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90년대 중반에 한 시인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이
진부해졌다고 쓴 구절을 보고서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지난 세기에는 그래도 혁명이란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상징적 수사(rhetoric)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말로 쓰이는 경우를 찾기가 어렵다.
80년대에는 혁명을 말하면서 낭만을 말하는 것이 금기였지만, 이미 우리 세대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납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혁명을 낭만과 동의어로 취급하기 일쑤일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 속에서도 혁명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고 그 자리에 진보라는 말이 시민권을
얻은 지 오랜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진보보다 혁명이 매력적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진보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 불편함이 따른다. 진보는 상대적이다. 과거나 현재에 견주어서, 또는 보수와 비교하여 설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말 그대로 운명을 바꾼다는 의미이니 기성의 체제, 질서, 제도, 가치를 바꾸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단호한 정신과
의지가 담겨있다. 혁명이 정권에 참여하는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데 그친다면 이미 혁명은 진부한 것이다. 대다수의 혁명정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혁명이 내건 이상은 탈색되었다.
정치무상이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상투적인 결론을 말하고 싶지 않다. 혁명 동기의
순수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혁명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과 그 후임자들의 변질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속절없는
일일 것이다. 정치와 권력이 결정적인 문제로 보일 지라도 그것에 참여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혁명적이지 않을 때 얼마나 허망하게 붕괴하는 것인지는
20세기 후반의 역사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증명한 것이니까. 혁명이 사람들이 벌이는 사업이라면 그것도 역시 사람이 가진 요구와 의지의 실현과정일
수밖에 없다. 혁명을 정치적인 태도나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혁명의 근본 동기라 할 수 있는 먼저 혁명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인가에 따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이 진부해진 것이라면 혁명이라고 이름하는 사회적 운동의 요구가 이미 낡은 것이거나
기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에 한편으로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에 대한 허무 때문이 아니라 지난 세기에 내세웠던 요구들이 매력을
잃어간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곤에서 해방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그렇다. 신분적 억압과 계급적 차별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역시 그렇다. 정권은 그 사회 구성원의 의사로 조직되어야 하는가? 역시 당연하다. 그것의 정당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혁명이
진부한 것이 아니라 그 요구의 보편성과 절실함이 우리 사회에서 시간이 갈수록 약화되어 왔기 때문에 진부해지는 것이다.
2.
지난 세기의 혁명에서 대중의 빈곤 문제가 혁명의 강력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세계적 범위에서 보편적 현상이었다.
혁명운동이 대중들의 지지를 쉽게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빵을 주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회적 본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사람이 의식주(또는 食衣住)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사치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법과
도덕을 아무리 고상하게 정해서 강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지되고 지켜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벌이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쉽게 법률과 윤리의식으로 재단할 수도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는 어느 정도인가?
완벽하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진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그러나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저개발국의 사회구성원
대다수와 비교할 때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사회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세대 전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그 차이는 명확해 질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부자와 빈자의 격차에 대해서 생각하였을 때는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 명제가 주는 설득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빈부 비교를 통하여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빈곤문제를 사회의 보편적 과제로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당시에 빈곤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빈곤에 대한 관점과 해결 방식은 달랐지만 한 세대 전에는 정권을 담당하는 측이나 사회운동 측에서나
빈곤은 제1차적인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기아로 인하여 육체적 생명이 위협받는 사회구성원이 있다면 그 절박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해결에 선차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사회운동이 가질 수 있는 이해관계를 떠나 선차적인 주목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의무였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가 보편성을 띠는가 아니면 부분으로 한정되는가를 나누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간 빈곤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온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거와는 빈곤 문제에 대하여 사뭇 달라진 논지를 발견하게 되면서다. 그들로부터
