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과 소녀, 노인까지 자주와 독립을 부르짖어 세계를 흔든
무수한 순국열사여!
⊙ 사상적 코훌쩍이 탓에 국론통일은 고사하고 나라가 코훌쩍이로 위태하다!
⊙ 만원 버스에 오르면 마치 奇談처럼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 사상적 코훌쩍이 탓에 국론통일은 고사하고 나라가 코훌쩍이로 위태하다!
⊙ 만원 버스에 오르면 마치 奇談처럼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박용철이 편집하여 낸 《정지용 시집》과 1941년 동명출판사에서 펴낸 《백록담》. |
광복 이후 정지용은 각종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남겼으나 그의 행로(行路)를 둘러싼 논란 탓에 잊혔다. 1988년 해금 이후 시인의 글을 찾는 노력이 있었지만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金鍾旭)씨가 수십 년간 모은 자료를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앞으로도 많은 서지(書誌) 보완작업이 필요하다.
표기법은 원문을 중시하되 일부 현대어로 고쳤다. 마이크로필름 상태가 나빠 읽을 수 없는 단어는 전체 흐름을 살려 의역했다.
추도가(追悼歌)
1946년 3월 2일자 《대동신문》에 게재된 〈추도가〉. |
원수와 의(義)로운 칼을 걸어
칼까지 꺾이니 몸을 던져
옥(玉)으로 부서진 순국열사(殉國烈士)
〈후렴〉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웠으므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리라.
2. 조국(祖國)의 변문(邊門)을 돌고 들어
폭탄(爆彈)과 육체(肉體)를 함께 메고
원수(怨讐)의 진영(陣營)에 날아들어
꽃같이 사라진 순국열사(殉國烈士)
3. 조차 뼈 모두 부서지고
최후(最後)의 피 한 점 남기까지
조국(祖國)의 혼령(魂靈)이 잠들지 않는
형대(刑臺) 위에 성도(聖徒) 순국열사(殉國烈士)
4. 소년(少年)과 소녀(少女)와 노인(老人)까지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부르짖어
세계(世界)를 흔들고
적탄(敵彈) 앞에 쓰러진
무수(無數)한 순국열사(殉國烈士)
(출전=《대동신문》 1946년 3월 2일. 이 시는 광복 이후 처음 맞이한 3·1절을 기념해 순국선열과 위국열사들을 추도하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소와 코훌적이
1949년 2월 21일자 《새한민보》에 실린 〈소와 코훌적이〉. |
모질(毛質)만은 여느 짐승보다 열질(劣質)에 속할 것이었는데 전쟁 중에는 일본인들이 이것까지도 이용하여 질기고 튼튼한 ‘국방복’ 가음을 짜내어 그도 저희들 정분 좋은 놈들끼리 나눠 입었던 것이다.
소에서 노력을 뺏고 영양을 뺏고 지방 약품을 뺏고 평화산업과 군수공업에 희생하고 공예와 비료로 쓰고 의복 가음까지 만들어냈으면 또 무엇이 소에 대한 불평이 있을 것인가?
마침 잊었으나 고래 민간요법에 소의 타액(唾液)을 무슨 약에 쓴다는 말이 있다. 어려서 고모 집에 갔을 때 열네 살짜리 고종 사촌누이가 학질을 앓았다.
하루는 해 돋기 전에 아침 일찍 그 집의 소를 끌고 나와 밖으로 옮겨가서 사촌누이의 입을 소의 입에다 부벼 대었다. 사린(四隣-이웃사람)이 들리도록 아저씨는 큰소리를 질러,
“어허, 우리 문숙(文淑)이 소하고 입맞췄네!”
누이는 한나절 울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사촌누이의 학질이 떨어졌다.
조선에 “기니네(해열제의 일종)”가 없는 무의촌(無醫村)에서는 소가 학질에도 유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귀중한 가축이거니 근간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본산 군마(軍馬) 30두(頭)와 조선산 해태(海苔) 5백만 속(束)에 1만 두와 연정(年定) 물물교환이 된다고 한다.
조선에 지금 소가 몇 마리 남아 있기에 말이다. 그도 해태만을 가지고 마두(馬頭)를 바꿀 수 있다면 식량부족으로 곤란하다는 일본인들이 말을 연산(年算) 3000두씩 팔아 백미(白米) 대용으로 해태를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나 조선 남해에 작동(昨冬) 비상한 온기 때문에 해태가 무전(無前) 흉작이라 하니 해태 대신 조선 농우(農牛)가 일본인의 입에 말려 들어갈 판이다.
