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이승만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시대정신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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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이승만의 동맹 제의와 미국의 거부
20세기 전반(前半) 한국의 역사는 시련과 좌절 그리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 확장을 위한 각축장이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한국의 독립보전(保全)과 정치적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은 독립을 위한 기나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도둑같이 뜻밖에” 찾아온 해방은 불행하게도 한국민의 당연한 독립을 의미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고, 남한과 북한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하여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3년에 걸친 군정 기간 동안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좌익과 우익 세력뿐만 아니라 미소 양국과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의 국무부와 국방부 사이의 정책상의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두 개의 적대적인 분단국가의 출현과 동족상잔의 6・25전쟁의 발발을 초래한 근본적인 동인(動因)으로 작동했다.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은 험난했던 이 시기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를 제쳐놓고 초기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을 해명하기 어렵다. 청년 이승만은 개화기 한국 최고의 지식인 중의 한사람으로 등장했고, 한국의 독립보전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면담했으며, 미국 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3・1 독립운동 직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0년에 걸친 유학과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여러 차례의 배신행위와 기만 그리고 무관심으로 이승만이 겪어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 친미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로 만들었다. 나아가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처럼 자행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이승만은 초강대국인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의 위력을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독립과 생존의 확보를 위해 미국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굳게 믿었던 철저한 용미(用美)・연미(聯美)주의자였다. 군정(1945-1948) 기간 동안 이승만은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단독정부 수립안을 둘러싸고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하지(John R. Hodge) 남한주둔 미 점령군사령관 뿐만 아니라 트루먼 행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신생독립 국가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회의적인 전망 속에서 대한민국은 출범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반소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따라서 한국은 반공・반소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과 군사동맹의 체결을 절실하게 원했다. 왜냐하면, 한국과 같은 약소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초강대국인 미국과 법적・도덕적 의무를 지는 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는 좋으나 싫으나 미국의 의지와 정책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한미동맹의 체결을 위한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에 온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에게, “우리[한국민]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달려있다”고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는 이승만의 거듭된 동맹체결 요구를 차갑게 외면했다. 미국은 한국이 지니는 군사전략적 가치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오히려 미국은 불과 수백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둔 채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군철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949년 5월 중순, 이승만은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심각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음의 3 가지 방안 중 하나를 미국이 선택해 줄 것을 요구했다. (1)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태평양조약(a Pacific Pact)의 체결, (2)외부의 침략에 대한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과 한국 간의 협정체결, (3)한국을 방어하겠다는 약속을 미국이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 등이었다. 물론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만 주한미국대사인 무초(John J. Muccio)가 미국이 한국과 우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위한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으나, 이승만은 군사적 지원조항이 없는 조약은 한국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전히 이승만은 장면(張勉) 주미한국대사에게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국무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을 지시했다.
Ⅱ. 이승만의 승부수: 반공포로 석방
1950년 6월 25일 김일성(金日成)이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은 후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6・25전쟁을 한반도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적 개입으로 이승만의 소망은 실현되기 어려워졌다. 1951년 5월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을 군사적 방법이 아닌 정치적 해결로 종식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은 휴전에 결사반대했고, 북진무력통일을 줄기차게 주창했다. 이승만은 휴전이 한반도의 고착화를 초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휴전을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영장(death warrant)”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국을 제외한 모든 전쟁 당사국들은 휴전에 동의했고, 미국은 북진통일론을 “환상”이라고 일축했다. 이승만도 휴전을 끝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했다. 6월 30일 한국정부는 휴전의 수락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중공군의 철수와 북한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7월 10일 휴전회담이 개성(開城)에서 개시되었고, 10월 8일부터는 판문점(板門店)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11월 23일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쌍방이 대치한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1952년 5월 7일 트루먼은 전쟁포로의 자발적 송환 원칙이 관철되지 않는 한 “휴전도 없다”고 선언하면서, 휴전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휴전이 아니라, 북진무력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또다시 주창하고 나섰다.