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리더십 인문학

이강기 2015. 10. 20. 09:47

 

 

 

 

리더십 인문학 ①


[송 복 | 연세대 명예교수]

Ⅰ. 리더십의 원류(源流): 왜 인문학인가?

 

가. 원류 · 인문학 - 인문학은 리더십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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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원류는 인문학이다. 리더십의 기원과 발전은 인문학에서 시작된다. 흔히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혹은 경영학, 법학 등을 그 원류로 생각하지만, 이 사회과학 학문들의 연구 대상인 정치, 경제, 사회, 경영관리, 법규제 등은 리더십의 1차적이며 시원적(始原的)인 관계대상은 아니다. 리더십이 만들어지는 근본, 리더십이 존립하는 바탕은 역사와 철학, 문학으로 이루어지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아니, 다루기 이전 그 내면세계에 뿌리를 둔 학문이다. 인간의 본성, 본능, 본마음, 본정신, 본 사상, 본 욕구, 본 욕망, 거기서 만들어지는 본 행동이 인문학의 뿌리며 줄기다. 인문학은 모두 인간 내면세계의 이 본(本), 심연(深淵)과도 같이 깊고 깊은데 자리하고 있는 이 내면세계의 본을 보고 본을 캐고 그 본을 사람들에게 내 보이는 학문이다. 그 본은 기본이고 기초다. 그래서 인문학을 기초학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매일 같이 맞닥뜨리는 정치현상이나 경제, 사회현상은 모두 우리의 외면세계의 일들이다. 내 몸 안이 아니라 내 몸 밖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법과 제도, 규범, 규제며 규칙, 조직 관리며 경영, 더 넓게는 지배와 복종은 모두 외면세계의 일을 다스리는 행동방식이며 다양한 행위양식들이다. 이것은 모두 ‘네가 지금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네 속이 검으냐 희냐’가 아니라, 밖으로 드러난 너의 행동이 ‘이러냐 저러냐’를 문제 삼고 있다.

인간의 내·외면 세계가 이같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광물의 광맥처럼 땅속에 깊이 박혀있는 것은 내면세계, 밖으로 캐내어 나온 것은 외면세계와 같이 요연(瞭然)하게 인간의 내·외면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구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문도 그와 같이 인간의 내·외면 세계를 확실히 구분해서 어느 학문은 내면세계, 어느 학문은 외면세계를 연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문학도 여타 학문처럼 인간의 외면 세계를 연구하고, 다른 학문도 인문학처럼 내면세계를 꼭 같이 연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문학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외면세계를 다루고, 다른 학문들 또한 외면 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내면세계를 다룬다. 학문이 그와 같이 분류되어 있는 한 중심적으로 다루는 세계가 그와 같이 나누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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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시작은 리더십이다. 문제의 핵심도 리더십이다. 리더십을 말하면서 인문학을 먼저 말한 것은 인문학이 다른 학문보다 인간 내면세계를 더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세계야 말로 인간 그 자체이고 인간 삶의 본디 모습이다. 인문학이 ‘리더십의 원류, 리더십의 시작’이라 한 것은 바로 이 인간의 내면세계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법, 경영으로 처음부터 나아가지 않고 이 인문학으로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리더십은 사람들의 내면세계에서 출발해서 외면세계로 나아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리더십은 외면세계가 주관계대상이고, 내면세계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것만큼 내면세계는 부차적이다. 오직 외면에 나타난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통제하느냐, 그래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목표에 이르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외면적 통제, 그러한 외면적 성과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바로 리더십의 한계다. 리더십의 발휘가 지극히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 한계의 극복이 내면세계의 성찰이고 내면세계로의 귀의(歸依)다. 리더십은 기본적으로 인간내면세계의 작동이다. 내면세계는 자동차의 내연기관(內燃機關)이다. 내연기관에서 자동차를 움직이는 동력이 나온다. 리더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내면세계의 동력인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그 마음을 잡아야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 아니라 내면세계의 지향(志向)인 정신도 함께 일깨울 수 있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복잡하다. 마음이 움직이면 뜻이 인다. 뜻이 일어나면 그 뜻을 굳혀야 한다. 정신을 일깨우면 뜻이 굳어진다. 이른바 강한 의지다. 기어이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그것은 오로지 내면세계의 작동에서 나온다.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을 일깨우고, 뜻을 일으키고, 강한 의지를 갖게 하는 것, 그것은 개인에게는 개인의 몫이지만, 집단이나 조직에서는 리더의 몫이다. 나는 내가 주체가 되어 나를 움직이지만,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무리에서는 리더가 이 무리의 움직임을 주도한다. 어떤 집단이든 집단으로서 구실을 하려면 그 집단이 달성하려는 특정 목적이 있어야 한다. 물론 높은 이상도 있고 장래의 나 혹은 우리를 비추는 비전(vision)도 있어야 한다.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이 모두를 꼭 실현해야 하겠다는 공동의지를 갖게 하는 것, 그것은 오직 리더의 몫이다. 집단의 개인들이 어쨌든 이 공동의지를 갖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리더가 주도해서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작동시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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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리더에 의한 집단내 사람들의 내면세계 작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간 내면세계의 복잡성만큼 이중성이 있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각기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이 있다. 하나는 리더의 지위와 강한 권력이 만들어내는 우리 내면세계의 작동이고, 다른 하나는 리더의 감응력(感應力, empathy), 감정이입이 만들어내는 우리 내면세계의 작동이다. 리더의 권력과 감응력에 의한 내면세계의 작동 방식은 결과적으로 인문학과 여타 학문의 구분도 되고, 리더십 원류(源流, original)와 방류(傍流, collateral)의 구분도 된다.

리더가 강한 권력을 가질 때, 그 강한 권력의 힘이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자동차 내연기관처럼 작동시킬 수 있다. 강한 권력의 힘으로 얼마든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을 일깨우고 뜻을 일으키고 굳은 의지를 갖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집단, 다른 나라들 보다 빨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정해진 목표에 보다 빨리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연료가 떨어지면 자동차가 멈추듯, 리더의 권력이 쇠퇴하면 리더가 지금까지 이끌어 온 사람들의 내면세계도 작동을 멈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 내면세계를 지속적으로, 그것도 강한 동력을 일으키며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가. 그것은 복잡한 내면세계의 또 다른 면인 리더의 감응력이다. 더 정확히는 리더가 이끄는 사람들의 내면을 리더가 울림으로써 나온다. 사람들이 여간해서는 내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의 안면, 그것은 심연(深淵)이다. 깊고 깊은 땅 속에 뻗어있는 광맥, 깊고 깊은 물속에 침잠 해있는 용들의 세계, 그처럼 사람들의 내면세계 저 넘어 깊은 곳에는 사람들의 속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 속마음이 움직여야 지속적인 동력이 나온다. 생기(生氣) 넘치는 ‘공동의지’가 만들어져야 그 공동의지는 지속된다.

이 속 마음을 끊거나 바꾸지 않고 계속 밖으로 분출 - 내솟게 하는 것, 그것이 리더의 감응력이다. 이 리더의 감응력은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발성으로, 그리고 그 감정을 희열(喜悅)로 가득 차게 한다. 이 경우 그 집단이 내는 힘은 그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수를 하나하나 세어서 합친 단순한 산술합산이 아니다. 한단위의 힘을 내는 열 사람이 그 힘을 합치면 열 단위의 힘이 나오는 것이 힘의 단순 산술합산이다, 그리고 그 수가 증대하면서 힘도 함께 증대해 가는 것이 힘의 산술급수적(算術級數的, arithmetic series) 증가이다.

그러나 리더의 감응력에서 나오는 힘은 전혀 다른 상황을 야기한다. 리더의 마음, 리더의 정신, 리더의 정서 그리고 리더의 희망과 욕구, 비전, 이상이 모두 집단사람들의 내면세계에 이입(empathize) 됨으로써 일어나는 힘, 바로 이 리더의 감응력에서 생성되는 힘은 이제까지 보던 세계, 겪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힘의 세계를 노정한다. 그것은 마치 종교의 영적 믿음이 가져오는 힘, 혹은 역사상 이런 저런 카리스마들이 일으키는 힘처럼 엄청난 부피와 무게, 엄청난 질량의 힘을 만들어낸다. 그 힘은 산술급수적으로 증대하는 힘이 아니라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 geometric series)으로, 혹은 지수상승적(指數上昇的, exponential)으로 증대하는 힘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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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리더의 감응력이 바로 인문학이다. 아니 인문학이 그 감응력의 원산지이다. 리더십의 원료와 리더십이라는 제품을 생산해내는 본산지다. 인문학 속에 담긴 원형의 내면세계, 그 원형의 내면세계를 구성하고 재구성해서 또 다른 또 하나의 내면세계를 펼쳐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 인문학에 외면세계는 없는가? 안의 세계가 있다면 응당 바깥 세계도 있다. 그 바깥 세계도 인문학에선 유위(有爲)일 수가 없다.

마치 아이들이 “제가 나고 자란 땅의 말로 / 재잘거리듯이 / 제나라 말로 나눈 사랑의 말속에 / (아이들이) 잉태되듯이 / 자란 동네 아침공기와 저녁연기 밴 말 / 온갖 감정과 문명이 밴 말 속에서 / (아이들이) 자라듯이” 인문학은 바깥 세계에 대해서도 무위(無爲)처럼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위(有爲)가 없어도 온 몸과 온 맘을 달구어 일어나는 감동이 있고, 풀무질 하듯 기운이 마구 솟아오르는 감흥이 있고 그리고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이 있다. 그 감동, 그 감흥, 그 열정을 불러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래서 인문학이 리더십의 원류이며, 그 원류는 리더십 감응력의 원류이며 원산지이다.

