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호, 뉴욕조선족 통신 대표, 재미 조선인
작가
‘마르크스주의란 한마디로 반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택동의 유명한 해석이다. 모택동의 원 말은 이러하다.
“马克思主义的道理,千条万绪,归根结底就是一句话:造反有理.”
모택동과 거의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미국의
세르기우스(Sergius Riis) 장군 역시 칼 마르크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숭배는, 중국의 모택동에 못지않았는데,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직접 런던에 있던 마르크스의 집에까지 찾아가보았다. 가족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빈집에 혼자 남아있었던
마르크스의 하녀 헬렌을 만난 세르기우스 장군은 헬렌에게서 얻어들은 마르크스의 참 모습에 하마터면 기절초풍할 뻔했다.
헬렌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분은 신을 경외하던 분이셨어요. 중병을 앓을 때면 혼자 방에 들어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촛불을 향해
기도하시곤 했지요.”
이 것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공산주의 사상의 창시자였던 칼 마르크스, 유물주의 철학의 대표자이고, 모든
신을 파괴하였던 무신론자 그가 몸만 아프면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받들었던 신은 어떤 신이었고, 무슨
신이었을가?
이에 대한 해답은 리처드 범브란트가 1986년 출판한 ‘마르크스와 사탄(Marx and Satan)’이란 책에
나온다.
원래 로마 천주교의 신자였던 마르크스는 한때 ‘기독교 신자들이 의거하는 요한복음 15:1-14와 합일, 합일의
의미, 필요성과 그 영향’이란 유명한 글을 써서 종교계에 이름을 날렸고, 이 글에서 “그리스도와 합일하는 것은 그와 가장 친밀하고 가장 활기찬
우의 속에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사실 속에서 늘 그를 우리 눈앞에 두고 마음속에 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한때 이 종교 안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신자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그랬던 칼 마르크스의 종교에 대한 ‘반란’은, 당시 유럽지방에서 비밀리에 전해지고
있었던 사타니즘교(Satanism, 撒旦教)에 발을 담그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합법적인 대형
검색사이트인 바이 두에 사탄 교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사탄 교는 사탄을 숭배하는 종교적 교파로써, 사탄은 중세기 이래 줄곧 사악함의 화신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현재까지 종교계에서 많은 쟁의를 가지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사교로 인정받고 있다.”고 밝혀놓고 있다.
칼
마르크스가 로마 천주교에서 ‘반란’하여 사탄교의 신자로 들어간 사실은, 유독 중국, 북한 등 몇몇 사회주의 국가들만을 제외하고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 사탄 교에 가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르크스가 썼던 희곡 ‘울안 엠(oulanem)’은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아주 주요한 증거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울안 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성서 속 이름인 히브리어 단어
‘임마누엘(Emanuel)’의 발음을 거꾸로 한 말이다. 서로 대방을 이단이라고 물고 뜯기를 잘하는 기독교의 목사님들도 유독 사탄 교에 대하여
물어보면, 놀라우리만치 한결같은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사탄 교에 흑암의 미사(The Black Mass)라는 일종의 종교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의식의 지도자는 장식이 많이 달린 예복을 일부러 뒤집어 입고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낭송할 때도 뒷줄에서부터
거꾸로 읽는 방식으로 성경을 의도적으로 뒤집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한 야훼, 예수 그리스도 등 거룩한 이름들도 모두 거꾸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사를 볼 때 제단에 여인의 나체를 바치고 또 십자가는 거꾸로 매달거나 발로 짓밟고, 미사를 진행하는 동안 성경을
불에 태우는 행사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속에 기록된 모든 죄들을 다 범할 것과 선한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 후 난잡하게 즐기고 노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반란’ 사상을 잉태시킨 첫 씨앗이었다. 역사는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가 바로 이 사탄교의 출신이었음을 밝혀놓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 인민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다.
일단 해외로 나온 유학생들이거나 또는 방문학자들이, 조금만이라도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뒤지다보면, 이와 같은 엄청난 반동주의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사탄 교를 비판하고 있는 종교학자들은, 사탄교가 낸 세계적인 인물 마르크스에 대하여 인류를
훼멸하려고 했던 사탄의 대리인이었다고 한결 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또 히틀러에 대한 일부 종교학자들의 견해와도 사뭇 비슷한데 가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유대인들에 대한 징벌로 하늘이 히틀러를 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학자들마다 각자 나름대로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종교 학자들은 마르크스를 비판할 때, 그가 본인이 원래 몸담았던 천주교에 대한 ‘반란’의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사탄 교’였다고 고증하고 있는데 반해, 사회주의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벌써 18세 때에 창작하였던 이 ‘울안
엠’에서 ‘훼멸, 훼멸. 나의 시기가 이미 도래했다. 시간은 정지되었고 저 자그마한 건축은 붕괴되었다. 나는 곧 영원을 부둥켜안고 광야의
울부짖음을 따라 전 인류를 저주하리라.”고 썼던 시 속에서 ’전 인류‘라는 구절은 슬쩍 빼버리고, 그 구절 대신에 ’지주, 자본가 등
부르주아계급‘을 만들어 넣고 있다.
