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죽음이 건네는 말 / 염무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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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한 도시에 살며 깊은 친교를 가졌던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에게 〈죽은 자는 말이 없다〉(1897)란 단편소설이 있다. 오래전 독문학 강독시간에 읽은 것이라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남편 있는 여자가 외간남자와 밀회를 하다가 그 남자가 사고로 죽게 되자 버리고 도망치면서 “죽은 자는 말이 없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불륜 사실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마치 스스로 살인을 저지른 듯한 불안감이 교차하는 유부녀의 이중적 심리를 묘사한 소설이었다. 세기말의 퇴폐적인 분위기도 있지만, 슈니츨러 자신이 의사였으므로 내면세계의 심층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분석적 시선도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스님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신동엽의 사색은 사뭇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본다. 수필에 따르면 그 여승들은 나이가 겨우 스무 살 남짓한 또래들이다. 신동엽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상경한 것이 1959년이므로, 이 사건은 그 이전 그가 부여에 살던 때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승들은 열두어 살 때 6·25전쟁을 겪고 가족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어쩌면 더 끔찍한 고난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런 비극적 경험이 그들을 절로 들어가게 하고 결국 자진해서 속세의 삶을 버리게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에는 단지 젊음의 고뇌와 피안에의 동경뿐 아니라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불행도 크게 드리워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우리는 세월호 참사라는 전대미문의 죽음 앞에서 집단적인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지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신문·방송들은 참사의 원인에 관해 다양하게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고의 직접적 책임자만이 아닌 재앙의 뿌리까지 철저하게 진상규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역관제소, 해경, 해수부, 안행부 등 관계기관의 관행적 부정과 비리는 물론이고 최고 명령기구인 청와대까지 정치적·법적·행정적 책임소재를 낱낱이 추궁해야 한다. 엊그제 다녀온 합동분향소 출구 앞에서 가족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나는 정부의 대응이 얼마나 미봉책에 그치는지 더욱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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