 

나. 인문학의 최고 수혜자 -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에서 찾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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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서울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한창 경고음을 내고 있을 때,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무구(無垢)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는 이 시를 암송하고 암송하며 창조하고 혁신했다. 혁신하고 창조하며 또 이 시를 암송했다. 스티브 잡스가 누구인가. IT의 상징이고 이 시대 최고 신기(神器)의 창시자다. 세계 사람들은 자기 나라 수상이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잡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인에게는 이상하게 들리는 그 이름도 세계 사람들에게는 애칭처럼 다정하고 친근하게 불린다.

『맹자(孟子)』에 “만물개비어아(萬物皆備於我)”라는 구절이 있다. 우주만물이 내 작은 몸 안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내 몸을 자세히 보라. 그 안에 무한의 우주가 있다. 우주가 만들어내는 무한의 이치가 모두 그 속에 있다. 멀리까지 가서 딴 것에서 구하려 하지 말라. 바로 나, 내 몸과 마음, 그 속과 밖을 더 자세히 더 면밀히 더 열심히 보라. 우주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바로 거기에 우주가 있다고 맹자가 말하듯, 잡스도 그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았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한 그 한 알의 모래, 거기서 우주를 찾았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며 될법한 소리인가? 시인의 감각이 다르고 시관(時觀)이 다르고 직관이 다르다 해서 시인은 비유도 조작할 수 있는가? 모래를 우주로, 우주를 모래로 동일시할 수 있는 그런 권리가 시인에게는 있는가? 우주는 크고 광활하다. 우주는 무한이다. 모래는 작다. 작은 것 중에서도 또 작은, 그 중에서도 모래는 더 미세하다. 미세한 것은 미세 먼지처럼 날아간다. 모래는 유한(有限)이다. 그 유한은 곧 사라진다. 유한의 모래와 무한의 우주는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이 아닌 일반 우리들의 상식이고 우리들의 분별지(分別智)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배워온 우리들 모든 일상의 가르침이고 생각이고 지식이다. 그 상식, 그 분별지 그 패러다임, 그 주류이론을 벗어나면 모래는 우주의 다른 한 극단이다. 거대 우주가 한 극단이라면 미세 모래는 또 다른 한 극단이다. 한 극단은 다른 극단을 비춘다. 한 극단을 보면 다른 극단이 보인다. 모래는 보이는 극단이고 우주는 안 보이는 극단이다. 그래서 보이는 한 알의 모래에서 안 보이는 무한의 우주를 본다. 모래를 보고 모래를 감지하면 광대무변한 우주가 나타난다. 모래를 알면 우주를 알고, 우주를 알려면 모래가 먼저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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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찾는 사람들은 천국도 함께 찾는다. 천국이 보이는가? 누가 천국에 가 보았는가? 천국에서의 삶을 어떻게 아는가. 그 천국이 바로 거기, 모래위에 핀 들꽃에 있다. 오로지 무위 천연 그대로의 꽃, 그 순수 무구, 사람의 손때라곤 묻지 않은, 인공이라고는 가해지지 않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그 들꽃, 그 들꽃에서 무심히 보기만 했던 이제까지의 그 일상의 들꽃, 그 들꽃과는 다른 유별난 희열을 느껴 보았는가. 천국은 이제 내가 느낀 바로 그 들판의 모래 위에 핀 그 들꽃이다.

그 들꽃은 땅위에 있다. 하늘나라가 아니라 땅위에 피는 꽃이다. 그 땅위의 꽃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느끼고 보고, 실제처럼 하늘나라의 삶을 체험하고 만끽한다면 그 세계는 지금까지의 내가 살며 아웅다웅 다투던 그 세계가 아니다. 같은 공기 같은 물을 숨 쉬며 마시는데도 전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 전혀 다른 세계의 감지, 그 다른 세계에로의 눈뜸, 그 눈 밝힘이 곧 창조다. 같은 들꽃에서 전혀 다른 들꽃을 보는 것, 그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 흔하디흔한 들꽃, 그 지천으로 핀 그 들꽃에서 지금까지 나는 무얼 보았는가? 내게는 그저 무심코 보았을 뿐인, 한갓 들꽃뿐이지 않았는가. 누가 뭐라 해도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하고, 잡스가 암송한 그 꽃이 아닌, 그 곳에 늘 피어있는 범상의 그 꽃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창조와는 관계없는, 창조와는 늘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일상으로 보던 그 꽃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천국」이라는 세계를 본 그 시인의 영혼, 그 시인의 노래가 인문학이다. 그 인문학을 알고, 그 시인의 노래를 영혼으로 암송한 잡스야말로 인문학의 발견자이고 인문학의 체득자(體得者)이다. 그리고 인문학의 최대 수혜자이다. 잡스의 암송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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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의 공간을 쥐고

찰나(刹那)의 순간에 영원의 시간을 잡는다.

 

손바닥으로 얼마나 큰 것을 잡을 수 있는가. 손바닥은 손바닥 크기만 한 것만 넣을 수 있다. 손바닥의 물리적 공간은 너무 작고 너무 좁다. 손바닥이 잡을 수 있는 것은 무한이 아니라 유한이다. 그것도 극히 한정된 유한이다. 그 유한으로 무한을 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유한과 무한은 같이 존재할 수가 없다. 무한 속에 유한이 없고, 유한 속에 무한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 손바닥은 그 안에 무엇이든지 넣을 수 있다. ‘어떻게’ 넣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넣느냐를 생각해 보라. ‘어떻게’를 의심하면 무한의 공간은 손바닥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을’를 궁구(窮究)하면 무한의 공간도 쉽게, 쉽게 손바닥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가 실물의 세계라면, ‘무엇을’은 상상의 세계다. 실물과 상상 –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하나는 논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하나는 이치로 따지는 것이고, 하나는 이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무한의 공간은 반드시 무한에 위치한다. 하지만 무한에 위치한다고 그 무한이 반드시 무한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한이 자리한 위치와 무한이라는 공간의 존재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무한공간이라는 ‘위치’는 멀리 멀리 나아가 잡을 수 없지만, 무한공간이라는 ‘존재’는 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와 나는 얼마든지 그 무한공간을 쥘 수 있다. 그 무한공간을 내 손바닥으로 쥐는 한, 내 손바닥은 무한공간이다. 아니 그 무한공간은 바로 내 손바닥이다. 앞의 ‘어떻게’와 그 ‘무엇이’, 그리고 그 뒤의 ‘이치로 따질 수 있는 것’과 그 ‘이치를 넘어서는 것’, 거기에 인문학의 요체가 있고, 거기에 비(非)인문학적 사고와 인문학적 사고의 차이가 있다.

손바닥 안과 무한 공간의 다름만큼 찰나와 영원도 다르다. 찰나는 순간이다. 눈 깜짝할 새 보다 더 짧은 순간이다. 영원은 영겁(永劫)이다. 일겁(一劫)은 천지가 한번 열리고 또 다음 열릴 때까지다. 영겁은 그 겁이 영원히 계속되는 영원이다. 그 영원을 찰나로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찰나로 영원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찰나는 영원이고, 그 영원은 찰나로 바뀐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아니 그 가능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느냐이다.

찰나와 영원, 그것은 극과 극이 아니다. 그 어떤 극이든 극과 극은 비교가 되고 비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찰나와 영원, 설혹 비교할 수 있다 해도 비교의 실체가 없고, 비교의 결과도, 비교의 흔적도 남지 않는다. 찰나와 영원은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그렇게 함께 생각하고 그렇게 한 묶음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찰나로 영원을 잡는다’고 말하는가. 무슨 힘으로, 무슨 권능으로 찰나의 순간에 영원의 시간을 앉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 혹은 찰나를 영원으로, 영원을 찰나로 바꿀 수 있다고 읊조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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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돈오(頓悟)라는 것이 있다. 돈각(頓覺)이라고도 한다.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찰나에서 영원을 보는 것, 영원도 찰나에 불과 하다는 것, 그것을 홀연히 깨닫는 것, 그 깨달음에 갑자기 이르는 것, 그것이 윌리엄 브레이크의 노래이고 스티브 잡스의 암송이다. 손바닥 안이나 무한의 공간이나, 찰나의 순간이나 영원의 시간이나 모두 같다는 그 홀연한 깨달음, 그 깨달음에서 스티브 잡스의 창조의 기운이 번쩍 솟아 오른 것이다.

창조에는 명시된 개념이 없다. 창조에서 명확한 개념을 찾는다면 그것은 창조가 아니다. 지금 ‘창조경제’에 개념이 없다고 말하는 것, 구체(具體)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바른 지적이고 정직한 목소리다. 창조는 돈오다. 그 돈오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설명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결론이 있다. 그래서 개념이 형성된다. 설명은 개념을 만드는 경로다.

그러나 돈오에는 그것이 없다. 그런 개념화 과정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순간으로 영원을 잡느냐, 어떻게 영원을 찰나로 만드느냐, 거기에는 설명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설명하면 찰나만 남고 영원은 없다. 혹은 영원만 있고 찰나는 사라진다.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내 하기에 따라 모든 순간이 다 피어나는 꽃봉오리 인 것을”이라는 시구가 있다. 한 순간에 피는 그 꽃봉오리, 그 꽃봉오리가 영원으로 이어진다. 순간에 핀 그 꽃봉오리에 영겁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대로의 돈오일 뿐이다. 그것이 잡스의 인문학이다. 잡스가 그것을 알아낸 것이다. 거기에 잡스의 창조가 있고, 잡스의 애플이 있다.

