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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대표적 역사파괴 - 프로이센 王宮 폭파·옛 중앙청 철거

이강기 2015. 10. 27. 23:06
20세기의 대표적 역사파괴 - 프로이센 王宮 폭파·옛 중앙청 철거
 
東獨 정권 시절 과거청산 위해 폭파한 王宮을 6억7000만 유로 들여 복원키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른 역사적 건축물 철거 결정은 그 정권이나 이데올로기가 몰락함과 동시에 호된 비판을 받게 마련이다

李 璿 求 숭실大 건축학부 교수

1941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大 독어과 졸업. 베를린工大 공학박사. 건축·환경·사회대학 교육·문화·사회건축 연구소(공학박사), 美 컬럼비아大·美 프랫大 풀브라이트 원로 방문교수 역임. 저서: 「통일독일 현대건축」, 「유럽의 도시와 건축 1960~1990」 등.


東獨 정권, 프로이센 왕궁 폭파 철거
<東獨 정권에 의해 폭파된 프로이센 王宮(왼쪽)과 金泳三 정권에 의해 철거된 중앙청 건물(오른쪽). 두 건물의 철거는「과거청산」을 내건 정권의 독단과 無知의 소산이었다.>
 
  브란덴부르크門에서부터 시작해 「城 앞 광장」까지 2.5km에 이르는 「운터 덴 린덴」 거리는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市의 상징적 街路이다.
 
  「운터 덴 린덴」 거리 양편으로 古宮, 兵器庫(現 독일사 박물관), 훔볼트 대학교, 국립도서관, 국립 오페라座 같은 18세기 바로크 및 新고전주의 시기의 기념비적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街路 중앙에 2列로 植栽(식재)된 보리수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운터 덴 린덴」 거리가 끝나고, 슈프레 운하를 가로지르는 城橋(성교)를 건너면 곧 칼 리프크네히트 거리가 시작된다.
 
  이 거리 좌우편으로 두 개의 광장이 펼쳐진다. 거리 북쪽에는 싱켈의 古미술관 앞 잔디광장인 루스트가르텐이, 남쪽에는 東獨 시절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으로 불리던 「城 앞 광장」(슐로츠 廣場)이 있다.
 
  도시계획적 조화와는 거리가 먼, 연병장을 상기시키는 「城 앞 광장」 주변에는 東獨 시절의 유산인 국가평의회 건물, 외무부 청사(1995년 철거), 인민회의 청사 겸 국민 위락시설이던 「공화국 궁전」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도시의 흉물로 남아 있는 「城 앞 광장」은 격동의 독일 역사가 남겨 놓은 상처이다.
 
  「城 앞 광장」이라는 광장의 이름처럼, 이 광장은 원래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王家의 王宮이 있던 자리이다.
 
  王宮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의 戰禍에도 불구하고 그 골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1950년 7월22일 「독일민주공화국」(東獨) 국가평의회 의장(대통령) 발터 울브리히트는 독일제국주의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王宮 건물 철거를 결정했다.
 
  東獨 공산정권의 이같은 반달리즘(야만적 문화파괴 행위)에 대해 독일 안팎에서 거센 반발이 제기됐지만, 東獨 정권은 1950년 9월6일 王宮을 폭파, 철거했다. 철거된 王宮 옛터는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으로 命名되어, 東獨 공산정권 시절 대규모 官製 데모를 벌이는 장소가 됐다. 광장 주변으로는 공화국 궁전, 국가평의회 청사 등이 들어섰다.
 
 
  근대 국민국가 성립기 시대정신을 상징
 
  東獨 공산정권에 의해 철거된 호엔촐레른家의 王宮은 바로크 시기의 유럽 건축양식은 물론 당시의 思想的 潮流(조류)를 잘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이 王宮은 1451년 이 지역의 領主이던 브란덴부르크 選帝侯(선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지닌 대귀족)의 居城으로 지어졌다. 大選帝侯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독일 전역이 초토화된 후, 자신의 領地의 재정을 정비하고, 도시와 지방을 재건하며, 군대를 양성했다. 그는 독일을 침략한 스웨덴 군대를 물리치고, 프랑스에서 핍박받던 위그노(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받아들여 산업기술을 일으켰다. 그는 네덜란드의 水利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運河를 만들고 농토를 개간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로 프로이센 왕국을 창건한 프리드리히1세(1657~ 1713)는 대대적인 王宮 改築(개축)을 명령했다.
 
  프리드리히1세는 자신의 王宮과 首都가 가톨릭 세계의 영광을 상징하는 로마 교황과 스페인 국왕에 대한 新敎세계의 대응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태양왕 루이14세의 루브르宮,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王家의 융성을 자랑하는 빈과 프라하, 영국 런던의 서머싯 거리, 러시아 제국의 에르미타주宮 등 주변 列强들의 王宮이나 首都에 비견할 수 있는 곳으로 개조하기를 원했다.
 