진실한 마르크스, 즉 18세 시절부터 벌써 계획되기 시작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류 혹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혹은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그런 환상이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가 평소 가장 좋아했던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 델레스의 대사는 “일체 존재는 모조리 다 훼멸되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또 두 가지 판본의
해석이 나온다. ‘일체’에 대하여 서구의 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노동자와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도 모두 포함된 인류 전체에
대한 파괴적인 사상이라고 보고 있으나, 사회주의 학자들은 ‘나는 신에게 복수하려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그는 사악한 종교, 즉
유심주의와의 싸움을 선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근거는 마르크스를 사회주의 이념으로 유도하였던 모세 헤스(Moses
Hess)가 1841년 친구에게 보낸 서한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당대의 젊은 철학자 마르크스 박사가 장차 종교와 철학에
궁극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던 내용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르크스 본인이 실제로는 항상 신을
경배했으며, 중병을 앓고 몸이 아프고 할 때면 혼자 조용한 독방에 들어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신에게 빌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는 분명히 진정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자신이 증오하는 또 다른 신을 타격하기 위하여 그 신과 반대되는 다른 신에게 의탁했을
뿐이고, 이런 신들의 충돌을 물리적으로 이겨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무산계급을 유인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의 이상은
사회주의가 아닌 종교와의 싸움이었고, 이 종교자체가 억압하고 있는 자유와 방종, 쾌락과 즐거움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런 것은 대학시절부터
방탕하고 사치스러웠던 그의 생활을 절제하려고 들었던 천주교의 집안과 결별하고 선뜻이 사탄 교에 몸을 담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마르크스가 무산자들을 이용하려고 했을 때, 그는 근본적으로 조물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렸고, 그 누구에게도 도덕적
계율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며, 또 사람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던 것은, 그가 최종적으로 “공산주의자는 결코 도덕을
선양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였던 것과 부합한다.
왜냐하면 종교야 말로 그와 반대로 가장 도덕적인 계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아나키즘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러시아 출신의 혁명가이자 철학자인 바쿠닌이 ‘그 사악의 지존은 바로 신에
대한 사탄의 반란‘이고, ’이 반란 중의 곳곳에서 인류를 해방하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해석했던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즉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란은 ’사탄 교‘에 몸을 담는 방법으로 사탄에 의해 시작됐고,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성사시킨 것이 레닌을 위수로
하는 러시아의 혁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바쿠닌은 한때 ’사탄이야말로 영원한 반란자로 제일의 자유사상가이자 구세주‘라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바쿠닌이 위대한 것은, 그가 마르크스의 사상이 국가 권력으로 바뀌는데 대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비판한
것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면 반드시 독재자가 나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언은 바로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비록 마르크스나 엥겔스보다도 훨씬 더 극단적인 사람이었지만, 바쿠닌의 예언은 확실히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바쿠닌이 꿈꾸었던 혁명도 결코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주의 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는 ‘착취당하는
빈민들을 해방시키는’ 그런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1849년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참가하였던 드레스덴의 폭동을 조직하고 다닐
때 그는 많은 연설을 하였는데, 그 역시 마르크스의 사탄 교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증명이라도 하듯이 바쿠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혁명 중에서 우리는 반드시 사람들 마음속의 마귀를 일깨워 그들의 가장 비열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파괴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파괴의 욕망은 바로 창조의 욕망이다.”
인간의 도덕적인 계율을 강조해왔던
종교와 전쟁을 선포하였던 마르크스의 주변에는 멋진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독일의 저명한 시인 하이네도 역시 사탄의 숭배자였다. 마르크스와
아주 친하게 지냈던 하이네는 사탄을 가리켜 “내가 마귀를 부르면 그것이 곧 온다. 의구심을 품고 자세히 그것의 얼굴을 살펴보니 추하거나 흠이
없었으며 오히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남자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이네의 이 시를 해석할 때, 사회주의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이 시에서의 ‘마귀’ 또는 ‘사탄’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사탄의 반란’을 기본 골자로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훗날 철학자로써 소련공산당의 교육부장관까지 지내게 되는 루나차르스키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의 ‘사회주의와
신앙’이라는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렸으며 사탄을 무산계급 대오의 앞에 놓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 본인이 사탄 교에 몸담고 있을 때에 잉태되고 온양되었으며, 그것이 레닌의 실천으로 중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훼멸하는 마르크스주가 중국에서 그를 이은 모택동사상에 의해 한층 더 증명된 것은, 그에
대한 모택동의 더 이상 정확할 데가 없는 결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즉 마르크스주의 천조만서(千条万绪)의 도리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바,
반란하는데 는 도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택동 본인이 몇 차례의 성공적인 ‘반란’을 조직 지도하였다.