 

II. 인문학의 위기: 자초한 위기

 

가. 누가 먼저 버렸는가 ―주범은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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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한창 「무구의 노래」를 노래하며 애플을 만들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정반대로 인문학을 버리고 있었다. 인문학 포기와 인문학 모멸(侮蔑), 심지어는 인문학 추방과 인문학과의 사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세기말의 갖가지 증후군(症候群)을 타고 그 진행은 가속화 되었다. 그것은 오직 실리, 소득, 이득, 재산, 부(富,) 자리만을 병적으로 챙기는 증후군이기도 하고 가치, 상상, 꿈, 이상, 창조, 보람 등에 대한 병적 허황감(虛荒感) 혹은 공허감, 심지어는 지나칠 정도의 거부감, 혐오감 등을 갖는 증후군이기도 했다.

그 증후군은 한국특유의 쏠림현상이 가세해서 심화되었다. 한쪽에서 하면 다른 쪽도 덩달아 하는, 그래서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마침내 모두 함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세찬 타자지향적(他者指向的) 사회행태 —대중사회 초기에나 보던 그 쏠림 행태-가 세기 말에 되살아나서 남이 어떻게 하는가에 맞춰 획일적으로 너도 나도 따라하는, 그런 사회심리의 포로, 그런 사회심리의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인사아취(人捨我取)—남이 버리면 나는 취한다. 남이 버리는 길을 나는 간다는 고고(孤高), 고매(高邁), 고답적(高踏的)인 생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인문학적인 사고의 독자성과 특유성, 다양성과 다원성이 죽은 상태였다. 40년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적어도 1950년대와 60년대는 그러한 인문학이 살아 있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마다 그런 기풍은 여전히 활발했다. 그것을 서울대학교가 제일 먼저 버리고 다른 대학들도 질세라 함께 따라 버렸다.

인문학은 이렇게 대학에서 먼저 버려졌다. 대학 내에서 가장 먼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학부모들이 동참하고 학생들이 동조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인문학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고, 마지못해 인문학과에 들어온 학생들도 인문학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다른 공부만 했다. 시 한줄 외우는 학생이 없고, 소설 읽는 학생도 귀했다. 문학은 아예 시간낭비고, 철학은 거리에서 밥 빌어먹는 거지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고시(考試)와 관계없는 것, 취직시험과는 거리가 먼 것, 그것이 인문학이었다. 그래서 인문학은 필요 없는 학문이었고, 그래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필경, 유한계급(有閑階級)이거나 한량(閑良)으로 치부(置簿)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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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안에서도 인문학 하는 사람들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다. 인문학 하는 ‘그들’, 그들이 먼저 인문학을 무너뜨리고 인문학을 파괴했다. 그들은 인문학을 할 줄 몰랐다. 인문학이 무엇이고, 인문학을 어떻게 해야 하고, 왜 해야 하는지, 그들 스스로 알지를 못했다. 그들은 그저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직업이니까 하는 것이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고, 작업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직업적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이었다.

인문학은 매료(魅了)다. 인문학은 마음을 홀리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인문학은 내가 먼저 매료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문학은 그 학문에 내가 먼저 반해야한다. 내가 먼저 홀려서 혼이 빠져있어야 한다. 나는 왜 인문학을 하는가. 반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 여인을 사랑하는가. 반했기 때문에 사랑한다. 거기에는 보상도 대가도 없다. 아니 보상도 대가도 생각지 않는다. 생각할 수가 없다. 오직 열정만 있고 치열함만 있을 뿐이다.

내가 내 학문에 매료되지 않는데 누가 매료되겠는가. 내가 반하지 않는데 어느 학부모가 반해서 자녀에게 그 공부하라고 하겠는가. 내가 내 학문에 열정이 없는데, 치열함이라곤 전혀 없는데, 내가 깊이, 깊이 침잠하지 않는데, 누가 이 학문을 지지해 주겠는가? 누가 나서서 나를 대변하며 나의 학문을 주창해 주겠는가. 너무도 명백히, 너무도 당연히. 삼척동자도 알 일이며 공부라고는 해본 일이 없는 촌농부도 알 일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인문학자들은 모르는가.

인문학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한다.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된 우리의 산업화가 우리의 인문학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오직 실용만 추구하는 산업화가 산업사회에 필요한 공학, 의학, 법학, 경영학만 요구해서 인문학이 쇠퇴하고 인문학이 죽었다고. 인문학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환경의 변화가 인문학의 입지를 좁히고 인문학이 설 자리를 무너뜨렸다고 입만 열면 너무도 당당히 외치지 않았는가. 그렇게 외치는 그 순간, 더 산업화되고 더 실용주의적 사고를 하는 서구나 미국, 일본에서는 왜 그토록 인문학이 성(盛)한지, 그들의 인문학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우리 인문학을 석권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어떤 이들은 해외파와 국내파를 양분해서, 해외파들의 지나친 득세(得勢)로 국내파들의 학문발전이 어려워 졌다고 이유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 인문학자 절대다수, 특히 한국학과 관련된 분야 학자들의 절대다수는 안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어서 지난 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가 그 같은 양분화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2000년대를 넘어 와서도 아직도 인문학자들의 상당수는 그 같은 나뉨의 의식이 저변에 똬리를 튼 채 남아있다. 이 모두 학문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남을 탓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자기 가책(苛責)의 가혹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을 보라, 일본학에서 일본의 국내파는 해외파를 단연 압도하지 않는가.

 

3

 

안에서 공부하는 학자들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들을 들라면 미상불 한국사나 한국문학, 한국철학을 하는 학자들이라 할 것이다. 이들을 통 털어 ‘한국학’하는 학자들이라 한다면 이들 한국학 학자들 중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드물 뿐 아니라 ‘한국학’은 으레 국내에서 공부해야만 제대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국학의 발전을 어렵게 하는 이유일 뿐 아니라, 실은 그래서 전혀 발전이 안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사 하나만 보아도 1950년대 한국사학이나 60년이 지난 지금 2000년대의 한국사학이나 학문적 차이는 고사하고 일반 독자들의 시각에서, 그 내용상에서 실제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때도 국수(國粹)이고 지금도 국수이고, 그 때도 반일 대 친일이고 지금도 반일 대 친일이지 않는가. 언제나 그러하다면 그야말로 너무 고루(孤陋)하지 않는가.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보고 들은 바에 다름이 없어서 학문하는데 시야가 너무 너무 좁지 않은가. 혹은 또 다른 의미의 고루로 사상이 너무 낡고 고집이 너무 세서 변화와 발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한가. 우물 안에 있으면 우물 안 개구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기도 호수나 강으로 나가야 큰 고기가 된다. 바다로 나간다면 더 이를 것이 없다. 안에 있으면 그 좁은 안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좁은 안도 실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스스로 환히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안은 반드시 밖에서 보아야 본다. 안에 있으면 자기가 앉은 자리 범위를 넘어서, 맞은편의 벽도 제대로 보기 어렵다. 하물며 내 등 뒤의 벽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시야가 좁고 시각도 왜곡되기 때문이다.

안의 전체, 안의 규모와 안의 범위와 안의 구조와 안의 짜임새와 안의 모양, 다른 안과 다른, 그 안의 고유성, 정체성 등은 모두 밖에서 보아야 보인다. 안에 있으면 자기만의 상자에 갇혀 있는 것이다. 상자는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네모꼴(四角形)이다. 사각형은 구속 속박의 상징이다. 그 사각형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죄수이다. 수인(囚人)은 탈출할 수가 없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없고 더 넓은 세계를 볼 수도 없다. 창의적 행동, 창조적 사고는 고사하고, 고정관념에서 조차 벗어나기 어렵다.

 

4

 

『맹자』에 “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관어해자 난위수 유어성인지문자 난위언)”이란 명구가 있다. 큰 바다를 본 사람은 감히 물을 말하지 못하고 진리의 학문에 들어가 본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넓이가 다르고 높이가 다르고 깊이가 전혀 다른,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늘 서있던 자리, 내가 늘 보던 그 사물, 내가 늘 만나 듣던 그 사람들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는 것만큼만 본다. 수영장 물을 본 사람은 수영장 물 밖을 보지 못한다. 모든 물은 수영장에 담긴 그 물과 꼭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다를 알 수가 없다. 작은 기업만 해본 사람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기업은 다 같은 것이라는 동일시 의식을 갖는다. 규모가 그 천 배, 만 배 되는 기업의 구조를 생각할 수가 없다. 기업은 같아도 ‘조직’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웅덩이 물이나 바다 물이나 같은 물이라도 그 ‘작용’하는 바가 전혀 다르듯이.

그래서 “讀萬卷書 行萬里路(독만권서 행만리로)”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왔다. 영국 경험론자들이 끊임없이 주창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던 구절이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간다”는 가르침이다.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시에도 나오는 이 글의 진수는 무엇인가. 안에 앉아서 만 권의 책을 읽는다. 그 안이 감옥이든 방안이든 책이 있는 한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읽는 곳이 안이면 역시 사각형 안이다. 그 사각형 안에서 읽음은 역시 수인처럼 탈출할 수 없고 비상(飛翔)을 할 수도 없다. 제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도 안에서는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나가서 만 리의 길을 걸으면서 보고 깨치고, 깨치고 보면서 내 눈의 껍질, 내 생각의 껍질을 벗겨야한다. 내 새로운 세계, 내 새로운 창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나. 어떻게 버렸는가 - 역사

 

1

 

한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 중, 영어로 강의 할 수 있는 학자가 몇이나 되는가. 과문의 탓이라 해도 있다면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영어가 아니라면 일본어, 중국어로 외국인에게 한국사를 강의 할 수 있는 학자는 또 있는가? 영어, 일어, 중국어가 아니면, 사료(史料)로서의 한적(漢籍)을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학자는 얼마나 되는가. 그 많은 학자들 중에서 이 역시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라면 도대체 한국사 하는 사람들은 무슨 글, 무슨 말로써 한국사를 연구하는가?

