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 韓美關係

그레고리 헨더슨의 한국 도자기 반출사건 전말

이강기 2015. 10. 18. 11:37
  •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1960년대 미국 대사관 직원의 국보급 도자기 143점 불법 유출, 미 대사 조차 막으려 했다

  • 안치용
    재미 탐사보도전문기자
    E-mail : jesim56@gmail.com
    조선일보가 ‘뉴욕의 저승사자’로 표현한 탐사보도전문기자로 1인미..

입력 : 2014.10.27 14:26
1960년대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 국보급 포함 도자기 143점 미국 반출
1970년대 하비브 대사, 외교 전문에서 “버거 당시 대사가 핸더슨 유물수집 막으려 했다” 언급
핸더슨, 군사정부와 갈등으로 떠났지만 유물반출은 합리화할 수 없어
그레고리 핸더슨이 한국에서 밀반출한 국보급 도자기.
그레고리 핸더슨이 한국에서 밀반출한 국보급 도자기.
미국 등 해외로 반출된 한국문화재 회수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1960년대의 주미한국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의 한국유물 대량 밀반출과 관련, 당시 사무엘 버거 미국대사도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핸더슨의 유물 수집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레고리 핸더슨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그리고 1958년부터 1963년 초까지 주미한국대사관에서 문화아타세[CULTURAL ATTACHE]와 정치담당[POLITAL OFFICIAL] 등을 지낸 인물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급 고려청자를 포함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도자기를 최소한 143점 이상 미국으로 밀반출했습니다.