조선에 부(富), 중(中), 빈농을 통틀어 13호(戶)에 소 한 두가 겨우 배당될까 말까 하는 현상에 한 두당 경작면적이 5정(町) 8단보(段步)가 된다 한다. 그러나 축우(畜牛) 총수 중에 유우(幼牛), 거우(車牛)가 약 반수가 될 것이므로 현역 경우(耕牛)는 농우(農牛) 중에도 성우(成牛)만이 유자격자이므로 성우 한 두당 경지면적이 10정보가 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연당(年當) 소 1만 두를 일본에 보내고 군마(軍馬) 연당 3천을 들여온다면 경우가 경마(耕馬)도 여하한 숫자로 개편될 수 있는 것이며 군마를 농마(農馬)로 조종할 만한 기술(旣述) 농민조직의 개편이 다시 문제일까 한다.
농우 절멸상태에서 농우를 팔아 일본 군마를 사올 필요가 어디에 있는 것이냐? 군마는 비기계화 군대에 필요한 것이요, 경우는 비기계화 농촌에 필요한 것이다. 기계화 이전에서 조선은 군마, 농우 양대(兩大)의 문제로 질식할 지경인데 농민 중의 농민이 인우(人牛)가 되어 농민 이하에 다시 인우적(人牛的) 신흥계급이 태두할 징조가 심히 걱정이다.
나의 이야기가 어쩌다 농업경제 우국학자가 할 소리에까지 침범하였으나 다시 사촌누이와 소의 강제 키스 이야기에 올라가 그때 사촌누이가 노발하여 통곡할 순간 소도 적이 분개하였던지 그 큰 머리를 흔들며 “씩!” 소리와 함께 콧김과 코침을 뿌렸던 것이다.
소의 이러한 동작을 코 푸는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하나 소가 발을 씩씩 코를 푼달 수야 없는 것이요, 소가 코를 풀고 아니 푸는 것이 통히 또 전적으로 유용한 소의 본질, 본체적인 것에 이러한 부수적인 동작이 이용후생에 그래도 유용한 것이면 것이었지 유해할 리가 없다.
소의 코 푸는 것도 대우해야 한다.
사람은 웬만한 아이나 여자라도 손을 사용하여 능히 코를 푼다. 사람은 더욱이 여자가 소 못지않게 머리끝에서 닭의 알 같은 발꿈치에 이르기까지 통히 또 전적으로 필요할 뿐 아니라 버릴 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여자의 기능, 정서와 동작의 미묘현란에 들어서는 여간 소에게 비교할 바가 아니다.
여자가 소보다 확실히 정당하게 손을 사용하여 코를 푸는 동작을 갖는다. 유용가치가 소 이상일 바에는 여자의 코 푸는 동작은 소의 그것보다는 더 우대할 만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겨울 추위에 들어 그 여자들은 흔히 대학생급의 여자들이 코를 푸는 것이 아니라 손을 쓰지 않고 들이마시는 것이 유행한다.
밥상을 들고 코를 마시는 것쯤은 마침 변명이 설 수 있겠으나
“선생님, 새해에 안녕하세요? 흐음! 훌쩍!”
비액 처치에 관한 동작이고 보니 코를 마시는 것도 일종의 코를 푸는 동작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에도 없는 유해한 코 푸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비액이라고 하는 것은 뇌수의 피로물질의 배설물이라고 한다. 배설물을 들이마시고서야 위생에 해롭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럴 뿐 아니라 이러한 동작을 청춘에 따르는 치태(稚態)라고 장려할 것은 아니라도 단불용서(斷不容恕)까지 갈 과오라고는 아니라고 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습관이 5, 6월 더위 중에도 버리지 못하는 여자를 많이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여자의 병사(病死) 원인이 코훌쩍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검진작성서가 있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으니 여자의 코훌쩍이를 사회문제화할 때까지 가지 않아도 좋을까 한다. 그런데 극단의 유물론자 중에는 사고작용을 뇌수의 분비물 내지 배설물질로 규정하는 파가 있다. 그러면 뇌수에서는 이종(二種)의 배설물, 즉 물질적인 비액과 정신적인 사고 두 개가 있는 것이 된다. 열악한 사고체계는 그것이 고도의 영혼론자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이것이 사회적 표명이 될 때에는 열악한 사고가 추악한 배설물 이하에 해당할 것이 아닌가?