우리 사회의 절대적 빈곤이 감소한 것을 인정하면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다소의 과장이 있을 수 있다하더라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를 대하는 것과 상대적 빈곤을 대하는 문제의식은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경차 타는 사람이 중형차 이상을 타는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 국내 여행하는 사람이 해외 여행하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빈곤, 갈비 정도의 외식을 하는 사람이 호텔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빈곤감, 소형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이 최고급 빌라에서 사는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박탈감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사회적 운동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사람들의 의식주 문제에서 가장 기본을 이루는 것은 역시 먹는 문제이다. 사람은 무엇이기
이전에 신진대사를 해야하는 생물학적 존재임을 벗어날 수 없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인지상정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쌀독이 그득해도
인색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절대적인 빈곤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가면서 남을 돕는 것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적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먹는 문제에 허덕이는 상태에서 참여하는 사람보다는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북한처럼 ‘올해는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선차적인 힘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한다면 다수의 국민들은 그의 정세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상을 보면 양적으로는 기아보다 과다한 열량의 섭취 때문에 나타나는 비만과 성인병 등의 부작용들이 압도하고 있다. 여성들이 건강유지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만약 한 세대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기성의 사회운동은 산업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나타나는 새로운 빈곤문제와 격차에 대해서는 비교적 둔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의 많은 부분이 사회운동을 계급운동으로 제한하여 산업노동자를 운동 기반으로 생각하는 조건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보와 지식의 격차가 새로운 사회의 문제로 제기될 것은 명확한 현실이다.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문제라 할 수 있는 정보의 소외와 지식정보의 격차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지식과 정보가 산업을 넘어서 사회 공동의 자산,
인류의 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를 운동과제로 받아들여야할 때가 온 것이다.
3.
동양의 고전적인
정치 명제 중에 ‘가까운 사람은 기쁘게 하고 먼 곳의 사람은 오게 한다(近子悅 遠子來)’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평천하의 방법으로써 왕도정치의
요체를 제기하고 있다. 한 제후가 왕도정치를 시행하여 자신의 제후국을 잘 이끌어 다른 제후국의 주민들을 이주하게 하거나 민심이 기울어지게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역사는 이와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그 결과가
아니라 국적에 대한 생각이다.
사람들에게 고정된 영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혈통과 성(性), 성명, 그리고 국적 같은 영역들로
보인다. 혈통, 성명, 성전환이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사회운동이 전통적으로 포섭해온 문제라 할 수 없고 국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민주국가의 경우 주민들에게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의 경계를 넘어가면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외국에 나가서 산다는 것이 개인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의사를
넘어서는 국가라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야 국민국가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그 실체를 인식하기가 어렵지만 해외여행을 한다든지 장기간의
외국거주가 필요한 경우를 당하게 되면 한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여권, 영주권, 시민권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라는 사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1948년에 국제연합(UN)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을 보면 13조 2항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국을 포함한 어떠한 국가로부터도 떠날 권리와 자국에 돌아갈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자국을 임의로 떠날 수
있다하더라도(현실에 있어 국가에 따라 이것도 이런 저런 제한이 있기 마련이지만) 다른 국가가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우루과이라운드와 그로 인해 출범한 WTO체제는 상품, 기술, 자본의 이동에 제한을 가하는 환경을 크게 약화시켜 놓았지만 노동력의
이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결정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환경과 노동에 대한 국제적인 협상이 앞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문제에 한정시켜
예상해 본다면 국제적인 범위의 협상은 노동조건의 기준을 우선적인 의제로 삼을 것이 명확하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조건이 열악한 국가와 형편이
좋은 선진국들 사이에 심각한 협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지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과 그것이 동반할 이민의 자유에 대한 논의와 협상으로까지 나갈
것이라는 예측은 성급해 보인다.