그는 도자기 외에도 고서화 등을 다수 밀반출해 자신의 집을 한국박물관처럼 꾸몄고 1969년 오하이오대학에서 '그레고리 핸더슨 콜렉션: 한국의 도자기'라는 전시회를 열고 143점의 도자기를 선보였으며, 1988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부인이 143점의 도자기를 하버드대 박물관에 기증, 현재 하버드대가 이 유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1974년 6월 18일자 경향신문 7면에 보도된 그레고리 핸더슨 밀반출 문화재 회수운동.
1974년 6월 18일자 경향신문 7면에 보도된 그레고리 핸더슨 밀반출 문화재 회수운동.
이선근 전 영남대 총장이 회장을 맡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는 지난 1974년 6월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레고리 핸더슨이 미국으로 밀반출한 한국유물이 최소 143점에 이른다며 국무부와 주한미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이를 회수하겠다고 밝혔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국무부와 비밀전문을 주고 받으며 이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1960년대 초 사무엘 버거 주한미국대사가 함께 근무하던 그레고리 핸더슨의 한국유물 수집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1974년 6월 19일 오전 10시 22분 미국 국무부로 보낸 '그레고리 핸더슨 컬렉션의 반환'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한국언론들이 핸더슨 케이스를 계속 보도하고 있다며 언론보도내용과 이선근 회장과의 면담내용 등을 보고했습니다.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하비브 대사는 전 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인 김재원씨가 TBC동양방송과 인터뷰를 했으며 이 인터뷰에서 김씨는 그레고리 핸더슨이 수집한 도자기 몇점을 비공식적으로 본 적은 있지만 이를 감정했다는 데 대해서는 전면 부인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당시 버거 대사가 자신에게 그레고리 핸더슨이 문화적 가치가 있는 도자기를 모으는 것을 중단시켜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자신이 거절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버거 대사는 김씨에게 “핸더슨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해보라, 즉 공론화시키지 말고 살짝 이야기해서 막아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버거 대사가 핸더슨의 한국유물수집을 저지하려 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버거 대사조차도 핸더슨이 수집하는 유물이 한국의 문화재임을 인식한 것은 물론 이로 인해 한미간에 심각한 문제가 일으킬 수 있는 범법행위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핸더슨과 친밀한 김씨에게 그같은 행위를 중단시키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김씨는 또 핸더슨이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축출된 것은 대사관 내부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하비브 대사는 이 말은 헨더슨의 출발, 즉 미국으로 돌아간 것이 비정상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수출절차[통관절차]를 밟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사실 그레고리 핸더슨은 1963년 3월 27일 돌연 한국을 떠났으며 그는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간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 1963년 4월 3일 경향신문의 보도였습니다. 그레고리 핸더슨은 주한미국대사관 내 대표적인 반(反)박정희 인사였으며 핸더슨이 떠나기 전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했다가 철회하는 등 한미 간에 긴장이 고조됐었습니다. 또 미국이 군정에 반대해 배에 실린 원조물자를 하역하지 않고 있다는 이영희 합동통신기자의 기사도 이즈음 보도됐고 그 소스로 핸더슨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설사 한미간 갈등으로 핸더슨이 추방형식으로 미국으로 쫓겨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한국유물 밀반출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핸더슨은 자신의 모든 짐의 통관이 한국의 법과 규정에 의해 진행됐음을 확인시켜줄 책임이 대사관에 있다고 요구했다고 하비브는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비브는 핸더슨의 이같은 요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핸더슨이 한국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이 한국에 남아 짐을 싸는 것을 감독했으며 무엇보다도 핸더슨 자신이 어떤 물건을 미국으로 가져가는지 정확히 알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비브는 또 왜 대사관이 이런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하비브가 이처럼 자신있게 당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비브가 핸더슨과 함께 1960년대 초반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에 근무했었기 때문입니다. 각종 전문을 살펴보면 주한미국대사관의 정치과의 책임자는 하비브였고 핸더슨은 그의 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비브는 그 이후 승진을 거듭, 71년께 주한미국대사에 임명됐으며 한국국민들의 핸더슨 밀반출 유물반환 요청이 있을 때인 1974년 6월 귀임발령을 받고 8월말 귀국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핸더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하비브가 대사로 재임 중일때 반환요청이 제기돼 하비브가 핸더슨이 한국을 떠날 때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비브가 핸더슨의 부인이 짐을 싸는 것 등을 감독했다고 밝혔지만 핸더슨의 부인 마이아 핸더슨은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등에 출강한 조각가로 미술에 조예가 깊어 사실상 한국문화재 수입을 진두지휘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핸더슨은 한국근무를 끝으로 사실상 불명예스럽게 국무부를 떠나 터프츠대 연구원으로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되며 해방 직후, 그리고 5·16혁명 등 한국근무시 경험을 토대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박사논문을 써내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밀반출한 한국유물을 보면 과연 그의 진짜 직업이 무엇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하비브는 또 이 전문에서 이선근 한국문화재보호협회 회장이 6월 19일 주한미국대사관과 미 국무부에 핸더슨 케이스 관련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주한미국부대사[DCM]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때 이 회장은 문화재보호협회가 이미 2년전 설립된 민간단체로 2주전 해외밀반출 문화재 회수 운동을 펼치기로 결정했으며, 핸더슨의 유물반환을 요청한 것은 핸더슨이 스스로 자신이 143점의 한국도자기를 가지고 있다며 팜플렛을 통해 모든 증거를 제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회장은 핸더슨이 팜플렛을 통해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고 밝힌 143점의 도자기는 1962년 제정된 문화재법에 따른 문화재에 해당하는 것이며, 일부는 도저히 해외반출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핸더슨이 국보급 한국문화재를 밀반출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핸더슨은 1963년 3월 28일 한국을 떠났고, 그가 수집한 한국 문화유물 등 짐은 그 이후 한국에서 반출됐으며, 이는 문화재법이 제정된 1962년 이후에 해당하므로 밀반출이 명백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대사는 주한미국대사관과 미 국무부에 보내는 서한은 접수하겠지만 국무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책임은 없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사실 이 당시 핸더슨이 워싱턴포스트 등에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반대한다는 투고를 하는가 하면 하원 외교위원회의 프레이저 위원이 개최하려던 한국-필리핀 인권청문회에 출석하려 했기 때문에 한국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핸더슨의 유물 밀반출 문제를 거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핸더슨 자신이 1969년 2월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그레고리 핸더슨 컬렉션: 한국의 도자기'라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면서 팜플렛에서 밝힌 대로, 기원 후 1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다시 말하면 백제·고구려·신라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한국의 도자기 143점을 한국에서 미국으로 밀반출한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특히 5천달러 이상의 해외유물을 미국으로 반입할 때 미국 관세청으로부터 정상적으로 통관했다는 확인서를 받지 못하면 모두 밀반입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 핸더슨은 자신이 소장한 유물을 미국으로 정상적으로 반입했다는 미국정부 확인서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모두 불법입니다. 또 현재 핸더슨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는 하버드대학 또한 이 정상반입 확인서가 없으면 장물을 불법 소지하고 있는 것이므로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하버드 대학의 책임있는 조치를 기대합니다.



  • 헨더슨, 한국 유물들을 보스톤 경매장에 내다팔아 돈 챙겨

  • 안치용
    재미 탐사보도전문기자
    E-mail : jesim56@gmail.com
    조선일보가 ‘뉴욕의 저승사자’로 표현한 탐사보도전문기자로 1인미..

