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외국 정상들과의 대화록이 반영되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 역사학계가 축적해놓은 방대한 자료와 모순된다. 히로히토는 적극적인 행동파 군주였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이끌었고, 전쟁 열병에 사로잡혀 도조 히데키를 1941년 총리로 임명하면서 전쟁내각에 직접 참여했다. 진주만과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한 결정도 사실상 히로히토가 내렸다. 그는 패전이 임박했을 때도 항복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히로히토가 더 빨리 항복했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피할 수 있었다."

“전쟁 배후조종한 히로히토, 美 ‘증거 없다’ 기소 안 해”- 히로히토(왼쪽 사진 오른쪽) 일왕이 일본 패전 한 달여 후인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맥아더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과 함께한 모습. 오른쪽 사진은 1948년 도쿄에서 열린 전범 재판 모습.
“전쟁 배후조종한 히로히토, 美 ‘증거 없다’ 기소 안 해”- 히로히토(왼쪽 사진 오른쪽) 일왕이 일본 패전 한 달여 후인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맥아더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과 함께한 모습. 오른쪽 사진은 1948년 도쿄에서 열린 전범 재판 모습.

―도쿄전범재판에서 미국이 히로히토 일왕을 기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연합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이 히로히토를 적극 보호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을 미국 통제하에 두면서 조속히 안정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국가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면죄부를 줬고, 이때부터 일본의 역사 왜곡이 시작됐다. 일본 우익은 일왕에 대한 비판을 테러로 막아왔다. 1960년 일왕을 비판한 주간지 중앙공론(中央公論)의 발행인 집에 극우 세력이 침입해 가정부를 죽였다. 1957년엔 2차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군 출신이 전쟁의 참상에 대해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우익이 들고일어나 인쇄를 못하도록 출판사를 협박했다."

―일본은 나치 범죄를 끝까지 추적해 처벌하는 독일과 대조적이다.

"과거사를 자발적으로 반성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양민 대량 학살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독일은 특수한 사례다. 국경을 맞댄 프랑스 등 주변국이나 나치 범죄를 적극 비판한 동독과의 관계 때문에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독일 정치인들은 나치에 대한 비판이 유럽에서 독일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하지만 일본은 전후 미국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주변국 관계에 신경 쓸 필요가 별로 없었다."

―아베 총리와 일본 우파는 위안부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든 위안부 이슈가 일본 극우 정치인들에겐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재무장에 나서면 한국·중국 등 주변국이 가장 먼저 떠올릴 피해가 위안부 문제다. 하지만 일본 극우 세력은 지금 일본 바깥 세계에서 여성 인권이 얼마나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면 할수록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이미지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우경화 비판에도 아베의 연립여당이 지난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자민당은 직전보다 4석을 잃었다. 유신회 등 극우 정당들이 참패한 데서 보듯 일본 우익의 승리로 보기는 어렵다."

―한·일, 중·일 관계가 악화일로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일본의 반성이 선결돼야 한다. 일본이 반세기에 걸친 어두운 과거에서 빠져나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변국과의 갈등은 해결될 수 없다. 국제적 협력을 통해 일본이 반성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또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해 일본이 재무장 필요성을 덜 느끼게 해야 한다."

☞허버트 빅스는

빅스 교수는 하버드대 역사학 박사 출신으로 매사추세츠대(보스턴)와 일본 호세이대, 히토쓰바시대를 거쳐 2001년부터 빙엄튼대에 재직하고 있다. 보스턴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 도서관에서 일본군과 중국인 위안부 책을 읽고 일본사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졸업 후 미 해군에 입대해 일본에서 근무했고, 일본 대학에서도 오래 강의한 일본사 전문가다. 그는 2001년 히로히토 일왕이 2차대전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파헤친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이란 책으로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이 책은 2010년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