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박정희 장군을 회상하다

이강기 2015. 10. 13. 21:49

 

[회고] 박정희 장군을 회상하다


[조성규 | 연세대 명예교수 ]

 

시대정신 2015 여름호

1. 미국포병학교(Ft. Sill, Oklahoma) 유학시절


1953년 7월 휴전이 되기 1년 전부터 병과별로 선발된 장교들이 초등군사반과 고등군사반으로 나뉘어 재교육을 받았다. 박정희 장군은 포병의 고등군사반으로 선발되어 미국에서도 교육을 받았다. 미포병학교는 오클라호마주에 있고 미국의 서남지방에 위치하였다. 포트실(Ft. Sill)은 미포병학교의 위치이고 로턴(Lawton)이라는 조그만 도시의 교외에 넓게 위치하고 있다. 1889년에야 백인 정착이 허용되기 시작하였고, 겨우 1907년에 50개의 주중에서 46번째로 미합중국에 편입되었다. 주요 산물은 다량의 천연가스와 석유이고 농산물이 좀 있다. Okla Homa는 피부가 붉은 사람들(red people)이라는 뜻이며, 아메리칸 인디안이 많이 살고 있다.조그만 산맥, 대초원, 암석돌출지대와 동부의 산림지대도 있지만, 오클라호마주의 대부분은 소위 대평원과 고르지 못한 고지대에 위치한다.


나는 미국에 연락장교(통역장교)로 도착하기 1년 전에는 김포비행장, 수원비행장, 의정부의 미 I Corps(제1군단전방사령부)의 경비를 책임진 13경비대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1951년 동부전선 7사단 5연대에서 부상도 당했지만, 육군병원에서 51년 8월에 퇴원한 뒤 경비대대의 연락장교로 근무했다. 1952년에 대구에 가서 시험을 보고 미포병학교 교육통역으로 선발되어 다른 연락장교들과 함께, 1952년 말에 샌프란시스코까지 Pan Am의 민간여객기를 타고 본토에 도착했다. 이미 10명 정도의 통역장교들이 포트실 일을 하고 있었다. 2, 3일 자고 나를 포함 세 명의 신임통역장교는 1953년 3월까지 포술학의 교재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미군들의 초등군사반에서 같이 교육을 받았다.