 
입력 : 2014.10.31 08:28 | 수정 : 2014.10.31 10:17
국보급 한국유물을 대량 밀반출한 그레고리 헨더슨 전 주한미대사관 공보관은 한국 국민들의 반환요구가 거세자 자진 기증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결국 이 유물의 일부를 하버드대학에 매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터프츠대는 헨더슨의 집을 기부받았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이를 거부한 것으로 확인돼 헨더슨이 밀반출한 한국 유물 등이 장물로 문제될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헨더슨이
헨더슨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 있다면 자진 기증 하겠다"고 밝힌 서울신문 1974년 6월 20일자 보도.
그레고리 헨더슨은 1974년 6월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등이 한국에서 밀반출한 도자기 143점 등의 반환을 요구하자 같은달 19일 UPI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근무를 마친 지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느닷없이 문화재를 돌려달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뒤 자진기증의사를 밝혔습니다.

1974년 6월 20일자 서울신문 등에 따르면 헨더슨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지적해서 반환요청을 한다면 한국의 국립박물관에 자진 기증하겠으나 어느 것이 이에 해당하는 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역사적 유물이 있으면 자진 기증하겠는데 나는 어떤 유물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언듯 보기에는 합리적인 항변으로 보이지만 그의 주장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헨더슨의 주장대로 그는1963년초 당시 군사정부와의 마찰로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반환요구가 제기된 1974년이 11년째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그는 11년동안 입도 뻥긋 않던 사람들이 왜 지금 돌려달라고 하느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말하면 일종의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헨더슨이 국보급 유물을 포함해 수많은 유물을 차곡 차곡 상자에 담은 뒤 합법적인 반출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실어날랐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가 유물을 가져갔다는 짐작은 했어도 과연 무엇을 얼마만큼 밀반출했는 지는 상세히 알 수 없었기에 반환요구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헨더슨의 한국유물 전시회 관련 도록(圖錄).
헨더슨의 한국유물 전시회 관련 도록(圖錄).
헨더슨의 유물 중 일부라도 그 규모와 구체적 내용이 드러난 것은 스스로 자신이 수집한 한국유물을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헨더슨은 1969년 2월 9일부터 한달 간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열린 자신의 한국유물 전시회를 앞두고 도록을 출판하게 됩니다. 60페이지에 달하는 이 도록의 제목은 ‘코리안 세라믹스, 언 아츠 버라이어티’로 우리말로 하자면 ‘한국의 도자기, 그 다양성’ 정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도록에 그가 수집한 한국유물의 일부인 최상급 한국 도자기 143점이 수록돼 있었습니다.

이 도록의 발간과 함께 미국 주요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연거푸 열리고 도록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정부와 우리 국민들도 마침내 그가 밀반출한 우리 문화재의 규모와 그 가치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고 도록 등에 대한 기초조사를 한뒤 1974년 반환요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UPI인터뷰 중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는 자진 기증하고 싶지만 나는 뭐가 뭔지 몰라서 못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 또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1969년 오하이오주립대 전시를 시작으로 헨더슨이 수집한 한국유물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 유물들은 ‘헨더슨 컬렉션’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가치를 모르겠다”는 헨더슨의 주장은 사실과 크게 다른 것입니다.

1969년 발간된 도록에도 그가 수집한 한국유물 중 일부인 도자기 143점에 대한 가치가 너무나도 잘 언급돼 있습니다. 이 도록에는 각 도자기의 출토연대, 크기는 물론 출토장소 등이 언급돼 있습니다. 가장 먼저 수록된 유물인 ‘곳간 모형’은 낙랑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제조된 것으로 평양지역에서 발굴된 것이라고 돼 있고 143번쩨 유물인 갈색저장단지는 조선시대인 19세기 작품으로 전라북도 남원군 가마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 문외한이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국보급 유물도 많이 수록돼 있어 한국자기에 관한 한 전문가로 꼽히는 헨더슨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박상식 당시 보스톤총영사가 보낸 한 외교전문.
박상식 당시 보스톤총영사가 보낸 한 외교전문.
특히 헨더슨이 숨진 뒤 밀반출한 유물 중 도자기 143점을 하버드대에 기증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는 매도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헨더슨은 1988년 10월 66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메사추세츠주 메드포드의 자신의 집 지붕을 수리하러 올라갔다 떨어져 결국 사망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의 보도였습니다. 헨더슨이 사망한 뒤 헨더슨의 유물 중 일부인 도자기 143점은 우여곡절 끝에 하버드대 박물관이 차지하게 됩니다.

