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韓, 南北關係

북한의 ‘대남일꾼들’ - 탁자 쾅쾅… 기자들 나가자 “우리 사정 알지 않습네까”

이강기 2015. 10. 19. 11:52

[토요이슈]탁자 쾅쾅… 기자들 나가자 “우리 사정 알지 않습네까”

 

하태원 기자

 

입력 2015-08-29 03:00:00 수정 2015-08-29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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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일꾼들’ 

2007년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렸던 20차 남북 장관급회담에 참석한 남북회담 대표들이 ‘종결회의’를 마치고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회담은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 당국 간 마지막 공식회담이 됐다. 북한 수석대표였던 권호웅 내각책임참사(오른쪽 가운데 앉은 사람)는 2008년 이후 행방이 묘연해 대남정책 실패의 책임으로 숙청됐다는 설이 나돈다. 동아일보DB
 
 
2000년대 초중반 남북 관계가 문자 그대로 팡팡 돌아갈 때 우리 측 회담 대표로 나섰던 한 인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며 후일담을 전했다. 언론에 공개되는 전체회의 모두발언 부분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장 철수하겠다”며 탁자를 쾅쾅 내리치던 북한 수석대표가 문을 걸어 닫고 비공개 회의로 전환되자 갑자기 ‘읍소 모드’로 전환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 

“선생, 우리 사정 뻔히 알지 않습네까.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셈 치고 통 크게 한번 도와주시라요….” 

매년 우리 정부가 북한에 쌀 30만∼50만 t, 비료 20만∼30만 t을 지원할 때의 이야기다. 말이 차관(借款)이지 사실상 거저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이 매년 식량수급 계획을 짤 때 우리의 지원분을 ‘상수(常數)’로 놓았던 시절이다. 

필자도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난감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만찬 도중 취재진 안내를 맡은 40대 초반 북한 인사의 가슴에 달린 배지 모양과 형태가 조금씩 다른 것이 궁금해 “배지가 왜 다르냐”고 묻자 벼락같이 화를 낸 것.

‘초상휘장’을 배지라고 부른 것이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이라며 “동무는 다시는 공화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만찬 분위기는 어수선해졌고 남북 당국 간 연락관 협의가 몇 차례 이뤄진 뒤에야 사태는 일단락됐다.

 
공개된 자리에서 나온 ‘김 씨 일가’에 대한 불경한 발언에 즉각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경우 문책 대상이 되는 탓에 북측 인사가 ‘오버’한 것 같다는 우리 당국자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대남일꾼’으로 산다는 것 

직급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른바 북한의 ‘대남일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남북대화나 교류협력 사업의 일선에서 북한을 대표해 남측 인사를 상대하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얼굴이 선명한 초상휘장을 달고 남북 관계의 현장을 누비는 만큼 ‘국가대표’라는 자부심도 강하다. 이미 체제 경쟁이 끝난 상황인데도 ‘사회주의 조국’의 우월성과 ‘우리 민족끼리’의 당위성을 설파해야 하는 이들은 당성(黨性)도 강하고 논리 무장도 철저하다. 

통일전선부는 대남일꾼들을 지휘하는 사령탑과도 같다. 통전부의 지휘 아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같은 대남전위기구나 아태평화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같은 곳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남북 대결’을 치른다. 

순환보직 개념이 없는 북한에서 한번 대남일꾼은 영원한 대남일꾼이다. 업무에 대과(大過)가 있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남북 관계의 현장을 누벼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니 1991년 당시 46세의 나이로 기자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던 백문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수많은 남북 접촉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단골 일꾼이다. 이제는 일흔이 됐을 그는 회담의 진전이 더디거나 양측 간 첨예한 견해차로 신경전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자들에게 말을 걸어왔던 기억이 있다.

“당신네 대표단이 뭐라고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며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 백문길의 장기. 취재진을 통해 우리 대표단의 속내를 읽어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쓰고 나오는 모자도 다양했는데 2008년 기사에는 ‘민화협 상무위원’이라는 직함이 눈에 띄었다. 


‘술’을 이겨라 

남북회담을 보는 또 다른 재미는 양측 회담일꾼들이 벌이는 불꽃 튀는 신경전이다.

45세의 나이에 일약 남북 상급(相級)회담(장관급회담의 북한식 표현) 대표단장이 된 권호웅은 20년씩 차이가 나는 남측 수석대표에게 까칠한 언행을 자주 해 구설에 오르곤 했다. 1998년 민간대표단으로 방북한 지 9년 만인 2007년 2월 20차 장관급회담 남측 수석대표로 방북한 이재정 통일부 장관에게 “상상할 수 없는 도약을 했다”며 기선 제압을 시도한 뒤 회담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등 이 장관을 가르치려 했다.

술을 둘러싼 에피소드도 부지기수다. 평양에 온 남측 대표단의 감성을 자극하고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의 대남일꾼들이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인 셈이다.

2003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로 임동원-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방북했을 당시의 일이다. 두 사람의 김정일 면담은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을 찾았던 장성택이 ‘빚을 갚겠다’며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고 한다.

두주불사(斗酒不辭)형으로 알려진 장성택은 연신 “쭉 냅시다(‘원샷’을 하자는 뜻)”를 외쳤고 술이 약한 이종석 전 장관은 얼마 안 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처방해 준 ‘약물’의 힘으로 겨우겨우 버텨낸 것으로 알려졌다.