배설물을 여학생처럼 들이마시는 데서 더욱이 정신에 역(逆) 축적되는 배설물의 해독이란 여하한 해독일까 걱정해 본 이가 있는가? 코훌쩍이 습관이 사상의 코훌쩍이로 진전되어서야 쓰겠는가?
여자는 고사하고 일류신사의 사상적 코훌쩍이들이 신문사, 주필, 작가, 평론가, 교수, 종교가로 들어앉아서야 국론통일은 고사하고 나라가 코훌쩍이로 위태한 것이다.
철두철미 유용하고 필수적인 농우(農牛)가 일본으로 연정(年定) 1만 두로 팔려가는데 이 망국적인 코훌쩍이들을 어느 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는 것이냐!
회수(回收) 문제로 상정(上程)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섬보다 낙원이리라. 동삼(冬三) 석 달에도 동백꽃이 붉은 대마도로 수송할까?
(출전=《새한민보》 第 42號 1949년 2월 21일)
나의 시
1949년 1월 30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나의 시〉. |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잖도 하다만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우리 편인 말아
검정콩 푸른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낳은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자네. (중학 때 동요)
2.
날마다 만나 날마다 졸리어도 날마다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나의 청년이 있다.
“오늘은 쓰셔야지요?”
“무엇이던가?”
“원고 말씀입니다.”
“무슨 원고?”
“문학에 관한 것입니다.”
“나 고전주의, 상징주의 다 잊어버렸소. 나~ 문학을 모르오.”
“시라도 괜찮습니다.”
“시? 시 다 버렸소!”
이리 대꾸를 해놓고 나서 나는 갑자기 미안하기보다도 불안해진다.
청년 시절에는 나이 먹은 사람에게 너무 기대하기보다 너무 실망하기 쉬운 다혈적 경향이 있었다.
내가 언제 진정한 문학을 해보았기에 말이다. 인제부터 어학과 문학공부를 착실히 해볼까 하고 대학에 파묻힐까 했더니 천만에! 점심도 굶어가며 머리가 번쩍여서 나왔다.
대학에서 문학자나 창작가나 시인이 나오기는 일제시대에도 틀렸던 것이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가망이 없다.
어떤 친구가 날 보고,
“지용! 인제 가두로 오시오!”
별안간 홧김에 주책없는 신경질이 나서,
“이 자식아! 가두로 나오라는 것은 어떻게 나가는 것이냐!”
거리에 나서 서성거리고 보니 삐라 뿌리는 청소(靑少)남녀가 없나, 발포하는 경관이 없나, 영령의 개선이 없나, 몽둥이 데모 행진이 없나, 우선 전차정류장 안전지대가 안전하기에 여기서 기다려야 전차가 오니 그래도 여기서 자칫 잘못 비켜나서면 지프에 치어 죽을 것 같다.
이렇게 쩔쩔매다가 3, 4년 동안 나는 시도 못 썼다. 그래도 나는 비관치 않는다. 내가 아니라도 시인이 8·15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수십, 수백이! ‘세르게이 에세닌’이 조선에 나왔다 할지라도 나의 동생 시인들보다 우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동생들은 무슨 ‘필요’로 우수한 것이 아니다.
주의(主義)와 세대(世代)와 나의 동생들은 ‘불가피’로 우수한 것이다. 나의 동생들보다 역사와 세대가 더 천재인 것이다.
‘휘트먼’이 새 조선에 나왔다 하면 그는 시를 못 쓰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의 동생들보다 더 진실하기 어려운 것이다.
(출전=《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30일)
春宵有情 ④ 야간 뻐스 안의 奇談
1939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야간 뻐스 안의 기담〉. |
이즘은 어쩐지 밤이 늦어 교붕(交朋)과 중인(衆人)을 떠나서 온전히 제 홀로 된 때, 취기와 피로가 삽시간에 급습하여 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이것도 취기로 인해서 그런 것이 아닐지요. 버스로 들기가 무섭게 앉아서 쏟아지는 졸음을 간신히 참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고 인내심의 극한이었습니다.