한통의 외교전문이 그 과정을 잘 설명합니다. 1992년 1월 22일 박상식 당시 보스톤총영사는 외무부로 한 통의 외교전문을 보냈습니다. 외무부가 이 전문을 접수한 날이 1월 30일인 점으로 미뤄 아마도 파우치편으로 전달된 듯 합니다. 전문번호가 보스톤(공) 2052-0034인 이 전문은 수신인이 외무부장관, 참조는 문화협력국장, 미주국장이며 전문제목은 ‘한국문화재 기증’ 이었습니다. 전문내용은 하버드대 박물관에 대한 헨더슨 전 주한미공보관의 유품(도자기)기증관련자료, 즉 하버드대 박물관 보도자료를 보낸다고 돼 있습니다.

두번째 문장은 특히 중요합니다. ‘헨더슨은 생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유품을 판매하려 했으나 협상이 실패된 바 있다. 그의 사망 뒤 미망인도 ‘뮤지엄 오브 파인아트 보스톤’, ‘피바디뮤지엄’, ‘살렘 및 하버드뮤지엄 중 한 박물관과 교섭했으나 여러 고려 끝에 하버드대 박물관에 일부를 기증키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헨더슨이 생전에 한국문화재를 팔아넘기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번째 문장은 박상식 당시 총영사의 견해입니다. “본직은 동 유물이 하버드박물관에 영구전시된 것은 한국예술품의 국제적 홍보면에서 바람직한 것이라 사료합니다”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하버드대가 헨더슨컬렉션과 관련해 작성한 보도자료.
하버드대가 헨더슨컬렉션과 관련해 작성한 보도자료.
이 전문에 첨부된 4장짜리의 보도자료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버드대가 작성한 이 보도자료는 전문발송 약 보름 전인 1992년 1월 8일 작성, 배포된 것으로 ‘하버드대가 그레고리 앤 마리아 헨더슨 컬렉션의 50%는 마리아 헨더슨으로부터 기증받고 50%는 하버드대 동양예술품펀드의 자금을 활용, 수년에 걸쳐 사들일 것이다’라고 밝혀 헨더슨 일가가 일부만 기증하고 일부는 돈을 받고 팔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증이 아니라 일부기증, 일부 판매라는 사실이 첨부문서에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상식 당시 총영사는 전문제목을 ‘한국문화재 기증’이라고 기록, 정확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또 하버드박물관에 영구전시됨으로써 한국예술품 홍보면에서 바람직하다고 결론냈지만 현재 하버드대 박물관에서 143점 전체를 본 사람은 박물관 직원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실정입니다. 안타깝게도 헨더슨컬렉션의 10%정도인 10여점 정도만 전시돼 있고 나머지 백여점은 수장고에서 햇볕조차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당시 총영사가 추후 하버드대가 이를 어떻게 전시할지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절반은 판매됐다’는 정확한 사실을 외무부에 보고하고 밀반출 논란이 계속됐던 만큼 이에 대해 조사하고 견해를 밝혔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랬다면 한국정부가 정확한 판단을 하고 하버드대 매도 직후 곧바로 문제를 제기, 반환요청을 해서 좋은 결실을 맺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 외무부의 무사안일한 대응, 서울올림픽과 관련해 신군부와 헨더슨간의 유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점 등이 헨더슨컬렉션의 조기 반환을 가로막은 셈입니다.
하버드대가 헨더슨컬렉션과 관련해 작성한 보도자료.
하버드대가 헨더슨컬렉션과 관련해 작성한 보도자료.
특히 하버드대는 이 유물을 아셔 샤클러 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박물관이 미국내 한국자기전시관이 됐으며 약 150점에 가까운 도자기 컬렉션은 한국 도자기의 전체 역사를 반영하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자기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보도자료에는 하버드대박물관의 아시안예술담당 큐레이터인 로버트 마우리의 평가도 담겨있습니다.