부담스러운 ‘접대’ 

장성택 자신도 서울 방문 당시 마신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열흘간 전국 18개 지역 38개 산업시설과 연구소 등을 방문하는 일정을 소화했는데 장성택은 밤마다 남측 인사들이 베푸는 주연(酒宴)을 만끽했고 룸살롱을 찾았다는 미확인 첩보가 나돌기도 했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만 장성택은 지방으로 좌천됐고 2004년 방북했던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안부를 묻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조선에서 폭탄주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몸을 버렸다. 지금은 조금 쉬게 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종종 남측 요인에게 ‘은밀한 접대’를 제의하기도 하는 듯하다. 지금은 공직을 떠난 한 당국자의 증언이다.  

“부담이 적은 회담이었던 것 같다. 남북 관계가 좋았던 시절이어서인지 회담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A는 작정한 듯 ‘바람이나 쐬자’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우리 식으로 따지면 룸살롱이었다. 의도를 뻔히 알겠기에 술맛이 싹 달아나더라. 한두 잔 홀짝거리다가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겨우 빠져나왔다.” 


가차 없이 가해지는 ‘팽(烹)’ 

남북 관계의 부침은 대남일꾼들의 거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남북 관계에서 목표로 하는 성과를 이뤄내고 전리품을 챙겨야 하는 것이 대남일꾼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대남일꾼들에게는 ‘햇볕정책’이 유지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이 그리울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손에 쥘 수 있는 ‘기념품’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회담일꾼으로 남북 관계의 현장을 누비다가 통전부 부부장으로 남북 관계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던 최승철의 운명은 줄타기와도 같은 대남일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승철을 만났던 우리 당국자들은 그의 캐릭터에 대해 “한마디로 호방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었다”며 “다른 대남일꾼들과 달리 즉석에서 ‘내가 책임지고 관철시키겠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하곤 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군사분계선(MDL)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영접했을 정도로 잘나갔지만 이제는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대북소식통은 “이명박(MB) 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 남북 관계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상황이 급반전하면서 숙청을 당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너무 뻣뻣해도, 지나치게 비굴해도… 

대남일꾼들의 잔혹사는 최승철로 국한되지 않는다. 2008년 이후 행방이 묘연한 권호웅은 대남정책 실패에 책임을 지고 총살당했다는 설이 나돌았고, MB 정부 출범 이후인 2009년 초 대남사업의 2인자 반열에 올랐던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담판협상 대표로 나섰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역시 2011년 처형됐다. 김정은 체제 들어 양봉음위(陽奉陰違·보는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음)하고 박수도 건성건성 쳤다는 이유로 비명횡사한 장성택의 최후는 말할 것도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 남북 관계의 전면에 나섰던 임동옥 김용순 전금진 송호경 같은 사람들이 김 씨 일가의 최측근으로 천수(天壽)를 누린 뒤 예우를 받으며 퇴장한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이다. 

MB는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류경의 처형은) ‘한국에 기밀을 누설했다’거나 ‘서울에서 MB 면담을 요청했다가 실패했는데 즉각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루 더 머물러 있었고 이에 대해 김정일이 크게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김양건 통전부장의 경우 예외로 볼 수 있다. MB 회고록에는 북한이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옥수수 10만 t △쌀 40만 t △비료 30만 t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 지원 등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09년 대북 비밀접촉에 나섰던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증언이라며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라며 “논의 내용을 확인해 준 것뿐이지 합의한 것은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양건은 자존심을 버리고 남측에 지원을 구걸한 격이지만 그는 김정은 체제 들어서도 대남총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재량권은 없고 책임은 무한대 

북한 문제를 ‘내재적 시각’에서 보는 쪽에서는 MB 정부 이래 남북 관계가 적대적 대결로 반전되면서 북한 내 대화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생태계가 파괴됐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남북 관계가 경직되면서 북한에서도 이른바 ‘리뷰’ 과정이 있었고 해당 부문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정보당국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북한 내에서도 ‘우리가 남측에 퍼주기 했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는 비판론이 제기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을 위해 군사전략 개념도 바꾸고 군부대까지 이전했고, 금강산 개발권도 내줬는데 ‘공화국’에 실질적인 이득이 된 것이 뭐냐는 불만이 나온다는 것. 

전직 장관급 인사도 “남북 관계에서 성과가 안 나면 전전긍긍해야 하고, 그렇다고 성과를 위해 ‘구차한 부탁’을 하다가 누군가 상부에 찌르면 본인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며 “모르긴 해도 북한 내에서 가장 직업 스트레스가 심한 직역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재량권은 거의 없으면서도 책임은 무한대로 져야 하는 불편한 자리라는 것.


남북 대화는 계속되어야 하기에… 

고위급 접촉 공동보도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측 수석대표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과 관련해 남조선 당국이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며 “일방적 행동으로 상대측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일 경우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찾았을 것”이라고 오리발을 내민 것은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糊口之策)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2011년 5월 중국 베이징 등에서 열린 남북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일정을 협의했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도 스스로의 보호본능 발동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내자고 하면서 우리 측에 제발 좀 양보해 달라고 애걸했다”는 주장을 했다.  

 
심지어 북측은 “정상회담을 빨리 추진하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했다”며 남측의 회담일꾼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덧붙임: 더 적나라한 남북 관계의 에피소드를 취재했지만 전부 기사화하지는 못했습니다. ‘대남일꾼’들의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고 미우나 고우나 남북 관계를 최일선에서 다룰 대화의 파트너이기 때문입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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