연전(年前)에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저명한 학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한다고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사를 듣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교수가 영어로 강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 학생들이 무슨 재주로 한국어로 하는 한국사 강의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불문가지로 교수가 영어로 강의할 수밖에 없고, 영어로 강의할 수 없다면 자동적으로 한국사 강의는 요란한 선전과 달리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국어로 강의하는 것은 차치하고, 외국 학회지에 나오는 연구물들은 제대로 읽을 수 있는가. 한글로 된 논문들이나 다름없이 이해할 수 있는가. 평생 책을 통해 공부해 왔기 때문에 외국어로 강의는 못한다 해도 저술이나 논문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고 자신한다면, 그 저술이나 논문들의 명시적 의미(denotation) 외에, 함축적 의미(connotation)도 파악 할 수 있는가. 「맹자」에서 말하듯 “以意逆志(이의역지)” 할 수 있는가. 글을 읽는 사람이 그 글을 쓴 작자의 원래 의도며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까지 깨칠 수 있는가.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그 같은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외국어에 어둡다는 것은 외부세계와 그만큼 접촉이 적다는 것이고, 그것은 상자 안의 수인, 동굴 안의 환영(幻影)처럼 바깥 세계를 모르거나 착각, 착오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나는 책을 통해서, 미디어를 통해서, 혹은 여행이나 안식년의 해외거주 기간 등을 통해서, 바깥세상을 알 만큼 안다고 자신해도, 그 앎은 지극히 제한된 것이다. 물론 『노자(老子)』에서처럼 “不出戶知天下(불출호지천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훤히 아는, 그러나 그런 사람 수는 너무 적어서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다.

 

2

 

중요한 것은 바깥 세계에 대한 앎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다. 그 앎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느냐 있지 않느냐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학문하는 이의 마음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 그 마음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이다. 요지는 학문하는 이의 ‘학문의 열림’이다. 핵심은 학문하는 이의 마음의 세계화, 글로벌 마인드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바깥 세계와 접촉이 많아 바깥 세계를 향해 물리적 창문이든 심리적 창문이든, 창문을 늘 열어놓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열림’이 훨씬 클 것이라는 것, 글로벌 마인드를 더 많이 가질 것이라는 것,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더 물어볼 필요가 없다.

한국사 하는 이들의 절대 다수는 바깥 세계를 잘 모른다.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외국어도 잘 못한다. 심지어는 잘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감히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대답은 간명하다. 두 가지 점에서다. 하나는 한국사 하는 학자들의 거개(擧皆)는 한국사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는 공부하지 않는다. 한국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도 이웃나라 역사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를 둘러싼 4강(四强)의 역사 즉, 일본사, 중국사, 러시아사 그리고 미국사이다.

조선의 정체(停滯)와 달리 17-18세기 도쿠가와(徳川家康) 시대의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발달했는가, 명치유신 훨씬 이전 이미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중국을 점령할 정도의 국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는가. 17세기 중반 이후 18세기 전(全)기간의 대청(大淸)제국은 오늘날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의 국가였다. 하지만 19세기를 넘어서면서 서구와 일본의 반(半)식민지 국가로 전락했다. 그 전락과정을 적어도 60년 이상을 지켜보면서 조선은 계속 반외세 쇄국정책을 썼다. 청국의 그 무엇이 조선을 그토록 폐쇄국가로 만들었는가.

오늘날의 한국분단 70년사는 태평양 전쟁 종전(終戰) 바로 이듬해인 1946년, 김일성을 시켜 단독정부를 수립케 한 스탈린의 한반도 분단정책으로 만들어졌고, 동구(東歐)분할 정책과 같은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18-19세기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의 속성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그 러시아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의 지난 70년 분단사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이 불과 2백 년 동안에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인류의 주가치(主價値)인 자유, 평등,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확장시켰는가. 우리 또한 그 보편적 가치를 떠나서는 이제 살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이같이 이웃나라들의 역사는 바로 우리 역사와 직결되어 있고, 그 이웃나라들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 특히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보고 확실히 보는 첩경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 나라 언어부터 먼저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한국사 하는 사람들이 이웃나라들의 언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3

 

다른 하나는 한국사 하는 학자들의 대다수는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아직도 민족주의(nationalism)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그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다수는 국수주의자(ultranationalist)들이다. 민족주의만 해도 ’아직도 그런 사상’을 하는 판에, 그것도 모자라 앞에 ‘초(超)’니, ’극단의‘ 혹은 ‘과도한’ 이라는 한정어가 붙는다면, 그 학자는 도대체 50년 전 사람들인가 1백 년 전 사람들인가.

‘우리 역사가 최고다. 우리 역사는 자랑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를 만든 우리 조상들은 위대하다.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들 보다 강인하고 창의성도 높다. 우리는 우리의 그런 정체성, 우리의 그런 우수성을 지켜야한다’는 자긍심(自矜心)을 갖고 그런 자존심을 간직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자기 역사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는 것, 그것은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자기 역사에 대해 오직 그 생각만 갖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닫힌 생각이고 닫힌 마음이다. 역사를 공부하는데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그러한 닫힌 생각, 닫힌 마음이다. 다른 나라도, 적어도 이제 막 생겨난 신생국이 아니라면 우리만큼 다 우수하고 우리만큼 다 빛나는 역사,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선진국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직도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 사람들, 심지어는 오지(奧地)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도 그러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우수하고 그 모두에게 우리가 배우고 취할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열린 마음이고, 특히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깊이 간직해야할 열린 생각이다. 그들과 우리, 누가 더 우수하냐, 누가 더 좋은 역사를 가지고 있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좋은 공부 방법이지만, 어느 것이 낫고 못 하냐, 좋고 나쁘냐를 따지는 것은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연구방법도 공부자세도 아니다. 그것은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그 무엇에도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고 역효과만 가져다 줄 뿐이다.

역사를 가진 모든 민족은 다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서로 다를 뿐이다. 그 의미는 생활양식의 다름에서 나타나고, 사고방식의 다름에서 나타나고, 행위유형의 다름에서 나타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다름’이다. 그 다름을 존중하고, 그 다름에서 우리가 갖지 못한 것, 우리가 모자라는 것, 우리가 새로이 찾고 개발해야 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열린 마음이고 열린 학문을 하는 길이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는 그 열린 마음을 닫게 하는 것이고 열린 공부, 열린 학문을 저지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숙고해보면 그 대답은 자명해진다. 삼척동자(三尺童子)라 왜 그러한가를 안다. 구태여 학교에 가서 배우지 않아도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 그것을 꼭 한국학 하는 사람들만이 모르고 있다고 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4

 

민족주의는 한 시대의 사상이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 특유의 사상을 갖는다. 어떤 사상이든 그 시대 특유의 산물이다. 민족주의는 19세기 후기와 20세기 전기의 사상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 이태리 같은 후발국(後發國), 여타 지역에선 우리와 같은 약소국가들이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 고양(高揚)했던 사상이다. 특히 우리와 같이 식민지 경험을 가졌던 나라들은 민족정신을 고취(鼓吹)하고 민족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족의기를 불태우고 민족단합을 강화하는데 이보다 더 유용한 사상은 없었다. 우리의 지난날을 한번 돌아보라. 적어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불탔던가. ‘민족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엉엉 우는 사람들 그 때 그 시대에는 많았다.

 

지금도 그러한가? 지금 지구상에서 제대로 된 나라치고 ‘민족’, ‘민족주의’를 말하고 외치는 나라가 있는가? 민족주의에서 으레 내세우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고 있는 나라가 여전히 존재하는가. 있다면 유일하게 북한이고, 또 있다면 한국 내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이고, 또 있다면 미상불(未嘗不) 한국사하는 학자들 중 상당수를 점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국민의 절대다수는 절대로 ‘우리 민족끼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르치고 외치는 사람이 아직도 없는 것이 아님에도,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거기에 귀를 기우리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은연중 그리고 경험으로 그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을 살리고 우리민족을 지키는 길이 민족주의며 ‘우리 민족끼리’가 아니라 그 민족주의, ‘우리 민족끼리’를 초극해서, 세계의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의 세계관 그들의 물질관을 수용하며, 그들의 사회구조와 산업체계 안에서 공급과 수요를 창출해내는 것, 그 길이 바로 우리가 살 길이고 우리를 지키는 길이란 것을 치열했던 해외 경험을 통해 알아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성취(大成就)는 바로 그렇게 해서 이루어낸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의 신생국들, 140여 개국이 넘는 그 나라들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반성취(同伴成就)한 나라, 그리고 유일하게 ‘선진국 진입 성공’이라는 신화를 쓰고 있는 나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민족끼리’라는 ‘우물 안 개구리’ 행태며 사고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60년대 이래 해외로 뻗어나가며 지구촌 곳곳을 누비면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렬했던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이겨내서 더 넓은 세계로 도약해 나간 우리 국민들이야 말로 드물게 우수한 사람들로 칭찬 받아 마땅하다.