4월쯤에 우리나라의 포병장교들이 100명 도착하여 그들의 교실통역을 매일 했다. 1953년 12월까지 초등군사반에서 교실통역을 하다가 같이 온 연락장교들과 작별을 하고 고등군사반의 일을 보도록 명을 받았다. 그때 1954년 첫 번째 고등군사반 고급장교 25명이 도착했다. 장군2명과 23명은 소령에서 대령까지의 계급이었는데 일이 바쁘다보니 개별적으로 인사를 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내 방문에 박정희 장군이 찾고 있다는 쪽지가 있었다. 교실이나 천문기상대에서 통역은 했지만 직접 인사는 하지 못했다. 그날 밤은 University of Georgia의 청강을 야간에 일주일에 두 번 듣는 것이 있어서 그날 밤 10시가 지나서 숙소에 왔다. 수요일 저녁식사가 끝나면 찾아뵙겠다고 쪽지를 써서 박 장군의 문에 붙여놓았다. 박 장군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나 그분은 군대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내 방에 가서 이도 다시 닦고 목소리도 가다듬고 박 장군에게 할 인사를 연습했다. 같이 미국에 온 통역장교 문장식 중위를 만나서 말을 좀 듣고 갈까 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어서 저녁 7시쯤 박 장군의 방으로 갔다. 박 장군의 방에 살며시 노크를 했다.
“각하, 조성규 대위입니다.”
“들어오시오.”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조성규 대위입니다.”
“나라 조씨인가?”라고 갑자기 물었다.
“네, 한양 조씨입니다. 이룰 성(成)자와 홀 규(圭)자, 조성규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정시대에 소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소위‘사상지도(事上之道)’(윗사람을 받들고 섬기는 도리)를 처음으로 써보았다.
“학교는?”
“연희대학 2학년 때 6·25가 터졌습니다.”
“영어는 어디서 배웠나?”
“일제시대에 용중(龍中)에 다녔습니다. 근로동원 때문에 공부를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류주(龍中의 日本발음)에 다녔나?”
“소학교 담임 선생이 용중에 시험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근로동원 때문에 비행장을 닦는 일이나 소방도로를 내기 위한 집 부수는 일을 했으나, 밤에는 하라 센사꾸(原仙作)라는 일본인 선생이 영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라 센사꾸가 용중 선생이셨구만. 나는 몰랐어. 그분의 영문해석법(英文解釋法)은 유명했지.”
“류주 3학년 때 해방이 되어 해산되었고, 하는 수 없이 원주농업학교로 옮겼습니다.”
“다행히 원주에 3년 있는 동안에, 에스더 레아드(Esther Laird)라는 감리교 선교사가 저의 친구 5명과 45년부터 48년까지 회화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 그것은 운이 좋았네.”
“운 좋게도 원일한(H. G. Underwood) 선생이 2년 연희대학에서 영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6·25전쟁까지 두 번째 도시락을 먹고 ‘문교부영어학교’에 만 이년간 밤마다 다녔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고 내 숙소로 돌아왔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말씀해 주도록 인사를하고 각하의 방을 떠났다.‘박 장군은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누가 학교 다니다 군대 입대한 젊은이의 말을 그렇게 자세히 성의 있게 들어준단 말인가. 어느 날 토요일에 바지를 사고 싶다고 하여 군복 바지를 영내에서 사고, 보통 바지를 시내에서 샀다. 젊은 통역장교들은 25센트를 주고 바지를 자기들에게 맞게 줄이기 때문에, 저에게 주시면 바지 길이를 맞게 줄여드리겠다고 말하니,“내가 더 잘할 걸.”하시면서 숙소로 돌아오더니 길이를 재고 안쪽으로 접더니 가위로 잘라 넣고 꿰매고 다리미로 다리기까지 하였다.“자! 다 됐지?”하였다. 재미로 줄인다고 하였지만, 대단히 검소하게 보였다.


또한 박 장군의 검소는 몸에 밴 미덕으로 보였다. 어느 날 오후 2시경 따듯한 봄날 박 장군이 점심 후에 넓고 넓은 교정을 한번 걷고 싶다고 말하였다. 나는 박 장군의 왼쪽에 서서 걷고 다른사람은 누구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대여섯 발걸음 떨어져 자기들끼리 말하며 따라왔다. 천천히 앞만 보고 걷는데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보이는 것은 물탱크뿐이었다. 오클라호마에는 이런 한적한 곳이 주위 사방에 있었다. 끝없는 길만이 있는 듯했다. 박 장군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아니 여기는 나무도 제대로 자란 것이 하나 없어?”하였다. “동부 오클라호마주에는 나무가 잘 자랍니다.”고 남의 말을 옮겼다.
“저는 작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 동네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미군장교가 아메리칸 인디언 동네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한국인을 초대하는 것을 보면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우리를 자기들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나라에서 얼마씩 주는 돈을 받고 그저 술에 취해 살기만 한답니다. 그리고‘Reservation’이라고 불리는‘지정 거주지’에 살고 있답니다. 점심을 먹으라고 주는데, 야채와 고기를 넣은 기름진 국 같은 것하고 빵이었습니다. 옛날 우리 시골처럼‘더 먹어, 더 먹어’하면서 자꾸 기름진 국을 주는데 저의 비위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 오래전에 알래스카로 해서 미국 본토로 왔겠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조 대위, 그런데 난 영어를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아무 말 못하고 대답을 찾지 못했다.
“제가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겨우 대답을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답이 쉽지 않았다. 영어공부에 왕도는 없다는 말이 생각나기는 하건만, 영어공부에 아주 쉬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간혹 박 장군이 술을 잘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당시는 잘도 참았다는 기억이 난다. 1920년 미국 전역에 선포된 금주법(禁酒法)은 13년만에 대다수의 미국 각주에서 폐지하였다. 그러나 오클라호마와 그 외의 두서너 주는 우리 포병장교들의 교육이 지속되는 기간에도 금주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숙소를 청소하는 흑인 청년이 깡통맥주를 사다주어서 술을 배우지 못했던 나는 박 장군 방에 갖다 주었다. 박 장군은 그때에 놀러온 몇 사람과 깡통 맥주를 마셨는데, 맥주보다는 우리나라의 막걸리가 맛이 좋다고 말하였다. 누군가 시내에는 밀주집(Speakeasy)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 박 장군은“그런 곳은 기웃거릴 수 없잖나”며,“어째서 오클라호마에는 여전히 금주법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물었지만, 그 까닭을 바르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동안 박 장군이 내게 던진“조 대위, 내 영어 어떻게 하면 좋지?”라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1954년 4월 말경에 아무도 없는 틈을 찾아서 나름대로의 왕도(王道)라고 생각하는 공부방법을 제안해 보았다. “작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만든 녹음기가 비싸지만 앞으로 미국인이 정확하게 녹음한 것을 거듭해서 자꾸 틀어 흉내를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포트실을 출발하는 날 기차역까지 모두 나갔다. 하루 전에 박정희 장군이 나를 부르더니,“조 대위, 줄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아서 이것을 자네에게 주겠어. 나에게는 요란한 빛깔이지만, 자네는 젊으니까 잘 맞을거야”하였다. 포장지를 풀어보니 프랑스 국기를 넥타이에 옮겨놓은 것이었다.
“각하, 감사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잘 알지?”
“네, 감사합니다.”
이처럼 상징적인 귀한 기념품을 나는 받은 적이 없었다.
박 장군이 늘 믿음직하게 기억되는 까닭은 포술학 시험을 자주 보는데, 언제나 문제에 대한 질문 한마디 없이 계산척을 가지고 혼자서 답안을 작성한 것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험문제에 잘못이 있는 듯 질문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으나, 박 장군은 그러지 않았다. 미국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에서 박 장군의 성적이 일등이었다는 것은 교육에 관계한 사람은 다 잘 아는 일이다.

