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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美學, 李舜臣의 경우

이강기 2015. 10. 13. 09:26
남자의 美學, 李舜臣의 경우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2014. 12. 6

 

 

李舜臣(이순신)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해전)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다시피한 朝鮮 水軍에서 겨우 13척의 戰船(전선)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별망군)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명량)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우수사) 金億秋(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총통)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이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군령)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초요기)를 세웠더니 中軍將(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안위)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준사)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無上(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1594년 5월9일 일기: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못 이루는 밤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속이다.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 후 종 順花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살에 그는 心身이 골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땐 李舜臣이 억울한 옥중생활에서 풀려나 죄인의 신분으로 白衣從軍중이었기 때문에 문상만 하고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戰線으로 떠나야 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脫營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을 빌어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에 110여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軍需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한 상황에서 軍紀를 엄정하게 잡아가자니 강력한 體罰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 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武將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능한 王朝,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270여 회.
  

[ 2014-12-06, 14: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