 

5

 

하지만 북한은 다르다. 북한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민족끼리’ 뿐이다. 지난 세기, 60년대 이래 북한이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일제가 만들어준 공장, 일제가 남겨준 철도와 도로, 일제 강점기의 그 산업수준 그 사회수준을 넘지 못한 채, 일제시대의 우물 안에서 그 우물 안의 개구리로 여전히 살고 있다. 그 시대 그 우물 안에서 외쳤던 구호가 ‘우리 민족끼리’이고, 그 ‘우리 민족끼리’에서 자동적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이 ‘친일 대 반일’이다. 그 60년 전의 구호, 그 60년 전의 프레임을 여전히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친일 대 반일’의 프레임은 한국사 연구자들에서 보듯이 너무 고루(固陋)하고 고루(孤陋)한 것이다. 너무 낡아서 발전의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고, 너무 세상과 동떨어져 변통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삶의 지향, 삶의 가치, 국가발전에 역류(逆流)하는 것이고 역기능(逆機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수명이 다했다.

생명이 다한 것은 어떤 수를 써도 살아날 수가 없다. 죽은 것은 빨리 땅속에 파묻을수록 좋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민족끼리’라는 북한식 비명이고 ‘친일 대 반일’이라는 북한식 파당(派黨)구분의 프레임이며, 그 추종 세력들의 맹종형(盲從形) 역사심리이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소리를 내는 교과서에 대해 “테러리스트 김구, 깡패 유관순”이라는 기상천외의 허황된 괴담까지 만든다. 제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생명이 다한 것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마지막 기름 한 방울에 매달려 등잔 불꽃이 다시 살아나기를 제아무리 고대해도 최후의 순간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누구보다 한국사 하는 사람들이 왜 한국사가 그렇게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지,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자국 역사연구보다 한국사 연구가 왜 탈바꿈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한국사연구의 지평이 그렇게 좁고 그렇게 낡은지, 이 모두 한국사 연구자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한국사 연구, 그것은 오로지 한국사 연구자들의 책임이다. 쇠퇴와 위기는 안에서 먼저 오는 것이지 밖에서 먼저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사 연구자들은 밖을 먼저 탓한다. 

 

 

리더십 인문학 ②


[송 복 | 연세대 명예교수]

다. 어떻게 버렸는가? – 철학

 

1

 

철학자들도 인문학 위기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국사학자들과 다른 측면에서 그들 또한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다. 지금 한국에서의 철학은 철저히 강단철학(講壇哲學)이다. 학교 안에서만, 그것도 강의실 안에서만 철학이 있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면 그 어느 곳에도 철학은 없다. 그렇다면 실은 학교 안에서도 철학은 없다는 말이다. 대학은 흔히 말하는 상아탑(象牙塔)이다. 속세에 있으면서도 비속세적(非俗世的)이어서 철학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거기에 철학이 없다면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한국에서의 철학은 〈철학과(哲學科)〉에만 있다. 철학과에서 강의하는 교수와 강의를 듣는 학생에게만 있고, 같은 대학 구내에서도 철학과 아닌 다른 학과에는 철학이 없다는 말이다. 국사학이 〈국사학과〉에만 있듯이 철학도 오로지 철학과에만 있다. 그나마 철학과에라도 있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안으로 더 파고 들어가 보자. 철학과에서 철학 강의를 듣는 학생이 정말 철학공부를 하는 학생이며, 적어도 학부에 적을 두고 있는 기간만이라도 철학공부를 하려는 학생인가. 철학과에 적을 두었으니 이것이 내 본적(本籍)이다 생각하고,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는 이 공부를 한번 해 보겠다는 학생이 반(半)은 고사하고, 반에 반, 아니 10%라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대학이 오늘날 한국대학들 중 몇이나 될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면 기이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기이한 것이 오늘날 한국 철학계의 현실이다. 학교강단 밖을 나와서 대중매체를 타고 철학을 강의하는 철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수는 적다해도 대중들이 좋아하고 심지어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 철학자들의 강의, 그 철학자들의 글을 강단(講壇)철학자들은 대개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듣는 대중들도 대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과는 다른 철학으로 듣고 다른 철학으로 생각한다. 구태여 분류한다면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는 철학을 정통(正統)이라 한다면, 대중매체에서의 그것은 이단(異端)이라 할까. 물론 이 경우 이단은 대학의 전통이나 권위 바깥에 있다는 의미에서의 이단이고, 그 이론이 잘못되어 있다거나 사이비(似而非)라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정통이냐 이단이냐의 구분이 아니다. 정통이든 이단이든 철학 같은 철학 강의를 듣고 철학 공부를 한다면 조금도 탓할 것이 못된다. 오히려 칭찬하고 반길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강의란 밖에서 하는 철학 강의 – 대학의 전통이나 권위를 전혀 빌리지 않고 하는 철학 강의가 지금은 대학 안에서 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 강의 보다 학생을 위해서나 일반 국민을 위해서 훨씬 더 ‘철학적 기여’를 한다 할 수 있다. 그만큼 대학 내 강단철학의 사회에 대한 철학적 기여는 적다 할 수밖에 없고, 기여가 적은 것만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그 외면은 대학 밖이 아니라 대학 안에서 강단철학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심지어는 70년대 초반까지도 우수한 학생들이 철학과를 지망했다. 일반 사람들의 철학적 관심도(關心度)도 높았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학문의 대종(大宗)으로 생각했다. 무슨 공부를 하던 먼저 철학 공부부터 해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고, 으레 큰 성취는 철학적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때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합격자가 철학과에서 몇 차례나 나왔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아마도 기절초풍(氣絶-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세대 남짓 지나는 사이에 어떻게 이토록 '학교의 철학'이 달라졌고 '세인들의 철학'이 달라졌는가. 대중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철학의 추락이 어떻게 그렇게 현저(顯著)할 수 있는가?

2

 

철학은 생각하는 것(thinking)이고 생각게 하는 것(rethinking)이다. 철학 강의는 그 강의에서 하는 말을 한 번 더 되새겨보고, 곰곰이 생각해보고, 깊이 생각해보고, 그리고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둘러보고, 인생을 성찰(省察)하도록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사색(思索)이다. 사색은 인터넷에서 하는 검색(檢索)과 달리 찾는 것이 아니라 숙고(熟考)하는 것이다. 검색은 눈으로 그냥 찾는 것이고 사색은 심중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무심코 지나갈 일도 한 번 더 생각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조용히 묵상하듯 생각게 하는 것. 그것은 철학 외에 다른 학문에서는 하기 힘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생각을 갖게 해서 사고(思考)의 풍부(豊富), 풍부한 상상력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만큼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공부가 없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는 학문이 없다.

미국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심지어는 8학년(중 2학년)만 넘으면 즐겨 사다 읽는 『철학책』이라는 이름의 철학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철학만큼 쉽고 간명(簡明)하면서 우리의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하고, 그리고 또 생각게 하는 학문이 없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동서고금 철학자들의 글과 말의 핵심이 명확하게, 쉽게 알 수 있도록 요약되고 풀이되어 있다. 이 책 맨 앞, 시작 부분을 보면:

 

“철학은 뛰어난 사상가들이나 혹은 기발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영역이나 전유물이 아니다. 철학은 매일 매일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바쁘지 않은 한가한 날을 틈타 인생(life)이란 무엇이며 세상(universe)이란 또 무엇인가를 한번 의심(wonder)해 보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일상을 영위(營爲)해 가는 그 모든 이의 것이다. 그 누구든 인생과 세상만사 그리고 우주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그 같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명쾌하고도 확실한 답은 없다. 철학은 다만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process)일 뿐이다. 그 과정은 통상적인 견해(conventional views)나 전통적인 권위(traditional authority)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적 추론(推論, reasoning)을 통해 찾아가는 것이다. “

 

철학은 이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무엇이며, 세상은 어떻게 되어있는 것이며, 도대체 우주란 무엇인가를 아무리 바쁜 일상에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산다. 그 생각이 얕든 깊든, 어쨌든 '생각'이란 것을 하며 산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누구나 ‘철학’을 하고 있고, 더 나아가선 철학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의 미국 『철학책』에서 말하는 대로의 철학을 보면, 철학은 인생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그냥 의심이며 의문의 제기는 아니다. 누구나 다 그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적어도‘생각’이라는 것을 갖고 제기한다면, 그 경우 생각은 통상적으로 하는 그런 생각, 말하자면 인습적으로, 관습적으로 판에 박힌 듯이 하는 상투적(常套的)인 그런 생각, 그런 견해에서 벗어나서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철학 혹은 철학적 생각 내지 철학적 사유는 그 상투적인 통상(通常), 인습(因襲), 관습(慣習)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것이란 의미다.

그런 통상, 인습, 관습 뿐 아니라 우리는 또 전통적(傳統的)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며 만들어진 관념이나 행위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를 전통적 권위에 의한 사고며 행동이라고 말한다. 전통적 권위는 대개의 경우 강박관념(强迫觀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분명히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자각하면서도 전통이 부여하는 권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관념, 그 행위에 사로잡혀 그리로 따라가는 것이다. 유교적 가르침인 충(忠) 과 효(孝)가 훌륭한 덕목이라 해도 거기에는 불합리한 것 또한 적지 않다. 철학한다는 것은 그런 전통적 권위에 억눌리거나 억매이지 않고 합리·불합리를 생각하고 자각하면서 행동을 살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그 무엇을 통상적 견해나 전통적 권위에 벗어나서 생각하라는 것인가. 그 생각은 자기 생각의 종류나 갈래만큼 많을 수 있다. 거기에 우리 생각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우리 생각은 천 번 바뀌고 만 번 다른 생각이 된다. 마치 구름이 일 듯 일어나고 구름이 사라지듯 사라진다. 그 구름 일 듯, 그 구름 사라지듯 하는 생각을 어찌 일일이 다 좇아갈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철학자는 강단 안에 있든 강단 밖에 있든 이 생각들을 한 곳에 모아주고 조리(條理)에 맞게 정리해주고 그러면서 스스로 조용히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을 써 주어야 한다.