포트실을 출발하던 기차역에 가서 25명 모두에게 인사하고 각하께도 인사를 했다.
“각하, 내년에 귀국하면 찾아뵙겠습니다.”
“응, 그러세.”
떠나시는 기차가 멀리 보일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원주서 자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참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2. 육군사관학교와 서울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나는 3년간(1952-1955) 미국포병학교 근무를 마치고, 마침 그때 교육을 끝낸 초등군사반 5기생들 100명과 기차로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배에 탑승했다. 그 후 오클랜드를 떠나 23일간 태평양을 항해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2박한 뒤 새벽이 되어서야 인천에상륙했다. 서울 계동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병중이신데다 그동안의 생활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을 졸업한 여동생이 영국대사관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여동생은 대학에 다녔으며, 그 밑의 남동생 둘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다. 나는 학창(學窓) 복귀를 신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했다. 아직 군인신분이므로 육사교수부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라는 명을 받아, 함께 귀국한 유지식 중위와 함께 육사의 교수부 영어과에 신고했다. 황찬호 대위, 김종운 대위, 조순 중위 세 분이 반겨주었는데, 김종운 중위가 꾸준히 나를 육사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을 알았다. 육사교장 장준식 소장에게 정식으로 신고했다. 그때가 1955년 8월 중순이다.


1955년 11월 5일 정동에 있는 제일감리교회에서 대전 기독사회관에서 에스터 레아드(Esther Laird) 선교사와 같이 일을 하던 신부 함재영과 결혼식을 올렸다. 포트실에서 교육받던 포병장교 몇 사람들이 고맙게도 결혼식장에 왔다. 서울에 살면서 육사에서 영어를 가르치다보니까, 미국에서 3년 있다 왔다고 창피하지만 세간에 이름이 올랐다. 1956년 1월 이한림 육사교장이 나를 불러 가보니 서울고의 김원규 교장을 소개하였다. 일주일에 이틀-화요일과 목요일-은 육사에 오지 말고 서울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라는 지시였다. 내가 신청한 것도 아닌데 꼼짝 못하고 기꺼이 복종했다. 그 후 서울고교에 이른 아침에 가서 하루에 9시간씩 고등학교 3학년생을 첫째 반부터 끝 반까지 아홉 번 반복교육을 하였다. 1년쯤 가르치던 1957년 4월인가 5월에 교실에 갔다 돌아오니 낯익은 수학선생이 “박정희 소장이 전속부관을 보내서, 한번 만나자고 하신다”고 말했다.

