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없이는 통일 불가능 주장에도
공산체제에 이득이 될지언정
동독 주민들 삶의 질에 중점 둔
동방정책의 신뢰가 결정적…
흔들리지 않는 통일 정체성 절실
25년 전 10월 3일 독일이 통일을 선언하는 것을 보며, 같은 분단국 처지인 우리도 ‘통일’ 희망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오늘의 남북관계는 25년 전 그날과 비교하더라도 통일을 향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듯해, 북한문화와 통일을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살고 싶다’는 한탄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심심찮게 들리곤 한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상식’이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식을 전제로 돌아가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그 ‘상식’은 규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한데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 서로 다르다면?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상식’이 사람마다 세대마다, 성별마다 다르다면 그때는 우리는 누구의 상식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통일’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서로 어긋난 상식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에게 ‘통일’은 반드시 이룩해야 할 민족성 사명이며 당위성이었다. 하지만 늦깎이 유학생활을 하며 띠동갑 혹은 그보다 훨씬 어린 후배들의 ‘통일’에 대한 상식은 나와 달랐다. “솔직히 같은 민족이란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통일이 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고민한 적이 전혀 없는데요”라는 무관심한 태도를 넘어 “통일하면 북한 사람들 먹여 살리느라 남한도 같이 망할 거라던데요”라며 “난 이 통일 반댈세”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재산문제로 등을 돌리고, 3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온 부부도 황혼이혼을 하는 판국에 50년을 각기 따로 살아온 남북한을 “한 민족”이라는 피상적인 이유로 묶어보려는 시도나 열망은 젊은 세대에게 ‘상식’밖의 행동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통일을 여전히 ‘민족의 사명’으로 여기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서독이 주도했던 통독 정책은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 통일 실현을 위해 꼭 곱씹어야 하는 역사적 교훈이다.
1960년대 말 집권한 서독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에 의해 추진된 이른바 ‘동방정책’은 꾸준하고 폭넓은 양독 교류와 협력을 통해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국가 통일을 이룩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민족과 종교, 인종을 초월한 통합사회’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유럽에서도 독일 통일은 ‘기능주의적 사회 통합’의 성공적인 사례로 재조명된다. 여기서 기능주의란 경제 사회 문화 영역 등 비정치적 영역의 교류 및 협력을 확대해 상호 신뢰와 동질성을 회복하고 그 결과 최종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사회통합론을 말한다.
반면 동방정책이 오히려 독일 분단을 장기화시켰다는 의견도 있다. 긴장완화를 명목으로 내세운 공존정책이 일찌감치 무너졌을 동독 공산체제를 연장시켰으며, 서독이 동독의 정권체제를 인정함으로써 동독 내 민주화 세력의 입지를 위축시켰다는 평가다. 염돈재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저서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평화연구소)에서 “독일의 통일의 원동력은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 아니라 초대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주도한 ‘서방정책’ 또는 ‘힘의 정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독일 통일은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며 서독이 경제, 군사, 도덕적으로 힘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이룬 성과라는 것이다.
브란트 총리도 “서독의 동방정책은 서방정책의 연장”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보면, 이 주장은 일리가 있다. 독일 내 2개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아네나워 총리는 1955년 ‘할슈타인 원칙’에 입각해 서독의 서방 편입을 통한 경제 재건과 완전한 주권회복을 목표로 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에 가입했다. 그의 정책은 소련 및 동독과의 갈등을 심화시켜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으로 대표되는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졌지만, 이 시대 서방 국가와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고, 그리고 미국의 후원으로 이룩한 경제 재건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만년 야당이던 서독의 사회민주당도 1959년 마르크스 사상을 담은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폐기하고 서방동맹 참여와 서방 경제 체제에 따른다는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한 후에야 비로소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해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다진 빌리 브란트 총리를 배출할 수 있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가 저서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에서 언급했듯, 전범(戰犯)국으로서 전승 4개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가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했던 서독은 이처럼 서방에 굳건히 돛을 내린 뒤에야 동맹국의 동의를 바탕으로 동쪽으로 향하는 자결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 총리의 측근으로 대 동독 교섭을 도맡으며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평가 받는 에곤 바르는 ‘흡수 통일’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꺼렸다. 바르는 지금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연설로 평가 받은 1963년 “접근을 통한 변화”연설에서 동독의 체제붕괴를 노리는 암묵적 정치적 행동에 반대해, 기민당을 비롯한 보수 우파들로부터 극렬한 저항을 샀다. 동방정책의 일차적 목표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동서독 시민 사이에 신뢰와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경제 및 정치 통합은 장기적인 전략이란 판단이다. 당시 바르는 공산주의의 붕괴는 상호 교류확대에 따른 부차적인 결과일 뿐 신뢰구축과 평화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방정책은 폭넓은 교류 협력으로 동독 내부의 변화, 특히 동독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브란트 정권이 20년 동안 매년 평균 32억달러의 인도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한 것은 결코 단기적인 정치 경제적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동독에 대한 원조가 설령 당장의 공산체제에 이득이 될지언정 동독 주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며, 먼 장래 통일의 날까지 동ㆍ서독인들이 서로‘우리는 적이 아님’을 잊지 않고, ‘체제를 이유로 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신뢰를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향후 통일을 대비, 서독 청소년들의 동독 견학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것 또한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방정책의 또 하나의 특징인 ‘작은 걸음의 정책’으로 표현되는 느리고 점진적인 속도 조절에 있다.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때 독일 통일이 쉽게 이룰 수 없는 문제임을 직시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 문제로 인간의 존엄성과 내면생활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휴머니즘에 입각해, 그는 장기간에 걸친 소통과 화해가 당장 통일은 이룰 수 없지만 분단의 고통은 완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분단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전쟁이라는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단시간에 분단을 해결하려던 북한의 무모함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증오만을 남겼고, 결국 전범국 독일보다 더 오래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만약 통일이 우리에게 여전히 옳고 지당한 것, 그리고 반드시 이룩해야 할 사명이자 과제라면, 현재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독일보다 한참 멀다.
젊은 세대가 북한 주민에게 느끼는 민족적 동질감 지수는 그 이전 세대보다 현저하게 낮다. 또한 동서독이 서로를 믿고 베를린 벽을 허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는 우리처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불신의 과거가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독일도 20년에 걸친 서독의 동방정책에도 불구하고 통일 뒤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진통을 겪었다.
무엇보다 애매한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평화통일’을 줄기차게 입에 달고 살지만, 필자는 그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 정확히 배우거나 들은 기억이 없다. 서로 적대하지 않고 대화로 해결하며 하나가 되는 ‘과정이 평화스러운’ 통일이 평화통일인지, 어떤 방식이든 북한 체제만 무너지면 평화통일인 것인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 평화통일의 실현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서로 신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권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일관되고 분명한 원칙과 정책이 절실하다.
노승림(칼럼니스트)
●노승림은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와 영국 워릭대학교 문화정책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월간 ‘객석’ 음악담당 기자 등으로 일했다. 현재 영국 워릭대학교 문화정책 박사과정에서 북한 문화정책을 공부했으며 국제 문화정책 컨퍼런스와 영국 한국학 협회 컨퍼런스 등에서 북한 문화정책 관련 주제로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