오르고 보면 번번이 만원인데도 다행히 비집어 앉을 만한 자리가 하나 비어 있지 않았겠습니까. 손바닥을 살짝 내밀거나 혹은 머리를 잠깐 굽히든지 하여서 남의 사이에 끼일 수 있는 약소한 예의를 베풀고 앉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피로를 잊을 만하게 그렇게 편편한 자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양옆에 완강한 젊은 골격이 버티고 있어서 그 틈에 끼워 있으려니까 물론 편편치 못한 이유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마는 서서 쓰러지느니보다는 끼워서 흔들리는 것이 차라리 안전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만원 버스 안에 누가 약속하고 비워놓은 듯한 한 자리가 내게는 사양할 수 없는 행복같이 반가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상생활이란 이런 행운을 각기 맞으면서 즐거움을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겐 이 작은 행운이 전부이겠는데 이런 하치 못한 시민을 위하여 버스 안에 빈자리가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보다는 겨우 있다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원리로 통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종시 올 것이 불편한 것을 그래도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니 불편이란 말이 잘못 표현된 말입니다. 그 자리가 내게 꼭 적합하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동그란 구멍에 네모진 것을 끼웠다거나 네모난 구멍에 동그란 것이 걸렸을 적에 느낄 수 있는 대개 그러한 저어감(齟齬感)에 다소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로손 한 15분 동안의 일이 그다지 대단한 노역이랄 것이야 있습니까. 마침내 몸을 가벼이 스치어 빠져나와 집에까지의 어두운 골목길을 더덕더덕 걷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도 그때쯤 하여 버스에 오르면 그 자리가 역시 비어 있었습니다. 만원 버스 안에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는 것이나 또는 그 자리가 무슨 지정을 받은 듯이나 반드시 같은 사람을 반드시 나를 기다렸다가 앉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 이상한 일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밤을 두고 한길로 그러하니 그 자리가 나와 무슨 미신에 가까운 숙연(宿緣)으로서거나 혹은 무슨 불측(不測)한 고장(故障-괴로움)으로 누가 급격히 낙명(落命)한 자리거나 혹은 양복 궁둥이를 더럽힐 만한 무슨 오점이 있어서거나 그렇게 의심쩍게 생각되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무슨 실쿳한 혈흔 같은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하도 여러 날 밤 같은 현상을 되풀이하기에 언제는 버스에 오르자 꺼멓게 비어 있는 그 자리가 내가 끌리지 아니치 못할 무슨 검은 운명과 같이 보이어 실듯한 대로 그대로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밤을 연해 앉고 보니 자연히 자리가 몸에 맞아지며 도리어 일종의 안이감(安易感)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괴상한 노릇은 바로 좌우에 앉은 두 사람이 밤마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가 실상 스무 살 안팎이 아니 되는 청춘남녀 한 쌍인데 나는 어느 쪽으로 쏠릴 수 없는 꽃과 같은 남녀였습니다. 이야기가 차차 괴담에 가까워갑니다. 그들의 의상도 무슨 환몽(幻夢)처럼 현란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청춘과 유행에 대한 예리한 판별력을 상실한 나이가 되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밤마다 나타나는 그들 청춘 한 쌍을 꼭 한 사람들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괴담과 같은 버스 안의 이국인과 같은 청춘남녀와 말을 바꿀 일이 없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종시 불편하였던 원인을 추구하여 보면 아래와 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1. 나의 양(兩) 앞에 그들은 너무도 젊고 어여뻤던 것임이 아니었던지?
2. 그들의 극상품(極上品)의 비누 냄새 같은 청춘의 체취에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지?
3. 실상인즉 그들 사이가 내가 쫓기고 앉을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나 아닐지?
대개 이렇게 생각되기는 하나 그러나 사람의 앉을 자리는 어디를 가든지 절로 정하여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늙은 사람이 결국 아랫목에 앉게 되는 것이니 그러면 그들 청춘남녀 한 쌍은 나를 위하여 버스 안에 밤마다 아랫목을 비워놓은 것이나 아니었을까?
지금 거울 앞에서 아침 넥타이를 매며 역시 오늘 밤에도 비어 있을 꺼먼 자리를 보고 싶습니다.
(출전=《동아일보》 1939년 4월 14일)
어린이와 돈
《소학생》 1949년 5월호에 실린 〈어린이와 돈〉. |
성녀 작은 ‘테레사’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착하고 총명하고 경건하였던지, 아버님 어머님의 대단한 사랑을 받으시었다.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에 지나치게 총명하여서 여간해야 남에게 속지 않으셨다 한다. 네 살 적에 한번은 그의 아버님이 하도 총명한 어린 딸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너 땅에다 머리를 굽히고 입술을 흙에 묻히고 일어서면 아버지가 돈을 많이 주마”
하시었다.