이 수학선생은 박정희 장군을‘박정희 장군’도 아니고‘박 장군’이라며 집안 식구끼리 얘기하듯이 부르고 있었다. 그 전속부관이 나에게 간단한 쪽지 한 장이라도 써놓았으면 좋았는데,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다 몇 달 후에 또다시 그 수학선생이 나보고“박 장군이 한번 만나면좋겠다고 말씀하신다.”고 전하였지만 이번에도 만남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바로 그 수학선생이 육인수 씨였다. 1958년 말쯤에 수학과의 육인수 선생이“박 장군은 소장으로 진급하시고 7사단장으로 인재에 가셨어요.”라고 너무 정확하게 말하기에“아니, 어떻게 그렇게 소상히 아십니까?”하였더니, 육인수 선생은“박 소장은 나의 매제예요.”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고교에는 약 80명쯤 되는 고교선생님들이 한자리에 있을 수 있는 큰 교무실이 있었다. 선우 선생이라는 사회를 가르치는 연로하신 선생이 있었는데 10분간의 휴게시간에 영어과와 수학과가 앉아있는 곳에 슬슬 와서 심심찮게 말을 건네며, 한국사회를 근심하는지 무슨 울분을 터트리고 싶어 하였다. 가끔 군복 입은 나에게“그 군복은 사복으로 갈아입지도 않으시오?”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공손히“선생님, 저는 마땅한 사복이 아직 없습니다.”라며 예의를 지키는 대답으로 잘 빠져나왔다. 1958년 하늘이 맑게 갠 좋은 가을날이었다. 우연히 김원규 교장선생이 교무실에 들어왔고 모두 쉬는 시간이었다. 선우 선생이 나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조 소령, 군 장성들이 모두 썩어빠졌어! 안 그래?”라며 모든 선생이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를 질렀고, 나는‘조 소령’하고 불린 탓에 앉은 의자에서 순간 벌떡 일어서며,‘아이고 조심해야지’하고 생각했다. 선우 선생은 다시 모두가 듣게끔 소리를 질렀다.“조 소령, 우리 군 장성들이 다 썩어버렸어. 그렇지 않아?”라고 반복하니, 구경거리가 났다고 모두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어라고 한마디 해봐, 조 소령!”
그래서 나도 같은 높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선우 선생님, 선생님은 썩은 장군만 간접적으로 보셨지만, 저는 썩지 않은 장군들만 직접 보았습니다.”
“그게 누구요?”
“지금 갑자기 생각나는 분은 제가 미국포병학교에서 모셨던 박정희 장군이십니다.”
“또?”
“원주 일 군사에 계시던 백선엽 장군도 썩지 않으셨지요.”
“또?”
“3군단장 하시던 유재흥 중장도 계십니다.”
“또?”
“1951년에 육군참모총장 하시던 정일권 대장도 계시지요. 육사교장 하시던 장상국 소장, 육사교장이신 이한림 중장, 그야 생각하면 부지기수의 장군들이 썩지 않으셨어요.”


온 교무실이 조용했다. 그때 마침 수업시작 종이 울렸다. 감사할 일이다. 오후 수업이 또 하나 끝나고 교무실에 돌아와 선우 선생의 책상에 가서 절하고 악수를 청했더니 아무런 거부감 없이 굳게 악수를 했다. 이후에는 선우 선생하고 같이 점심도 먹으러 가곤 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잘도 지나갔고 1959년 말에 이럭저럭해서 예편이 되었다. 김원규 교장이 경기교장으로 가면서, 1959년에는 강당에서 주일에 경기고 3학년도 가르쳤다. 1960년 2월에 연세대 영문과에서 면접을 오라는 말이 있었다. 연세대의 미국인 교수 중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정해진 날짜인 2월 21일 2시에 오라고 해서 면접을 하러 갔는데, 백낙준 총장, 원일한 박사(H. G. Underwood), 프레드 루코프(Fred Lukoff) 교수(Pilot Project-국무성의 영어교육후원계획), 최현배 부총장, 홍 교무청장, 최재서 영문과 과장이 총장실에 모여 있었다. 그 당시는 원일한 선생 외 에는 친히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연희대에서 2학년일 때 전쟁이 나서 중퇴했다고 말했고, 경력을 말했다.


