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중국이라는 巨大한 질문

이강기 2015. 10. 16. 17:34

원문출처 : [강천석 칼럼] 중국이라는 巨大한 질문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3/2012080301115.html

입력 : 2012.08.03 19:49 | 수정 : 2012.08.03 22:17

 

 

"세계를 놀라게 한 한·修交 20년 후의 양국 관계

중국, 공산 혁명과 개혁 개방 이은 민주화 大長征에 성공할 수 있을까"

 

    

 강천석 주필

 

베이징(北京)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꼬박 7시간을 기다렸다. 다롄(大連) 상공의 기상 조건 악화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엔 레이더 관제의 안내를 받아야 하지만, 중국은 군용기와 민항기가 항로를 73 비율로 나눠 쓰고 있어 민항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무료했던 건 공항 안에 중국 신문과 잡지 이외에는 읽을 게 없어서였다. 세계 각국 신문 가운데 일부 경제신문을 제외하곤 외국 신문의 공항 반입이 금지돼 있었다. 2005년 세계 4, 2008년 세계 3, 2010년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줄달음쳐온 중국 간판 공항의 얼굴이 이랬다. 비행기에 올라서야 북한 민주화 운동가 김영환씨가 중국 공안(公安)에 체포돼 전기 고문을 비롯한 갖가지 고문을 받았다는 한국 신문을 접했다.

 

오는 824일은 한중 수교(韓中修交) 공동성명 발표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이 6·25 30만 대병력(大兵力)을 보내 김일성의 몰락을 막아주고 눈앞에 다가왔던 통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던 중국과 담장을 허물기로 했다는 뉴스는 그때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중국 당정(黨政) 수뇌부는 김일성과 50년 가까이 두터운 교분(交分)을 쌓아온 혁명 원로들이었다. 북한이 1990년 한·소 수교 때보다 정치적·심리적으로 더 크게 흔들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한·소 수교, 한중 수교라는 연이은 대지진으로 발밑이 갈라지자 더 결사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매달렸을 것이다.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 우리의 대중(對中) 수출이 265000만달러, 수입이 372000만달러였다. 2011년 한국의 대중 수출은 1342억달러, 수입 864억달러가 됐다. 한중 무역 규모 2206억달러는 일본(1080억달러)과 미국(1008억달러)과의 무역액을 합한 것보다 많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4466억달러) 일본(3429억달러)에 이은 제3위의 교역 대상국이다. 그때 고작 10만명 선에 머물던 인적 교류는 작년 640만명에 이르렀다.

 

한중 관계는 이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시장을 제공한다는 식의 일방적 의존(依存) 관계가 아니다. 두 나라는 액정 디바이스, 메모리 반도체, 자동차 부품, 통신기기 부품, 석유화학 제품, 정밀화학 원료, 휴대용 컴퓨터, 휴대폰 같은 공통 품목을 서로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 산업에 필요한 중간재와 원자재를 상대에 공급하는 상호 의존 관계이자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 고위 인사들은 한중 국교 수립의 길을 텄던 노태우 정부의 정원식 전 총리와 정해창 전 비서실장 일행을 맞아 '우물물을 마실 때는 우물 판 사람의 옛 공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을 보고 배우라'던 덩샤오핑(鄧小平)과 장쩌민(江澤民)이 나라를 이끌던 80년대의 '한국 학습 분위기'는 옛이야기가 됐다. 2011년 중국 GDP73000억달러로 15900억달러인 미국의 딱 절반이다. 중국이 지금처럼 연 8%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면 2020년 전후(前後) 미국과 중국의 순서가 역전(逆轉)된다. 해마다 일자리 900~1000만개를 만들어내는 중국 경제의 위력이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국 경제의 기세가 중국 모습의 다는 아니다. 오늘의 중국은 두 차례 '긴 여행'의 결과다. 중국식으로 부르면 장정(長征)이다. 첫 번째 장정은 1934년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蔣介石)의 토벌군을 피해 15000를 달아났던 대탈주(大脫走) 행진이다. 공산당은 산시성(陝西省) 두메산골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해서 1949년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토를 장악했다. 두 번째 장정은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30년 만에 미국과 세계의 대세를 논하는 G2 자리에 올라섰다. 중국의 실력과 운()이 언제까지 현재의 성장 속도를 뒤받쳐줄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도 개혁의 지도자 덩샤오핑이 100년 후의 모습으로나 그리던 장면이 30년 만에 현실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 중국 앞에는 세 번째 장정 길이 끝없이 뻗어 있다. 바로 민주화 대장정(大長征)이다. 역사의 예외(例外)가 아닌 한 중국도 언젠간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중국의 다음 또는 다다음 지도자가 마오쩌둥(毛澤東)의 황제적(皇帝的) 카리스마나 덩샤오핑 같은 강철의 의지를 가졌다 해도 성패불명(成敗不明)의 난제(難題). 중국이 134000만명의 국민을 이끌고 아직 첫발도 떼지 않은 이 대장정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까. 천안문광장에 인민대회당만큼 큰 규모로 신축돼 위용(偉容)을 드러낸 인민통제총본부 공안국(公安局)의 신청사는 세계가 묻고 중국이 답()해야 하는 이 '세기적 거대(巨大) 질문'의 상징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