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선행되지 않는 휴전의 성립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이승만의 결의는 더욱 굳어만 갔다. 미국은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했고, 나아가 그를 제거하기 위한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했고, 그 결과 비상계획과 상시대비계획(Plan Everready)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은 실행되지 못했다. 한국에는 탁월한 위기관리능력과 다수의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지도자가 이승만과 이외에 “실제로 한사람도 없다”는 앨리슨(John M. Allison) 주일미국대사의 의회 증언은 당시 트루먼 행정부의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행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은 휴전회담의 재개(再開)를 위한 계기로 작용했다. 4월 하순 이승만은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를 통하여, 만약 중공군이 휴전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압록강 이남에 계속 주둔한다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회수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자신의 결의를 아이젠하워에게 통보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행동과 협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속한 체결을 위한 계산된 전략이었다. 이승만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은 여전히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은 북한 출신 반공포로들에 대한 일방적인 석방을 시사했고, 만약 미국이 경제 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렇게 하라”고 위협하면서, ‘한국은 그렇게 되더라도 독자적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발언이 허세에 불과하다고 간주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요구를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이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한미 간의 결별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에 두 나라는 반드시 단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6월 17일 이승만은 브릭스(Ellis O. Briggs) 주한미국대사와의 회동에서, ‘한국은 오늘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그리고 내일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절실하다’고 역설하면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궁극적인 지배라는 야망을 지금까지도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같은 날 아이젠하워는 미국을 방문 중인 백두진(白斗鎭) 국무총리에게, ‘조그마한 한국을 위하여 전면전쟁의 모험을 결코 시도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휴전협정은 한국민에 대한 “사형집행영장”이라고 규정해 왔던 이승만은 다음날인 6월 18일 새벽 2만 7천명에 달하는 북한군 반공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휴전협정의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이러한 결단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속한 체결을 재촉하는 이승만의 유일한 승부수로서 벼랑 끝 전략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즉각 이승만의 행동을 ‘약속파괴’라고 비판했다. 덜레스 국무장관도 백두진 총리와 양유찬 대사에게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을 “등 뒤에서 칼을 찌르는 격”이라고 비난하면서, ‘끔찍한 재앙’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그렇다고 이승만을 제거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승만의 벼랑 끝 전략은 적중했다. 미국은 한국과 조속히 군사동맹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의 특사로 이승만과 끈질긴 협상을 벌여야만 했던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차관보도, “이승만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후일 고백하기도 했다. 6월 19일 아이젠하워는 각료회의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절대로 퇴장해서는 안 되며,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방치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심하게 갈등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 간의 심각한 대치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타협점이자 처방책이었다.
Ⅲ.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협상 과정
로버트슨 특사는 6월 25일부터 7월 12까지 서울에 체류했다. 대미협상에 임하는 이승만의 결의와 전략도 치밀했다. 그는 이승만이 미국정치의 생리에 정통한 미국전문가이며,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임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로버트슨과의 회담에서,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즉각적인’ 체결과 경제원조, 그리고 육군의 20개 사단으로의 증강을 요구했고, 나아가 군사적 승리만이 한국이 ‘제2의 중국’으로 전락되는 비극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슨은 미국이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의 통일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상호방위조약도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도 한국이 휴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군사・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는 이승만의 고집을 꺾기 위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고집은 국가적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로버트슨은 이승만에게 한미 양국이 상호 협력의 길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인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당신[이승만]에게 달려 있다”고 전제한 후, 만약 미국이 한국문제에서 손을 떼기를 원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로버트슨은 자신의 말이 결코 ‘위압’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최후통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한 한국은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약속도 구두 약속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만약 상원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미국의 확실한 보장을 받아 내기 위한 이승만의 치밀한 협상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자동개입’ 조항이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조약을 내심 원했지만, 최소한 ‘일본 내와 그 부근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한 미일안보조약과 같은 조약이 되어야만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반면에, 미국은 무엇보다도 한국이 ‘성급한 모험을 결코 시도하지 않는 신뢰할 수 있는’ 국가임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마침내 미국은 이승만으로부터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 대가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한국 내와 그 부근에(in and around Korea)” 미군의 주둔 약속과 신속한 비준 약속을 받아 냈다. 