작은 ‘테레사’는 성이 나서 단연코 시험하시는 말씀을 거부하셨다. 물론 아버님도 딸이 구태여 흙에다 입술을 붙여가며 돈을 얻기를 바란 것이 아니고, 어린 딸의 기상이 어떠한가를 보려고 한 것이었으나, 어린 딸의 늠름한 기상을 보고 매우 만족해하시고 기뻐하신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높고 깨끗한 기상을 갖춘 작은 ‘테레사’는 스물세 살에 과연 거룩한 성녀로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버지의 하신 일을 따님과 같이 쓸데없이 한 짓으로 볼 수 없어 한다. 만일 그때 네 살 된 어린 따님이 아버지의 명령대로 하셨다면 어떠하였을까, 생각해 본다.
아버님은 크게 실망하시고, 불쾌하시고, 어린 딸을 다소 노여워하셨을 것이다. 돈이 좋은 것이라고, 좋은 것이라고 만들어놓은 것은 모두 어른들이 하여 놓은 것이다. 세상에 모든 어린이가 돈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른들이 하여 놓은 잘못 지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놓고 왜 어린 ‘테레사’를 시험한 것일까?
이 세상에는 성녀 작은 ‘테레사’ 같으신 분은 매우 수가 적고, 돈을 바라서 흙에다 입술을 댈 네 살짜리 어린이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몰라서 성인 성녀가 못 된 이런 어린이들은 모두 못 쓸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인 성녀는 몇 분에 그치는 것이요, 또 어린이가 자라서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어른들이 돈을 표준하여 만든 사회에서 어린이도 보기에 가엾은 짓을 하게 된 것이다. 심하면 남의 돈을 훔치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란 물건이 나쁘고 더러운 것은 아니다. 전기와 수도와 일상잡화 등속이 반드시 사람의 생활에 필요하듯, 돈도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돈이 그렇게도 좋은 것도 아니요, 적당히 필요한 것이므로 어린이가 철이 들려 할 때부터 돈에 대한 지혜와 옳은 도리를 배우게 할 것이다.
돈을 무조건 더러운 것이라고 가르치거나, 제일 좋은 것으로 알게 하는 교육에서 비참한 어른들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서양 문화국의 좋은 가정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무리 어린 아들 딸이 귀엽다고 해서 돈을 거저 주는 법이 없다고 한다. 마당을 쓸든지 방을 치우고 반드시 돈을 준다고 한다. 일을 하여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먹고 자고 사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서양 문화국의 좋다는 가정에서 귀여운 아들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돈을 준다는 것이 거저 돈을 주어 까먹게 하는 것보다는 좋을까도 싶으나 그렇게 한다면 돈을 반드시 보아야만 일을 하게 되고 돈 없이는 집안일도 못 시킬 염려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란 문화국의 아이들이란, 극단에 가서는 개인주의자로 늙을 염려가 있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돈이라면 어려서부터 약아빠져 깍쟁이가 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까 가장 이상적인 돈과, 어린이의 관계를 적어도 소학생 시절까지는 아주 가깝게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일까 한다.
교과서, 학용품 값, 월사금, 입학금, 후원회비 따위 문제로 일찍 어린이의 머리와 가슴을 졸이게 하고, 괴롭게 굴지 않을 만한 어른의 사회가 먼저 서져야 하겠다.
아이들이 돈을 자랑하고 돈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야 하는 꼴을 지금 우리나라에서 본다. 소학생이 해가 지기 전부터 밤이 늦도록 “내일 아침 신문 사시오, 사시오” 하고 비참한 소리를 지르며 달음질을 쳐야 하는 것이 어찌 ‘이마에 땀을 흘려 일하고 먹어라’라는 성경 말씀에 맞는 것이 되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이마에 땀을 흘려 일하고 먹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나쁜 풍속이 남아 있는지, 정월 초하룻날 세뱃돈이라는 것이 있다. 어린이들 세배를 받고 즉시 돈을 준다. 으레 받을 작정으로 세배를 한다.
아아! 이것이 흙에 입술을 붙이고 돈을 받는 것과 조금 다른 것일까? 이렇게 착한 어린이들이 자라서,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든지 하지 않을지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돈은 단 한 푼이라도 절을 하고 비굴한 짓을 하여 얻을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제 손발로 일을 아니 하고 남의 덕분에 살기 좋아하는 어른이나 어린이일수록 돈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실큼한 일이다.⊙
(출전=《소학생》 1949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