판사가 판결문으로 말하듯 학자는 글로써 말한다. 글이 없는 학자는 학자가 아니다. 특히 철학자는 더 글로써 말한다. 아니, 오직 글로써만 말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강단에서나 내보이는 ‘그들 끼리’의 논문이나 책이 아니라 일반사람들의 마음을 향한, 장삼이사(張三李四), 갑남을녀(甲男乙女)의 생각에 다가가는 글이 없는 철학자는 철학자가 아니다. 칸트나 팔고 주희(朱熹)나 매문(賣文) 해서 그저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철학자, 그는 철학자가 아닌 일개의 평범한 직업인일 뿐이다.

 

3

 

철학자는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최소한 다음의 두 가지는 꼭 말해 주어야 한다. 그 하나는 본질(本質)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따진다. '본질'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심오하기까지 해서 습관적으로 그 이름 높은 서양 철학자들을 먼저 떠 올린다. 그와 동시에 대학 강단을 생각하고, 그 강단의 이름 모를 교수를 연상하고, 강단철학자들은 그들만의 화두로 그들만의 언어로, 마침내 그들만의 세계로 지금처럼 모두에게서 고립되고 모두에게서 멀리 가버린다.

그럼으로 철학자는 모두의 몸에 닿도록 말해 주어야한다. 본질이 무엇인지, 왜 본질을 생각해야하는지, 이는 오직 철학자만의 대답일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 앞서 철학자들이 먼저 대답해 주어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철학이니까. 직업으로서의 철학자가 아닌 일반사람도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은 경험으로 잘 안다. 경험으로 그들은 느낀다. 본질적이지 않는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은 부패한다. 부패는 썩는 것이고, 썩으면 사라진다.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예술가의 눈으로 보면 본질적이지 않아서 변하고, 변해서 무망하게 사라져 가는 것, 그것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을 더 자세히 더 깊게 보면 무망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현상(現象)-무늬'는 사라져도, 본질은 그대로 살아있어서,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오래 전에 죽은 시인 박재삼(朴在森)의 시(詩) 「나무」를 암송하면 문득 본질이 떠오른다.

 

사랑은 만 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渴症)

물거품 한 없이 일고

그리고 한 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구나.

 

아무리 열심히 사랑해도 사랑은 꼭 일었다 꺼져버리는 물거품 같다. 거짓도 많고 미덥지도 않고 자취도 희미하면서 사라지는 허망, 그것이 사랑으로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또 사랑을 한다. 아무리 해도 사랑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왜 그런 사랑을 하는가. 이 세상엔 그 사랑 외엔 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왜 할 것이 없는가. 다른 것은 모두 물거품이고 모두 허망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이 변함없이 내 몸에 응어리져 갈증을 일으킨다. 그 사랑이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본질이기 때문에 한없이 이는 물거품이라도 물거품이 아니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라도 허망이 아니다. 무늬-현상만 물거품이고 무늬-현상만 허망일 뿐이다.

이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본질은 인류가 경전(經典)을 만든 이래 쉼 없이 주창해 오던 것이다. 유교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시작한다. 하늘이 명(命)한 것을 본성(本性)이라 하고, 이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고(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그리고 이 본성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주를 지배하는 대원리다. 그 대원리가 인간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곧 우리의 인성(人性)이다. 이 우리의 인성인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 즉 도리(道理)이고, 그리고 도리인 이 본성을 하늘이 준 원래 모습 그대로 닦게 하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가르침은 지식을 넓히고 견문을 넓히는 것만이 아니라 이 본성을 닦고, 그 변하지 않는 본질을 깨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맹자(孟子)』 서설(序說)에도 "솔성이이(率性而已)"라는 참으로 시사적(示唆的)인 구절이 있다. "오직 본성(本性)을 따를 뿐"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부여 받은 성(性), 그것이 본성이고 오직 이 본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영속적인, 만세에 이르도록 바뀌지 않는 진정한 법은 모두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오직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곧 "순천리(循天理)", 하늘의 이치며 하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 했다. 맹자가 가장 중히 여기는 이 본성, 그것은 바로 본질이다. 맹자가 끊임없이 주창한 본성을 밝히라는 말은 바로 본질을 찾고 본질을 밝히라는 의미다. 오늘의 철학자가 이 본성을 밝히고 본질을 말해주는 것 외에 이 세상에서 다른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 다음 하나는 성찰(省察)이다. 성찰은 ‘나’에 대한 성찰이다. 누구보다 ‘나’를 먼저 성찰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만인에게 자기를 성찰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에 대한 성찰이다. 이 어려운 나에 대한 성찰, 그 성찰의 길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열린다. 이 나의 내면을 비추는 성찰의 거울, 그 거울은 누군가가 비쳐주어야 볼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철학자다. 철학자는 이 성찰의 조력자(助力者)다. 이 성찰의 조력(助力)이 바로 예부터 말해오는 '여민동락(與民同樂)' 하는 것이고, '여민동학(與民同學)' 하는 것이다. 만민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고, 만민과 더불어 정심(正心)하면서 함께 공부해가는 것이다. 철학자는 결코 홀로 하지 않는다. 철학자는 늘 함께한다. 철학자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선생이며 조력자다. 보려는 자, 생각하려는 자, 깨치려는 자의 길잡이면서 도우미다.

바로 성찰의 길잡이, 성찰의 도우미다. '성찰'은 우리가 일생동안 가슴에 늘 품고 살아야하는 가장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그 많은 낱말(words)중에서도 이 '성찰'만큼 우리를 쇄신(刷新)하는 말이 없다. 쇄신은 묵은 때를 베껴내고 좋지 못한 것, 폐단이 되는 것을 제거해서 나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쇄신을 나타내는 절묘한 구절이 역시 유교사서(儒敎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있다. 대학 2장(二章)의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 그것이다. 진실로 오늘 하루를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매일 매일을 새롭게 할 수 있고 그러면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나날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성찰이다. '나날이 새롭다'는 것은 오늘의 생각, 오늘의 행위가 어제보다 새롭고, 좋아지고, 내일은 또 오늘보다 생각이며 행동이 좋아지고 참신해진다는 것이다. 이 새로움은 바로 나를 성찰하는데서 온다. 성찰의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다. 성찰(省察)의 '성(省)'은 '반성한다'는 성이고, 또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는 의미의 성이다. '찰(察)'은 '명찰한다'는 찰이고, '밝게 똑똑히 그리고 세세히 보고 살핀다'는 의미의 찰이다. 성찰은 나를 돌이켜 보고 나를 깊이 살피는 것이다.

영어에서 성찰은 'self-reflection'이다. 'self'는 나 자신이고, 'reflection'은 반사(反射)다. 빛이 거울에 비춰 반사되듯, 거울에 반사된 내 모습을, 나로부터 나를 멀리 떼어놓고 보는 것이다. 거울은 거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지 않는다. 또 성찰은 'self-examination'이라고도 한다. 거울에 반사된 자기를 보고 어떤 자기인가를 검증(檢證)하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가, 하나하나 증거를 대듯 검사해서 내가 나를 밝혀내는 것이다. 또 'introspection'이라는 말도 쓴다. 'introspection'은 자기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위며 대장 등 내 속을 내가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듯, 내 마음을 내 생각을 다른 사람 아닌 내가 보는 것이다.

인간이란 묘한 존재다. 남은 잘 보면서 자기는 보지 못한다. 누구나 나는 내가 잘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아는 것이 ‘진짜 나(眞我)’인가, ‘가짜 나(假我)’인가 ‘사이비 나(似而非我)’인가? 그 어느 것인지 나도 모르고,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잘 안다고 주장하고 또 그렇게 굳세게 믿고 있다. 정말로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는가, 내 아내 보다, 내 친구 보다, 내 부모형제보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는가, 있다면 왜 그 잘난 사람들이 쓴 자서전(自敍傳, autobiography)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가. 그렇게 열심히 쓴 자서전에 사람들은 왜 읽고 감동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은가?

사람은 모두 자기 위치에서 자기를 보고, 자기상황에서 자기를 보고, 자기가 대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자기를 본다. 거기에 있는 자기, 거기에 비춰진 자기가 진정한 자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위치는 끊임없이 바뀐다. 내가 처한 상황 또한 끊임없이 변한다. 내가 대하는 사람들의 나를 향한 안색(顔色) 또한 아침저녁으로 달라진다. 그러면 어느 것이 나인가. 높은 위치에 있을 때의 내가 나인가. 낮은 위치에 있을 때의 내가 나인가. 혹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내가 나인가. 그 반대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내가 나인가.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을 때의 내가 나인가. 욕먹을 때의 내가 나인가. 변하지 않는 본질의 나, 진짜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는 그 진짜 나, 진아(眞我)를 보도록 해 주어야 한다. 『맹자』에 이 진짜 나를 찾는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공부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내 본 마음을 찾는 것이다." 자기의 본마음, 그것이 바로 진아(眞我) - 진짜 자기다. 그 자기를 찾는 것이 배움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를 거창하게 "학문지시야(學問之始也)" - "학문의 시작"이라고 주석(註釋)을 달고 있지만 그냥 일상으로 보통으로 하는 내 마음 공부다. 오늘날 대학에서 입에 달고 사는 '학문'이라는 말을 거기에 붙이면 사람들은 염증을 내고 천리만리 도망가 버린다.

