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살롱<8>]삼한갑족(三韓甲族)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조선일보
입력 : 2004.09.17 18:57 14'
삼한갑족(三韓甲族). ‘삼한에서 가장 으뜸가는 집안’이란 뜻이다. 도대체 어떤 집안이 이처럼 최상급의 찬사를 받았단 말인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집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집안에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이래로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9명의 영의정(4명의 贈영의정 포함)과 1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시절 우당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李始榮:1869~1953)이 부통령을 지냈으니까 성재까지 포함시키면 총 11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쏟아져 나온 셈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인 우당 집안에서는 ‘상신록(相臣錄)’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건이 있다. 재상을 지낸 사람들의 행장만 모아놓은 책자이다. ‘상신록’이라는 이름의 책자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은 그 집안에서 재상을 10명 이상 배출해야만 된다. 10명 미만은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재산은 약 3만석에 이르렀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급 재산이다. 이들이 살았던 집터는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 현재 명동성당 앞의 YWCA 자리 일대였다고 전해진다. 그 부와 귀에 있어서 조선 최고의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우당을 비롯한 6형제는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는 결단을 내린다. 모든 기득권의 포기였다. 3만석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조상 제사 지내는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하였다. 저택과 수많은 고서는 우당이 평소 아들처럼 아끼던 육당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넘겼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 현재 시세로 800억원이었다고 한다.
이 800억원을 가지고 만주에 가서 세운 학교가 바로 그 유명한 신흥무관학교였다.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위해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육군사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인 셈이다. 여기서 배출된 3500명의 병력이 일본 육군을 상대로 해서 승리한 청산리 전투에 투입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는 삼한갑족 집안에 내려오던 800억 재산과 생명을 모두 쏟아부은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형제 가운데 우당을 비롯한 5형제는 중국에서 병들어 죽거나 고문으로 죽었다. 다섯째인 이시영 한 사람만이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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