그는 ‘서구박물관의 한국도자기컬렉션 중 최고’라며 ‘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하며 고려청자는 지구상에서 최고’라고 밝혔습니다. 또 ‘고대시대부터 9세기,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도자기가 모두 수집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헨더슨컬렉션에 AD 1세기, 즉 기원후 1세기부터 1910년까지의 한국도자기가 모두 포함돼 있다는 평가와 일치합니다. 헨더슨이 수집한 도자기는 한국도자기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정도로 소중한 유물인 것입니다.
헨더슨컬렉션 관련한 뉴욕타임즈 기사.
헨더슨컬렉션 관련한 뉴욕타임즈 기사.
헨더슨의 도자기 컬렉션 143점이 헨더슨 밀반출 유물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이같은 도자기 외에도 많은 유물을 유출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헨더슨 일가가 수시로 보스턴의 미술품 경매장에서 한국유물을 내다 팔아 돈을 챙겼다는 것이 미술품경매업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소문입니다. 실제 미국 한 신문에 보도된 그의 집 거실사진은 거대한 탱화 등 한국유물이 가득했습니다. 또 한국학생들의 도미유학을 주선하고 일부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서 숙식토록 하면서 학생들이 학위를 마치고 귀국할 때나 결혼식을 할때 등에는 선물로 고가의 한국문화재를 서스럼없이 건넸고 이 때문에 한국에 ‘헨더슨키즈’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한국유물이 많았다고 합니다.

헨더슨의 미망인인 마리아 헨더슨이 숨진 뒤 또 하나 중요한 일이 발생합니다. 마리아 헨더슨은 한국에서 서울대, 홍익대 등에 출강하고 서울 혜화동 등에 작품을 남긴 조각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나치 치하의 베를린 올림픽, 즉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 바로 그 올림픽의 개막식 때 여중생으로서 혼자서 스타디움에서 올림픽개막 축하무용을 선보였던 인물로 밝혀졌습니다.

헨더슨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독일 베를린에 근무하다 마리아를 만난뒤 일본 교토에서 결혼식을 올린뒤 평생 반려가 됐고 1958년부터 1963년까지 헨더슨의 두번째 한국근무 때 마리아도 한국유물 수집에 조언을 했고 유물의 체계적 수집, 즉 고대시대부터 근대까지 빠짐없이 수집하도록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터프츠대가 제출한 '주택기부 거절' 문서.
터프츠대가 제출한 '주택기부 거절' 문서.
마리아 헨더슨 사후 발생한 중요하고도 특이한 일은 마리아가 헨더슨과 살던 집을 터프츠대학에 기증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터프츠대학이 이를 거부했다는 점입니다. 메사추세츠주 미들섹스카운티 등기소 확인결과 터프츠대학은 2009년 2월 11일 한 건의 문서를 접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토마스 맥거티 터프츠대 재정담당 부총장이 같은 해 1월 30일 작성, 봉인한채 등기소에 제출한 이 문서의 제목은 ‘거절’로 첫페이지는 본문, 두번째 페이지는 공증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내용인 즉슨 ‘마리아 헨더슨의 주택 기부를 거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터프츠대학이 제출한 이 문서에 따르면 마리아 헨더슨이 2001년 7월 25일 작성한 유언장 2조에 ‘메사추세츠주 미들섹스카운티 메드포드의 락힐스트릿 12번지 부동산의 대지와 건물 등을 모두 터포츠대학에 기증한다고 기재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뒤 2007년 12월 14일 마리아 헨더슨이 사망했고 이 유언장은 2008년 3월 17일 미들섹스카운티 가정법원에서 집행승인을 받음으로써 주택은 터프츠대 소유가 되도록 돼 있었지만 터프츠대가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문서에 터프츠대가 왜 마리아 헨더슨의 주택기증을 거부했는 지에 대한 이유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집을 받았을 경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터프츠대가 제출한 '주택기부 거절' 문서.
터프츠대가 제출한 '주택기부 거절' 문서.
0.64에이커에 침실이 5개, 욕실이 3개인 2층주택이며 3층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는 이 집은1970년 8월 19일 헨더슨 부부가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969년 오하이오주립대 전시회를 시작으로 헨더슨컬렉션이 각광받기 시작한 뒤 이 집을 매입한 것입니다. 백방으로 기부금을 구하는 미동부의 유명사랍대학이 주택기증을 마다한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정황상으로는 아마도 테프츠대학은 이 집의 구매자금이 밀반출된 한국유물과 관련됐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주택기증을 거절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헨더슨의 밀반출사실이 확인된다면 주택을 기부받은 터프츠대학도 골치아픈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예 문제소지를 차단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터프츠대의 헨더슨 주택기부 거부사실도 헨더슨의 한국유물 밀반출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헨더슨은 1968년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실제1963년 군정연장에 반대하다 사실상 추방당하는 등 한국 정치제도 발전을 일정부분 노력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국정치발전을 위해 노력했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한국문화재 밀반출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1074년 문화재반환을 요구하자 헨더슨은 정치적 탄압, 희생양 운운했지만 밀반출한 국보급 문화재부터 한국국민들에게 돌려주고 그같은 주장을 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정부는 미국정부, 그리고 하버드대 등에 헨더슨컬렉션의 반환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