맹자는 아주 쉽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개를 잃으면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의 본심을 잃고선 찾으려 들지 않는다." 내 본심은 바로 나다. 그렇다면 나는 내 집에서 기르는 개나 닭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왜 개나 닭은 찾으면서 주인인 나는 찾지 않는가. 나는 내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인가. 그것이 맹자의 개탄(慨歎)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하게 우리 생각을 이끌어내는가. 기막힌 추론(推論)이며 촌철살인(寸鐵殺人)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내가 나를 잃었는지 잃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타성(惰性)으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이유는 개나 닭처럼 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사대육신(四大六身), 내 몸 뿐이다. 그 몸의 주인인 마음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그 마음 잃음의 개념도 없다. 그 잃음에 대한 분별력 또한 가질 수 없다.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취생몽사(醉生夢死) 하듯, 아무 뜻 없이 이룬 일도 없이 한 세상 흐리멍덩하게 살다 간다. 그래서 중용의 "하루, 하루를 새롭게 산다"는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의 가르침이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4

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일신(日新)시키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하루하루 새롭게 사는 삶을 갖도록 하는가. 나는 그 날 그 날을 뒤돌아보거나 뉘우치는 일 없이 습관적으로 그냥 산다. 변화나 새로운 삶을 꾀하기는커녕, 새로운 기대나 다른 내일에 대한 별다른 소망도 없이, 심지어는 나태하다 할 정도로 굳어진 습성으로 살아간다. 이미 말한 대로 우리의 일상은 타성(惰性)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타성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 그것은 남이 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남이 가는 길만 의심 없이 무사유(無思惟)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나, 새로운 나를 찾는 산문(散文)이나 시(詩)를 가끔 읊조린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詩) 「가지 않은 길」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젊은 학창시절 아마도 이 시구(詩句)를 한번쯤 암송하지 않은 학생은 드물 것이다. 나이 들면 더 절실히 이 시가 암송된다.

 

노란 숲속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네.

안타깝게도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는

나는 한 사람의 나그네

오래 동안 서서

덤불속 굽어져 내려 간 길

눈이 닫는데 까지 멀리 바라보았네.

 

(중략)

 

훗날 훗날에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이네

숲 속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 그 많은 사람들이 걸어온 길, 그 뭇사람들이 선택한 길,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발자국이라고는 오직 짐승들의 발자취뿐인, 덤불숲으로만 가득한 그 길을 나는 헤치며, 열며, 새 길을 만들어 갔다. 마침내 나는 새 길을 만들어 걷는 새 사람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연 그 길을 따라서 왔고, 그리고 그 사람들도 새 사람, 다른 사람들이 됐다.

프로스트의 이 명시(名詩)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도전(挑戰)을 고창(高唱)하는 시(詩)이기도 하다. 청춘은 도전이다. 무거운 인생의 짐, 그 짐을 다른 새로운 짐으로 바꾸어 더 많이 더 즐거이 지려는 도전이다. 그 새로움에의 도전, 그 도전의 의지가 흔들림이 없을 때 그는 언제나 하루하루를 새롭게 사는 사람이다. 이 시(詩)는 또 젊은이들에게 혁명을 고창하는 시(詩)이기도 하다. 청춘은 혁명이다. 아버지가 물려주는 기득권(旣得權)을 받지 않는, 아버지와 다른 새로운 나의 성취를 만들어가는 혁명이다. 그 혁명의 의지가 불타고 있을 때 그는 하루, 하루를 새롭게 사는 사람이다.

프로스트의 시(詩) 「가지 않는 길」 과 비슷한 또 하나의 격발(擊發)로서, 내 타성에 대한 방아쇠 당기듯 한 반발 혹은 강한 감정의 솟구침을 나타내는 ‘인사아취(人捨我取)’란 오랜 교훈이 있다. 남이 버릴 때 나는 그것을 취한다는 의미다. 남이 버리는 것의 대다수는 시세(時勢)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시세는 어떠한 시기의 추세(趨勢)다. 추세는 그 때 그 때의 흐름이며 경향이다. 그것은 대개 목전의 이득, 기껏해야 시간적으로 단기적인 이익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추세는 그 어떤 추세든 바뀐다. 그 바뀌는 추세에도 그 추세를 추종하는 세력이 반드시 있고, 그 세력들은 장기적인 것, 멀리 있는 것, 그것은 결코 취하려 하지 않는다.

기초적인 것 본질적인 것, 그것은 대개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에도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라 생각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으레 거부하고 으레 버린다. 학문으로서 인문학은 그 버리는 것 중의 하나다. 문학이며 역사며 철학, 그것은 지금 당장 밥이 되지 않는다. 목전(目前)이든 단기적이든 이익(利益)을 보증(保證)해주지 못한다. 법학이며 경영학 혹은 의학은 다르다. 그것은 현재적이며 즉각적이다. 그것은 확정적이며 구체적 현실이다. 그 현실을, 그 확실한 이득을 누가 버리려 할 것인가. 천에 한 사람의 예외, 그런 사람은 드물고, 모두 그것을 취하려한다.

이때 인문학을 해보라. 문학, 역사, 철학 등, 그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것, 남이 버리기만 하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을 해보라.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다. 그것이 나의 장래를 보장한다. 훌륭한 나의 밥줄이 된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하루하루를 새롭게 해 준다. 목전의 이익을 추종하는 그 추세 추종자들의 진절머리 나는 타성을 나는 갖지 않아도 된다. 타성은 반드시 종언(終焉)이 있다. 지금의 타성에 젖어 이득을 구하는 세력, 그 세력은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다른 세력이 들어선다. 인사아취(人捨我取)-남이 버릴 때 나는 갖는다. 인문학의 시대가 곧 도래 한다.

나는 또 나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는가. 그 나를 보고 나를 찾는 것을 성찰이라 했다. 나는 어떻게 성찰하는 인간, 성찰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를 보고 나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보고, 인생의 원리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고 철학의 문제다. 철학자가 반드시 말해주어야 하는 최고의 철학적 성찰이며 철학적 과제다. 철학자의 임무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자' 이전에 우리 모두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일깨워주는 성찰의 스승이다. 우리 모두를 비록 일순일망정 멈춰 서서 자기를 곰곰이 돌아보도록 깊은 생각과 사색, 사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성찰의 안내자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철학자를 찾는다. 지금 철학자의 ‘수요’(需要)는 절정에 달해 있다. 지금이 바로 철학자의 시대다. 그 현실은 확연하고 그 증거는 명백하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들끼리’의 싸움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우리끼리' 싸운다. 그 싸움은 치열하고, 그 치열함은 그치지 않는다. 그 투쟁의 치열함은 남북(南北)갈등보다 더 복잡한 우리끼리의 치열함이다. 남북갈등은 치열하다 해도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싸움이다. 적의 단점도 알고 나의 단점도 아는 싸움이다. 그러나 우리끼리의 이 싸움은 남의 단점은 아는데 내 단점은 모르는 지피부지기(知彼不知己)의 싸움이다. 이 우리끼리의 싸움은 타협점이 없다. 상대의 단점은 훤히 보이는데 내 단점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는 언제나 잘못하고 있고 나는 언제나 옳다. 상대는 언제나 책임을 회피 하는데, 나는 회피할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예부터 우리는 하루도 그칠 날이 없이 싸워왔다. 외국인과의 싸움이래야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합쳐 10년도 안 된다. 조선조 500년 그 기나긴 세월, 모두 '우리끼리'의 싸움이었다. 내세우느니 유교며 예의, 도덕이었는데 왜 그렇게 쉴 날 없이 싸웠는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절대빈곤 하에서는 양반 벼슬아치는 양반벼슬아치 끼리, 상민천민은 상민천민 끼리 만나면 싸운다. 그것이 『맹자(孟子)』의 유명한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다. 일정한 생업(生業)이 없고 재산이 없으면 선한 마음도 도덕심도 없어진다. 양반 벼슬아치도 권력에서 물러나면 그날부터 무항산이고, 그래서 일반백성 보다 더 죽기 살기로 싸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무항산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역사에서 지금처럼 풍족한 시대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지금보다 도덕적 수준이 높은 때는 없었다. 우리 이전에는 불특정 다수가 모여 사는 사회공동체에 대한 도덕의식, 도덕개념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오직 충(忠), 효(孝)이고, 아는 친지들끼리의 예의범절이었다. 그것이 전체사회 혹은 국가전체로 이어지는, ‘그들끼리’가 아닌 오상(五常)으로 넘어 설수가 없었고, 그들 울타리 밖의 염치며 신뢰로 쌓아 갈 수가 없었다.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그들끼리’ 아닌 오상(五常)으로 넘어 설수 없었고 그들 울타리 밖의 염치며 신뢰로 쌓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높다는 그 도덕적 수준도 우리들 전(前) 시대의 그것 보다 높다는 것이지, 내가 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 정도로 높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나를 모른다. 나를 못 보고 있다. 나를 못 보니 내 단점 내 잘못이 보일 리 없다. 하지만 남은 내가 아니니까 잘 보인다. 남은 객체이니까, 내 밖의 유기체니까, 속속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그 남의 단점, 잘못된 것이 더 유난히 잘 보인다. 나는 안 보이고 남의 것은 잘 보이고, 너무나 당연히 내 탓은 없고 남의 탓만 있다. 그 남은 어떤가. 그 남은 또 자기 탓은 없고, 그의 남인 나만 보고 탓한다. 그 남과 나의 싸움판은 절로 만들어지고, 그 싸움판의 싸움은 아무도 피할 수가 없다. 가는 길은 오직 하나, 남과 북이 아니라 ‘우리끼리’, ‘너와 나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다.