대한민국도 불법 입국과 불법 취업, 불법적인 정착민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문제도 적지 않다.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동정하여 그들의 인권을 보장해주려는 운동단체와 인권운동이 생겨나서 활동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주어진 문제만을 인식하고 해결해 나갈 뿐 주어 질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여
취업은 물론 영주권과 국적을 취득하게 하여야 할 것인가,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준을 만들 것인가? 이런 문제가 아직 공론으로
삼아야 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몇몇 나라에서는 자국의 외국인 노동자 정책에 대한 태도가 정치적
당파의 색을 판단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머지않아 대한민국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은 식민지를 개척하여 원료, 노동력을 얻고 상품의 판로를 확대하며 자본을 증식하는 대상으로 삼아 국부를 축적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산업에서 1차 원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격하게 줄어들고, 상품수출 대상으로서 후진국은 구매력 수준이 크게 제한되어있다는 문제가 있으며,
선진국이 산업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영역에서 그들의 산업에 적합한 노동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후진국을 찾는 것도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요인들과 함께 후진국에 사회간접자본의 부족과 사회적 불안정성 등의 요인이 더해지면 자본투하지로서 매력은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상황이 개입주의와 함께 고립주의라는 외교정책을 가진 집단이 양립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이 ‘우리끼리 살자’는 주장이다. 선진국들 입장에서 보면 자국의 시장을 잘 관리하는 동시에 선진국들 상호 간의 경제교류에 의해
이득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압도적이라서 뒤떨어진 나라에 대하여 과거의 식민지 쟁탈전과 같은 열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현재의 선진국이 동양의 왕도정치와 같은 정책을 쓰고 있는가? 국가란 시민권자에 대한 기득권을 보호할 수는 있어도 자국민이
아닌 사람들까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외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이슈로 제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국의 이익과 관련이 되어있을
경우나 국제적인 안정이 크게 위협받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화’란 구호가 정권 차원의 과제로 부각되면서 세계화
과정이 느닷없이 닥쳐온 것 같은 착시에 빠지지만 근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서구인들의 주도로 지구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가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역사를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 세기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하여 전쟁도 말 그대로 세계적 범위에서 벌어질 수 있음을
피로써 증명해 주었으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슬로건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경제체제였기 때문이다.
민족해방투쟁이 국제 사회에서 민족 단위의 평등한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으로서 이해될 수는 있어도,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우리식대로’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 것’이란 것의 질료도 다른 민족과 문명의 영향 없이 땅에서
갑자기 솟구쳐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걸어온 노정을 보면 삶의 영역이 확대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이
아니어서 정복, 학살, 약탈, 수탈, 지배와 피지배로 점철되었다. 인류의 생활단위가 결정적으로 확대된 것은 서구인들이 ‘지리상의 발견’을 하기
시작한 시대와 그 이후의 중상주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결과일 것이다. 군사력, 문명, 경제적 발전 정도의 차이에 의하여 서구와 그 나머지
지역 사이에 일방적인 관계가 지속된 것이 지난 세기 전반까지의 결과였다.
지난 세기 후반의 인류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지구적인
판도에서 주도권을 쥐고 승리해 온 역사과정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도 사회주의란 이상으로 분식되었던 독재체제의 붕괴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 국면을 세계적인 범위에서 민주와 독재의 대립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 도사리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허무의식이란 것을 비판적 지식인들의
침묵을 통해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진보적’ 지식인의 반성은 ‘비판을 위한 비판’을
넘어서지 못하고 현상에 대한 지적이나 본말이 전도된 평가라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한 대표적인 것들 중의 하나가 붕괴된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자들의 무능력이나 자질, 공산당원들의 관료주의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한 비판이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결과를
초래했느냐는 것에 대해서 근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을 나열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판으로서의 무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무기로서의 비판’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계급적 관점으로 독재를 옹호했던 것은 아무리 비판한다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지만 ‘세계’를 생각하고 세계범위의 운동을 생각했으며 세계를 얻으려 했던 것은 진보의 이름으로 옹호해야 하지 않을까?
상당 기간 희망의 영역, 이상의 영역으로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소망스런 세계를 얻기 위한 운동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진보의 영예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워져 있는 의무가 아닐까?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 사람으로 몸을
묻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하더라도…
4.