백 총장, Lukoff 교수, 원일한 선생 셋이서 영어로 인터뷰를 했다. 유사 이래 연세대에서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교수로 임용된 적은 없었을 것 같은데, 상관없이 23일부터 강의를 하라면서 Lukoff 교수가 책을 한 권 주었다. 그날 아버지께 가니“의학이니 무엇이니 때늦은 소리는 말고 영어교육에 전념하라”는 말씀이 있었다. 10월 24일에 돌아가시기 전에“이리저리 헤매지 말고 연세대 가르침에 전념하라”고도 하셨는데, 특히 병중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이라 명심하였다. 1963년에 오하이오(Ohio)주의 마이애미(Miami) 대학의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 소위 유학을 뒤늦게 갔다 온 후, 1968년에 박대선 총장이 오화섭 교수의 추천에 의해 미국문학을 담당하는 조교수로 발령을 냈다. 가끔 전속 부관을 보내던 박정희 장군으로부터는 연세대 재직 후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3. 5·16시기 박 장군과의 인연


박정희 장군이‘군사혁명’을 주도하고 있던 5월 16일 새벽 나는 동대문구 숭인동 돌산 밑 조그만 집에서 잠자고 있었다. 집사람이 막 나를 깨웠다. 새벽 6시였다. 대문밖에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단다. 이런 새벽에 누가 나를 찾지? 급히 대강 바지를 입고 대문을 여니, 한 낯선 사람이쌤 솔버그(Sam Solberg)가 왔다고 말했다. 쌤은 나와 연세대에서‘현대영어’를 가르치며 한국문학 박사공부를 하고 있었다. 6·25에 참전했던 미국인 친구다.
“쌤! 웬일이야?”
“큰일 났대!”
사정이 급하게 보였다.
“필립이 자네를 만나고 싶대. 지금 당장에.”
“그분이 누구지?”
“정치담당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미국대사관 사람.”
“난 자네가 대사관 일을 하는지 몰랐어.”
“난 대사관 직원은 아니야!”
“그렇지.”
안에 가서 급히 떠날 채비를 하고 대사관 차에 탔다.
“쌤, 왜 그래?”
“큰일 났대.”
“무엇? 큰일?”
“군사혁명이래.”
갑자기 심장이 뛰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무엇을 고대하고 있던 것처럼. 동대문을 지나 종로통에 들어서니 싸늘하게 느껴졌다. 당시의 미국 대사관 건물은 그때에 새로 지은 롯데호텔을 마주보는 4층짜리 낮은 건물이었다. 그 건물 우측의 좁은 길로 대사관 뒤 좁은 주차장에 주차를 했고, 나는 쌤을 따라 4층 방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악수를 했다.
“내가 조성규입니다.”
“갑자기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천만에.”
“부대사가 오기 전에, 이것 좀 봐주시오.”
두 장의 종이를 받았다. 한 장은 내 이력서 비슷했고, 또 한 장은 BG Park Chung Hee(박정희 준장) 라고 적혀있어서,“아,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급은 BG(육군 준장)가 아니라 MG(육군 소장) 입니다.” “제 계급은 중위가 아니고 53년에 대위, 58년에 소령 진급, 59년 말에 예편입니다. 60년 2월부터 연세대에서‘현대영어’를 가르치고 있지요.”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에 다녀왔고, 방으로 돌아와서 마침 도착한 부대사와 악수를 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미안하다며 자기가 커피와 도넛을 가지고 오겠으니 어서 시작하라고 말하면서 나갔다.