휴전의 성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했던 이승만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이, 휴전 이후에도 자주국방의 능력이 결여된 상황에서 여전히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에 직면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법적 장치라고 믿었기 때문에 협상의 결과에 만족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휴전협정을 위반한 공산군이 한국을 무력으로 침공할 경우 실행될 미국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군사적 대응이 ‘일본이나 다른 외국이’ 공격할 경우에도 확대 적용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위해 서울에 온 덜레스에게 이승만은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민은 소련보다도 일본을 더욱 우려한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재건과 부흥을 위한 미국의 대규모 군사적・경제적 지원 정책은 잘못된 것이며, 일본의 ‘한국 재점령 야욕’을 반드시 분쇄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인들의 독립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있었던 1950년대의 세계정세를 되돌아 보건대, 이승만의 일본경계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과 미일 간의 급속한 밀착에 대한 자신의 현실적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불안은 자신의 재임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정부가 불참한 가운데 정전(停戰)협정이 조인되었다. 곧이어 8월 8일 서울에서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국제적인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약속했으며, 각 당사국이 합법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은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각 국의 헌법 절차에 따라 공동으로 대처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이 조약은 ‘한미 양국이 원하는 한 무기한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이승만과 덜레스가 발표한 공동성명서는, ‘조약이 법적으로 발효될 때까지 한미 양국 군대는 유엔군 사령부에 소속된다’는 점을 명시했고, 나아가 “한국은 서로 합의를 본 정치회담 기간 중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일방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동의했다”고 적시했다. 이는 이승만의 군사적 단독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양보는 향후 한미협상에서 한국군의 증강과 장비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지렛대로 활용되었다. 10월 1일 양국 대표는 워싱턴에서 이 조약에 공식적으로 조인했고, 1954년 1월 15일에는 한국 국회가, 1월 26일에는 미국 상원이 비준했다. 양국의 비준이 완료되었지만, 비준서 교환의 지연으로 인하여 조약의 법적 효력은 발생하지 못했다. 조약의 제5조는,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 효력을 발생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17일 한미합의의사록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이승만의 단독 북진무력 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 팽창주의로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Ⅳ. 한미동맹의 성립: 이승만 외교의 역사적 평가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성립으로,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고, 이 조약으로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의 기대와 전망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후일의 역사는 증명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상징되는 한미동맹은 지난 60년 동안 긴장과 갈등의 시기도 겪었지만, 대체로 성공적으로 운용되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미동맹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용미주의자였던 이승만의 냉혹한 국제정치에 대한 정확한 현실인식과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가 최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그리고 탁월한 대미협상전략의 값진 열매였다.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특단의 조치에서 볼 수 있는 이승만의 정책 결정은, 마치 ‘칼 물고 뜀뛰기’같은 상당한 위험부담도 내포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적 유연성을 제한함으로서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승만의 역할은, 저명한 미국외교사학자가 오래 전에 적절하게 지적한대로, 체스(chess)판의 단순한 졸(卒)이 아니라 성장(城將)과 같은 졸이었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보장했던 한미동맹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전쟁의 재발을 억제하고, ‘긴장속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한 탄탄한 토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미국이 직・간접으로 개입했던 30여개의 신생독립국가들 중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안정된 민주주의를 모두 달성한 국가는 오직 한국과 대만뿐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정치가들은 그들의 신념에 의거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지, 후일 역사가들이 어떤 평가를 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열전(熱戰)과 냉전이 공존했던 1950년대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들의 정치적 운명을 독자적으로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던 전환의 시기였다. 이승만은 한미동맹을 한국민의 생존이 걸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하야를 결심한 직후, 그가 국민에게 남긴 마지막 말도 ‘동맹국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간곡한 당부였다.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들이 그늘 덕을 본다”는 속담이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이승만의 역할과 공헌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이승만의 대미외교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한표욱(韓杓頊) 전 주미공사는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을 잘 알았고 또 그랬기 때문에 미국과 유효적절한 협조와 흥정을 할 수 있었다. 예컨대 한미상호방위조약 같은 것은 이대통령이 미국을 몰랐더라면 과연 얻어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표욱의 지적은 적절하고도, 공평한 평가이다. 북한 핵문제와 영토 분쟁 그리고 역사인식 논쟁과 일본의 개헌 논의 등으로 동북아시아의 불안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자주독립과 한미동맹을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했던 이승만의 혜안과 업적”은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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