300여 명의 젊은이가 수몰되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져도 그 사태의 장본인조차 남 탓을 한다. 세계 수준의 잠수․구조 장비와 인력을 보유하고, 여객선 안전을 위한 규정도 충분히 갖추고, 거기에 재난 대응 매뉴얼만 해도 수백 가지 넘게 갖고 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순순히 움직이기만 해도 되는데도, 상상할 수 없는 참변을 당한다. 그러니 경제규모 세계 15위를 자랑하는 나라가 산업재해 연간사망자 수만 2,400명,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라는 불명예를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자기를 못 보는데서다. 자기를 못 보느니 자기 책임을 모른다. 남에게만 모든 탓, 책임을 돌리고, 책임질 일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조차도 기필코 회피한다. 으레 하는 말은 "나는 돈을 적게 받았다", "저임금으로 혹사당했다", "죄는 나를 부린 사람에게 있다", "나에게도 죄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많은 죄가 있다. 누가 감히 누구에게 돌을 던지려 하는가?"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고, 그리고 나의 마음가짐이고, 나 아닌 남, 그의 마음 상태라고 한다면 너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스스로 알아 책임지려고 하는 자가 없는데, 누가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벌하겠는가. 자기를 못 보니 자기를 모르고, 자기를 모르니 깨칠 능력도 없다. 그 악순환은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그 고리가 계속되는 한 ‘우리들끼리’의 싸움은 치열하다.

 

5

 

그것을 누가 깨쳐 줄 것인가, 그 고리를 누가 끊어 줄 것인가. 부처가 왕림해서 해주실 것이며 예수가 재림해서 해 주실 것인가. 공자, 소크라테스가 다시 오셔서 큰 가르치심을 내리실 것인가. 그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면, 그 깨우침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지자(知者)는 누구이며 학자(學者)는 누구인가. 당연히 철학자일 수밖에 없다. 오직 철학자만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자를 부르고, 철학자를 갈망하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철학자의 시대다. 아무도 철학자를 대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만큼 나를, 나의 인생을, 내가 사는 세상을 그 원리 그 본질에 깊숙이 들어가 함께 대화해 줄 수 있는 학문은 없다. 철학만큼 내 속을, 내 인생과 세상 속을 버선발 속 뒤집듯 속속들이 뒤집어서 밤새워 흥미진진하게, 그러면서 감동적으로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학문은 없다. 철학만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다차원, 다 측면, 다 관점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학문은 없다. 오직 철학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른 학문들, 예컨대 정치학이나 경제학, 사회학, 경영학 등은 철학처럼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아닌 집단이며 조직이 연구 대상이고 분석의 대상이다. 이 학문들은 철학처럼 존재에 대한 사유(思惟)며 관조(觀照)를 본업으로 삼지 않는다. 이들 학문이라고 어찌 ‘사유’며 ‘관조’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 사유는 외면 세계의 변화와 현상에 대한 사유다. 그 관조 또한 사물이나 현상에 드러난 대상들을 관찰하고 관조할 뿐이다. 마음으로 나라는 존재의 내면세계를 곰곰이, 조용히 그리고 깊숙이 들여다보지도 않고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를 찾는다. 철학자만이 잃어버린 ‘나’를 찾아 줄 수 있다. 철학자만이 남의 얼굴을 너무 잘 아는 나를, 나로 하여금 그만큼 내 얼굴도 알게 해줄 수 있다. 나는 남의 얼굴의 흉터를 너무 잘 본다. 그처럼 내 얼굴의 흉터도 보게 하는 거울, 그 거울 같이 나를, 내 속을 비춰주는 철학자를 고대한다. 아니, 너무 오래 동안 고대해왔다. 우리는 그 학수고대(鶴首苦待)의 신호를 이미 오래 전에 철학자들에게 보냈다. 신통치도 않은 외국 철학자들, 그들의 신통치도 않은 저서와 말들을 우리에게 보내올 때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매료당하는 척 하면서 우리 철학자들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그들의 분루와 분투를 촉구했다.

그러나 우리 철학자들은 멀리 있었다. 우리와 떨어져 고립의 성(城)에 울타리를 치고 ‘그들끼리’만 기거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쉼 없이 '철학의 현실화 - 현실의 철학화'를 내세웠다. 새로운 화두로 '융합'도 설명하고, IMF사태, 천안함 폭침, 심지어는 ‘안철수 현상’까지도 다루었다. 그래서 철학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왔는가. 그 '철학의 현실화'가 다른 사회과학자들의 그 프레임에 갇힌 설명들과 다른 관점, 다른 메시지로 그것을 읽는 이들을 설득했는가. 그 '현실의 철학화'가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일상으로 하는 그 진부한 주장들과 다른 차원 다른 콘텐츠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철학자들의 그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여전히 철학은 일반 사람들에게서 멀리 있지 않은가. 철학은 여전히 강단에만 머물고 ‘그들끼리’의 학문으로 ‘그들끼리’ 만의 학회를 만들고 ‘그들 끼리’만 소통을 강화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철학하는 것’이고 강단 밖, 객석에서 하는 소리는 모두 객설, 객론, 객담으로만 치부하진 않았는가. 다른 나라의 철학자들처럼 혹은 반세기 전의 우리 철학자들처럼 '여민동락 여민동학' 하는 학문으로 ‘철학하는 것’을 생각했다면 지금 '우리끼리'의 이 치열한 싸움에 중재자(仲裁者)로서의 철학자의 기여가 엄청나지 않았겠는가.

불과 얼마 전 미(美)하버드 대학의 철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우리 서점가를 뒤흔들었다. 조금 뒤에 나온 『왜 도덕인가?』란 책도 마찬가지로 서점가를 지배했다. 한국사회에 그야말로 샌델 교수의 돌풍이 일었다. 그것은 선풍(旋風)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돌풍(突風)이었다. 불과 얼마 사이에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그것도 2권 다가 아닌 『정의란 무엇인가』하나만으로 1백만 부를 넘겼다. 원산지인 미국보다도 더 많이, 아니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보다도 더 많이 팔렸다. 독서인구가 미국이나 일본에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그 책이 어째서 그렇게 많이 팔렸는가.

그 책을 한 번 더 자세히 읽어보라. 절대로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우리 독자들의 취향, 우리 독자들이 기대하는 해답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특별히 다른 시각, 다른 지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다른 내용, 다른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독자들의 요구대로 '바로 이거다' 하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확한 제시나 똑 부러진 가르침이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든 사고, 모든 판단이 미국식으로, 답은 모두 상대적이고 풀이는 모두 상황논리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하나도 간지러운 데를 제대로 긁어주는 것이 없다. 아무리 읽어도 간지러울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었는가. 어떻게 그토록 최고의 인기를 모았는가. 그때 많은 해설자들은 ‘정의’에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굶주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돼서 정의를 그만큼 갈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일본은 우리만큼 정의를 갈구하지 않고 미국 또한 우리만큼 정의를 갈구하지 않아서 밀리언셀러가 못되었단 말인가. 일본사회, 미국사회는 우리사회보다 훨씬 ‘공정한 사회’가 돼서, 그만큼 정의가 살아있어서, 구태여 ‘정의’ 문제를 끄집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근대국가가 만들어진 이래 ‘정의’와 ‘공정’은 모든 나라가 공통적으로 갈구(渴求)하는 문제다. 어느 나라든 지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모든 나라가 다 목이 멘 듯, 목이 마른 듯 애타게 갈망하고 있다. 오직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근대화를 우리보다 앞서 경험한 나라 사람들은 정의란 시간과 장소, 그때의 상황, 행동하는 사람들의 처지와 행위결과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무엇이 정의이고 어느 것이 정의 아닌가에 대한 판단이나 결정은 결코 일목요연한 하나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의에 대해 그런 철학을 갖고 있고 철학자들은 그런 철학을 끊임없이 말해 왔다.

그렇다면 샌델 교수의 인기, 밀리언셀러가 된 그의 저서는 우리만이 ‘갈구하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만의 ‘빈곤한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철학의 빈곤’에 굶주려 철학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철학자들이 자기들만의 성곽을 쌓지 말고, 자기들만의 우물을 파지 말고, 헤르만 헷세의 새의 알, 그 알을 깨고 제발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알은 새의 세계다. 그러나 그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픔으로 해서 새는 알이 아닌 세계를 연다. 새가 됨으로써 비로소 넓은 세상을 만난다. 수많은 군상들을 만난다.

샌델처럼 군상들을 향해서 말해보라. 그들이 귀를 기우릴 수 있도록 뭐든 말해보라. 본질이든 나라는 존재든, 자유, 평등, 법치, 인권 그리고 정의와 공정, 박애와 관용, 너무나 철학적으로 설명할 것이 많다. 그 무엇이 화두가 되던 철학에선 빙산의 일각이다. 밖으로 나오면 그 어느 것도 철학적 설명의 대상이 아닌 것은 없다.

쉽게 쉽게 그들의 심장이 울리도록, 그들의 마음에 다가가 그야말로 ‘철학적’으로 말해주라. 철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샌델이 말하는 것처럼 한 번 더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그런 것인가. 의심을 갖고, 각자가 모두 곰곰이 깊이 생각해 보도록, 그리하여 어떤 문제든 ‘자기만의 생각을 갖도록’ 생각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