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고 고암 이응노화백 부인 박인경 여사

이강기 2015. 10. 13. 10:15

[인물] 고 고암 이응노화백 부인 박인경 여사

입력 : 1999/04/13 16:4

조선일보

## 고국 찾아 10주기 유작전…"'친북' 누명 벗은 것 같아요" ##.

 

♧ 89년 1월 10일.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고암 이응노(고암 이응로)전시회가 개막되던 날이었다. 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살았던 작가. 77년 백건우·윤정희 납치사건으로 다시 한국과 등을 지고파리서 쓸쓸히 살아온 거장. 그에게 87년 6·29이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조국은 전시회를 마련했다.

그 때 파리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고암 별세-. 전시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전시장에는 곧바로 분향소가 설치됐다. 그리고 10년이흘렀다. 유족인 고암 부인 박인경(74) 여사는 아들 융세씨와 함께 한국땅을 밟았다. 조선일보 미술관과 가나아트센터에서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열리고 있는 '고암 이응노 10주기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이가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조선일보 같은 큰신문사가 그 분의 그림을 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이에게 가해졌던'친북주의자'같은 누명을 이미 벗겨준 셈이죠.".

박 씨는 거장의 부인이기 이전에 그 역시 화가였다. 이번 전시회에공개되고 있는 고암의 대표작 120여점은 모두 박 씨가 손수 고른 것들이다.

"이 작품은 걸면 안돼요. 예술성이 낮아. 그이가 보면 싫어하실 거야. 다른 작품을 걸어야지.".

박 씨는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자주 눈시울을 붉혔다. 파리서 늘 보아온 그림들이지만, 조국의 전시장에 걸린 것을 보면서 남편 생각이나 감정이 격해진다고 했다.

고암 이응노는 묵죽화에서 산수화, 수묵추상, 문자추상, 인간 연작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간, 남과 북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실현한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평생 제작한 3천여점 작품 중 600여점이 전세계 미술관에 소장돼 있을 정도로국제적 성가도 얻었다.

그런만큼 10주기전 작품 선정도 어려웠다고 박 씨는 말한다. "한국에 이미 알려진 문자추상이나, 수묵추상 외에도 그이가 말년에 그린'군상'연작 시리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지막 예술인생을 불사르며,열정적으로 그렸던 '인간'에 대한 그이의 애정이 담겨 있어요.".

전시회 주제인 '통일무'에서 느껴지듯, 처음 공개되는 고암의 '군상' 시리즈는 장엄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어요. 춤추는 듯 어우러지는 인간들의 모습을통해 그이는 민족 통일, 평화를 나타내고 싶어한 것 같아요.".

평론가들 표현이 아니라도, 이번 고암 전시회는 한국이 그에게 진빚을 갚는 고해의 행사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고암은 58년 도불후 단한번 조국 땅을 밟았다. 1967년 6월 '해외의 민족문화 선양자'란 명목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초대를 받고 그는 서울에 왔다. 그러나 그는 김포공항서 남산으로 끌려갔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그는 2년여간 실형을 살았다. 교도소에서도 고암은 휴지에 간장으로 드로잉을 하는가하면, 밥풀을 이겨 개어조각을 만들었다. 신문지 천조각, 나무토막 등에 그림을 그렸다.

"그이는 솔직한 예술가였어요. '나는 한국인 화가다. 그러니 내가무엇을 그릴 지는 정해진 것 아닌가'라고 말하곤 했죠. 그는 '민족의기백을 그려야 한다. 민족의 희망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전시장의 그림들을 보세요. 그의 생각들이 그대로 투영돼 있어요.".

고암은 생전에 일본과 대만서 여는 전시회를 참 좋아했다고 한다.

조국에보다 가까이 와 있다는 게 행복했기 때문일까. 조국과 불편한관계에 있던 고암은 83년 프랑스 국적을 획득했고, 87년 평양에서 작품전을 갖고 한국전쟁 때 월북한 양아들과 꿈에 그리던 재회를 했다. 그러나 북한 화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왜 북한 작가들은 자신의생각을 담아내지 못하는가'라고 비판해, 북 당국으로부터도 환영받지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북한정부가 '이응노 미술학교'를 만들겠다는제의도 거부했다고 한다.

박 씨는 무엇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고암이 금기작가로낙인찍힌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이는 결코 친북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더더구나 남북 평화통일 주창자였습니다. 그이는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시대가 그 누명을 벗겨줄 것입니다.".

80년대 들어와 고암이 그린 '군상' 연작에 대해 한국 평론가들은'데모하는 학생들 같다' '광주 시위를 표현한 것이다'는 식 해석을 했고, 유럽서는 '반핵시위다', '환경운동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암은 '두 해석이 다 맞다'며,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그이는 파리의 동양미술학교에서 외국인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큰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고암이 배출한 외국학생 수가 3000명이 넘습니다. 58년 프랑스로 갈 때도 그는 '나는 학생이 아니라 작가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죠. 그는 그곳서 스스로 예술세계를 발전시켜 나갔지만, 그것은 프랑스작가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식이었지, 그 곳의 예술을 배우는 차원은 아니었어요.".

이화여대 회화과 1기생으로 동양화가인 박 씨는 그러나 고암이 그에게는 자상한 미술 스승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그이는 '주부가 살림도 해야지'라며, 완전한 예술의 자유를 주지않았다"고 회고하고, "그이가 돌아가신 후 창작에 몰두하려 했지만,남편 유작 정리를 하느라,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 털어놓았다. 박 씨는여러차례 개인전을 통해 평단서 높은 평가를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기억할 때면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아픈대목이라고 말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서 오신 분들은 정치적이유로 우리 집을 찾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친한 분들이 그냥파리를 다녀갔다는 말을 들으면 무척 슬펐어요.".

박 씨는 고암의 작품들을 관리할 재단 설립을 요즘 추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파리에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고암 그림이 몇 점인지 아직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자칫 고암의 그림이 예술적 가치보다 재산적 가치로 비쳐질 우려도 있고. 고암 뜻을 받들려면 이 그림들은 공익재단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씨는 고암이 세상을 떠날 때도 편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89년 1월 그분은 병원에 입원해 계셨지만, 조국서 전시회가 열리게돼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아들 융세보고 '넌 그 길(그림)로만가라.(붓을) 들고 일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제게 '집에 가서 밥먹어라'고 했죠. 그게 유언이었습니다. 그이는 당시 병으로 고생을 하지도않고, 병원에 입원하기 한달전까지도 붓을 손에 잡았을 만큼 건강했어요.".

최근 1년에 1번 꼴로 조국을 찾는다는 박 씨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외국인 줄에 설 때면(그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다), 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미술관(02-724-6328) 가나아트센터(02-3216-1020).

<* 진성호 문화부기자 shjin@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