  조각가 겸 건축가인 안드레아스 슐뤼터는 1698~1716년 일련의 보수·재건작업을 통해 中世의 음침한 古城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王宮으로 개조했다. 두 개의 中庭을 중심으로 1200여 개의 방을 갖춘 3층 높이의 王宮은 이후 200여 년 동안 호엔촐레른 王家의 거처가 되었다.
 
  王宮의 개조 공사가 진행되던 시기는 독일 땅에서 30년 전쟁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內亂이 평정되고, 터키인들의 빈 침공을 저지한 시기였다.
 
  이 시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시기 각국의 왕실과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을 후원, 장려한 것도 이러한 사회사상의 반영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질서와 권위, 도덕성이 회복되고 문화가 부흥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때부터 유럽은 근대 국민국가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호엔촐레른家의 王宮은 이와 같은 근대 시대정신의 상징이었다. 1950년 東獨 공산정권은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제국에 대한 반감, 과거를 씻어 버리고자 하는 강박관념에서 이 왕궁을 헐어버렸다.
 
 
  문화예술 공간으로 복원
 
  1993년 「베를린 도시성곽후원회」는 옛 王宮 터에 도시성곽의 축소모형을 만들어 놓고, 옛 성곽 및 王宮 복원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1999년 7월 독일연방정부와 베를린州정부 공동위원회는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2001년末 박물관·도서관과 문화예술의 집, 만남과 대화의 마당, 대규모 축제 행사장을 포함하는 王宮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2002년 4월17일 위원회는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연방과 州정부는 복원에 필요한 재정과 설계공모를 1년 내에 검토키로 결정했다.
 
  총 6억7000만 유로(韓貨 9380억원)로 추정되는 재건비용 중 성곽 立面 복원에만 8000만 유로(韓貨 1120억원)가 소요된다. 베를린성곽 협회는 벌써 500만 유로(韓貨 70억원)의 성금을 모금했다.
 
  현재 독일경제의 어려움을 감안할 때, 성곽재건을 위한 설계공모까지 3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공모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이것이 곧 성곽재건 공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02년 7월4일 독일 연방의회 의원들은 도시성곽의 재건을 절대다수로 결의했다. 2003년 11월6일 연방의회 문화분과위원회는 만장일치로 東獨 시절 프로이센 王宮을 철거한 자리 주변에 세운 「공화국 궁전」의 철거를 결의했다. 재건될 王宮은 「훔볼트 만남의 장소」로 命名되어 철거될 「공화국 궁전」을 대신해 문화예술 행사 및 축제, 각종 회의의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디터 레만」 프러시아 문화유산소유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현재 베를린市 남부 딜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非유럽권 예술품들이 새로 건립될 王宮미술관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길 건너편에 있는 「미술관 섬」에 전시돼 있는 古代 문화유산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1970년대에 사회주의적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공화국 궁전」이 결국 실패로 끝났음을 감안해, 성곽은 주변의 역사적인 건축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옛 모습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빌헬름 폰 보딘」 베를린성곽협회(베를린도시성곽후원회의 後身) 회장은 성곽재건 일정을 이렇게 밝혔다.
 
  <2005~2006년 건물 설계공모를 해 1년 후에 당선자를 결정한다. 건축기간만 4년여가 걸릴 것을 감안하면 성곽은 빨라야 2010년 이후에야 완공될 것이다. 성곽 건축에 필요한 8억 유로는 성곽협회를 통한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YS정권의 중앙청 철거 연상
 
  2004년 4월27일 베를린성곽후원회는 성곽기념 주화를 발행했다. 10유로 주화의 양면에는 베를린 성곽과 베를린市 紋章(문장)이 조각돼 있다. 이 기념주화의 판매로 모금되는 25만 유로는 성곽의 유리창 제작비용에 사용된다.
 
  東獨 공산정권은 「독일제국주의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지워버리기 위해 호엔촐레른 王宮을 철거했고, 통일독일 정부는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불구하고 王宮과 성곽의 복원에 나섰다. 金泳三 정권 시절 舊중앙청 건물의 철거를 떠올리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도 보존할 가치가 있으며, 비록 조선총독부 건물로 지어지긴 했으나 그 안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도 만들어져 왔다』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日帝 잔재를 철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金泳三 정부는 중앙청 건물 철거를 강행했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역사적 건축물이나 유적들을 훼손하는 것은 역사상 흔히 있어 온 일이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居城이 파괴됐다. 히틀러는 베를린市를 나치즘 철학에 입각한 제3제국의 새로운 首都 「게르마니아」로 전면 개조하려 했다. 東獨 정권은 호엔촐레른 王家의 王宮을 폭파, 철거했다. 중국의 홍위병들은 儒敎의 祠堂과 불교 및 도교 사찰들을 파괴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우상숭배 금지라는 이슬람敎의 가르침을 敎條的으로 해석해 바미안 石佛을 砲擊, 파괴했다.
 
  하지만 역사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건축물의 철거가 그다지 현명한 결정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른 역사적 건축물 철거는 그 정권이나 이데올로기가 몰락함과 동시에 호된 비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2004년 10월 월간조선에서 퍼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