하비브는 우선“요즘 그분을 만났소?”라고 물었다.
“그분이라니요?”
“박정희 장군 말이요.”
“1954년에 미국포병학교에서 뵌 것이 마지막이요.”
“그분은 어떤 사람이지요?”
마침 그때에 부대사가 들어왔다. 손에 삐라 같은 것을 들고 있다가 나에게 그것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번역 중이라고 했다. 저쪽 탁자에 있는 도넛과 커피를 손으로 가리키기에‘혁명공약’을 읽으면서 감사인사를 하고 도넛을 먹으며 커피를 마셨다. 박정희 장군의 이름은 혁명공약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뛸까? 기다리던 그들은 자리에 착석했고, 나도 내가 앉았던 의자로 돌아왔다.
“읽었어요? 어때요?”
“박 장군은 어떤 분이셨소?”
“그분은 군에서 존경받고 있는 장군이요.”
“그래요?”
“그분은 미국의 오클라호마주 포트실 고등군사반에서 성적이 첫째이셨소. 대단히 검소하시어 새 바지를 사면 손수 짧게 줄이시고 뒤를 꿰매셨소. 젊은 우리들은 바느질 품삯으로 25센트를 주고 줄였소. 그리고 그분은 시험칠 때 컨닝을 하지 않으셨어요. 박 장군님은 오클라호마에서 밀주집(Speakeasy)에는 갈 꿈도 꾸지 않으셨소.”
“그런데 그분에게 불리한 말도….”
“예를 들면 어떤 불리한 말입니까?”
“그분이 공산주의자란 말이….”
“그런 소리는 1945~1948년 사이의 해방 후 혼란시기의 헛소리겠지요. 내 듣기엔 1949년에 그분은 소령으로 육군본부의 정보과에 복귀하셨다는 말도 있고, 1950년 6·25 이후에는 수원에서 집결한 육군본부의 일원으로 대구까지 가셨대요. 6·25 직후에 준장으로 진급하셨고요. 그리고 10년 이상을 준장으로 여러 가지 요직을 맡으셨죠. 한국의 신원조회는 철저해요. 그리고 1953년 도미유학시험 때 새롭게 정보부의 신원조회를 누구나 받았어요. 게다가 지금은 1961년이요. 박 장군은 지난 10년 이상 포병학교장, 5사단장, 7사단장, 6관구사령관 등 기타요직의 책임자였지요. 누구든지 보직이 바뀔 때마다 신원조회를 새로이 받아요.”
하비브 정치담당은 전화를 받더니, 부대사에게 장면 총리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말했다. 미국 그린 부대사와 하비브 정치담당관 두 사람이 영어로 말을 하기에 나는 앉은 채 쳐다보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우리들의 이 만남을 이만 끝내고 싶어요. 다만 한마디 보태고 싶어요. 박 장군께서 1954년 5월에 포트실을 떠나셔서 한국으로 출발하시기 전날 저에게 말씀하셨어요.‘조 대위, 이것은 내가 사복입을 때 매려고 산 프랑스제 넥타인데 나에겐 좀 요란해. 자네는 젊으니까 받아두게.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 알지?’라고 말씀하시며 저에게 주셨어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면서‘네 각하, 감사합니다. 대단히 상징적입니다’라고 하였지요. 지금 이런 날엔 유달리 상징적으로 여겨지네요.”집무실을 떠나는데“다시 또 곧 보십시다.”라고 하비브가 말했다.