지난 세기에 경험한 양(兩)차대전의 참혹한 결과를 보면서
인류의 폭력성이 증대된 것으로 역사를 암울하게 평가하는 비판적 지식인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 양상의 가공할 파괴력에 가리워서 인간의 진보를
사상하는 오류이다. 서양의 중세는 흔히 상상하는 전원적 낭만과는 딴판으로 일상적인 전쟁 상태였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인식할 수 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지방화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서구의 봉건이란 지방으로 분권화된 시대였다. 서구에서
민주화 과정이 절대주의에 대한 극복과정이었으므로 절대주의의 결과가 쉽게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절대주의가 봉건의 일상적 폭력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였다는 학설은 근거가 있어 보인다. 강력하게 집중된 중앙권력이 지방권력을 제어할 수 있었고 지방간의 폭력성을 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산되어 있는 대상이 아니라 집중된 대상을 상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볼 때 공격의 대상을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니까.
인간의 폭력성이란 인간 문명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동물적 잔재이다. ‘늑대와 춤을’이란 영화의 줄거리는 남북전쟁에 지친 미국인이
인디언과 접촉하게 되면서 평화와 자부심을 배운다는 내용인데 그 영화에서 종족간 전쟁의 참혹성에 대해서는 안이하게 처리한 느낌을 받았다. 종족간의
전쟁이 덜 참혹하게 보이는 것은 무기의 문제이지 인간이 가진 폭력성이나 잔인성, 야수성에 있어서 덜하다는 증거는 결코 찾을 수 없다. 이
순간에도 벌어지는 종족(혹은 민족, ethnic)전쟁의 양상은 인간의 폭력성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도 얼마나 사람들이 배타적인가는 멀리 갈 필요없이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차별에 몸서리치는 우리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는지 반론을 펼 자신이 없다.
세계화(지구화)를 인류가
좁은 생활 반경을 극복하고 인류가 유적 존재로 조직되는 인류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서로 다른 공동체들을 이루고 있던 관계에서,
군사력이 질서의 근간을 이루던 것에서 사람들이 먼저 필요를 느끼는 경제가 우선 통합되어 가는 국면으로 보인다. 지금 인류의 수준은 경제를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지만 지구적 판도에서 정치, 문화적 통합성을 높이는 데 있어서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사람 사이의 공고한 질서란 물질의 교환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전면적인 교류의 결과에서 파생되는 것이고, 그러한 교환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 질서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세계 시민이 없는데 세계체제를 이룩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도 없고 어느 국가가 자국 시민들의 기득권의 보호와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왕도정치를 펼 수도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람
사이의 질서가 사회를 구성하는 능력에 달려있고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사에 달려있는 것이라면 사람들 스스로의 필요와
의지에 의해서만 질서는 가능한 것이다.
세계인들에게 보급되고 있는 인터넷은 세계인들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일상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확보한 성과로 보인다.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절실한 문제가 안전과 먹고사는 문제이므로 사람들이 선차적으로는
군사적, 경제적 필요에 의하여 그것을 발전시켜온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공고한 관계 유지를 위한 정치적 요구, 정신세계를 풍부히 하기 위한
문화적 욕구가 아울러 강화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류가 분리, 배타, 갈등, 대결을 넘어 통합, 조화, 협력, 우애와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얼마나 키우는 가에 따라 세계화, 인류화 과정의 속도와 성패, 그리고 성취물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진보의 이름으로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고 당파적인 판단으로 국제적인 판단 착오를 보이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코소보 문제에서 보여준 ‘진보적’ 지식인들의 태도는 진보의 이름이 무색한 것이었다. 미국의 영향력과 나토의 힘이 강화될 것을 우려하여
밀로셰비치의 무자비한 학살을 방치해야 한다는 논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자본주의 진영인 연합국 진영에 가담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아적인 생각이다.
5.