어려서부터 마르크스에 못지않게 반란주의자였던 모택동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얻어맞았고, 마을 밖 호수가로 뛰어나가 ‘더
때리면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방법으로 아버지를 굴복시키기도 했다.
모택동이 참가한 중국공산당이 1910년대
중반부터 1949년에 이르기까지 진행하였던 신민주주의 혁명은 당시의 합법적인 정권이었던 국민당의 중화민국에 대한 가장 성공적인 ‘반란’이었다.
이 ‘반란’의 중반기를 직접 지도하였던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하고 나서 1966년부터 또 한 차례의 성세 호대한 ‘반란’을 직접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바로 문화대혁명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반란’은 어떤 정권이나
또는 정당 같은 체제에 대한 반란이 아니고, 5천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중화민족의 찬란한 유교 문화를 상대로 벌인
‘반란’이였기 때문이다. 이 ‘반란’에서 모택동은 ‘중화민족의 유교 문화’를 파괴는 할 수 있었을 지언정, 결코 소멸할
수는 없었다. 나라 안의 모든 사묘, 고적, 문물들을 파헤치고 불사르고 했지만, 인민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이미 고질화되어버린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신(神)에 대한 경배 사상은 뿌리 뽑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 핏속 깊이로 잦아들어버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대표로 하는 유교사상은 탱크로도, 장갑차로도 밀어낼 수 없었고, 결코 불로도 태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몇 개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해석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야 말로 얼마든지 중화민족의 유교 전통문화와 상부상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추켜들고 있는 정치적 기치는
모든 신을 파괴하고 불사르는 마르크스주의인데, 이 주의에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던 염황 2제(炎黃二帝)’를 기리는 초대형 기념물들이 나라 안
여기저기서 준공되고 있다. 학자들, 작가들, 예술가들 모두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모택동의 인간성만을 찾아내서 부각하고 확대하기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 조선족의 학자들 가운데서도 곡학아세의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연변대학의 김관웅교수는 기다란 논문까지 만들어,
일명 마르크스주의 문화로 불리는 오늘의 이런 환경이야말로 중국의 역사상에서 가장 학자들이 자유롭게 학술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호황기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파괴하는 사상과, 천지 신을 경배하는 문화가 어떻게 한데 융합될 수 있으며,
모든 도덕적인 예의 법규를 생활 속에 받아들이고 있는 문화와 그것을 파괴하고 불 지르는 사상이 어떻게 화평 공존할 수가 있으랴.
마르크스주의에 열 백번 재해석을 가해도, 그의 사타니즘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르크스 본인이 근 본상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과 같은 도리다.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는 옳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고백하였는데, 이런 고백들이 ‘마르크스, 엥겔스전집 제21권과 ’제 35권, 그리고 제 37권에서도 재차 나오고 있다.
사실은 웅변을 이긴다. 무릇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던 국가들은 모두 망했거나 또는 망해가고 있다. 오늘의 중국이 성공하고 있는 것은 비록 형식에
있어서는 아직도 마르크스주의 기치를 들고 있으나 실질에 있어서는 이미 이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등소평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허울만 비젓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고 있을 뿐, 이미 철저한 경제주의 숙명론에 다가갔다. 만약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잣대로 등소평의 이론을 잰다면 그는 오히려 헤겔의 유심주의 변증법과 더욱 친하다. 이는 이미 등소평 본인도 마르크스의 유물주의에서 해탈하여
있었음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바로 헤겔의 변증법에서 왔고, 헤겔의 절대적 유심론을 유물론으로 뒤집어 엎어치기 한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타니즘 자체가 인류의 공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상대로 ‘반란’을 도모할 때와 달리, 이미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공산당도 사타니즘의 ‘반란’의
대상자로 변화하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챠우쉐스꾸가 처형당하고 나서, 우리는 루마니아나
또는 모잠비크의 공산당 감옥에서 죄수에게 자기의 똥을 먹이군 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 엥겔스는 ‘마르크스 본인이 자기의 책을 모조리
’똥‘이나 다름없다고 수차례 고백하였다’고 말하였던 적이 있었다. 사람에게 자기의 ‘똥’을 먹이는 비인간적인 사타니즘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이라는
것은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구권의 인류가 멋도 모르고 불쑥 받아 안고, 그것이 자기 ‘똥’인줄도 모르고
배불르도록 먹은 것이 바로 서구에서 버림받았던 마르크스주의다. 이제는 이 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을 집정하고 있는 공산당이
영구불멸하고 장생불로하자면 하루라도 빨리 마르크스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공산당이라는 당명도 바꿔버려야 한다.
2012년
7월1일, 미국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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