집에 와서 아침식사를 하고 지난 몇 시간을 반성하며 다음번에는 박 장군의 장점을 예를 들면서 설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 31세인데 그분만큼 친근히 알게 된 분이 없었다. 혁명공약을 읽으면서 이렇게 짜임새 있게 잘 쓰였으니 필경 박 장군의 머리를 통해서 나온 명문으로짐작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아도 또 가슴이 떨려서 차분히 읽을 수가 없었다. 박 장군 자신이 나에게 읽어주는 듯 여겨졌다. 읽다가 쉬고 읽다가 쉬고 했다. 첫 번째,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 반공이 나라의 우선 기본방침이다. 이것을 내일 대사관에 가서 강조해야지라고 다짐했다.‘무질서, 질서 유지’, 이러한 문제는 1945년 해방 후부터 계속되어왔다. 1960년 4·19이후 새로 수립된 정부는 사회의 무질서를 유발하여 경찰도 맥이 없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집단이 일시 힘을 갖고 대세를 지배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는 무질서가 득세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정이 자행되었고, 정계는 물론 군부도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심스러운 것뿐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군대의 정돈이 필요하다는 정군(整軍) 또는 군대의 기강을 바로 잡자는 숙군(肅軍)의 필요성을 자주 듣게 되었고, 또 몇 달 전에 있었던 영관급장교들이 참모총장실에 드나드는 항의가 하극상(下剋上)이 아니라 정군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비쳐지던것이 생각났다. 1960년의 어느 날 워싱턴에 있던 어느 미국인이“한국의 실정을 보건대 장교들이 군사혁명을 아직 일으킬 수 없다”며‘얕보는 듯한’글을 써서 문제가 있었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집에 전화가 없었을 때라 어디 소식을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해서 오후 12시 30분쯤 영어영문학과 Pilot Project의 젊은 영어선생들 20여 명이 자주 모여 있는 큰 사무실에 가보았다. 몇 명의 강사들이 점심 후에 모여 있었으나 오늘 아침 놀랐다든지, 혁명공약을 읽었다든지 하는 말들이 전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수인동의 집을 찾았던 쌤도 아무 말이 없었다. 모두들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다음 날 17일 오전 9시에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해 하비브와 2시에 만날 약속을 하고,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나를 만나자마자“박 장군을 만나고 왔느냐”고 물었다. 학교에 가서 강의했다고 말했다. 나는 하비브에게“당신이 어제 새벽에 갑자기 불러서 당신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여유도 없이 대답을 하였지만, 오늘은 나의 자유의사로 온 것”이라며, 포트실에서 보았던 박 장군을 다시금 설명하였다. 첫째로 박 장군이 포트실에서 어떠했느냐 하는 질문에는,“검소하고 관찰력이 풍부하며, 자기 생각을 혼자만이 간직하고, 다른 장교와는 달리 쾌락 추구나 노는 것에 급급하지 않고, 술 마시고 흥청거리지도 않았다. 박 장군은 마치 엄격한 계율의 순교자처럼 장교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모범적으로 준수하였다”고 답하였다. 또“당신이 어제 질문한‘박 장군이 공산주의자였느냐?’하는 질문은, 해방 후 3년간, 즉 1948년까지는 이러니 저러니 하는 소문이 있었던 것 같지만, 나라가 대한민국으로 된 다음에 육군본부의 정보책임자였다는 말을 정보부에서 같이 근무했다고 자랑하는 나건석 강사(전 통역장교 예편)에게 어제 연세대에서 들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1950-61), 박 장군은 5사단장, 7사단장, 제6관구장 등 육군의 장군으로서 요직에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분의 정확한 신원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덧붙여서 그러한 점은 한국군에서는 진급하거나 미국에 유학 갈 때 철저한 신원조회를 받는 법이라고 말해주었다. 하비브는 어제보다 느긋하게 보였다. 어제의 놀란 듯 보였던 그 표정을 오늘은 보기 어려웠다. 그의 마음이 여유가 있고 넉넉하게 여겨졌다. 당신이 어제 찾던 장면 총리는 찾았느냐고 물으니 서울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수녀원에서 어제 미 8군으로 왔다고 말했다.
“6가지 공약 중에 불필요한 것이 있어요?”내가 물었다.
“글쎄.”
“6가지의 공약 중에 중복되는 것이 있나요?”
“글쎄.”
“6가지 공약은 모두 바람직한 한국의 미래상이 아니요?”
“글쎄.”
그가 말한‘글쎄’는‘Well’의 번역인 셈인데, 자기의 속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외교관의‘글쎄’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 신촌 쪽으로 다시 갔다. 아버지 말씀대로 연세대에서 현대영어 가르치는 것을 지키고 있으니 아버지에게 효자는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