진보와 좌파가 같은 말은 아니지만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진보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국가에 대한 좌파의 전통적인 사상은 국가는 계급의 지배도구이므로 없어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좌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마저도 국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개입을 최대한 제한하려는 입장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정권을 잡고서 국가를 노동계급의 독재를 실현하는 도구로, 국유제를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소유제도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계급제도는 강화되었고 사회주의 국가는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가에 비하여 비할 바 없이 강한 계급지배의 도구인 동시에 소유권을 오로지 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체제였다. 사회주의자들은 계급의 철폐를 위하여 계급을 강화하고, 국가를 폐절하기 위해서 국가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서구에서 국가주의자인 우파와 사회주의자인 좌파가 동시에 국가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좌파가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라는 말이 금기처럼 되어 있으므로 진보운동, 시민운동으로 이념적
색깔이 드러나지 않게 사회운동을 표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왔다. 그런데 이 두 진영 모두 결과적으로 국가를 강화시키는 방향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 지향적 운동은 사회보장의 강화를 국가라는 수단 이외에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고
시민운동은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국가에게 제도의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있었던
역설이 재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복지정책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적 정책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물질적 수단인 세금문제가
제기 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 지향의 운동은 국민들에게 불가피하게 높은 담세율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와 북구는 담세율이 대단히
높은 국가들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포함)적인 복지 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금을 올리자는 이야기를 해야만 자신들의 정책에
일관성이 성립될 수 있다. 토론 기회가 있어서 이런 경향의 활동가들에게 세금정책의 기본 방향을 물어보면 세금에 대해서 불분명한 태도를 보이거나
심지어 세금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서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야 소유와 처분의 권리가 사실상
국가에게 있으므로 세금정책이란 것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세금이 국가정책을 집행하는 물질적 원천이므로
세금정책이 선거에서 주요쟁점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의 다수도
국가가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도록 강제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히 담세율을 높이는 정책을 비롯한 국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시민운동이야 시민을 주체로 세우겠다는 것이 그 정체성의 근간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시민운동으로부터 받게 되는 인상은 대단히 법가(法家)적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시민운동의 주요한 활동가가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라고
농담을 건네는 사람이 있어서 웃고 말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런 방식의 시민운동은 시민들을 주체로
강화하는 시민운동이라기보다 국가를 개혁하는 애국운동이란 생각이 든다.
현 시점에서 국가가 감당해야 할 지위와 역할이 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지위에 있어서도 국내적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국제적인 흐름에 크게 제약될 것이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가는 이상주의자들이 초기부터 생각했던 것처럼 사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 억지로 죽여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가를
이상주의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국가가 강제력이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강제력이 없는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국가라 할 수 없다.
강제를 통하지 않고도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상태는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와 지향을 사회의 요구와 지향에 맞게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어서 법,
제도, 그리고 그것을 집행하는 강제기구가 유명무실한 상태에 이른 고도로 발전한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제 없는 질서를
만드는 것이 이상주의자의 정치적 목표이고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입증해 나가는 것이 진보로서의 정치가 아닐까?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진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해 한 발짝 떼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무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길이 아닌 것이고 비현실인 것뿐이다.
현실이 즐겁고 현실에 만족한다면 무엇하러 진보를 택해야 하는가?
6.
사농공상이란 말이 있듯이
봉건시대에 물질적인 생산의 영역은 농업이 압도적이었고 수공업의 역할은 농업의 생산수단을 보조해주며, 그나마 많지 않은 잉여를 상인들이 소화하는
형태의 삶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대는 상업과 공업이 빛을 발하여 농업의 비중을 현격하게 줄였던 과정을 보여주었다.
선진국의
경우 현 시대에 와서는 공업마저도 서비스업, 그리고 첨단 과학과 통신 수단을 바탕으로 한 지식산업에 주도적인 위치를 내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운동세력에게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는 산업 임금 노동자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강제해 왔다. 서비스업과 전문직의
노동자를 노동자 속에 포섭하지 않고서는 노동운동세력의 계층적 기반의 축소가 명약관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대응은 미봉책
이상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벤처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노동형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도 문제로 되겠지만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구분선
마저도 대단히 모호하다. 그리고 계급이라 할 때의 신분적 생득성은 말할 것도 없고 고정성마저도 약화되어 있다.
통계를 보면 직업의
수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몇 년 전의 통계만 보더라고 우리 사회의 직업의 가짓수만 하더라도 2만여 개가 넘었고 선진국의 경우에는 5만개
이상에 달하였다. 계급이 양분화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직업의 다양성은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몇 년 전에 출간된 『노동의
종말』이란 책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노동운동을 핵심으로 생각하는 진보진영에게는 종말론적인 예언서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책은
미래의 공장에서는 개 짖는 소리만이 들려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노동자 없는 노동운동이 있을 수 없고, 대중적 지반 없는 사회적 운동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은 따질 필요도 없다.
다소의 과장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공장에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농업노동이 5%로 줄었다하여 그 사회가 종말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듯이 공업노동이 사회에서 1% 미만을
차지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노동이 종말을 맞고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상과학소설이 제기하는 다른 행성에
맞아 지구가 파괴될 가능성 정도로 느낀다면 지나친 것일까. 노동의 종말과 같은 비관적 정서는 근대의 산업이 열리면서 수공업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려한 심리상태와 같아 보인다.
진보란 미래에 대한 낙관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이러한 심리상태로는 방어와 저항,
사수(死守)라는 비극적인 결연함은 있을지라도 낙관성에 바탕한 진취성, 실험성을 동반하는 전위성, 건강한 모험정신의 배양은 찾을 수가 없다.
진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진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보수와 러다이트를 반복할 것 같은 반동성이 싫다. 노동이 반동적일 수는
없지만 러다이트가 보여주었듯이 노동운동은 얼마든지 반동적일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를 통해 보여주었던 고도의 의식을 소유한
인간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계적 운동에 복종해야 하고, 그것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인내심을 실험이라도 하는 것 같은 단순한 노동을 각오해야
했던 근대 노동을 그렇게 아쉬워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가? 노동의 소외를 그렇게 규탄해 마지않았던 진보의 이름으로? 『노동의 종말』이 그려
보이는 세계는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근대 노동의 축소과정을 전망하는 정도로 보인다. 세계는 변화한다는 진리를 확증해주는
사례집처럼.
진보의 이름으로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의 개성과 능력이 존중될 수 있는 노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직업의 수가 인간의 개체 수만큼 도달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5만개의 직업은 사람들의 다양성에 비추어 ‘겨우 5만개!’에 불과하다.
생물로서 인간의 욕구는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의 요구는 무한하다.
요구의 종말, 의지의
종말,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는 혁명성의 종말이 너무도 싫다.
7.
진보는 사회운동의 한
측면이다. 생명체가 보존과 혁신의 두 측면이 공존하면서 진화할 수밖에 없듯이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이미 확보한 것에 대해서 보존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쇄신하지 않을 수 없다.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속성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주어질 것까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진보를 위한 운동에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어제에 진보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 오늘도 여전히 진보적인 의의를 가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보운동은 사회의 발전 수준과 사람들의 요구의 변화, 그리고 조건의 변화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내용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 세대 전에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드는 혁명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면 현재는 상대적인 과제로
변화되었다. 그만큼 사회가 진보한 것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유권자들의 의사가 폭력적인 강제력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을 거부하고 민의에 기초하여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제도를 세우고자
했던 우리 세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자연스런 심정이다.
두 가지 형태의 운동 모두 포괄적으로
이해하면 민주주의를 위한 물질적 조건과 제도적 조건을 갖추기 위한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요구가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불가피한 갈등과 투쟁, 그리고 그 결과를 둘러싼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너무나 오래 계속되고 때로는
사회적 요구와는 동떨어진 논공행상 성격의 논쟁과 파쟁이 계속되어 식상을 넘어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흔히 하는 말로 역사의 평가에 맡기면 안될
불가피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제도적 환경이 혁신을 계속해야할 것이고 세계적 범위에서 민주주의의
주도권을 확장하는 것이 눈앞의 과제로 남지만 인간 자체의 요구와 지향을 바꾸고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운영하는 인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겠다는
각오를 세워야 할 시대가 우리들 속에 이미 와 있는 것은 아닌가?
과거에 대해서도, 현재에도 그리고 장래에도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어떤 형태의 진보에 대해서도 지지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러나 기성의 것에 대한 보존과 혁신은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데 쓰이는 조건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진보가 혁명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진보를 포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혁명은 진보보다 심장을 뛰게
하는 말이고 진보보다 강하게 사로잡는 매력을 가졌다.
* 조 혁(시대정신 편집위원) * 이 글은 시대정신
[2001 01-02월호] 제13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